울면서 내가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어처구니없는 걸 요구해서 상대를 끝내 시험에 들게 해 그걸 얻어내고 말겠다는, 결국 이겨먹고 말겠다는 그 악착한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선물을 헌신짝 버리듯 쉽게 잊고 그 선물을 준 사람마저 이겨먹었으니까, 먹어버리듯 이겼으니까 까맣게 잊고 마는 그 잔혹한 무심함은. - P232

여자를 둘러싼 찬란한 햇빛이 공중에 은빛 거미줄처럼 반짝인다. 하지만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잿빛 음영이 드리우면 빛나던 베일은 수의처럼 뻣뻣해진다. 생명의 어두운 결정체들이 점점이 박히고 누런 고치들이 매달려 흔들리는 검은 그물은 그녀 자신이 내뿜었지만 이미 그녀 자신을 가두는 거대한 망이 된다. 이윽고 그녀 스스로 고치가 되고 캄캄한 밤이 그녀를 덮는다. - P237

나는 여자의 말투를 흉내낸 게 아니라 내 속에 오랫동안 고여 있던 가래 같은 말을 내뱉은 것이다. 학대의 사슬 속에는 죽여버 릴까와 죽어버릴까밖에 없다. 학대당한 자가 더 약한 존재에게 학대를 갚는 그 사슬을 끊으려면 단지 모음 하나만 바꾸면 된다. 비록 그것이 생사를 가르는 모음이라 해도. - P238

나는 한참 눈을 꾹 누르고 있었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사람은 나와 춤추면서 넌 거미가 아니라고, 너는 지금 스스로에게 덫을 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작고 딱딱한 결정체로 만족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더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할 수 있다고, 이 그물에서 도망치라고 말해주었을까.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그 뜻을 알아채고 울었을까. - P241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게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 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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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시간보다 소미는 거기서 실개천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던 그 시간이 좋았다. 그때 우리는 젊었으며······ 두렵고 또 두려웠지. 현수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가끔 그 말이 떨쳐지지 않는 주문처럼 소미의 머릿속을 맴돈다. 그때 우리는 젊었으며······ 현수가 말한 그때는 그때가 아니었지만, 자신들이 다시 만났던 그때가 그래도 자신들이 마지막으로 젊었던 시절이었다는 것을 이제 소미는 안다. 그래서 여전히 두렵고 또 두려웠다는 것을. 그래서 그렇게 많이 웃고 죽자고 담배를 피워대고 겁없이 땅을 사고 했다는 것을. - P143

혜진이 무턱대고 들이받으려고 하거나 고집을 부려 대화 시간이 길어지면 혜영은 자기도 모르게 밀랍 가면 속에서 눈만 자주 깜빡거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럴 때면 혜진은 놓치지 않고 또 깜빡이 켜졌다, 했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혜영은 가슴속에 서서히 번지는 미지근한 불쾌감을 억눌렀다. - P150

요즘 들어 혜진이 급격히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느꼈지만 혜영은 절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자신만이 혜진과 세상을 이어줄 유일한 밧줄인 걸 아니까. 그런데도 쉽사리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육신······ 육신······ 그 말이 자꾸 입안을 맴돌았고, 니 육신······ 내 육신······ 하면 왜 더 심한 욕 같은가······ 그런 생각만 들었다. - P151

어떤 말은, 특정 음식이 인체에 계속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듯, 정신에 그렇게 반복적인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오익은 생각했다. 말의 독성은 음식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음식은 기피할 의지만 있다면 그럴 수 있지만,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킨 말은 아무리 기피하려 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기피하려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점점 더 그 말에 사로잡혀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된다. 원채는 다 갚기 전에는 절대 안 없어진다고, 죽어도 안 끝나고 죽고 또 죽어서도 갚아야 하는 빚이 원채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오익은 그게 바로 사는 일 같다고 생각했다. 기피 의지와 기피 불가능성이 정비례하는, 그런 원채 같은 무서운 말과 일들이 원채처럼 쌓여가는. - P172

