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는 잃어버린 고향땅을 기리며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 틈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영혼의 거처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비통함과 해방감을 누리는 이의 격정은 쉽게 구분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서가 물에 잠긴다면, 그곳이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 된다면 영지는 진정으로 자신이 태어난 땅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P17

한서 사람들의 공통된 특성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된 생각일지 몰라도, 이곳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천진난만함 같은 게 있었다. 같은 것을 먹고 같은 풍경을 보고 자랐는데 영지에게는 없는 것이 진우에게는 있었다. 그 천진함 때문에 진우는 고향에 남았고 자신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영지는 늘 생각했다. - P26

영지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서에 사는 인간들은 다들 이렇게 끔찍해. 한서에 살면 모두 끔찍해지는 건가. - P56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문득 구정은이 바라는 것과 자신이 바라는 것이 비슷한 방향이 아닌지, 그런 엉뚱한 생각도 하게 되었다. - P57

그 후 줄곧 나락에 있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누군가가 먼 곳에서 자신의 삶을 부러워했다고 하니, 자신의 비루한 삶이 순식간에 몇 단계나 격상되는 느낌이 들었다. 가지 못했던 곳에 이미 도달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영지는 식탁 위에 올려진 구정은의 손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역시 기억에 남을 만큼 유난히 작고 가녀린 손이었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흠이 너무 많았다. 살면서 두어 번 마셔본 보드카를 삼켰을 때처럼 뱃속에서 열이 끓어오르고. 가슴과 식도까지 불이 붙는 것 같았다. - P59

영지는 온 힘을 다해 달렸다. […] 영지는 생각했다. 행복하다고, 즐겁다고. […]
드디어 이 고향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가파른 산을 굴러떨어지며 영지는 생각했다. - P65

청춘 같아서요. 그런 열정이 있다는 게 부럽습니다. 두근거리는 감정을 느껴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말하고 나니 정답을 제대로 찾은 느낌이었고 박광일은 정말 노인의 열정이 부러워졌다. 부끄럼 없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 그것은 정말 큰 장점일지도 몰랐다. - P77

손님들은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기사가 내밀한 말을 고백할 때 순식간에 불쾌감을 느끼곤 했다. 박광일은 그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억울하고 답답한 순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왔다. 그러나 원하는 만큼 해명하고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증명하려 하다보면 택시 안 공기는 금세 냉랭해지곤 했다. 아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굳이 노인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나만 제대로 알고 있으면 되지. 박광일은 아쉬운 마음을 거두고 그렇게 생각했다. - P78

택시는 해질 무렵 태안에 도착했다. 분홍빛 노을이 바다 위로 길게 펼쳐진 광경이 장관이었다. 노을은 몇 겹의 구름을 넓게 감싸안고 있었고 그것은 어쩐지 누군가가 집안에 깔아놓은 두툼한 카펫 같기도 했다. 저 위에 드러누워 한숨 잔다면 모든 불안과 피곤이 깨끗이 씻겨내려가지 않을까. 살아서는 당도할 수 없는 피안의 세계가 저런 곳일까. 박광일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 P82

그러나 어쩌다 한 번씩 예상치 못한 시간에 예상치 못한 손님을 태울 때, 낯설고 험한 길을 달려서 손님을 목적지에 데려다놓을 때 박광일은 잠시 자신을 신이라고 상상하곤 했다. 부끄러워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지만 그럴 때면 몸에서 솟아오르는 기이한 에너지와 전능감에 전율을 느낀 적도 있었다. 이 순간 자신은 여자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으므로 박광일은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 P97

인간은 원래 미련하고 몽매한 행위를 반복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 P114

아내에게는 뭐라고 해명해야 하나. 자, 이렇게 시작하자. 들어봐. 내가 나 하나 좋자고 그랬겠어? 우리를 위해서였어. 안락하고 평안한 우리의 미래를 위한 일이었지. 궁색한 변명처럼 들릴 것이 분명한 이야기를 박광일은 마음을 담아 연습했다. - P118

진종일 운전대에 앉아 있다보니 온몸이 뻐근했다. 이러다간 택시와 자신이 한몸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오래 전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각성까지는 가닿지 못했다. 자신이 택시의 주인인지, 택시가 자신의 주인인지 구분하지 못한 지는 한참 되었다. 그저 길을 따라 달릴 뿐이었다. 마치 영원과도 같이 긴 시간이었다. 영원이라니. 과장이 심하군. 박광일은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뇌리를 스친 생각을 되짚으며 어림도 없는 말이라고 스스로를 비웃었다. […] 박광일은 눈을 감았다. […] 잠은 죽음에 대한 예습이자 복습 같았다. - P119

