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참 기이한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때로는 용기라는 것이 나약함의 이면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 P15

연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대신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한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으로,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연민을 말한다. - P17

고장 난 시계 속 톱니바퀴를 급하게 고치려다 보면 대개 시계 전체를 망가 뜨리는 법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어디까지가 나의 단순한 실수이고 어디서부터 나의 죄가 성립되는지 그 경계를 구분 짓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 P19

온실 속에서 자라는 꽃이 더 무성하게 잘 자라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자라는 망상도 그러했다. 망상은 불을 뿜어내는 덩굴식물이 되어 축축한 바닥에서 솟아올라 내 목을 졸랐고, 열에 들뜬 머릿속에서는 터무니없는 공포스러운 장면들이 꿈속에서나 있음직한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었다. - P39

에디트의 잔인한 퇴장을 지켜보면서 나는 심장이 조여왔다. 그녀가 어째서 남의 도움을 받거나 휠체어를 타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아차린 것이다. 에디트는 나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자신이 불구임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절망감에서 나온 은밀한 복수심에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고통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하느님을 책망하는 대신에 건강한 우리를 책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잔인하고도 도전적인 행동을 통해서 나는 에디트가 자신의 무력함 때문에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 P54

다른 사람이 불행하다고 해서 나 역시 불행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임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웃으며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매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병원, 채석장, 탄광 등지에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공장, 관청, 교도소에서는 매시간 수많은 사람들이 사역에 동원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또한 내가 쓸데없이 나 자신을 괴롭힌다고 해서 결코 이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구상의 모든 비참함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괴로움에 잠도 못 이루고 입가의 웃음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절망에 빠뜨리는 것은 결코 머릿속에서 그려보는 상상 속의 고통이 아니다. 실제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함께 나눈 고통만이 진정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수 있는 법이다. - P60

남을 도와주고 남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겠다는 결심 만으로도 나는 흥분되었다. 흥겨운 마음에 노래를 부르거나 뭔가 어리석은 짓이라도 저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사람은 자신이 남에게도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한 후에야 비로소 자기 존재의 의미와 사명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 P70

마음껏 수다를 떨고 농담을 하면서 나는 일종의 구속이라는 형식은 영혼이 갖는 본래의 힘을 제약시키는 것이며, 인간의 진정한 도량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을 때 드러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 P71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자유로운 사람과 감금되어 있는 사람의 관계가 아무런 문제없이 지속되기란 힘든 법이다. 불행한 사람은 쉽게 상처받고, 끊임없이 고통받는 사람은 모든 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쪽은 주기만 하고 한쪽은 받기만 하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가 불편할 수밖에 없듯이, 늘 보호를 받기만 하는 환자는 조금이라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마음에 대해서도 언제나 속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상처받기 쉬운 그녀에게는 때로는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 그녀를 달래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애매모호한 경계선을 넘지 않도록 언제나 주의해야만 했다. - P74

인간에 대해 한 가지를 이해하고 나면 다른 것들도 이해하게 되는 법이다. 한 가지 고통을 진심으로 연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와 같은 마법의 가르침에 따라 다른 고통도, 심지어는 낯설고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고통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P75

새로운 것을 깨우칠 때마다 황홀해지고, 어떤 감정에 빠지게 되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 바로 청춘이다. 남을 동정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이 나 자신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한 순간, 내 안에서는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연민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내 피를 더 따뜻하고 더 빨갛고 더 빠르고 더 격렬하게 만들어주는 독소가 혈액 속으로 침투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동안 마치 잿빛 어스름 속을 거닐듯 무미건조하게 어슬렁거리며 살아왔던 생활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예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수백 가지 일들이 나를 자극하고 나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남의 고통을 인식하게 된 그 순간부터 내 안에서 보다 날카롭고 예리한 눈이 깨어난 것만 같았다. 사방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나의 관심을 끌었고 나를 열광시켰고 격동시켰다. 온 세상이 거리마다. 방마다 운명으로 가득 차 있고, 밑바닥까지 어려운 일들로 넘쳐흐르는 덕분에 나의 하루하루는 끊임없는 긴장과 흥분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 P76

가엾은 소녀가 겪는 무력함이라는 고통을 이해하게 된 순간부터 나는 모든 잔인함을 증오하는 마음이, 모든 무력함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운명이 나의 눈에 연민이라는 뜨거운 눈물을 주입한 후부터 나는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수많은 일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사소하고 단순한 일들 하나하나가 나를 긴장시키고 격동시켰다. - P77

