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게 살아가는 것과 착하게 살지 않으면 큰일 날 수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살아가는 것이 과연 같을까요? - P57

대한민국의 헌법 제17조는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를 침해받지 아니한다‘라는 내용이에요. 코로나19 발생 초기에 확진자의 동선이 적나라하게 공개되어도 사람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요. 그건 사람들이 이미 디지털 기계의 편의성이 주는 이점에 무의식적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이에요.


누군가의 사생활을 침해했지만 이제 우리는 그게 사생활 침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된 것이죠. 이게 과연 바람직한 상황일까요? - P57

빅데이터를 만들고 관리하는 기술은 분명 혁신적이에요. 그렇지만 혁신 기술이 사람들의 생각도 혁신적으로 바꾸었다고는 볼 수 없어요. 포털 사이트는 조회 수가 많은 기사를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위치에 올려줘요. ‘좋아요‘를 많이 받은 댓글을 ‘베스트 댓글‘이라면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도록 노출해주죠. 하지만 그건 다수의 의견‘일 뿐이에요. 다수가 좋아한다고 그 정보가 무조건 옳은 건 아니에요.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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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인 장애인은 제도적으로 투표권을 보장받지만 문턱이 있는 기표소와 비장애인 중심의 선거 공보물은 장애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 P19

사생활은 혼자만의 공간이나 가정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에요. 사생활의 자유란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를 다른 이에게 알리지 않을 자유까지 광범위하게 포함해요.


즉 특정 시간이나 공간에서 보내는 생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일상 속의 여러 가지 일이나 경험을 다른 이에게 알리지 않을 자유를 갖는 것이 사생활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예요.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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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는 외롭지만 그렇기 때문에 외롭지 않을걸요. 반대로 그 외롭지 않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외로워지기도 하고요. - P257

미안해. 정말 미안. 앞으로 안 그럴게.
그러나 열세 살에게 관용이나 이해심은 없었고, 상황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동화나 만화영화와 달리 화해는 쉽지 않았다. 아이들은 무섭다. 손아귀에 누군가가 잡히면 쥐고 흔들고, 편 가르고 내쫓는 일에 순수하게 재미를 느낀다. - P268

……지영아, 자기가 하는 짓, 떠벌리는 말, 그게 다 질투라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사람은 없어. - P271

나에게는 이렇게 괴로운 일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때엔 아무 렇지 않게 되겠지. 내가 한 달간 온 신경을 쏟았던 일이, 정체를 궁금해하고 알지도 못하는 얼굴을 향해 저주한 일이, 나의 불행이 아주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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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된 건 이토록 이상하구나 생각하면서 동시에 왜 이렇게 압도적일까. 원망도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변화가, 아름다움과 무서움의 차이가 너무 미세해서 마음이 달라진 건지 여전한 건지 알 수 없었다. - P201

사람이 사람을 떠나면서도 몸이 바뀌나. 아마도 그렇겠지. 이 전 몸을 떠나 다른 몸으로 갈아입으면 얼마간은 새로 입은 몸이 낯설고 두렵고 껍데기처럼 느껴지겠지. - P207

세선이 나를 안아주는 건지 밀어내는 건지 의심했다. 따지고 싶으면서도 뭘 따지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나와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멀게 느껴졌다. 그게 가능한 관계도 있는 것이다. 모든 관계가 전부 그럴지도 모르겠다. - P224

나는 대체로 유쾌한 사람들을 좋아하네. 어째서일까? 내가 불유쾌한 사람이어서인가? 나에게 없는 것을 좋아하기 마련인 걸 까? 하고 자조적으로 물으면 세선은 고개를 저었다. 너는 너도 모르게 유쾌한 사람이지. 그러고는 웃었다. 내가 그 말을 정말 믿을 수 있도록. - P234

우리는 우리가 숨고 싶을 때 숨을 수 있고 나타나기를 원할 때 나타날 수 있다. 나는 언제 어디에서든 사랑을 할 수 있다. 참 쉽고, 그 쉬운 것이 이토록 어렵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 P248

세선은 언제나 내 마음 한쪽 어딘가에 있었고 그 일부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알기 어렵고 말하기 어려운 마음. 꺼내서 자세히 보려고 노력하지만 가장 마지막까지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마음.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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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얼굴. 해사하고 웃음기 띤 얼굴. 어쩌면 그 표정을 본 순간 영은은 그가 마음에 들었는지도 몰랐다. 커피 쿠폰에 첫 도장을 꾹 찍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던 마음에 뭔가가 남았다. - P163

마음이 엇나가면 이렇게 굳게 되는구나. 영은은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살면서 뭔가를 어기거나 어깃장을 놔 본 기억은 거의 없었다. 대체로 착실한 모범생으로 살았다. 그렇게 살았는데 ....당신은 나에게 좀처럼 마음이 없는 게 서운하고, 이십대 후반인데 아직 변변한 직업도 갖지 못한 채 병만 얻은 자신에게 자신은 없고, 그래 이런 사람을 누가 좋아할 리 없지 하는 바닥의 바닥 같은 마음이 되어 털어놓고 말았다. 실은 꾹꾹 참으려고 했는데 동정 섞인 배려라도 받고 싶어져버린 것이다. 주문 한 맥주가 나오자마자 벌컥 들이켜는 영은을 보고 주현이 웃으며 천천히 드세요. 저 못 데려다드려요. 하고 말한 순간. - P166

