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단순한 행위가 심지어 이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관계에서마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얼마나 기묘한가. 마치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조금 더 빛이 비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리라. - P300

"정말 너무 멋졌어요." 마크 수사는 허브밭 작업장으로 돌아와 신나게 일을 시작하며 말했다. 그런데 좀 부끄럽기도 하네요. 다른 사람이 골탕 먹는 걸 보면서 통쾌해하다니, 아무래도 제 마음속에 악한 구석이 있는 거겠죠."
"저런, 저런." 캐드펠은 바삐 바랑을 열어 단지며 병들을 꺼내면서 무심코 대꾸했다. "자넨 너무 일찍부터 성자가 되려고 하는구먼. 아직 스스로를 즐길 시간이 많이 남았네. 때로는 조금 악해지는 것도 필요하지. 그리고 정말 멋진 일이었던 건 사실 아닌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괜히 위선 부리지 말게."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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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수사 또한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들을 따라갔다. 그는 낙담과 불안에 빠져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죄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체념이라는 죄. 자기 자신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진실과 정의와 공정성에 대한 체념, 불행한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절망 어린 체념의 죄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P204

겨울철 낮은 예순을 넘긴 인생처럼 느릿느릿 시작되었다가 빨리 끝나버렸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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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변하기 쉬운 존재이며, 늘 오류를 범하고, 그때그때 적응해야 하는 동물이 아닌가. - P11

"사람이란 나이를 먹을수록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법이니까요."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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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동안 계속 눈이 내렸다. 날씨는 내가 바랐던 대로 바람이 잔잔하고 고요했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나 벼락이 친 뒤 내리는 조용한 여름비보다 평화로운 것은 없다. 칙칙한 하늘의 한쪽이 이따금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숲은 부드럽게 반짝이는 눈의 베일 너머로 가라앉았다. 태양은 눈 덮인 이 세상 어딘가에 떠 있겠지만 우리에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까마귀들은 몇 시간씩 가문비나무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회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하늘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까마귀의 침침한 실루엣에는 내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었다. 낯설지만, 그러면서도 친밀한 삶, 검은 깃털 속을 흐르는 붉은 피, 까마귀들은 나에게 금욕적 인내의 상징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다림,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인내의 상징이었다. 까마귀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내가 만약 공터에 쓰러져 죽는다면 까마귀들은 나의 시체를 뜯어 먹을 것이다. 숲에서 시체를 치워버리는 게 그들의 임무다. - P332

사랑에 빠지는 일이 동물들에게 행복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동물들은 그 순간이 지나가버리는 것임을 알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매 순간이 영원이다. […] 그 어디에도 행복의 흔적은 없다. 그 뒤에 남는 것은 허탈뿐이다. 윤기가 사라진 털과 죽음과도 같은 잠뿐이다. - P336

나는 내 겉모습에 신경을 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무슨 옷을 입든 동물들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동물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내 외양 때문이 아니었다. 어쩌면 동물들에겐 미적 감각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동물에게 아름답게 보이리라는 생각도 할 수 없다. - P359

나의 냉정함이 놀라웠다. 무엇인가 달라져 있었다. 나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불안해졌지만 내가 불안에서 벗어날 길은 불안의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 그것을 넘어서는 방법뿐이다. 해묵은 슬픔을 억지로 삶 속에 끼워놓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 과거의 삶은 나로 하여금 속임수를 쓰도록 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군가를 속일 만한 어떤 이유나 핑계가 없다. 내 주변에는 이제 사람들이 없다. - P368