나는 매일매일 새로운 일들을 통해서 내 안에서 갑작스럽게 생겨난 열정을 발산했다.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최선을 다해 돕자! 다시는 나태하고 무심한 생활로 돌아가서는 안 돼! 나를 희생하면 나의 가치가 높아지는 거고, 남의 운명을 이해하고 남의 고통을 함께 나누면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 놀라워하며, 내가 뜻하지 않게 상처를 줬지만 자신의 고통을 통해 연민이라는 마법을 내게 가르쳐준 그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밀려왔다. - P77

황금빛 옷깃을 단 고급장교들은 하급장교가 그런 식으로 우쭐대는 꼴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오래전부터 나의 본능은 두 개의 세계, 즉 구속받지 않고 사치에 익숙해진 자유인으로서의 화려한 세계와 한 달이 31일이 아닌 30일인 것만으로도 큰 부담을 더는 가난하고 불쌍한 직업군인의 세계를 가능한 한 떨어뜨려놓고 섞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무의식 속에서도 하나의 나는 또 다른 나에 대해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때로는 나 자신조차도 진짜 토니 호프밀러가 누구인지, 군인으로서 복무하는 나인지 케케스팔바 저택에 있는 나인지, 부대 밖의 나인지 부대 안의 나인지 구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 P79

그러나 마음의 평형상태가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아무리 스스로를 다잡으려 해도 소용없는 법이다. 나는 요치와 페렌츠가 놀라고 감탄하던 모습으로 인해 그동안 가볍고 편안했던 마음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정말로 나는 오로지 연민 때문에 그 저택을 드나든 것인가? 허영심이나 즐기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단 말인가? 이것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 P87

처음으로 나는 진정한 관심은 전기 스위치처럼 마음대로 켰다 껐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남의 운명에 관여한 사람은 자신의 자유가 제한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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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봤지만, 소용없었다. ‘금지된 일‘이라는 담배 가게 주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 P12

어쨌든 마흔셋이나 됐는데 일기 한번 쓰겠다고 매번 유치한 술수를 써야 한다는 사실이 수치스럽다. 어떻게 하든 미켈레와 아이 들에게 일기장의 존재를 알리고 내가 원할 때 방에 들어가 글을 쓸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애초에 시작부터 잘못됐다. 이런 식으로 몰래 일기를 쓰면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계속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정작 일기 내용은 하나도 숨길 것이 없는데 말이다. - P18

불편한 마음으로 전혀 다른 미렐라의 두 모습 중에서 어떤 것이 진짜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 생각하다, 문득 딸이 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애가 집에서 맡은 역할과 밖에서 맡은 역할 자체가 다른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둘 중 까탈스러운 쪽이 가족에게 배당된 것뿐이다. - P25

새벽 두 시다. 일기를 쓰려고 일부러 일어났다. 잠이 오지 않았다. 모든 게 다 이 일기장 때문이다. 전에는 집에서 일어난 일을 곧바로 잊었는데, 일기를 쓰면서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우선 머릿속에 저장해놓았다가, 대체 왜 그런 일이 자꾸만 일어나는 건지 이유를 찾으려 한다. 일기장의 은밀한 존재는 내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었지만, 솔직히 그 덕분에 내 삶이 더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 P32

나는 내 어머니가 거짓말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어머니가 조금 차갑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서 공범자로서의 친밀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 P33

이제는 부모님이 몸소 보여주셨던 삶의 모델, 우리에게 자연스런 영감을 주고 우리를 이끌어주었던 삶의 모델이 항상 명확하고 흔들림 없이 확고한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전통, 가족, 행동 지침 등 과거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가치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돈보다 가치 있다는 생각에도 의구심이 든다.
그럼에도 나는 과거의 신념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날 나는 남편에게 언제부턴가 미렐라와 리카르도가 우리를 못 미더워하게 된 것은 이러한 우리의 의구심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 P34

솔직히 말하면, 내게는 저녁에 침대에 눕는 순간 밀려오는 피로감이 평안의 원천이다. 어쩌면 휴식을 거부하는 나의 굳은 의지는 피곤이라는 행복의 원천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오는 두려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P37

나의 사랑스러운 펠트 모자는 친구들이 쓴 화려한 색상의 새틴 모자 앞에서 초라해 보였다. 예닐곱 명 남짓한 친한 친구 모임인데도 다들 중요한 예식에 참석하는 것처럼 온갖 장신구를 걸친 채 제일 화려하고 좋은 옷을 차려입고 나왔다. 친구들의 옷차림과 쨍쨍하고 날카로운 불안한 목소리에서 자신의 행복과 부와 행운을 증명하려는, 한마디로 자신들의 삶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하지만 내 장난감이 제일 멋지다고 서로 우기면서 선물받은 장난감을 자랑하던 학창 시절처럼 실은 그들조차 그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닐 것이다. 친구들에게는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잔혹함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 P41