씻기고 입히고 밥을 먹인 것은 할머니였는데도 연수는 이따금 자신을 차 뒷좌석에 태우고 안전벨트를 매준 다음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옷을 사주거나 햄버그스테이크를 사주는 할아버지를 조금 더 따랐다. 시간이 흐른 뒤, 한 여자에게 지독하게 흉악했던 사람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마음을 주고, 그 사람의 무릎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할머니가 깎아온 과일을 집어먹던 어린 날의 자신을 생각하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 P135

아무것도 제대로 차단하지 못하는 얇은 커튼으로 가망 없음과 무기력과 불길함이 드나들었다. 병원에서는 옆 환자들과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연수는 잠시도 쉬지 못하고 무한정 하루하루가 연장되는 것 같았다. - P135

연수는 20대 기업 인적성 검사 문제집을 들여다보며 자식 자랑으로 점점 과열되고 치열해지는 대화를 엿듣다가 가끔씩 비릿한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누구는 자식이, 누구는 며느리나 사위가 좋은 대학을 나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거나 의사나 변호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랑할 거리가 없는 할머니는 연수와의 관계를 과장해서 얘기했다. 오래전부터 친밀했고, 유독 살가웠고, 그만큼 각별했노라고. 연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 P136

할머니는 왜 자신의 틀니를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어쩌면 자신이 틀니를 한 몸이라는 것, 틀니를 할 만큼 노쇠했으며 몸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자체를 수치스러워하는 것이리라. - P138

그러나 병원은 어떤 결심과 다짐도 순식간에 휘발되는 공간이었으므로 연수가 밤새 골똘히 하던 생각도 아침이면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 P145

부모가 일터에서 느낄 모멸감을 상상하기도 했다. 나이가 많고 일하는 방식이 구식이라서, 그 사실을 스스로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을 견뎌야 하는 절망, 보람이나 성취감과는 먼 일을 하며 어제와 오늘을 구별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지난함 같은 것.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자신의 삶을 치열했다고 평가하며 후련하게 느낄 것이라는 생각에 연수는 증오심을 느꼈다. 오랫동안 연수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간절한 존재이기를 바라왔다. - P152

한두 번 혹은 두세 번, 할머니의 부름을 외면한 적도 있었다. 자지 않으면서 자는 척했던 그 순간, 할머니는 정말 몰랐을까. 자신의 존재가 자욱한 외로움을 더 짙게 하지는 않았을까. 연수는 고통을 관망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연수는 단 한 번도 할머니를 진정으로 측은해하지도, 가여워하지도 못했다. - P152

어머니에게 모성이라는 게 있을까. 그것은 자신이 짐작하는 것보다 더 얄팍한 감정임이 분명하다고 윤미는 생각했다. 모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윤미는 오십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이 그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았다. 살뜰한 보살핌을 갈망했다가도 어머니라는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어쩐지 이 정도의 허전함은 감수해야 할 것 같았고, 인색한 사랑에 서운해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로 느껴졌다. - P180

영실은 성남으로 온 지 나흘도 안 되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윤미가 며칠만 더 있으라고 권해도 완강히 거절했다. […] 남을 지적하고 평가하면서 하루를 다 보내는 그녀에게서 품위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윤미는 어머니의 말투와 습관을 하나 하나 재단하려 하는 자신이 불경하다고 느끼면서도, 어머니는 대접받고 존중받기엔 자격 미달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의 옷을 도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 P181

오묘하다는 단어 외에 어떤 말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이런 순간에 수치심을 느끼겠지? 같은 학교 같은 과를 다녔고 같은 해에 졸업을 했는데 둘의 처지는, 뭐 속사정까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경제 규모만큼은 확연히 차이 나는 게 사실이니까. […] 그러지 않고서는 삶을 연명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까지 치욕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처음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인맥을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연지를 부러워하고 시기해봤자 그 질투심이 현재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리 없으니, 마음 깊은 한구석에서 필사적으로 그 감정을 밀어낸 것일지도. - P214

