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토니는 호숫가에 우두커니 서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호수는 기름처럼 묵직했다. 간간이 잉어나 곤들매기가 지나갈 때마다 벨벳 같던 수면이 우그러졌다. 소년은 코를 킁킁거렸다. 공기에서 열을 잔뜩 품은 흙과 진창 냄새가 났다. 7월이 이미 떡 벌어진 소년의 등짝에 주근깨를 뿌려 놓았다. 소년이 걸친 건 낡은 축구 유니폼 반바지와 짝퉁 레이밴 선글라스가 전부였다. 날씨가 까무러칠 듯 무더웠지만 그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 P13

사촌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그의 피부 아래로는 근육이 울퉁불퉁 불거져 나와 정확히 따라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가끔씩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사촌의 접힌 겨드랑이 틈에 앉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말이 귀찮은 등에를 쫓듯 피부가 움찔움찔했다. 앙토니는 군살 하나 없이 날씬하고 근육도 탄탄한 사촌의 몸이 부러워 저녁마다 방에서 윗몸 일으키기며 팔 굽혀 펴기를 해 봤지만 아무리 해도 사촌 같은 근육은 생기지 않았다. 앙토니의 몸으로 말하자면 여전히 두툼하고 둔탁한 스테이크 덩어리 같았다. 언젠가 학교에서 축구공을 펑크 내는 바람에 자습 감독 보조 교사한테 한 소리 들은 게 억울해서 학교 수업이 다 끝난 후 잠깐 보자고 했지만 사촌의 덩치를 익히 아는 교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촌이 쓰고 다니는 레이밴 선글라스는 짝퉁이 아니었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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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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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지독히도 시끄러운 고독을 원했던 한탸 씨의 우여곡절 인생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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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거의 다 왔어." 펄롱이 기운을 돋웠다. "조금만 가면 집이야."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 P119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 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조차도. - P119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 P120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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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는 태연하게 펄롱에게 크리스마스카드를 주었다.
"오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안 부치고 가지고 있었어요. 엄마가 그러는데 아저씨는 신사래요."
좋은 사람들이 있지, 펄롱은 차를 몰고 시내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러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 - P102

"피곤하겠네." 계산하러 온 펄롱에게 미시즈 케호가 말했다. "날마다 하루 종일 일하니."
"아주머니만큼 하겠어요."
"왕관을 쓴 자는 머리가 무거운 법이지." 미시즈 케호가 웃으며 말했다. - P104

내 말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해, 빌. 그런데 내가 듣기로 저기 수녀원 그 양반하고 충돌이 있었다며?"
잔돈을 받아 든 펄롱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시선은 걸레받이 쪽으로 떨어져 걸레받이를 따라 방구석까지 갔다.
"충돌이라고 할 건 아닌데, 네, 아침에 거기 잠깐 있었어요."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거기 일에 관해 말할 때는 조심하는 편이 좋다는 거 알지? 적을 가까이 두라고들 하지. 사나운 개를 곁에 두면 순한 개가 물지 않는다고. 잘 알겠지만." - P105

"말했듯이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 수녀들이 안 껴 있는 데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해."
펄롱이 뒤로 물러서며 미시즈 케호를 마주 보았다. "그 사람들이 갖는 힘은 딱 우리가 주는 만큼 아닌가요?"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냐." 미시즈 케호는 말을 멈추고는 극도로 현실적인 여자가 가끔 남자들을 볼 때 짓는 표정, 철없는 어린애 보듯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일린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사실 꽤 많았다.
"내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미시즈 케호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 정말 열심히 살아서, 나만큼이나 열심히 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딸들도 잘 키우고 있고. 알겠지만 그곳하고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는 얇은 담장 하나뿐이라고." - P106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 P111

추위와 피로가 온몸을 덮쳐왔다. 조금씩이지만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린 눈이 온 세상 위로 내려앉았다. 펄롱은 왜 편안하고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아일린은 벌써 자정미사 준비를 하면서 펄롱이 어디 있을까 생각하고 있을 거였다. 그러나 펄롱의 하루는 지금 무언가 다른 것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 P112

가는 길에 오래전부터 알고 거래해 온 사람들을 마주쳤다. 대부분 반갑게 걸음을 멈추고 말을 걸었으나, 여자아이의 새카만 맨발을 보고 그 아이가 펄롱의 딸이 아니란 걸 알아차리자 태도가 바뀌었다. 몇몇은 멀찍이 돌아가거나 어색하게 혹은 예의 바르게 크리스마스 인사를 하고는 가 버렸다. 목줄을 길게 묶어 테리어를 산책시키던 나이 지긋한 부인은 대놓고 따졌다. 얘가 누구냐고, 세탁소 계집애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다. 한번은 조그만 남자아이가 세라의 발을 보고 웃으며 더럽다고 했고 아이의 아버지가 거칠게 손을 잡아당기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전에 본 적 없는 낡은 옷을 입은 미스 케니가 걸음을 멈추더니 술 냄새를 풍기면서 세라를 당연히 펄롱의 딸이라고 생각했는지 눈이 오는데 왜 애를 신발도 없이 데리고 나왔냐고 묻고는 가버렸다. 길에서 만난 사람 누구도 세라에게 말을 걸거나 펄롱에게 어디로 데려가냐고 묻지 않았다. 펄롱은 말하거나 설명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최대한 상황을 넘기며 계속 갈 길을 갔다. 가슴속에 설렘과 함께, 아직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맞닥뜨릴 것이 분명한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솟았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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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학 때 생리가 시작되었다. 메르세데스가 먼저였고, 그다음이 나였다. 엄마가 없었기 때문에 생리대 사용법을 가르쳐준 건 나르시사였다. 우리가 오리처럼 뒤뚱뒤뚱 걷자 크게 웃은 것도 나르시사였다. 나르시사는 또한 우리에게 그 피가 의미하는 것은 남자의 도움을 받으면 이제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어처구니없었다. 아기를 만드는 것과 같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을 어제는 할 수 없었는데 오늘은 할 수 있다니. 거짓말하지 말라고, 우리가 말했다. 그랬더니 나르시사는 우리 둘의 팔을 움켜쥐었다. […] 나르시사는 이제 진짜로 죽은 것들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더 조심해야 한다고, 이제 진짜로 죽은 것들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더 무서워해야 한다고, 우리를 계속 붙들고 말했다.
"이제 여자가 된 거야." 나르시사가 말했다. "인생은 장난이 아니야." - P33