"아이들 양육비와 가정의 경제적인 책임을 오롯이 남편에게 맡기지 않은 것은 잘못한 거야. 돈은 남편이 벌어야지. 네가 버는 돈은 비상금으로나 쓰고"
어쩌면 어머니 말이 옳을 수도 있다. 미켈레도 내심 그렇게 하는 편을 더 좋아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머니와 에우게네이 언덕에 별장이 있고 밤마다 할아버지가 이웃 친구들과 체스 게임을 하는 동안 난로 옆에 앉아 뜨개질하시던 할머니의 삶을 기준으로 하는 이야기다. 어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미켈레와 아이들과 나의 삶을 생각하면서, 어머니를 해묵은 종교화 인쇄물처럼 바라보곤 한다. 그럴 때면 세상 모두에게서, 심지어는 어머니로부터도 떨어진 채 오직 이 일기장과 나만 홀로 남은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 P48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일기장의 존재가 느껴진다. 하루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에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항상 나의 삶을 하찮게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 빼고는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로, 사소한 말투나 단어 선택이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일들만큼,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 같이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은밀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왠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두렵다. - P51

어찌 되었든 평생 친구로 지내기는 힘든 법이다. 살다보면 모두 변하기 마련이니까. 어떤 이는 앞으로 나아가고, 어떤 이는 같은 자리에 머무른다. 가는 길이 달라지면 만나기도 힘들고 공통점도 없어진다. - P55

인간은 언제나 과거에 한 말이나 한 일을 잊는 경향이 있다. 그 말을 지켜야 하는 끔찍한 의무감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망각하지 않으면 인간은 죄다 오점투성이의 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하겠다고 약속했던 일과 실제로 한 일, 되고 싶었던 존재와 현실과 타협한 실제 모습과의 간극이 큰 모순덩어리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 P71

어쩌면 나처럼 아이들을 다 키워놓은 후에야 비로소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려면 부모에게 자신을 투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문득 언젠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남편과 아이들의 안부를 전하고, 모두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 진정 깊은 고독의 심연으로 빠질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P77

나도 내 성격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투명하고 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나 때문에 놀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나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다. 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원래의 나로 돌아가려면 되도록 혼자 있는 시간을 피해야 한다. 남편과 아이들 곁에 있으면 나다운 균형감을 되찾지만, 혼자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넋이 나간 듯 묘한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집 밖에서는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평소와는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매일 걷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명랑하게 웃고 싶어진다. 정말이지 제대로 웃어보고 싶다. 어쩌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강장제라도 마셔야겠다. - P92

가뜩이나 미렐라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는데, 대체 무슨 마음으로 슬립을 산 건지 모르겠다. 토요일에 할 일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다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홀로 일기를 쓰다 보니 알 것도 같다. 일기장의 새하얀 백지는 나를 매혹하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혼자 거리를 거닐 때처럼 말이다. - P95

솔직히 말하자면, 스무 살 때 나는 미렐라와 전혀 달랐던 것 같았다. 나는 그애처럼 내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다. 지금과는 달랐던 사회적 관습 때문이 아니라, 나의 내밀한 상태 때문이었다. 스무 살 때 내겐 이미 미켈레와 아이들이 있었다. 미켈레를 만나기 전부터,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그들은 내 소명이기 이전에 내 운명이었다. 나는 그저 내 운명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잘 생각해보니 미렐라가 불안한 이유는 복종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권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 선택권은 부모와 자식 관계, 남녀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 P107

언제나 현실과 관련된 일을 생각하는 척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괴로웠다. 내가 윤리적인 문제나, 종교 문제, 정치 문제를 생각하는 중이었다고 대답하면, 아마도 다들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내게도 일기를 쓸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던 날 밤에 그랬듯 애정 어린 조소를 터뜨릴 것이다. 하지만 깊은 사유 없이 어떻게 올바른 기준에 맞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 - P109

남편은 마흔아홉 살이다. 그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다. 남편은 자기 아버지는 절대로 장바구니 따위를 들 고 돌아다니지 않을 사람이라고 했다. 반면에 리카르도는 그런 일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가끔 흔쾌히 나서서 나를 도와주기도 하고, 부엌에서 일하고 있으면 다가와 말동무를 해준다. 모자 간에는 모녀간보다 더 큰 신뢰 관계가 형성되는 법이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그 반대가 더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말이다. 어쩌면 성별이 달라 절대적인 친숙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의 존재가 덜 부담스럽게 느껴져 서로에게 더 솔직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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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는 잃어버린 고향땅을 기리며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 틈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영혼의 거처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비통함과 해방감을 누리는 이의 격정은 쉽게 구분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서가 물에 잠긴다면, 그곳이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 된다면 영지는 진정으로 자신이 태어난 땅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P17