그렇게 말하고 웃는 주현을 보자 정반대의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아픈 게 네가 아니라 나라서 다행이라는 마음과 아무런 나쁜 일 없이 말끔한 너를 괴롭히고 싶다는 마음. 좋아하나? 아니면 미워하나? 마음이 혼종이었다. 그러나 다행이라는 쪽이 근본적으로 더 컸다. 영은이 선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아픈 사람들을 잘 대하지 못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쁘지만, 더 나빠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가까웠다. 귀가 닫히자 마음들이 살아 움직였다. 그 궤도가 보였다. - P173

왜 먼저 마음을 열어 보여주지 않아? 내가 좋다면서 왜 내 쪽으로 더 넘어오지 않아? 그러나 지금 영은은 그렇게 물으면서도 처음으로 당당했다. 목적이 달라졌으니까. 이제 그 물음표들은 상대를 향해 이쪽으로 넘어오라고 거는 갈고리가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을 거둬들이는, 닫히는 쪽의 문고리에 가까웠다. 다른 사람의 세계에 구명을 크게 뚫는 일이, 그래서 내 쪽으로 넘치게 하는 일이 뭐가 그렇게 좋겠어. 거기엔 이미……내 고름 같은 것들이 꽉 차 있는데. - P174

누군가가 자신의 연약한 면을 고백해주는 일은 생각보다 기쁘고, 흥미롭고, 짜릿했다. 나는 이제 너에게 그런 사람이구나.…..
그건 황홀감에 가깝기도 했다. 기쁨에 찬 감정들은 순식간에 고조되고, 차례로 떨어졌다.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 우리 사이에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나는 그 말을 잘 몰라요. 그 말 아래의 실체를. 심지어 정말로...... 잘 듣지를 못해요. 당신이 당신의 아픔을 말해도 나는 내 아픔에만 놀라요. 안 들려요? 라고 잘못 들었을 때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던 느낌이 선명했다. - P177

우리는 서로 아플 때 해줄 수 있는 게 없네요.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뭘 줄 수 있는 사람은. - P180

자기 슬픔은 자기가 알아서 하고 갈게요. 수술대 위에 누워 영은은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나를 지켰어. 최선을 다해 그렇게 믿고 싶었고 그것이 최선이라고도 믿었다. 너라는 총체적인 세계보다 내 오른 귀의 편협한 청력의 세계가 중요해. 아픈 게 지나가고, 그 아픔의 무늬를 지닌 어떤 사람이 되었을 때 다른 아픔의 무늬를 알아보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아픔의 한복판에서 발을 구르는 채로 다른 사람 곁에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너무 가까이 가면 머리채를 잡혀 함께 가라앉을 것이고 너무 멀찍이 서서 그의 이름만 반복해 외치는 건 그에게나 나에게나 무력하다, 그렇게. 그러니까 우리, 나중에 만나요. 나중에 못 만날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만나요. 영은은 처음으로 결정짓지 않는 관계를 결정지었다. - P181

고통은 절대적인 동시에 상대적이었다. - P187

몇 초가 흐른 뒤 누군가가 그 불안을 애인에게 말해본 적이 있나요? 하고 물었고 은주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불안을 설명하고,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그 모든 말들을 내가 듣잖아요. 그렇게 불안을 구체화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말하는 은주는 약해 보였다. - P189

안도하는 표정. 나는 늘 상대방의 얼굴에서 그런 표정을 찾으면 마음이 놓이곤 했다.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었다는 성취감은 내 안의 유능감을 고취시키고 상대방에 대한 호감도를 상승시켰다. 상대가 내 맘에 들든 맘에 들지 않든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상대의 마음에 드는 일. 그게 중요했다. - P190

머리 위의 조명이 깜빡거렸다. 아주 살짝 조도가 낮아졌던 순간 봤던 은주의 얼굴은 그전까지의 얼굴과 어딘가가 달라 보였다. 신비한 느낌을 주는 건 빛일까. 은주의 얼굴일까. 문득 이 시공간이 낯설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심으로 애인을 이해하려는 은주가 여기에 있다. 이 도시 어딘가에 있을 은주의 애인은 한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고, 누군가가 자기를 이토록 이해하려고 애쓰는 마음을 지녔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오늘 낮까지는 두 사람의 존재 자체도 몰랐던 내가 그 모든 이야기를 안다. 그 어마어마한 시간이 빛이 깜빡이던 찰나에 응축된 것 같았다. 그 순간이 마법 같았다. - P198

내 앞에 이렇게 있는데 이게 다 껍데기인가. 아주 껍데기는 아니라고 해도 나는 여기엔 없는 오래전의 누군가와 영지의 마음을 나눠 쓰고 있고. 그게 싫으면서도 어쩔 수가 없고. 그렇게 산산이 조각난 마음에 목소리를 입혀 영지에게 들려줄 수는 또 없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이 오래된 무덤들의 도시에서 보내는 시간이 좋고 해서 그저 조금 울었어요. 영지가 힘들었지, 알아, 하고 제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어줬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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