지금은 숙이가 전생의 원한을 못 풀고 마음을 굳게 닫아걸었지만 우리가 진심으로 정을 주고 위해주면 언젠가는 마음을 열 거다. 명채는 명으로 갚고 정채는 정으로 갚아야 한단다. 그러니 우리가 날이면 날마다 숙이에게 정을 듬뿍 주자, 익아.
정을 무슨 수로 줘요? 전화도 안 받는다면서요?
마음으로 주는 거지. 진심을 다해 정을 주면, 정은 다 통하게 돼 있다.
오익은 어머니의 정 타령을 들으며 풍미정 방여사가 입에 달고 사는 정 나눔이란 말이 떠올랐다. 참으로 지겨운 말들이었다. - P187

기름냄새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선배들을 처음 만났을 때의 묵직한 기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차라리 상가 사람들이 그리웠다. 얼른 이 자리를 끝내고 상가 사무실로 돌아가 철호와 술이나 한잔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소리가 들려왔다.
새 세 마리······
오익은 흠칫 놀라 주위를 살폈다. […] 아무도 새 세 마리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오익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신의 귀에 입을 대고 숨결마저 끼얹는 목소리로 그 말을 속삭인 듯한 느낌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실감이었다. 새 세 마리······ 오익은 음소거하듯 가스 버너의 손잡이를 돌려 불을 꺼버렸다. - P193

이번에도 어머니는 다짜고짜 명자네 집 노인네가 귀가 먹어서 도대체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불평을 늘어놓았고, 세상에 벗삼을 사람이 없다고도 한탄했다. 그러다 갑자기 아니 쟤는 왜 비를 맞고 댕기니, 우산도 있는 놈이, 했다. 예전 같으면 이건 또 누구 얘긴가 했겠지만 이제 오익은 어머니가 어디 나와 앉아 우산을 든 채 비를 맞고 걸어가는 놈을 보고 있으려니 짐작했다. 그가 자정쯤 카페에 앉아 유리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어느 순간 그들과의 거리감이 상실되는 듯한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히듯 어머니 또한 그렇게 어딘가를 내다보며 저 녀석은 왜, 저 양반은 왜,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라고. 오익은 차분히 기다렸다. 오늘 어머니는 오숙에 관해 또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 - P197

오익은 어머니가 오숙의 말을 빌려 자신에게 막 해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실제로 그는 대학원 등록금을 빌리러 아버지의 재혼식 에 간 적이 있었다. 의리를 저버린 빚은 의채인가, 오익은 생각했다. 때로 어머니가 오숙의 입을 빌려 하는 말 중에는 그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모호한 기억과 말의 수렁에 잠긴 채로 그는 어머니의 말을 들었고, 그럴 때면 어머니가 자신을 아들이 아니라 원수로 여기는 건 아닌가, 심지어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로 여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198

자신이 알아챘다면 간과했겠는가. 마찬가지로 오익은 오숙이 얼마만 한 분노가 있었기에 자신을 ‘너‘라고 부르며 의절을 통보하는 문자를 보냈는지 알지 못했다.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까운 이에게 그런 분노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을 몰랐다. 알았다면 그렇게 했겠는가. 무지는 가장 공격받기 쉬운 대상이지만, 무지한 자는 공격 앞에서 두려워 떨 뿐 무지하여 자기 죄를 알지 못하므로 제대로 변명조차 할 수 없다. - P199

차라리 자신이 딸이었다면, 모든 걸 희생하고 차별받고 살아온 그런 존재였다면 오숙처럼 무섭게 돌변할 기회라도 있었으련만, 그는 한없이 억울했고 뭔지 모를 어떤 감정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만 그런 게 아니라 자신도 어머니를 닮아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다고, 자신이 오숙처럼 되기를 바라느냐고, 앞으로 자기가 다 포기하고 희생하고 살면 되겠느냐고, 어머니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 P199

오래전 기억 속의 자신은 원래 그렇게 생각되는 법인지 모른다. 하지만 원래 그렇더라도 놀라운 건 놀라운 것이다. 내가 손쓸 수 없는 까마득한 시공에서 기이할 정도로 새파랗게 젋은 내가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원한 적 없는 방식으로, 원하기는커녕 가장 두려워해 마지않는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부인할 수도 없지만 믿을 수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런 게 놀랍지 않다면 무엇이 놀라울까. 시간이 내 삶에서 나를 이토록 타인처럼, 무력한 관객처럼 만든다는 게. - P204

나는 곧 잊었다. 잊으려고 했고 그러면 잊히는 듯했다. 아무 일도 아니다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니게 되는 듯했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듯 어제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내 손에 쥔 확실한 패는 오늘밖에 없고 그 하루를 땔감 삼아 시간을 활활 태워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 P211