한서 사람들의 공통된 특성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된 생각일지 몰라도, 이곳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천진난만함 같은 게 있었다. 같은 것을 먹고 같은 풍경을 보고 자랐는데 영지에게는 없는 것이 진우에게는 있었다. 그 천진함 때문에 진우는 고향에 남았고 자신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영지는 늘 생각했다. - P26

영지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서에 사는 인간들은 다들 이렇게 끔찍해. 한서에 살면 모두 끔찍해지는 건가. - P56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문득 구정은이 바라는 것과 자신이 바라는 것이 비슷한 방향이 아닌지, 그런 엉뚱한 생각도 하게 되었다. - P57

그 후 줄곧 나락에 있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누군가가 먼 곳에서 자신의 삶을 부러워했다고 하니, 자신의 비루한 삶이 순식간에 몇 단계나 격상되는 느낌이 들었다. 가지 못했던 곳에 이미 도달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영지는 식탁 위에 올려진 구정은의 손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역시 기억에 남을 만큼 유난히 작고 가녀린 손이었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흠이 너무 많았다. 살면서 두어 번 마셔본 보드카를 삼켰을 때처럼 뱃속에서 열이 끓어오르고. 가슴과 식도까지 불이 붙는 것 같았다. - P59

영지는 온 힘을 다해 달렸다. […] 영지는 생각했다. 행복하다고, 즐겁다고. […]
드디어 이 고향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가파른 산을 굴러떨어지며 영지는 생각했다. - P65

청춘 같아서요. 그런 열정이 있다는 게 부럽습니다. 두근거리는 감정을 느껴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말하고 나니 정답을 제대로 찾은 느낌이었고 박광일은 정말 노인의 열정이 부러워졌다. 부끄럼 없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 그것은 정말 큰 장점일지도 몰랐다. - P77

손님들은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기사가 내밀한 말을 고백할 때 순식간에 불쾌감을 느끼곤 했다. 박광일은 그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억울하고 답답한 순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왔다. 그러나 원하는 만큼 해명하고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증명하려 하다보면 택시 안 공기는 금세 냉랭해지곤 했다. 아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굳이 노인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나만 제대로 알고 있으면 되지. 박광일은 아쉬운 마음을 거두고 그렇게 생각했다. - P78

택시는 해질 무렵 태안에 도착했다. 분홍빛 노을이 바다 위로 길게 펼쳐진 광경이 장관이었다. 노을은 몇 겹의 구름을 넓게 감싸안고 있었고 그것은 어쩐지 누군가가 집안에 깔아놓은 두툼한 카펫 같기도 했다. 저 위에 드러누워 한숨 잔다면 모든 불안과 피곤이 깨끗이 씻겨내려가지 않을까. 살아서는 당도할 수 없는 피안의 세계가 저런 곳일까. 박광일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 P82

그러나 어쩌다 한 번씩 예상치 못한 시간에 예상치 못한 손님을 태울 때, 낯설고 험한 길을 달려서 손님을 목적지에 데려다놓을 때 박광일은 잠시 자신을 신이라고 상상하곤 했다. 부끄러워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지만 그럴 때면 몸에서 솟아오르는 기이한 에너지와 전능감에 전율을 느낀 적도 있었다. 이 순간 자신은 여자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으므로 박광일은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 P97

인간은 원래 미련하고 몽매한 행위를 반복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 P114

아내에게는 뭐라고 해명해야 하나. 자, 이렇게 시작하자. 들어봐. 내가 나 하나 좋자고 그랬겠어? 우리를 위해서였어. 안락하고 평안한 우리의 미래를 위한 일이었지. 궁색한 변명처럼 들릴 것이 분명한 이야기를 박광일은 마음을 담아 연습했다. - P118

진종일 운전대에 앉아 있다보니 온몸이 뻐근했다. 이러다간 택시와 자신이 한몸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오래 전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각성까지는 가닿지 못했다. 자신이 택시의 주인인지, 택시가 자신의 주인인지 구분하지 못한 지는 한참 되었다. 그저 길을 따라 달릴 뿐이었다. 마치 영원과도 같이 긴 시간이었다. 영원이라니. 과장이 심하군. 박광일은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뇌리를 스친 생각을 되짚으며 어림도 없는 말이라고 스스로를 비웃었다. […] 박광일은 눈을 감았다. […] 잠은 죽음에 대한 예습이자 복습 같았다. - P119

