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증을 느끼며 그는 머저리 같은 행동을 하는 상상을 했다. 위층으로 올라가 가죽 주머니를 꺼내 들고 광택을 낸 부엌 탁자 위에 던진 뒤, 뒤엉켜 있는 보석 전부를 그녀에게 주면서 제발 가져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것을 말이다. 이상하게도, 미친 듯이, 그는 이 침울하고 가혹한 여주인의 발아래 무릎 꿇고 싶었다. 그는 그녀에게 피든 목숨이든 보석이든, 무엇이든 바치고 싶었다. 그녀의 시선을 다시 얻을 수만 있다면, 한 번만 더, 존경과 욕망이 뒤섞인 그 기묘한 표정을······ - P48

여자는 욕실로 사용하는 작은 방에 목욕 가운을 입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맨어깨를 드러낸, 치장 중인 여성 특유의 미묘하게 무장해제된 모습이었다. 게레가 그녀에게 달려들어 난폭한 군인처럼, 혹은 어설픈 소년처럼 그녀를 양팔에 가두고 마치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듯이 그를 향해 모습을 드러낸 믿을 수 없을 만큼 욕구를 자극하는 여자의 관능적인 둥근 어깨와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 순간, 거울 너머로 그녀가 그녀 자신에게 보내는 승리의 눈빛과 흥미가 담긴 미소를 그는 보지 못했다. - P52

게레는 네온사인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마치 첫 영성체를 위해 한껏 차려입은 웃자란 소년처럼 우스운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우스꽝스러웠다. 그런데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그런 식으로 웃은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사실 인생을 통틀어보아도, 심지어 군대에서도, 그 누구와도 그렇게 웃었던 기억이 없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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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다르
자넨 언제나 자기 본위로 생각하는군. 일어나는 일마다 자기와 관련 있다고 믿고 있어! 자네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야, 이 친구야! - P134

뒤다르
지금 당장은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어. 난, 이 사건을 확인하고 기록하는 중이야. 무언가 존재 한다면, 그건 반드시 설명할 수 있는 법이지. 자연 속의 진귀하고 이상하고 괴상망측한 것들, 그것들 이 하나의 유희에 불과한지 어떤지는 아무도 모르거든...... - P135

뒤다르
자신이 심판받기 싫으면, 남도 심판하려 해선 안 돼. 사사건건 걱정하고 참견하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나? - P141

뒤다르
악, 악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가 무엇이 악이고 선인지 알기나 하나? 그건 분명 편견에 불과해. 특히 자네는 자네 문제로 두려워하고 있어. 그게 바로 진실이지. 그러나 자네는 결코 코뿔소로 변하지 않을 거야. 그런 자질을 가지고 있지 않아!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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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고 게레와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광재 더미는 저녁이면 지는 해와 게레 사이에서 흙바닥부터 담벼락까지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려, 그를 속박했다. 매일 저녁 그림자는 벽을 넘어 그가 내다보는 창문에까지 이를 것 같았고, 게레에게는 그런 착시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퇴근하려면 그것과 다른 두 개의 광재 더미 앞을 지나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레는 쓸쓸하기는 해도 그림자를 지나지 않아도 되는 몇 달간의 겨울을 좋아했다. - P9

낮 동안엔 비가 내렸다. 젖은 벽돌과 철골이 햇빛에 반짝이는 거리를 그는 빠른 걸음으로, 평소 자신이 ‘유능한 사람‘의 걸음걸이라고 생각해온 속도로 걸었다. 사실 빨리 걷는다는 것은 그에게서 어떤 동작을 취할 것인지, 손을 어디에다 둘 것인지 선택할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행동이었다. 빨리 걷기란 천천히 걷는 사람이 겪는 끔찍스러운 자유를 제거하는 것이자, 그에게서 그 자신을, 사춘기 이후부터 줄곧 자기 것이 아닌 것만 같은 거대한 몸뚱이라는 짐을 덜어주는 일이었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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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병을 만들어 내고 있어.

베랑제
그건 선의에서 그런 거지. 환자를 돌보는 기쁨 때문에 말이야.


그들은 질병을 만들어 내고 있어, 새로운 병을 만들어 낸다고.

베랑제
그래, 어쩌면 새로운 병을 만들어 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병을 고치는 것도 의사들 아닌가.


난, 오직 수의사들만 믿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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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베냐민은 「나의서재 공개」라는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낡은 세계를 새로이 하는 것. 이것은 새로운 사물을 얻는 일에 자극받은 수집가가 가장 깊이 느끼는 욕망이다." - P45

오늘날의 독자에게 바벨의 도서관은 가상세계, 즉 검색 알고리즘에 따라 나타나는엄청난 정보와 텍스트의 네트워크에서 우리를 미로 속 환영처럼 헤매게 만드는 거만한 인터넷에 대한 예언적 알레고리이다. - P49

우리가 웹이라고 부르는 전자 네트워크는 도서관의 기능을 복제한 것이다. 인터넷이 만들어진 근원에는 세계적인 대화를 가능하게 하려는 꿈이 담겨 있었다. - P49

그는 도서관의 구조를 모방해 모든 자료에 주소를 부여하고 다른 컴퓨터로부터의 접근을 허용했다. URL은 도서관의 등록번호처럼 작동한다. 이후 버너스리는 우리가 http로 알고 있는 하이퍼텍스트의 이동 프로토콜을 고안했다. http는 우리가 도서관에서 원하는 책을 찾으려고 사서에게 써내는 요청서에 해당한다. 도서관이 광대하게 증강되어 방사된 것이 바로 인터넷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들어가는 경험은 내가 처음으로 인터넷을 경험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놀라움과 방대한 공간이 주는 아찔함.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 내려서 서둘러 책의저장고로 발걸음을 옮기는 여행자, 도서관 현관에서부터 어렴풋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풍요로움에 아찔함을 느끼는 여행자가 되는 상상을 해본다. 이 시대 사람이라면 누구든 같은 생각일 것이다. 이토록 많은 정보는, 이토록 많은 지식은, 공포와 삶의 즐거움을 경험하게 해주는이토록 많은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 P49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엄청난 진보였다. 수세기에 걸쳐 돌과 흙과 나무와 금속을 이용해 쓰여오던 언어가 마침내 제대로 된 재료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책은 언어가 수생식물의 줄기에 자리를 틀면서 탄생했다. 무겁고 경직된 과거의 재료에 비해 책은 처음부터 가볍고 유연하여 여행과 모험에도 적합했다. 펜과 잉크로 쓰인긴 텍스트를 품은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장차 건설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도착할 책의 단면이었다. - P53

모두가 알렉산드로스를 그리워했으며 그의 환영을 마음에 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세계적인 제국을 파괴하고, 가까운 친인척을 하나씩 제거하고, 그들을 뭉치게 했던 충성심을 배신하기도 했다. 이런 종류의 사랑에 관하여 오스카 와일드는 「레딩 감옥의 노래」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한 것을 죽인다" - P54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가 알렉산드로스의 묘에서경의를 표하고 있을 때 그에게 프톨레마이오스의 묘도 보고 싶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아우구스투스가 "나는 죽은 자를 보러 온 게아니라 왕을 보러 왔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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