문득 수영은 연지의 독특한 버릇을 발견했다. 연지는 인터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나눔을 받으러 온 이웃이 문 앞에 다가오는 모습과 물건을 확인하는 모습, 물건을 챙겨 엘리베이터로 돌아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연지와 함께 생활하며 그가 무언가에 꽂히면 넋을 놓고 바라볼 때가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수영은 연지가 그 정도로 집중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나눔받는 사람을 관찰하는 것, 그게 넋을 놓을 만큼 흥미로운 일인가. 수영은 그 행위가 연지에게 정신적인 포만감을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 P223

카페 유리창을 통해 멀어지는 연지의 뒷모습을 보았다. 서둘러 일어난 것치고 발걸음이 느릿했다. 바람이 불자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 순간 연지가 들고 있던 쇼핑백에서 선물 상자가 떨어졌다. 젖은 바닥이 찢긴 모양이었다. 연지는 떨어진 상자를 보고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럴 리 없는데도, 유리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환청처럼 수영의 귓가에 울린 듯했다.
수영은 문득, 자신이 훼손한 것이 정확히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 P232

세주가 열 번, 스무 번도 넘게 나를 추궁하며 반복해서 물었던 질문은 정말 단 한순간도 우리가 몸담고 있던 종교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넌 알고 있었지? 진리가 아니라는 것 말이야." - P242

신세 지는 게 미안한지 이모는 수화기 너머로 몇 번이나 엄마의 제안을 고사하는 듯했다. 그러자 엄마는 새로운 집을 구할 때까지만이라도 우리집에서 지내는 게 맞지 않겠느냐며 괜히 형제들 마음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쐐기를 박았다. 그것은 위선일까 허세일까 만용일까. 엄마의 진짜 마음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통화를 끝낸 엄마의 얼굴은 무척이나 홀가분해 보였다. 어쩌면 오래전 신세진 일을 지금이라도 갚을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기는 게 아닐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 P280

엄마는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 일‘을 겪고 나니 무사히 돌아온 아이가 마냥 귀하고 예쁘기만 해서 오냐오냐 키웠다고, 그 바람에 아이가 영 또래에 비해 늦되고 철이 안 든다고. 감당이 안 될 정도로 고집이 세고 자기 말을 들어줄 때까지 떼를 쓰는데 불만이 있으면 입을 꾹 닫고 방에 들어가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다고. 엄마가 묘사하는 나라는 존재는 썩 괜찮았다. 진심으로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오냐오냐 키워 철이 없고 고집이 센 막내딸. 살아 있는 것 자체로 유세를 부리며 뻔뻔하게 가장 좋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 말이다. - P283

그 시기의 나는 이모와 이모부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불안감을 조장하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왜 시시때때로 그런 충동을 느꼈는지, 때때로 그 충동을 실행에 옮겼는지 나조차 나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때의 나는 그것이 손에 잡히는 행복을 확인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 P306

이모에 대한 약간의 배신감과 오기로 그곳을 외면했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에는 캐나다에서의 좋은 기억을 내 안에 잘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의심할 여지 없이 사랑으로만 가득했던 그 시기를 훼손할 가능성은 모두 배제하고 싶었다. 그때 느낀 그리움과 슬픔은 애매모호하지 않아서 좋았다. 내가 가져본 것 중 가장 확연하고 선연한 감정이었다. - P315

"슬픔을 찾으러 왔지. 어느 날 문득 깨달았어. 이제 정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는 걸." 슬픔을 찾기 위해 왔다니. 내가 설명을 기다리듯 이모를 빤히 쳐다보자 이모는 마주보며 웃어주었다.
"내가 내팽개친 슬픔을 회수해야 제대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때는, 그러니까 이십 년 전에는 말이지, 떠나야 했어. 살기 위해서는 한국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시간이 지나고 늙으면 다 무뎌질 거라고 누군가가 말했거든. 그 말을 믿고 싶어서 그냥 믿어버렸어. 총기가 흐려지는 속도로 내 안의 슬픔이 옅어지기를 바랐지. 운좋게 휘발된다면 더 좋을 테고." - P319

모든 일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내 삶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망가져버린 듯해, 모든 의욕이 꺾이곤 했다. 이미 글러먹은 삶을 저버리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세상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일들이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곳이라고, 인간은 무작위로 그 사건들에 꿰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 그 모든 일들의 인과관계를 일일이 따질 수는 없는 거라고, 나는 분열하는 내 마음을 다잡으며 생각했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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