씻기고 입히고 밥을 먹인 것은 할머니였는데도 연수는 이따금 자신을 차 뒷좌석에 태우고 안전벨트를 매준 다음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옷을 사주거나 햄버그스테이크를 사주는 할아버지를 조금 더 따랐다. 시간이 흐른 뒤, 한 여자에게 지독하게 흉악했던 사람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마음을 주고, 그 사람의 무릎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할머니가 깎아온 과일을 집어먹던 어린 날의 자신을 생각하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 P135

아무것도 제대로 차단하지 못하는 얇은 커튼으로 가망 없음과 무기력과 불길함이 드나들었다. 병원에서는 옆 환자들과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연수는 잠시도 쉬지 못하고 무한정 하루하루가 연장되는 것 같았다. - P135

연수는 20대 기업 인적성 검사 문제집을 들여다보며 자식 자랑으로 점점 과열되고 치열해지는 대화를 엿듣다가 가끔씩 비릿한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누구는 자식이, 누구는 며느리나 사위가 좋은 대학을 나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거나 의사나 변호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랑할 거리가 없는 할머니는 연수와의 관계를 과장해서 얘기했다. 오래전부터 친밀했고, 유독 살가웠고, 그만큼 각별했노라고. 연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 P136

할머니는 왜 자신의 틀니를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어쩌면 자신이 틀니를 한 몸이라는 것, 틀니를 할 만큼 노쇠했으며 몸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자체를 수치스러워하는 것이리라. - P138

그러나 병원은 어떤 결심과 다짐도 순식간에 휘발되는 공간이었으므로 연수가 밤새 골똘히 하던 생각도 아침이면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 P145

부모가 일터에서 느낄 모멸감을 상상하기도 했다. 나이가 많고 일하는 방식이 구식이라서, 그 사실을 스스로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을 견뎌야 하는 절망, 보람이나 성취감과는 먼 일을 하며 어제와 오늘을 구별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지난함 같은 것.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자신의 삶을 치열했다고 평가하며 후련하게 느낄 것이라는 생각에 연수는 증오심을 느꼈다. 오랫동안 연수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간절한 존재이기를 바라왔다. - P152

한두 번 혹은 두세 번, 할머니의 부름을 외면한 적도 있었다. 자지 않으면서 자는 척했던 그 순간, 할머니는 정말 몰랐을까. 자신의 존재가 자욱한 외로움을 더 짙게 하지는 않았을까. 연수는 고통을 관망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연수는 단 한 번도 할머니를 진정으로 측은해하지도, 가여워하지도 못했다. - P152

어머니에게 모성이라는 게 있을까. 그것은 자신이 짐작하는 것보다 더 얄팍한 감정임이 분명하다고 윤미는 생각했다. 모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윤미는 오십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이 그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았다. 살뜰한 보살핌을 갈망했다가도 어머니라는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어쩐지 이 정도의 허전함은 감수해야 할 것 같았고, 인색한 사랑에 서운해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로 느껴졌다. - P180

영실은 성남으로 온 지 나흘도 안 되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윤미가 며칠만 더 있으라고 권해도 완강히 거절했다. […] 남을 지적하고 평가하면서 하루를 다 보내는 그녀에게서 품위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윤미는 어머니의 말투와 습관을 하나 하나 재단하려 하는 자신이 불경하다고 느끼면서도, 어머니는 대접받고 존중받기엔 자격 미달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의 옷을 도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 P181

오묘하다는 단어 외에 어떤 말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이런 순간에 수치심을 느끼겠지? 같은 학교 같은 과를 다녔고 같은 해에 졸업을 했는데 둘의 처지는, 뭐 속사정까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경제 규모만큼은 확연히 차이 나는 게 사실이니까. […] 그러지 않고서는 삶을 연명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까지 치욕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처음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인맥을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연지를 부러워하고 시기해봤자 그 질투심이 현재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리 없으니, 마음 깊은 한구석에서 필사적으로 그 감정을 밀어낸 것일지도. - P214

문득 수영은 연지의 독특한 버릇을 발견했다. 연지는 인터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나눔을 받으러 온 이웃이 문 앞에 다가오는 모습과 물건을 확인하는 모습, 물건을 챙겨 엘리베이터로 돌아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연지와 함께 생활하며 그가 무언가에 꽂히면 넋을 놓고 바라볼 때가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수영은 연지가 그 정도로 집중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나눔받는 사람을 관찰하는 것, 그게 넋을 놓을 만큼 흥미로운 일인가. 수영은 그 행위가 연지에게 정신적인 포만감을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 P223

