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학 때 생리가 시작되었다. 메르세데스가 먼저였고, 그다음이 나였다. 엄마가 없었기 때문에 생리대 사용법을 가르쳐준 건 나르시사였다. 우리가 오리처럼 뒤뚱뒤뚱 걷자 크게 웃은 것도 나르시사였다. 나르시사는 또한 우리에게 그 피가 의미하는 것은 남자의 도움을 받으면 이제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어처구니없었다. 아기를 만드는 것과 같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을 어제는 할 수 없었는데 오늘은 할 수 있다니. 거짓말하지 말라고, 우리가 말했다. 그랬더니 나르시사는 우리 둘의 팔을 움켜쥐었다. […] 나르시사는 이제 진짜로 죽은 것들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더 조심해야 한다고, 이제 진짜로 죽은 것들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더 무서워해야 한다고, 우리를 계속 붙들고 말했다.
"이제 여자가 된 거야." 나르시사가 말했다. "인생은 장난이 아니야." - P33

우리에겐 나르시사의 포옹이, 양파와 고수 냄새가 나는 나르시사의 손이, 죽은 것들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더 무서워해야 한다는 나르시사의 주술 같은 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런데 몇 센티미터를 남겨두고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것이 나르시사의 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공포에 질려 우리는 멈춰 섰다.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차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나르시사가 아니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 실루엣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어서 불쾌감과 공포가 우리를 덮쳤다. - P34

같은 집이기는 해도 그리셀다 아주머니의 집과 웬디 마르티요의 집은 무척이나 달라 보였다. 아마도 비좁은 거실에 놓인 커다랗고 칙칙한 색의 가구들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언제나 닫혀 있었던 두꺼운 커튼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셀다 아주머니네 집은 낡은 집의 냄새, 오래 묵은 냄새, 먼지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가 않았다. 아주머니의 케이크 파일을 펼치기만 하면 전혀 다른 세상이 나타났으니까. 알록달록한 케이크들. 디즈니 캐릭터 케이크, 설탕으로 만든 녹색 잔디가 깔려 있고 캐러멜로 만든 골대와 비스킷으로 만든 축구 선수들이 놓인 축구 경기장 케이크, 초콜릿 동전이 가득 담긴 보물 상자 케이크. 하트, 곰, 아기 신발, 바비 인형, 스파이더맨 등 정말이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케이크들. - P40

경찰 몇 명이 흰 천으로 감싼 아주머니를 들것에 싣고 나왔는데, 흰 천은 점점 피로 물들었다. 마치 얼룩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 P45

경찰차 불빛이 빙글빙글 돌았다. 모든 게 붉은빛이었다. 멀리서는 누군가 폭죽을 터뜨리는 소리, 불꽃놀이 소리가 들려왔다. 얼룩은 점점 커지고, 커지고, 커지더니 갑자기 흰 천 밖으로 아주머니 손이 툭 떨어졌다. 딱 손 하나만 삐져나온 것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잘 있어, 안녕, 거기 있으렴." - P45

디아나, 미국 말로 다이애나는 언제나 쉴 틈도 없이 내게 말을 하고 또 말을 한다.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아니면 제3의 단어를 만들어내면서. 정말이지 너무나도 재미있어서 나는 큰 소리로 웃게 되곤 한다. 그 아이와 있으면 나는 마치 집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웃는다. 여느 아빠들같이 우리 아빠도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는 웃는다, 마치 내가 아닌 것처럼, 행복하게 잠이 드는 소녀인 것처럼. 나는 웃는다, 험한 일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 P48

전형적인 1970년대 미국 사진들이 발하고 있는 빛 속에 어떤 슬픔이 배어 있다. 어쩌면 너무 지나치게 파스텔 톤을 띠고 있어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먼 곳이어서일 수도, 어쩌면 사진에는 드러나지 않는 모든 것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내 것이 아닌 슬픔을 느낀다. 나도 슬픔이 있지만 저 슬픔은 또 다르다. 저런 삶, 해바라기 분장을 한 아이들, 검은 강아지 옆의 예쁜 아기, 겉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 저 모든 것, 하지만 그렇게 다 좋을 수는 없는 그런 것. 다 좋을 수는 없다. 금발 머리, 운동선수로서의 다부진 몸, 발그레한 뺨, 빛나는 눈동자에도 불구하고 어떤 건 좋지 않을 것이다. - P53

그는 베트남에 갔어.
디아나와 미치 둘이서 동시에 같은 말을 뱉었는데 마치 한 사람이 남자 목소리와 여자 목소리로 말하는 것 같다.
그는 베트남에 갔어.
그는 월남에 갔어.
월남.
다시 그늘이 드리워진다. 빛이 사라지며 숨이 막히고, 성난 바다와 같은 정적이 우리를 감싼다. 우리가 좋아하는 도어스의 노래가 흐르고 우리 셋은 무릎을 감싸안고 레코드플레이어를 바라본다. 노래를 조금 따라 부르고 디아나가 해석해준다. 당신이 낯선 사람일 때 사람들은 이상해요, 당신이 혼자일 때 사람들의 얼굴은 추해 보여요. - P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