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는 없다. 또 다른 전쟁으로부터 또 다른 피난처를 향하는 것 외에는. 목적지를 향한 여러 세대의 교체와 역사의 행로에는 많은 기만들이 있다. - P92

타액을 분비하는 말들
타액은 말들을 분비한다
말들의 분비는 액체로 흐르고
말들을 침 흘리게 한다. - P142

타액을 분비하는 말들
타액은 말들을 분비한다
말들의 분비는 액체형으로 흐르고
말들을 분비한다. - P143

순백함의 이후로는 언제나.
그것은 자신을 지키고 있다, 하얗게,
능가할 수 없는, 색깔의 부재, 절대적, 지극히 순수하다, 이를 수 없도록 순수하다.
만약 그 자체의 하얀 그림자—수의안에서, 모든 얼룩이
사라진다면, 드리웠던 모든 과거 모든 기억이 떠난다면, 이 말들의 사면과 힘을 통하여.
덮어씌우고. 장막처럼 두르고. 옷을 입히고. 자루집에 넣고. 수의를 입혀.
덧씌우고. 덧입히고. 막을 치고.
숨긴다. 급습한다.
변장. 은닉. 가면. 베일
불분명. 모호. 가리개. 침식. 은밀.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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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른 뒤 윌리엄 스토너는 그날 조시아 클레어몬트의 집에서 오후에서 이른 저녁까지 보내며 자신이 어떻게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 분위기가 공식적이었고 기억도 흐릿해서, 현관홀의 계단 벽에 걸려 있던 색 바랜 벽걸이 같았다. - P68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도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처음으로 그녀와 둘이서 오랜 시간을 보낸 그해 12월 그날 저녁의 한 시간 반 동안 한 것만큼 그녀가 자신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자신과 그녀가 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그런 느낌을 갖게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는 또한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확신했다. - P75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천장이 높은 전시관들을 돌아다녔다. 그림에 반사된 빛이 풍요롭고 은은했다. 그 조용함, 그 따스함, 오래된 그림들과 조각상들 덕분에 시간을 초월한 듯한 그 분위기 속에서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과 나란히 걷고 있는 섬세한 키다리 아가씨를 향해 사랑이 마구 샘솟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마음속에서 솟아오른 조용한 열정은 따스했으며, 관능적이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았다. 사방에 걸린 그림에서 솟아나온 색깔들과 같았다. - P98

슬론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그래서 대학의 동료들과 이 도시 사람들 몇 명만이 좁은 구덩이 주위에 모여 서서 경외감, 당혹감, 존경심을 한꺼번에 느끼며 목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죽음을 슬퍼해 줄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관이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 울어준 사람은 바로 스토너였다. 이제 완전히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망자의 고독이 그 울음으로 조금 덜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가 운 것이 자신 때문인지, 슬론과 함께 보낸 젊은 시절이 함께 땅속에 묻히고 있기 때문인지, 그가 사랑했던 저 마르고 가엾은 사람 때문인지는 스토너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P125

스토너는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자신이 홀리스 로맥스에게 끌리는 이유를 깨달았다. 로맥스의 거만한 태도, 달변, 유쾌한 신랄함 속에서 스토너는 비록 조금 일그러지기는 했어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친구 데이비드 매스터스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데이브와 그랬던 것처럼 로맥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런 마음을 스스로 인정한 뒤에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젊은 시절의 어색함과 서투름은 아직 남아 있는 반면, 어쩌면 우정을 쌓는 데 도움이 되었을 솔직함과 열정은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망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그를 슬프게 했다. - P130

윌리엄 스토너는 이 말을 들으면서 그에게 뜻밖의 친근감을 느꼈다. 그는 로맥스가 일종의 변화를 거쳤음을 알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을 통해 알게 되는 직관적인 깨달음 같은 것. 스토너 자신도 예전에 아처 슬론의 강의를 들으며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로맥스는 일찌감치 혼자서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 깨달음을 통해 얻은 지식이 스토너의 경우보다 더욱더 그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두 사람은 비슷했다. 비록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또는 심지어 자신에게조차 그 사실을 시인하고 싶어 하지 않겠지만. - P137