카페 유리창을 통해 멀어지는 연지의 뒷모습을 보았다. 서둘러 일어난 것치고 발걸음이 느릿했다. 바람이 불자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 순간 연지가 들고 있던 쇼핑백에서 선물 상자가 떨어졌다. 젖은 바닥이 찢긴 모양이었다. 연지는 떨어진 상자를 보고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럴 리 없는데도, 유리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환청처럼 수영의 귓가에 울린 듯했다.
수영은 문득, 자신이 훼손한 것이 정확히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 P232

세주가 열 번, 스무 번도 넘게 나를 추궁하며 반복해서 물었던 질문은 정말 단 한순간도 우리가 몸담고 있던 종교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넌 알고 있었지? 진리가 아니라는 것 말이야." - P242

신세 지는 게 미안한지 이모는 수화기 너머로 몇 번이나 엄마의 제안을 고사하는 듯했다. 그러자 엄마는 새로운 집을 구할 때까지만이라도 우리집에서 지내는 게 맞지 않겠느냐며 괜히 형제들 마음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쐐기를 박았다. 그것은 위선일까 허세일까 만용일까. 엄마의 진짜 마음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통화를 끝낸 엄마의 얼굴은 무척이나 홀가분해 보였다. 어쩌면 오래전 신세진 일을 지금이라도 갚을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기는 게 아닐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 P280

엄마는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 일‘을 겪고 나니 무사히 돌아온 아이가 마냥 귀하고 예쁘기만 해서 오냐오냐 키웠다고, 그 바람에 아이가 영 또래에 비해 늦되고 철이 안 든다고. 감당이 안 될 정도로 고집이 세고 자기 말을 들어줄 때까지 떼를 쓰는데 불만이 있으면 입을 꾹 닫고 방에 들어가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다고. 엄마가 묘사하는 나라는 존재는 썩 괜찮았다. 진심으로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오냐오냐 키워 철이 없고 고집이 센 막내딸. 살아 있는 것 자체로 유세를 부리며 뻔뻔하게 가장 좋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 말이다. - P283

그 시기의 나는 이모와 이모부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불안감을 조장하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왜 시시때때로 그런 충동을 느꼈는지, 때때로 그 충동을 실행에 옮겼는지 나조차 나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때의 나는 그것이 손에 잡히는 행복을 확인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 P306

이모에 대한 약간의 배신감과 오기로 그곳을 외면했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에는 캐나다에서의 좋은 기억을 내 안에 잘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의심할 여지 없이 사랑으로만 가득했던 그 시기를 훼손할 가능성은 모두 배제하고 싶었다. 그때 느낀 그리움과 슬픔은 애매모호하지 않아서 좋았다. 내가 가져본 것 중 가장 확연하고 선연한 감정이었다. - P315

"슬픔을 찾으러 왔지. 어느 날 문득 깨달았어. 이제 정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는 걸." 슬픔을 찾기 위해 왔다니. 내가 설명을 기다리듯 이모를 빤히 쳐다보자 이모는 마주보며 웃어주었다.
"내가 내팽개친 슬픔을 회수해야 제대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때는, 그러니까 이십 년 전에는 말이지, 떠나야 했어. 살기 위해서는 한국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시간이 지나고 늙으면 다 무뎌질 거라고 누군가가 말했거든. 그 말을 믿고 싶어서 그냥 믿어버렸어. 총기가 흐려지는 속도로 내 안의 슬픔이 옅어지기를 바랐지. 운좋게 휘발된다면 더 좋을 테고." - P319

모든 일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내 삶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망가져버린 듯해, 모든 의욕이 꺾이곤 했다. 이미 글러먹은 삶을 저버리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세상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일들이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곳이라고, 인간은 무작위로 그 사건들에 꿰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 그 모든 일들의 인과관계를 일일이 따질 수는 없는 거라고, 나는 분열하는 내 마음을 다잡으며 생각했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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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지는 모욕당했다고 느꼈다. 그녀의 사랑은 개인적이고 그녀의 증오 또한 개인적이다. 그녀의 증오는 자기 경험에서 비롯되었고 데이비스가 그녀의 자매들을 때렸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클리지는 데이비스의 흑인 여성성을 향한 폭력에 분개한다. 그것은 그녀의 자아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그녀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과 마찬가지다. - P309

우리의 관계 또한 성장하면서 변한다. 하지만 그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거나 사랑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 P310