그건 무엇이었을까. 내 속에서 예기치 않은 순간에 발사된 것은.
지금의 내 생각에 그건 아마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어두운 정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물네 살의 삶이 품을 수밖에 없던 경쾌한 반짝임 사이에서 빚어진 어떤 비틀림 같은 것, 그 와중에 발사되는 우스꽝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어지간한 고통에는 어리광이 없는 대신 소소한 통증에는 뒤집힌 풍뎅이처럼 격렬하게 바르작거렸다. 턱없이 무거운 머리를 가느다란 목으로 지탱하는 듯한 그런 기형적인 삶의 고갯짓이 자아내는 경련적인 유머가 때때로 내 삶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사된 건 아니었을까. - P218

나는 그의 눈빛, 그의 경청에서 그가 나를 흥미진진하게 읽고 해석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서서히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한편으로는 혹시 그가 내 내부에서 치명적인 진실 들을 캐낼까 두려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내게서 아무것도 캐내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 둘은 아마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 P219

누구나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최소한 받아들일 만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그 처참한 비열함이라든가 차디찬 무심함을 어느 정도 가공하기 마련인데, 나 또한 그렇게 했다. […] 하지만 어느 순간 번쩍 몇 가지 일들이 떠오르면서, 그것들이 뜻밖의 별자리를 만들면서 내 정신은 깊은 어둠과 무지에서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깨어났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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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는 매일 어김없이 호수로 나가 삽질을 했다. 엑스레이의 말이 맞았다. 세 번째 구덩이가 가장 힘들었다. 아니, 네 번째가, 아니 다섯 번째가, 아니 여섯 번째가······.
스탠리는 흙 속에 삽을 쑤셔 넣었다.
얼마 뒤 스탠리는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신경도 쓰지 않게 되었다. 구덩이를 몇 개 팠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거대한 구덩이 하나를 1년 반 동안 파는 느낌이었다. 몸무게가 최소한 3킬로그램은 빠진 것 같았다. 1년 반 뒤면 몸이 아주 좋아지거나 아니면 죽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 P89

그날 밤, 스탠리는 간지럽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간이침대에 누워 낮에 자기가 달리 행동할 수는 없었나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별도리가 없었다. 행운과는 거리가 먼 인생에서 딱 한 번 올바른 시간에 올바른 장소에 있었지만,그것도 결국 허사였다. - P95

"음, 사실 우리 아빠는 헌 운동화를 새 운동화로 바꾸는 방법을 발명하고 싶어하셔.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늘 고약한 냄새가 나. 아빠가 항상 헌 운동화를 삶고 있으니까. 엄마는 신발 속에 사는 난쟁이 할멈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든대. 냄새가 얼마나 지독하겠니?"
제로는 멍한 표정으로 스탠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 P110

"신발 속에 사는 난쟁이 할멈 나오는 자장가 못 들어봤어?"
"못 들어봤어." 스탠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부르는 건데?"
"「쎄서미 스트리트」도 안 봤어?"
제로는 멀뚱멀뚱 스탠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스탠리는 저녁을 먹으러 발걸음을 옮겼다. 초록호수 캠프에서 자장가를 불러봤자 바보 같은 기분밖에 더 들겠는가. - P111

스탠리는 고개를 들어 먼지 구름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흩어진 해바라기 씨를 내려다보았다. 스탠리는 또 한 번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다.
이게 뭐 새삼스러운 일인가? - P123

트라우트는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졌다. 그래서 캐서린 선생님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트라우트는 캐서린 선생님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말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이 찰스 워커에게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아!"
그러자 캐서린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좀 전에 내가 그렇게 말한 걸로 아는데요." - P147

"제로."
제로는 얼굴이 작아 보일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스탠리는 제로가 자기 이름을 반복해서 자꾸자꾸 쓰는 것을 지켜보았다.
Zero, Zero, Zero, Zero, Zero, Zero, Zero······.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탠리는 왠지 짠한 느낌이 들었다. 제로, 그러니까 ‘0‘을 100번 써봤자 결국 ‘0‘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P169

"너도 알지? 제로가 진짜 내 이름이 아니라는 거."
저녁을 먹으러 휴게실로 가면서 제로가 말했다.
"어, 그래. 알았던 것 같아."
그렇게 말했지만, 스탠리는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날 제로라고 불렀어. 여기에 오기 전에도 말이야."
"어, 그래?"
"진짜 이름은 헥터야."
"헥터."
"헥터 제로니." - P170

