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맞는 말일 것이다. 내게 사랑의 상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내게 남겨진 건 사랑의 상처가 아니다. 내게 새겨진 건 사람이 준 상처이며 기록된 건 사랑이 아니라 환멸의 언어들이다. 나는 누군가가 내 영혼의 자기장 깊숙이 들어오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랑 속에는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는 따스함, 열정, 몰입, 기쁨, 까닭 없이 터뜨리는 웃음소리 같은 것만 있는 건 아니다. 그 눈부심 속으로 들어가 보면 마치 빙산의 아랫부분처럼 거짓과 권태와 배신과 차가움과 환멸 같은 것들이 수면 아래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이다. 환멸조차 사랑의 일부분이란 걸 사람들은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리거나 한다. 나로서는 그 상처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그래서 다시 누군가와 진짜 사랑을 하고 그 이면의 온갖 것들과 새로이 대면하고서야 비명을 지르는 그런 기억상실증 환자 같은 짓은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왜 사람들은 그저 아는 사람, 세 번째 우려낸 차처럼 담백한 관계 같은 그 지점에서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 P106

내 능력 이상을 요구하는 그것들을 사 모으면서 내가 뭐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다. 처음 그 칵테일 드레스를 가졌을 때의 느낌, 일상의 남루함이 일순에 사라지는 마술의 순간, 다른 모든 것들이 헛되고 헛되이 여겨지는 지나친 눈부심. 다만 그 느낌들을 찾아 헤매왔던 것 같다. 그것들을 가지게 되면 내가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던 엄마의 삶을 되풀이하게 될 것 같은 끔찍한 예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고 회청색 수의 같은 옷만을 입은 채 일생을 보낸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지도 따위는 지워져 버릴 것 같았다. 시의 주변이 아니라, 세상의 주변이 아니라, 더듬는 언어가 아니라, 어쩐지 폐활량이 부족한 듯한 연약함 이 아니라, 미약한 전화기 속의 목소리로도 세상의 중심에 서 있음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그런 강인함을 획득하고 싶었을 뿐이다. - P119

그랬다. 오해가 있었을 뿐이다. 나는 다만 시에 대한 연민을 말했을 뿐인데 그는 연민과 함께 다른 어떤 것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오해에 대해서도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피와 땀과 찢어지는 가슴한 조각의 레슨비를 제 스스로 지불해 가며 깨달아야만 하는 것들이 있으니까. 어쨌든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은 그 이유를 모르는 게 낫다. 알게 되면 고칠 수도 없 는 제 지병의 흔적을 더듬으며 끝없이 자책하는 일만 남게 되므로. - P121

봄이었다. 봄이 온 지는 꽤 됐을 것이다. 회색 콘크리트 벽에 붙어서 핀 개나리꽃 덤불을 도심에서 스칠 때면 지나친 집중을 요구하는 노랑이 징그럽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산자락에 잇대어 서 있는 여기서는 아무래도 끝내 봄빛을 외면하긴 어렵다. 이른 봄꽃들이 피었다 진 자리엔 이파리들이 초록 애벌레들처럼 꼬물꼬물 기어 나와 메마른 가지를 뒤덮고 있었다. 목덜미에 감기는 바람이 섬모를 문질러 대는 거대한 환형동물처럼 느껴져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캠퍼스는 쳐다보기도 눈부신 연두와 붉고 흰 철쭉 으로 뒤덮여, 내 귀에만 들리지 않는 생명의 재잘거림으로 가득 찬 듯하다.
봄이 올 듯 올 듯하며 오지 않았던 지난겨울의 끝에 이 렇게 5월이 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던 밤이 있었다. 그 밤,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봄이 여기 이렇게 쉽게 와 있다. 딸은 끝내 기다리지 못하고 가 버렸는데. 차마 못 볼 것을 본 듯 나는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담배 한 대를 피우려다 주머니에서 도로 손을 뺐다. 고객 앞에서 니코틴 냄새를 풍기는 건 보험맨의 예의가 아니지. 연구소의 동향 창들엔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다. 실눈을 떠야 할 만큼 눈부시게 환한데 나는 여기가 어쩐지 밤 같다. 숲 그늘에서, 누군가 잿빛 잔돌을 한 움큼 집어 던진 듯 작은 새들이 재잘거리며 흩어졌다. 순간,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진저리가 났다. - P127

아이는 키가 줄어드는 대신 나날이 영악해져 갔다. 무섭도록 눈치가 빨랐다. 병실에 밝은 얼굴로 들어서면, 더 나빠졌대? 물어볼 만큼.
그 밤에, 어린이날은 광년(光年)의 거리처럼 아득한 곳에 있었다. 이토록 쉽게 그날이 올 줄은 몰랐다. 나는 그날 밤, 가장 중요한 질문은 끝내 하지 못하고 병실을 나오고 말았다.
너는, 고통스럽게라도 여기, 이곳에 더 머물고 싶니? - P131