가족이 버거운 존재인 이유는 그들이 우리에게 강제로 맡겨진 괴물이기 때문이다(천사이기도 하고 그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괴물이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 이처럼 무작위적인 것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든 가족을 계속해서 사랑해 나가고 사랑하면서 끝난다. - P314

영국 철학자 질리언 로즈는 짧지만 놀라운 책 『사랑의 작용Love‘s Work』에서 이렇게 썼다. "개인의 삶에서 그 어떤 계약과 상관없이 한 쪽 당사자가 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할 수 있다. 그리고 상대와의 재협상 없이 변화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 어떤 사랑의 관계에서든 민주주의란 없다. 자비만 있을 뿐이다."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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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날아간 도리스 레싱은 마치 ‘예술가가 되기 위해 아이를 포기한 여인‘이라는 동화 속 주인공 같다. 우리에게는 동화, 우화, 신화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동화나 신화는 우리 삶을 지배하는 도덕적 복합성을 좀 더 단순하고 광범위하고 뚜렷한 붓놀림으로 색칠해 주기 때문이다. - P256

나는 회색의 거석들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이 모든 구조물이 뱀을 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 생각하기도 싫지만 뱀의 둥지가 그 밑에 있다는 뜻인가?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은유처럼 보였다. 너무 완벽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거대하고 무거운 이 작품은 예술적 야망과 성취를 완벽하게 표현했다. 자원, 시간, 수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저드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도 필요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뱀이 있었다. 마치 출처가 불분명한 벤야민의 문장을 우스울 정도로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과 같았다. "모든 위대한 작품의 밑바탕에는 야만성이 깔려 있다." - P258

어쨌든 다수가 여자가 된다는 의견에 동의한 맥락에서 여성의 폭력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된다. 공백이다. 대화를 끝내 버리는 주제다. 그 광경 앞에서 우리 마음은 한발 물러나 본능적으로 외면한다. 학대받은 개가 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는 것처럼, 아이가 치켜든 손에 몸을 움츠리는 것처럼. 정확히 그렇다. - P262

그리니치빌리지에 자리를 잡은 솔라나스는 『업 유어 애스Up Your Ass』라는 희곡을 썼고, 유쾌하게도 이 작품을 자신에게 헌정했다. 1967년 초반에는 자신의 인생을 바꿀 책 한 권을 썼다. 『스컴 선언문 SCUM Manifesto』이다.
‘SCUM‘은 Society for Cutting Up Man(남자를 말살하는 사회)의 준말로, 책에서는 이 지구상의 남성들을 멸종시켜야 한다고 선언한다. 선언문의 머리말은 다음과 같다. "이 사회에서 삶은 기껏해야 지루하기 짝이 없고 이 사회의 어떤 측면도 여성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에, 시민 의식이 있고 책임감 있고 스릴을 추구하는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부를 전복하고 화폐 체제를 해체하고 완전한 자동화를 도입하고 남성이라는 성별을 말살하는 것뿐이다." - P263

솔라나스에 따르면, 남자들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자기들이 쓰레기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솔라나스의 남성은 자신의 무능함을 보상하기 위해 가정과 직장에서 군림하고 전쟁으로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 "진정한 사회 혁명은 남성에 의해 이루어 질 수 없다." 그녀는 계속 쓴다. "꼭대기에 위치한 남성은 현상 유지를 원하고 아래에 있는 남성은 오직 위로 오르고 싶어 한다. (···) 남성은 기술 발전에 의해 강제로 변해야 할 때,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사회‘가 그가 변하거나 죽지 않으면 안 되는 단계까지 갔을 때만 변한다. 우리가 지금 그 단계에 와 있다. 여성들이 정신 차려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게 될지도 모른다." 역시나 이 선언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현재의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 책임자들이 세상을 돌이킬 수 없이 망쳐 버렸으니 나머지인 우리가 정신 차려 행동해야만 한다는 인식이 강렬하다. - P264

솔라나스는 자신의 스컴 자매들을 치열하고 에너지 넘치는 강한 여성 부족으로 상상했다. "지배적이고, 안전하고, 자신감 넘치고, 고약하고, 과격하고, 자기애 넘치고, 독립적이고, 자부심 있고, 스릴을 추구하고, 자유분방하고 오만한 여자. 자신이 우주를 지배하기에 적합한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이 ‘사회‘의 한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이 사회가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찾아내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 그녀에게는 스컴 자매가 없었다. 그녀는 혼자였다. […] 이들은 혁명가였지만 "자신만의 어록과 함께 홀로 부유하는 사람"이었다. - P272

