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높고 게레와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광재 더미는 저녁이면 지는 해와 게레 사이에서 흙바닥부터 담벼락까지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려, 그를 속박했다. 매일 저녁 그림자는 벽을 넘어 그가 내다보는 창문에까지 이를 것 같았고, 게레에게는 그런 착시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퇴근하려면 그것과 다른 두 개의 광재 더미 앞을 지나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레는 쓸쓸하기는 해도 그림자를 지나지 않아도 되는 몇 달간의 겨울을 좋아했다. - P9

낮 동안엔 비가 내렸다. 젖은 벽돌과 철골이 햇빛에 반짝이는 거리를 그는 빠른 걸음으로, 평소 자신이 ‘유능한 사람‘의 걸음걸이라고 생각해온 속도로 걸었다. 사실 빨리 걷는다는 것은 그에게서 어떤 동작을 취할 것인지, 손을 어디에다 둘 것인지 선택할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행동이었다. 빨리 걷기란 천천히 걷는 사람이 겪는 끔찍스러운 자유를 제거하는 것이자, 그에게서 그 자신을, 사춘기 이후부터 줄곧 자기 것이 아닌 것만 같은 거대한 몸뚱이라는 짐을 덜어주는 일이었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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