우리에겐 나르시사의 포옹이, 양파와 고수 냄새가 나는 나르시사의 손이, 죽은 것들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더 무서워해야 한다는 나르시사의 주술 같은 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런데 몇 센티미터를 남겨두고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것이 나르시사의 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공포에 질려 우리는 멈춰 섰다.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차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나르시사가 아니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 실루엣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어서 불쾌감과 공포가 우리를 덮쳤다. - P34

같은 집이기는 해도 그리셀다 아주머니의 집과 웬디 마르티요의 집은 무척이나 달라 보였다. 아마도 비좁은 거실에 놓인 커다랗고 칙칙한 색의 가구들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언제나 닫혀 있었던 두꺼운 커튼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셀다 아주머니네 집은 낡은 집의 냄새, 오래 묵은 냄새, 먼지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가 않았다. 아주머니의 케이크 파일을 펼치기만 하면 전혀 다른 세상이 나타났으니까. 알록달록한 케이크들. 디즈니 캐릭터 케이크, 설탕으로 만든 녹색 잔디가 깔려 있고 캐러멜로 만든 골대와 비스킷으로 만든 축구 선수들이 놓인 축구 경기장 케이크, 초콜릿 동전이 가득 담긴 보물 상자 케이크. 하트, 곰, 아기 신발, 바비 인형, 스파이더맨 등 정말이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케이크들. - P40

경찰 몇 명이 흰 천으로 감싼 아주머니를 들것에 싣고 나왔는데, 흰 천은 점점 피로 물들었다. 마치 얼룩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 P45

경찰차 불빛이 빙글빙글 돌았다. 모든 게 붉은빛이었다. 멀리서는 누군가 폭죽을 터뜨리는 소리, 불꽃놀이 소리가 들려왔다. 얼룩은 점점 커지고, 커지고, 커지더니 갑자기 흰 천 밖으로 아주머니 손이 툭 떨어졌다. 딱 손 하나만 삐져나온 것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잘 있어, 안녕, 거기 있으렴." - P45

디아나, 미국 말로 다이애나는 언제나 쉴 틈도 없이 내게 말을 하고 또 말을 한다.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아니면 제3의 단어를 만들어내면서. 정말이지 너무나도 재미있어서 나는 큰 소리로 웃게 되곤 한다. 그 아이와 있으면 나는 마치 집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웃는다. 여느 아빠들같이 우리 아빠도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는 웃는다, 마치 내가 아닌 것처럼, 행복하게 잠이 드는 소녀인 것처럼. 나는 웃는다, 험한 일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 P48

전형적인 1970년대 미국 사진들이 발하고 있는 빛 속에 어떤 슬픔이 배어 있다. 어쩌면 너무 지나치게 파스텔 톤을 띠고 있어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먼 곳이어서일 수도, 어쩌면 사진에는 드러나지 않는 모든 것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내 것이 아닌 슬픔을 느낀다. 나도 슬픔이 있지만 저 슬픔은 또 다르다. 저런 삶, 해바라기 분장을 한 아이들, 검은 강아지 옆의 예쁜 아기, 겉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 저 모든 것, 하지만 그렇게 다 좋을 수는 없는 그런 것. 다 좋을 수는 없다. 금발 머리, 운동선수로서의 다부진 몸, 발그레한 뺨, 빛나는 눈동자에도 불구하고 어떤 건 좋지 않을 것이다. - P53

그는 베트남에 갔어.
디아나와 미치 둘이서 동시에 같은 말을 뱉었는데 마치 한 사람이 남자 목소리와 여자 목소리로 말하는 것 같다.
그는 베트남에 갔어.
그는 월남에 갔어.
월남.
다시 그늘이 드리워진다. 빛이 사라지며 숨이 막히고, 성난 바다와 같은 정적이 우리를 감싼다. 우리가 좋아하는 도어스의 노래가 흐르고 우리 셋은 무릎을 감싸안고 레코드플레이어를 바라본다. 노래를 조금 따라 부르고 디아나가 해석해준다. 당신이 낯선 사람일 때 사람들은 이상해요, 당신이 혼자일 때 사람들의 얼굴은 추해 보여요.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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