그들의 텍스트는 남자 없이 위치하지만 남자에 의해 정의된다. 자유롭지 않은 자유의 장소에 있다. 그들은 남성의 폭력이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그들의 꿈은 여전히 남성에 의해 금지된다. 마치 이론가 마크 피셔의 문장 "자본주의의 종말보다는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처럼 가부장제의 종말보다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기가 더 쉽다.
개인사적으로 그들은 고통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이지만 가부장 제와 대항한 아마존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부장제에 맞서 싸운 전사들이기도 했다. 너무나 거대하고 소모적이라 그 힘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고 잊히고 당연시되는 힘에 맞서는 일상적 투쟁을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하면 무엇을 페미니즘(혹은 해방 운동)이라 할 수 있겠는가? - P274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라나스는 우리가 기대치 못한 무언가를 남겨 주었다. 특정 유형의 급진적 페미니즘의 가장 극단으로 안내해 그 한계를 잠깐 들여다보도록 한 것이다. 그녀는 젠더 본질주의의 제단 위에 진정한 해방의 비전을 올려놓고 희생시켜 버렸다. 솔라나스를 보며 의문에 잠긴다. 이 남자들의 범죄에 이토록 사로잡혀 있을 때 내 눈을 가리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괴물 남자들을 괴물화할 때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 P276

한마디로 중독자들은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때로는 빈곤이나 인종주의 같은 구조적 학대로 인해 심하게 상처받은 사람이다. 우리가 한방에 앉아서 동료 괴물들을 받아들일 때, 고통에 대한 우리 자신의 경험에 따른 지식은 모든 것을 수용하라고 말해 준다. 우리는 괴물이면서도 피해자다. - P290

술을 끊으면서 내가 옳고 정당하다는 믿음이 약해졌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믿음이 깨졌다. 내가 부분적으로 괴물이었다면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도 부분적으로 인간이었을 것이다. - P292

마크 피셔는 2009년의 책 『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Capitalist Realism: Is There No Alternatives?』에서 우리 모두가 숨 쉬고 움직이는 이 자본의 분위기, 비판이나 저항은커녕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만연한 자본의 분위기에 경각심을 일깨우려고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구매하고 있지 않을 때도 원자화된, 개별적인 소비자의 역할에만 갇혀 있다. - P293

우리는 물건을 살 때 판단력을 발휘하여 도덕성을 구현하려고 하지만 우리의 판단이 우리를 더 나은 소비자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사실상 우리는 통제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광경에 더 갇히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 광경의 허구성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어떨까? 유명인을 비난하고 퇴출시키는 일은 결국 얼룩이 없는 긍정적인 유명인이 있다는 개념을 강화한다. 나쁜 유명인이란 존재하지 않는 좋은 유명인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주입한다. 유명인이란 도덕성의 주체가 아니고 재현 가능한 이미지일 뿐이다. - P296

사실 우리가 작품을 소비하거나 소비하지 않는 것은 윤리적 행위로서 본질적으로 의미가 없다.
결국 우리에게는 감정이 남는다. 사랑이 남는다. 예술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세계를 환히 밝히고 넓게 확장한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사랑한다.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얼룩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 P296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도 중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미에 대해서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는다. 미는 우리 앞에 툭하고 떨어진다. 1995년 한 인터뷰에서 평론가 데이브 히키는 아름다움beautful과 미beauty를 구분했다. "아름다움은 사회적 구성물이다. 무엇이 적절한 시각적 외양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공동체의 기준이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좋아해야 하는 무언가다. 반면 미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다. 좋아해야 하는지 안 하는지에 상관없이 저절로 마음과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강조는 나의 표기다. 또한 미에 대한 우리의 비자발적 반응이 얼룩에 대한 비자발적 반응과 얼마나 흡사한지 주목하자.)
히키는 말한다. "따라서 미는 공동체의 산물이 아니다. 이것이 공동체를 형성한다. 원한다면 욕망의 공동체를 만들기도 한다." 어쩌면 팬덤에 대한 설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미는 굉장히 강력한 힘이자 정서적인 힘으로, 우리에게는 개념이 아니라 체험이다. - P300

예술 사랑, 작품에 대한 사랑—리베 추르 쿤스트—은 한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이전에도 이 글을 쓰는 거실을 묘사했지만, 이 공간은 나에게 기쁨을(혹은 고통을 혹은 그저 재미를) 가져다주는 책과 영화와 앨범을 열심히 소비했던 곳으로 리베 추르 쿤스트가 처마 장식처럼 드리워져 있다. 예술 사랑은 내 삶을 빚었고 우리의 삶을 빚었다. 펄 클리지와 그녀의 시절이 마일스에 의해 표기된 것처럼 예술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에도 진한 발자국을 남겼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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