이디스는 곤히 잠들어 있었지만, 빛의 장난 때문에 살짝 벌어진 입술이 소리 없이 열정과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한참 동안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련한 연민과 내키지 않는 우정과 친숙한 존중이 느껴졌다. 또한 지친 듯한 슬픔도 느껴졌다. 이제는 그녀를 봐도 예전처럼 욕망으로 괴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예전처럼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다시는 없을 터였다. 슬픔이 조금 가라앉자 그는 그녀의 몸에 부드럽게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끈 뒤 그녀 옆에 누웠다. - P139

이렇게 꾸민 끝에 서재가 서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비밀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지 하나가 묻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방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그가 책꽂이를 만들기 위해 낡은 판자들을 사포로 문지르자 표면의 거친 느낌이 사라졌다. 낡은 회색 표면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면서 나무 본래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더니, 마침내 풍요롭고 순수한 질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가구를 수리해서 서재에 배치하는 동안 서서히 모양을 다듬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질서 있는 모습으로 정리하던 것도, 현실 속에 실현하고 있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 P140

처음에 그는 자신의 책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것을 양손으로 들고 아무 장식이 없는 표지를 쓰다듬다가 책장을 펼쳤다. 섬세하고 활기찬 아이 같았다. 그는 책으로 완성된 자신의 원고를 다시 읽고 나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나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그 책을 보는 일에 진력이 났다. 하지만 자신이 책을 썼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경이가 느껴졌으며, 자신이 그토록 커다란 책임이 따르는 일에 무모하게 나섰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 P142

1927년 봄, 어느 저녁에 윌리엄 스토너는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막 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는 꽃들의 향기가 촉촉하고 따스한 공기에 섞여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귀뚜라미들이 노래를 부르고, 저 멀리에서는 자동차 한 대가 외로이 흙먼지를 피워 올리며 적막한 어둠을 향해 반항하듯 커다랗게 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새로운 계절의 나른함에 사로잡혀 천천히 걸었다. 덤불과 나무의 그늘 속에서 밝게 고개를 내민 자그마한 초록색 봉오리들이 신기했다. - P144

분빌은 그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 비해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새로운 건물이 몇 개 들어서고 옛날에 있던 건물 몇 채가 철거되었지만, 살풍경하고 보잘것없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지금도 언제든 없애버릴 수 있는 임시 거처처럼 보였다. 지난 몇 년 동안 대부분의 길이 포장되었는데도 흙먼지가 엷은 안개처럼 허공에 떠 있고, 강철바퀴를 단 마차 몇 대가 여전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강철바퀴가 도로와 도로 턱의 콘크리트 포장을 긁을 때면 가끔 불꽃이 튀었다. 고향집도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옛날보다 더 건조하고 칙칙해진 것 같기는 했다. 미늘벽판자로 된 벽에는 페인트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고, 역시 페인트칠이 되지 않은 포치 바닥도 맨살을 드러낸 땅을 향해 조금 더 주저앉아 있었다. - P146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옷을 입고 밭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해마다 일하던 곳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어렸을 때 보았던 아버지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밭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마른 흙 한 덩이를 손으로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부스러뜨리며 달빛 속에서 어둡게 보이는 흙 알갱이들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바지에 손을 털고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누워 하나밖에 없는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동이 틀 때까지. 땅 위의 그림자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척박한 회색 땅이 그의 앞에 무한하게 펼쳐질 때까지. - P150

그는 […] 이 황량하고, 나무 하나 없는 작은 땅으로 시선을 돌려 평평한 땅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태어난 집,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생을 보낸 집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는 해마다 땅에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했다. 땅은 옛날과 다름없었다. 아니, 그때보다 조금 더 척박해지고, 소출도 조금 더 인색해진 것 같았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즐거움이 없는 노동에 평생을 바쳤다. 그들의 의지는 꺾이고, 머리는 멍해졌다. […] 땅은 앞으로 서서히 두 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다. 습기와 부패의 기운이 두 분의 시신이 담긴 소나무 상자를 서서히 침범해서 두 분의 몸을 건드리다가, 마침내 두 분의 마지막 흔적까지 모조리 먹어 치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두 분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을 바쳤던 이 고집스러운 땅의 무의미한 일부가 될 것이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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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학 공부도 농장 일을 도울 때처럼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이 철저하게, 양심적으로 했다. 1학년 말에 그의 평균성적은 B학점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정도였다. 그는 점수가 더 낮지 않은 것을 기뻐했을 뿐, 점수가 더 높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전에는 알지 못하던 것을 배웠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점수가 그에게 의미하는 것은 2학년 때에도 1학년 때처럼 해낼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 P14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이 한참 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부드럽게 숨을 내쉬면서 허파에서 숨이 빠져나갈 때마다 옷이 움직이는 것을 세심하게 인식했다. 그는 슬론에게서 시선을 떼어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햇빛이 동료 학생들의 얼굴에 안착해서, 마치 그들의 안에서 나온 빛이 어둠에 맞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책상을 꽉 붙들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 갈색 피부에 감탄하고, 뭉툭한 손끝에 꼭 맞게 손톱을 만들어준 그 복잡한 메커니즘에 감탄했다. 작고 작은 정맥과 동맥 속에서 섬세하게 박동하며 손 끝에서 온몸으로 불안하게 흐르는 피가 느껴지는 듯했다. - P20