"비야, 제발 좀 내려라! 바람아, 제발 이쪽으로 좀 불어다오!"
겨드랑이가 소리쳤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서 호수에 물이 가득 찰지도 몰라. 그러면 수영도 할 수 있겠지." 오징어가 말했다.
"40일 낮, 40일 밤 동안만 내려라. 우리도 방주를 만드는 게 좋겠다. 그래서 암수 한 쌍씩 동물들을 태우는 거야, 그렇지?"
엑스레이가 말했다.
"맞아. 방울뱀 두 마리, 전갈 두 마리, 노랑 반점 도마뱀 두 마리."
지그재그가 말했다. - P179

스탠리는 제로에게 자기 구덩이를 대신 파게 한 것을 후회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도 제로에게 읽는 법을 가르칠 수 있는 것 아닌가. 제로가 온종일 구덩이를 파고도 배울 힘이 있다면, 스탠리 자신도 온종일 구덩이를 파고도 가르칠 힘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 P199

미리 경고하는데, 난 그다지 운이 좋은 사람은 아니야."
스탠리가 말했다.
"평생 구덩이에서 지낸 사람이 더 떨어질 데가 어디 있어. 위로 올라가는 길뿐이지."
제로는 별 상관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 P227

죽음을 떠올릴 때 스탠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었다. 죽음의 고통은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그 고통이 그렇게 심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죽는 순간이 되면 몸이 너무 약해져서 고통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죽음은 구원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탠리가 가장 걱정하는 점은 부모님이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아무것도 모른 채 헛된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 살아갈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죽으면 스탠리한테는 모든 게 끝이겠지만, 부모님의 고통은 끝이 없을 것이다. - P231

스탠리는 누워서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스탠리는 행복에 겨워 잠이 오지 않았다.
행복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스탠리도 알았다. 스탠리는 사람이 죽기 바로 직전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푸근해진다는 얘기를 어디서 읽은 것 같기도 하고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스탠리는 지금 자기가 바로 그 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행복을 느낀 때가 언제였는지 스탠리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 아무도 스탠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스탠리 자신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제 스탠리는 자신을 좋아했다. - P263

‘무슨 미친 생각을 하는지, 원.‘
스탠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과연 미친 사람들이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할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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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라 멘키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고르 바르코프가 마이라를 차지하려고 가장 살진 돼지를 내놓겠다고 했어요. 저한테 그렇게 값비싼 게 어디 있어야 말이죠."
"잘됐네. 너는 결혼을 하기에는 아직 젊어. 네 인생은 아직도 앞 길이 창창해."
"하지만 마이라를 사랑하는걸요."
"마이라는 머리가 꽃병처럼 텅 비었어."
"하지만 예쁘잖아요."
"그러니까 꽃병이지. 걔가 쟁기질을 하겠니, 염소젖을 짜겠니? 못하지. 걔는 너무 가냘파. 그리고 어디 수준 높은 대화나 할 수 있겠어? 못하지. 멍청하고 어리석거든. 또 네가 아플 때 널 돌볼 수나 있겠어? 못하지. 철이 없어서 네 보살핌만 받으려 들걸. 그래, 걔는 예뻐. 그래서 뭐? 퉤." - P47

펜댄스키 선생님이 말했다.
"인생에서 뭘 하며 살 것인가에 대해 토론하던 중이야. 죽을 때까지 초록호수 캠프에 있을 건 아니잖아. 여기를 떠난 다음을 준비할 필요가 있지."
"엄마, 그거 잘됐네요. 사람들이 드디어 엄마를 여기서 내보내 줄 건가 보죠?" - P84

"좋아. 한 가지 말해주지, 원시인. 네가 지금 이곳에 있는 건 딱 한 사람 때문이야. 그 사람만 아니었다면, 네가 이 뙤약볕 아래에서 구덩이를 팔 일도 없었을 거야. 그 사람이 누군지 아니?"
"아무짝에도—쓸모없고—지저분하고—냄새—풀풀—나는—돼지도둑—고조할아버지요."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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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는 간이침대에 누워 아이들과 한 대화를 떠올리며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결백하다고 했을 때는 아무도 자기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가 신발을 훔쳤다고 말하는데도 아무도 믿지 않으니 말이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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