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등급제는 장애의 경중에 등급을 매겨 그에 맞는 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취지의 제도였지만, 실상은 예산을 아끼려는 정부가 서비스를 제한하기 위해 악용하는 도구였다. 칼자루를 쥔 정부가 함부로 휘두르는 칼날에 수많은 장애인들의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있었다. 시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전단지에는 몸통이 다 잘린 채로 전시된 ‘한우 1등급‘ 그림과 함께 ‘장애인은 소, 돼지가 아닙니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 P13
도살장 앞에서 만난 동물 권리 운동가들은 이 당연한 현실이 전 혀 당연한 게 아니라고,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태도는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그 말은 몹시 충격적이면서 동시에 익숙했다. 아니, 익숙했기 때문에 충격적이었다. ‘동물‘의 자리에 ‘장애인‘을 놓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무수히 반복해온 말이었기 때문이다. - P14
인간들이 ‘품종 개량‘이라고 부르는 이것이 20세기 전반의 야만을 대표하는 우생학의 한 형태라는 것은 내가 살면서 알게 된 가장 무시무시한 진실이다. 장애인을 공동체의 짐으로 간주하여 가스실로 몰아넣고 단종을 시행하던 그 과학이 여전히 건재한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산업이 되었고 그 위에서 ‘풍요로운‘ 문명과 인권이 꽃피었다. 어떤 인간도 ‘짐승처럼‘ 살게 하거나 죽게 해서는 안 된다며 떠나온 그 자리에 ‘짐승‘들을 남겨두었고, 그들에겐 역사상 유례없는 야만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현대의 동물들은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죽는다. 더욱 끔찍한 것은 거대한 학살이 아니라 거대한 출생이다.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그들이 끊임없이 태어난다. 이 불의와 폭력이 그들의 숫자만큼 태어난다. - P17
인간들이 동물의 언어와 행동을 무시했을 뿐 그들은 끊임없이 말하고 저항했음을 도살장과 동물원을 탈출한 동물들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 P18
우리 사회를 진보적으로 변화시키는 운동사회 역시 비장애중심주의의 뿌리가 깊어서, 권력에 맞서 투쟁하는 인간을 상상할 때 우리는 언제나 뛰어난 신체와 높은 정신력, 드높은 이상과 신념을 가진 비장애인을 떠올린다. - P19
나는 인권이 짓밟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장애인이나 부랑인 수용소의 피해생존자 같은 이들을 만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어떤 것을 기어이 말하게 하고 그것을 다시 글로 바꾸는 일이다. 삶이 부서진 사람들의 말은 갈가리 찢겨지고 조각나 있기 일쑤였다. 장애 때문이기도 하고 낮은 교육 수준이나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했다. 그 파편들을 모아 거기에 논리와 서사를 부여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게 내 역할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기록한 글을 보며 자주 공허함을 느꼈다. 현실의 그들은 ‘짐승처럼 울었는데 글속엔 ‘인간‘만 보일 때 그랬다. - P22
장애인은 다양한 방식으로 짐이나 짐승으로 제시되었다. 장애해방과 동물해방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그 모욕과 굴레를 벗기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그 자리에 동물들을 남겨두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장애인을 배제하는 사회를 향해 ‘아무도 남겨두지 말라‘고 외치면서 또 다른 편에선 동물들을 배제한다면 그것이 어떤 논리이든 다시 장애인을 배제하는 칼날이 되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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