윌리엄 스토너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주위 학생들을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그들이 나간 뒤로도 몇 분 동안 그는 꼼짝 않고 앉아서 자기 앞의 좁은 바닥 널을 빤히 바라보았다. 바닥널은 그가 결코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학생들의 부산한 발길에 닳아서 니스 칠이 완전히 벗겨진 상태였다. 그는 그 바닥 위에 자신의 발을 미끄러뜨리며 나무가 신발 바닥에 닿는 거친 소리를 듣고, 가죽을 통해 느껴지는 거친 질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 P21

늦가을의 쌀쌀함이 그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창백한 하늘 아래 둥글게 말리거나 비틀려 있는 나무들의 벌거벗은 가지가 보였다. 수업에 들어가려고 서둘러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학생들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이 중얼거리는 소리, 돌로 포장된 길에 신발이 또각또각 닿는 소리가 들리고, 추위에 발갛게 변한 채 가벼운 산들바람을 피해 수그린 얼굴들이 보였다. 그는 호기심에 차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들이 자신과 아주 멀지만 또한 아주 가까운 존재인 것 같았다. - P21

밤에 다락방에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방구석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램프의 불빛이 구석의 어둠에 맞서 너울거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둠이 빛 속으로 모여들어 그가 읽던 책에 나오는 상상의 모습들을 펼쳐 보였다. 그러면 자신이 시간을 초월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의 중에 아처 슬론이 그에게 말을 걸었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과거가 어둠 속에서 빠져나와 한데 모이고, 죽은 자들이 그의 앞에 되살아났다. 그렇게 과거와 망자가 현재의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흘러 들어오면 그는 순간적으로 아주 강렬한 환상을 보았다. 자신을 압축해서 집어삼킨 그 환상 속에서 그는 도망칠 길도,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트리스탄과 아름다운 이졸데가 그의 앞을 거닐었다. 파올로와 프란체스카가 강렬한 어둠 속에서 빙빙 돌았다. 헬레네와 총명한 파리스는 자신들의 행동이 낳은 결과 때문에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어둠 속에서 솟아올랐다. - P24

입술이 근질거리고 손끝에는 감각이 없었다. 그는 잠든 사람처럼 몽롱한 기분으로 복도를 걸었지만, 주위의 것들을 똑똑히 인식하고 있었다. 복도의 광택이 나는 나무 벽들을 스치듯이 지나갈 때는 나무의 온기와 유구한 세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갈 때는 자기 발밑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것만 같은 차가운 대리석 계단에 감탄했다. 홀에서는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들 속에서 학생들 각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구분되고, 그들의 얼굴이 친밀하면서 동시에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제시 홀에서 오전 풍경 속으로 나갔다. 이제는 캠퍼스가 회색 풍경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캠퍼스가 그의 시선을 밖으로, 위로 이끌어 하늘을 향하게 했다. 그는 아직 이름을 알 수 없는 가능성을 바라보듯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 P30

윌리엄 스토너 앞에 놓인 장래는 밝고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장래를 수많은 사건과 변화와 가능성의 흐름이라기보다 탐험가인 자신의 발길을 기다리는 땅으로 보았다. 그에게 장래는 곧 웅장한 대학 도서관이었다. 언젠가 도서관에 새로운 건물들이 증축될 수도 있고, 새로운 책들이 들어올 수도 있고, 낡은 책들이 치워질 수도 있겠지만, 도서관의 진정한 본질은 근본적으로 불변이었다. 그는 몸을 바치기로 했지만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곳에서 자신의 장래를 보았다. 장래에 자신이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장래 그 자체가 변화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변화의 도구라고 보았다. - P36

