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까지 놀란 표정 하지 말게! 우리 안에 있는 악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면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어. 그리고 헤리버트 형제께서 로버트 부수도원장의 영혼에 어느 정도 은혜 또한 베푸셨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되네!" - P322

"알을 까기도 전에 병아리를 세어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점을 알려주셨잖나."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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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단순한 행위가 심지어 이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관계에서마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얼마나 기묘한가. 마치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조금 더 빛이 비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리라. - P300

"정말 너무 멋졌어요." 마크 수사는 허브밭 작업장으로 돌아와 신나게 일을 시작하며 말했다. 그런데 좀 부끄럽기도 하네요. 다른 사람이 골탕 먹는 걸 보면서 통쾌해하다니, 아무래도 제 마음속에 악한 구석이 있는 거겠죠."
"저런, 저런." 캐드펠은 바삐 바랑을 열어 단지며 병들을 꺼내면서 무심코 대꾸했다. "자넨 너무 일찍부터 성자가 되려고 하는구먼. 아직 스스로를 즐길 시간이 많이 남았네. 때로는 조금 악해지는 것도 필요하지. 그리고 정말 멋진 일이었던 건 사실 아닌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괜히 위선 부리지 말게."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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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수사 또한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들을 따라갔다. 그는 낙담과 불안에 빠져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죄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체념이라는 죄. 자기 자신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진실과 정의와 공정성에 대한 체념, 불행한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절망 어린 체념의 죄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P204

겨울철 낮은 예순을 넘긴 인생처럼 느릿느릿 시작되었다가 빨리 끝나버렸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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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변하기 쉬운 존재이며, 늘 오류를 범하고, 그때그때 적응해야 하는 동물이 아닌가. - P11

"사람이란 나이를 먹을수록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법이니까요."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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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동안 계속 눈이 내렸다. 날씨는 내가 바랐던 대로 바람이 잔잔하고 고요했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나 벼락이 친 뒤 내리는 조용한 여름비보다 평화로운 것은 없다. 칙칙한 하늘의 한쪽이 이따금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숲은 부드럽게 반짝이는 눈의 베일 너머로 가라앉았다. 태양은 눈 덮인 이 세상 어딘가에 떠 있겠지만 우리에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까마귀들은 몇 시간씩 가문비나무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회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하늘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까마귀의 침침한 실루엣에는 내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었다. 낯설지만, 그러면서도 친밀한 삶, 검은 깃털 속을 흐르는 붉은 피, 까마귀들은 나에게 금욕적 인내의 상징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다림,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인내의 상징이었다. 까마귀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내가 만약 공터에 쓰러져 죽는다면 까마귀들은 나의 시체를 뜯어 먹을 것이다. 숲에서 시체를 치워버리는 게 그들의 임무다. - P332

사랑에 빠지는 일이 동물들에게 행복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동물들은 그 순간이 지나가버리는 것임을 알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매 순간이 영원이다. […] 그 어디에도 행복의 흔적은 없다. 그 뒤에 남는 것은 허탈뿐이다. 윤기가 사라진 털과 죽음과도 같은 잠뿐이다. - P336

나는 내 겉모습에 신경을 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무슨 옷을 입든 동물들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동물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내 외양 때문이 아니었다. 어쩌면 동물들에겐 미적 감각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동물에게 아름답게 보이리라는 생각도 할 수 없다. - P359

나의 냉정함이 놀라웠다. 무엇인가 달라져 있었다. 나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불안해졌지만 내가 불안에서 벗어날 길은 불안의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 그것을 넘어서는 방법뿐이다. 해묵은 슬픔을 억지로 삶 속에 끼워놓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 과거의 삶은 나로 하여금 속임수를 쓰도록 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군가를 속일 만한 어떤 이유나 핑계가 없다. 내 주변에는 이제 사람들이 없다. - P368

그 여름, 나는 룩스가 개이고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니,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인간이고 룩스가 개라는 사실이 우리들의 차이를 뜻하지는 않았다. 룩스도 변했다. 내가 거의 모든 시간을 룩스와 함께 보내고부터 룩스는 침착해졌다. 5분만 자리를 비워도 그사이 내가 슬그머니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걱정 따위는 이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돌이켜보면 개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혼자 남겨지는 일이었다. 나도 많은 것을 배웠다. 룩스의 움직임이나 소리를 거의 다 알아듣게 되었다. 우리 둘 사이에 마침내 무언의 공감대가 성립된 것이었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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