그 여름, 나는 룩스가 개이고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니,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인간이고 룩스가 개라는 사실이 우리들의 차이를 뜻하지는 않았다. 룩스도 변했다. 내가 거의 모든 시간을 룩스와 함께 보내고부터 룩스는 침착해졌다. 5분만 자리를 비워도 그사이 내가 슬그머니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걱정 따위는 이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돌이켜보면 개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혼자 남겨지는 일이었다. 나도 많은 것을 배웠다. 룩스의 움직임이나 소리를 거의 다 알아듣게 되었다. 우리 둘 사이에 마침내 무언의 공감대가 성립된 것이었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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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에 그을린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밖에 나갈 때 쓰고 다니는 모자도 햇빛에 색이 바래져 있었다. 내 얼굴이 낯설어 보였다. 마르고, 뺨이 움푹 패여 있었다. 입술은 더 얇아져 있었다. 그 낯선 얼굴에는 뭔가가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얼굴을 사랑할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리 없다는 생각 따위는 할 필요도 없었다. 헐벗고 비참한 얼굴이었다. 나는 이 얼굴이 부끄러웠으며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동물들은 나의 냄새와 목소리, 그리고 나의 움직임을 보고 나를 따른다. 얼굴 같은 것은 없어도 된다. 얼굴을 이용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이상하게도 내 마음속에 공허감만 불러왔다. 거기에서 벗어나야 했다. 나는 할 일을 찾았다. 일을 시작하며 내 처지에 얼굴 때문에 슬퍼하는 것은 유치한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고통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 P321

맨 밑에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라고 썼는지 모르겠다. 정말 그때 시간이 유난히 빨리 흘렀던 것일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거기에 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
시간이 특별히 빨리 지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내가 그렇게 느꼈을 뿐. 시간은 가만히 정지해 있는데 나 혼자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미친 듯이 서두르며. - P329

시간은 조용히 정지해 있다. 시간을 볼 수도, 냄새 맡을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그것은 나를 에워싸고 있다. 시간의 적막과 정지는 끔찍하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집 밖으로 달려나가 시간으로부터 벗어나보려고 일에 열중한다. 그러면 잠시 시간을 잊는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시간은 다시 나를 에워싼다. 문 앞에 서서 까마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시간은 형체도 없이 조용히 나타나 우리를, 풀밭과 까마귀와 나를 포박한다. 나는 시간에 길들여져야 할 것이다. 시간의 무심함과 그 항존성에 말이다. 시간은 거대한 거미줄처럼 무한히 퍼져 있다. 수억 개의 작은 고치가 시간의 거미줄에 매달려 있다. 햇빛 속에 누워 있는 도마뱀, 불타고 있는 집, 죽어가는 군인, 모든 죽은 자와 산 자들이 거기 매달려 있다. 시간은 거대하다. 새 고치들이 들어갈 자리는 얼마든지 있다. 시간은 끔찍한 그물망이며 내 삶의 매 순간이 거기에 포박되어 있다. 시간이 나에게 더욱 끔찍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모든 것을 간직한 채 아무것도 끝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 P330

나보다 먼저 살았던 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거기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어떤 일의 의미라는 것은 단지 그것이 일일 뿐이라는 사실을 허영심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무심코 밟아 죽인 풍뎅이는 비극적인 이 사건에 우주 전체를 놓고 볼 때 중요한 의미가 있는, 비밀스러운 연관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풍뎅이는 그저 내가 걸어가고 있던 순간 내 발밑에 있었던 것뿐이다. 햇빛 속을 맘 놓고 기어가다가 짤막한 비명을 질렀고, 그러고는 끝이었다. 오직 인간들만이 있을 수도 없는 의미를 찾아 헤매느라 고생을 한다. 내가 언젠가는 이런 인식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태곳적부터 인간의 몸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던, 굳건한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 P331

인간들도 안쓰럽다. 그들은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 삶 속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인간이 가장 불쌍할지 모른다. 인간에겐 이성이 있어서 자연의 순환을 막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을 악하게 만들고 절망적으로 만들었으며 흉하게 만들고 말았다. 다른 식으로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랑보다 더 현명한 감정은 없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사랑받고 있는 사람 모두가 삶은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만이 나은 인생을 살아갈 유일한 희망,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것을 좀 더 일찍 알았어야 했다. 죽은 자들은 이제 그 유일한 가능성을 잃고 말았다. 그 생각이 계속 떠나지 않았다. 우리가 왜 잘못된 길에 접어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는 것뿐이었다.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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