그는 학생의 입장으로 강의를 들을 때 해방감과 성취감을 느꼈다. 그런 수업에서는 아처 슬론이 수업 중에 처음 그에게 말을 걸었던 그날처럼, 그 자신이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던 그날처럼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강의에 빠져들어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고 문학의 힘을 파악하려고 씨름 하면서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인식했다. 그러면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속한 세상으로 점점 빠져나와, 자신이 읽은 밀턴의 시나 베이컨의 에세이나 벤 존슨의 희곡이 세상을 바꿔놓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 작품들이 자신의 소재이기도 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세상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P39

전쟁선포 후 처음 며칠 동안 스토너도 혼란에 빠져 있었지만, 캠퍼스 내의 사람들 대부분을 사로잡은 혼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나이 많은 학생들이나 강사들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어도, 사실 그는 전쟁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전쟁이 이제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자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엄청난 무심함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전쟁 때문에 대학의 일들이 중단된 것에 화가 났다. 자신의 내면에서 강렬한 애국심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또한 독일인 들을 미워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 P47

그에게는 지금까지 내면을 성찰하는 버릇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찾아 헤매는 일이 힘들 뿐만 아니라 살짝 싫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자신에게 내놓을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 내면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 또한 거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나자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 P53

전에는 죽음을 문학적 사건 또는 불완전한 육체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조용하게 마모되어 가는 과정으로만 생각했다. 전장에서 터져 나오는 폭력이나 파열된 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처럼 다른 종류의 죽음이 존재하는 까닭, 그리고 그 차이가 지니는 의미가 궁금했다. - P57

그는 여름에 고전 작품과 중세시대의 라틴어 시를 읽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죽음을 다룬 시들을 많이 읽었다. 로마의 서정시인들이 죽음을 삶의 현실로 편안하고 우아하게 받아들인 것에 다시 의아함을 느꼈다. 그들은 무(無)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살면서 즐겼던 풍요로움에 바치는 공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반면 기독교 시대에 라틴 전통에 따라 시를 쓰던 후세의 시인들 중 일부의 작품에는 거의 감춰지지 않은 증오, 쓰라림, 공포가 드러나 있는 것이 신기했다. 그들은 비록 모호한 약속이기는 하나 풍요롭고 황한 영생의 약속으로 그런 감정이 드러난 것을 보면, 마치 죽음과 영생의 약속이 삶을 망가뜨리는 못된 장난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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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서 내가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어처구니없는 걸 요구해서 상대를 끝내 시험에 들게 해 그걸 얻어내고 말겠다는, 결국 이겨먹고 말겠다는 그 악착한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선물을 헌신짝 버리듯 쉽게 잊고 그 선물을 준 사람마저 이겨먹었으니까, 먹어버리듯 이겼으니까 까맣게 잊고 마는 그 잔혹한 무심함은. - P232

여자를 둘러싼 찬란한 햇빛이 공중에 은빛 거미줄처럼 반짝인다. 하지만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잿빛 음영이 드리우면 빛나던 베일은 수의처럼 뻣뻣해진다. 생명의 어두운 결정체들이 점점이 박히고 누런 고치들이 매달려 흔들리는 검은 그물은 그녀 자신이 내뿜었지만 이미 그녀 자신을 가두는 거대한 망이 된다. 이윽고 그녀 스스로 고치가 되고 캄캄한 밤이 그녀를 덮는다. - P237

나는 여자의 말투를 흉내낸 게 아니라 내 속에 오랫동안 고여 있던 가래 같은 말을 내뱉은 것이다. 학대의 사슬 속에는 죽여버 릴까와 죽어버릴까밖에 없다. 학대당한 자가 더 약한 존재에게 학대를 갚는 그 사슬을 끊으려면 단지 모음 하나만 바꾸면 된다. 비록 그것이 생사를 가르는 모음이라 해도. - P238

나는 한참 눈을 꾹 누르고 있었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사람은 나와 춤추면서 넌 거미가 아니라고, 너는 지금 스스로에게 덫을 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작고 딱딱한 결정체로 만족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더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할 수 있다고, 이 그물에서 도망치라고 말해주었을까.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그 뜻을 알아채고 울었을까. - P241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게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 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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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시간보다 소미는 거기서 실개천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던 그 시간이 좋았다. 그때 우리는 젊었으며······ 두렵고 또 두려웠지. 현수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가끔 그 말이 떨쳐지지 않는 주문처럼 소미의 머릿속을 맴돈다. 그때 우리는 젊었으며······ 현수가 말한 그때는 그때가 아니었지만, 자신들이 다시 만났던 그때가 그래도 자신들이 마지막으로 젊었던 시절이었다는 것을 이제 소미는 안다. 그래서 여전히 두렵고 또 두려웠다는 것을. 그래서 그렇게 많이 웃고 죽자고 담배를 피워대고 겁없이 땅을 사고 했다는 것을. - P143

혜진이 무턱대고 들이받으려고 하거나 고집을 부려 대화 시간이 길어지면 혜영은 자기도 모르게 밀랍 가면 속에서 눈만 자주 깜빡거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럴 때면 혜진은 놓치지 않고 또 깜빡이 켜졌다, 했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혜영은 가슴속에 서서히 번지는 미지근한 불쾌감을 억눌렀다. - P150

요즘 들어 혜진이 급격히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느꼈지만 혜영은 절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자신만이 혜진과 세상을 이어줄 유일한 밧줄인 걸 아니까. 그런데도 쉽사리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육신······ 육신······ 그 말이 자꾸 입안을 맴돌았고, 니 육신······ 내 육신······ 하면 왜 더 심한 욕 같은가······ 그런 생각만 들었다. - P151

어떤 말은, 특정 음식이 인체에 계속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듯, 정신에 그렇게 반복적인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오익은 생각했다. 말의 독성은 음식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음식은 기피할 의지만 있다면 그럴 수 있지만,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킨 말은 아무리 기피하려 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기피하려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점점 더 그 말에 사로잡혀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된다. 원채는 다 갚기 전에는 절대 안 없어진다고, 죽어도 안 끝나고 죽고 또 죽어서도 갚아야 하는 빚이 원채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오익은 그게 바로 사는 일 같다고 생각했다. 기피 의지와 기피 불가능성이 정비례하는, 그런 원채 같은 무서운 말과 일들이 원채처럼 쌓여가는. - P172

지금은 숙이가 전생의 원한을 못 풀고 마음을 굳게 닫아걸었지만 우리가 진심으로 정을 주고 위해주면 언젠가는 마음을 열 거다. 명채는 명으로 갚고 정채는 정으로 갚아야 한단다. 그러니 우리가 날이면 날마다 숙이에게 정을 듬뿍 주자, 익아.
정을 무슨 수로 줘요? 전화도 안 받는다면서요?
마음으로 주는 거지. 진심을 다해 정을 주면, 정은 다 통하게 돼 있다.
오익은 어머니의 정 타령을 들으며 풍미정 방여사가 입에 달고 사는 정 나눔이란 말이 떠올랐다. 참으로 지겨운 말들이었다. - P187

기름냄새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선배들을 처음 만났을 때의 묵직한 기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차라리 상가 사람들이 그리웠다. 얼른 이 자리를 끝내고 상가 사무실로 돌아가 철호와 술이나 한잔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소리가 들려왔다.
새 세 마리······
오익은 흠칫 놀라 주위를 살폈다. […] 아무도 새 세 마리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오익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신의 귀에 입을 대고 숨결마저 끼얹는 목소리로 그 말을 속삭인 듯한 느낌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실감이었다. 새 세 마리······ 오익은 음소거하듯 가스 버너의 손잡이를 돌려 불을 꺼버렸다. - P193

이번에도 어머니는 다짜고짜 명자네 집 노인네가 귀가 먹어서 도대체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불평을 늘어놓았고, 세상에 벗삼을 사람이 없다고도 한탄했다. 그러다 갑자기 아니 쟤는 왜 비를 맞고 댕기니, 우산도 있는 놈이, 했다. 예전 같으면 이건 또 누구 얘긴가 했겠지만 이제 오익은 어머니가 어디 나와 앉아 우산을 든 채 비를 맞고 걸어가는 놈을 보고 있으려니 짐작했다. 그가 자정쯤 카페에 앉아 유리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어느 순간 그들과의 거리감이 상실되는 듯한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히듯 어머니 또한 그렇게 어딘가를 내다보며 저 녀석은 왜, 저 양반은 왜,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라고. 오익은 차분히 기다렸다. 오늘 어머니는 오숙에 관해 또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 - P197

오익은 어머니가 오숙의 말을 빌려 자신에게 막 해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실제로 그는 대학원 등록금을 빌리러 아버지의 재혼식 에 간 적이 있었다. 의리를 저버린 빚은 의채인가, 오익은 생각했다. 때로 어머니가 오숙의 입을 빌려 하는 말 중에는 그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모호한 기억과 말의 수렁에 잠긴 채로 그는 어머니의 말을 들었고, 그럴 때면 어머니가 자신을 아들이 아니라 원수로 여기는 건 아닌가, 심지어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로 여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198

자신이 알아챘다면 간과했겠는가. 마찬가지로 오익은 오숙이 얼마만 한 분노가 있었기에 자신을 ‘너‘라고 부르며 의절을 통보하는 문자를 보냈는지 알지 못했다.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까운 이에게 그런 분노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을 몰랐다. 알았다면 그렇게 했겠는가. 무지는 가장 공격받기 쉬운 대상이지만, 무지한 자는 공격 앞에서 두려워 떨 뿐 무지하여 자기 죄를 알지 못하므로 제대로 변명조차 할 수 없다. - P199

차라리 자신이 딸이었다면, 모든 걸 희생하고 차별받고 살아온 그런 존재였다면 오숙처럼 무섭게 돌변할 기회라도 있었으련만, 그는 한없이 억울했고 뭔지 모를 어떤 감정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만 그런 게 아니라 자신도 어머니를 닮아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다고, 자신이 오숙처럼 되기를 바라느냐고, 앞으로 자기가 다 포기하고 희생하고 살면 되겠느냐고, 어머니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 P199

오래전 기억 속의 자신은 원래 그렇게 생각되는 법인지 모른다. 하지만 원래 그렇더라도 놀라운 건 놀라운 것이다. 내가 손쓸 수 없는 까마득한 시공에서 기이할 정도로 새파랗게 젋은 내가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원한 적 없는 방식으로, 원하기는커녕 가장 두려워해 마지않는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부인할 수도 없지만 믿을 수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런 게 놀랍지 않다면 무엇이 놀라울까. 시간이 내 삶에서 나를 이토록 타인처럼, 무력한 관객처럼 만든다는 게. - P204

나는 곧 잊었다. 잊으려고 했고 그러면 잊히는 듯했다. 아무 일도 아니다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니게 되는 듯했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듯 어제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내 손에 쥔 확실한 패는 오늘밖에 없고 그 하루를 땔감 삼아 시간을 활활 태워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 P211

그건 무엇이었을까. 내 속에서 예기치 않은 순간에 발사된 것은.
지금의 내 생각에 그건 아마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어두운 정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물네 살의 삶이 품을 수밖에 없던 경쾌한 반짝임 사이에서 빚어진 어떤 비틀림 같은 것, 그 와중에 발사되는 우스꽝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어지간한 고통에는 어리광이 없는 대신 소소한 통증에는 뒤집힌 풍뎅이처럼 격렬하게 바르작거렸다. 턱없이 무거운 머리를 가느다란 목으로 지탱하는 듯한 그런 기형적인 삶의 고갯짓이 자아내는 경련적인 유머가 때때로 내 삶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사된 건 아니었을까. - P218

나는 그의 눈빛, 그의 경청에서 그가 나를 흥미진진하게 읽고 해석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서서히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한편으로는 혹시 그가 내 내부에서 치명적인 진실 들을 캐낼까 두려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내게서 아무것도 캐내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 둘은 아마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 P219

누구나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최소한 받아들일 만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그 처참한 비열함이라든가 차디찬 무심함을 어느 정도 가공하기 마련인데, 나 또한 그렇게 했다. […] 하지만 어느 순간 번쩍 몇 가지 일들이 떠오르면서, 그것들이 뜻밖의 별자리를 만들면서 내 정신은 깊은 어둠과 무지에서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깨어났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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