돌이켜 보면 내 지난 생애에 그때처럼 씩씩한 목소리로 살았던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전화기 속에서 나는 모든 것이 잘되어 나가며 조금도 어렵지 않은 사람처럼 밝고 큰 목소리로 떠들어 댔다. 밤의 병실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도 명랑하고 가벼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어느 밤 복도 끝에서 휴대폰을 들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얼굴은 저게 아니야. 우울하게 처진 눈매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입을 가진 누군가가 어두운 창밖에서 어린새처럼 조잘대는 날 쳐다보고 있었다. - P137

협상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고통이란 내 몫이 아님을 시위해야 한다. 아빠 눈 속에 별이 있어, 조잘거리던 딸아이 앞에서 끝내 밝은 목소리를 잃지 않았던 그 밤처럼. - P141

사람은 모든 불행이 자신은 비껴갈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 자신은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그런 열등한 운명의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일간지 사회면에 실린 기사란 결코 나나 내 주위 사람에겐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결국은 확률의 문제일 뿐이라는 걸 모르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친 불행에 대해 고통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낀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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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의도적인 열정이 아니듯, 환멸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구나. - P78

나는 내 왼쪽 손목에 채워져 있는, 무언가를 조잘거리듯 사랑스럽게 반짝이는 것들이 테두리를 따라 빼곡하게 박혀 있는 시계의 타원형 자판을 내려다본다.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기능 이상의 것이 확실히 이 시계에는 존재하고 있다. 이 시계가 주는 느낌은 뭐랄까,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이룬 땀 냄새나는 부유함이 아니라 자생하는 귀족만이 소유할 수 있는 절대적인 부의 오만함 같은 것이다. 뭇별 속에서 항성처럼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싶을 때 다른 무엇이 있어 이걸 대체해 줄까. - P89

……쿠바에서 노년을 보내던 헤밍웨이는 밤이면 오랜 친구들인 어부들을 불러 놓고 문맹인 그들을 위해 자신의 소설을 읽어 주었다지요. 밤바람에 검푸르게 일렁이는 풀사이드에서 끊임없이 독주를 마시면서 말이에요. 헤밍웨이가 자신의 소설을 연극배우처럼 읽어 내릴 때면 갈라파고스의 거북처럼 검고 질기고 주름진 목을 가진 어부들은 그저 경외와 낡은 사랑만을 눈빛에 담고 그를 바라보았습 니다. 노벨상을 탄 그는 상금을 아바나의 성당에 전액 기부하며, 당신이 무엇을 소유했음을 알게 되는 것은 그것을 누군가에게 주었을 때, 라고 말했다지요. 그 무렵의 그는 거의 글을 쓰지 않고 있었지만 자신의 삶의 서사시를 그렇게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밤의 작은 음악』을 사랑하는 여러분, 가진 것을 모두 누군가에게 줌으로써 스스로 충만해지는 삶의 비밀을 우리는 언제쯤 알게 될까요. - P90

시를 쓰는 일이 내 속에 있는 빈약한 샘에서 근근이 물을 길어 올리는 일이라면 이 일은 누군가에게 줄 한 컵의 물을 위해 개울이나 정수기나 유통기한이 지난 생수병에서, 혹은 하수구에서라도 마실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물을 무차별적으로 떠오는 일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혹은 이 일은 조각 천을 모아 눈부신 꽃밭 형상의 베드 스프레드를 만들어 내는 퀼트와도 닮았다고 얘기할 수 있겠다.
그 조각 천을 어디서 주워 왔건 원래의 용도나 섬유의 원단 조성 비율이나 뒷면의 이어 붙인 자국 같은 건 문제 되지 않는다. 색상을 잘 배치하고 흔적 없이 꿰매어 현실의 꽃밭보다 더 매혹적인 걸 만들어 놓으면 되는 것이다. 내 영혼에서 퍼낸 샘물이거나 내가 밭 갈고 씨 뿌려 키워 낸 꽃이 아니라면 그것들에 대해 근거 없는 애정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고 그 언어의 진실성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까지 덤으로 따라온다. - P91

언젠가 서류를 찾으러 간 구청에서 엄마를 본 적이 있다. 엄마가 돌아볼까 봐 재빨리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회청색 유니폼을 입은 엄마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 지 워지지 않고 여태 남아 있다. 선명치 못한 푸른색 옷은 내 게 수인(囚人)의 그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엄마는 여전히 자신의 형량도 모른 채 그 옷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엄마의 통장 속에 든 알량한 푼돈은 결국 그녀의 고통을 덜어 내는 대가로 동그라미를 하나씩 지워 나갈 것이다. - P97

바깥은, 봄이라기보단 겨울의 끝에 가까웠다. 바람이 몹시 차다. 버린 우편물의 무게가 고스란히 내 가슴에 와서 얹힌다. 고개를 저으며 나는 다른 그림을 떠올린다. - P99

자정 5분 전. 허공에 걸려 만월처럼 둥글게 빛나는 시계. 분침은 자정 쪽으로 쉼 없이 달려가고 있다. 초록 융단 같은 잔디밭 위로 밤은 별 하나 없이 칠흑으로 어둡고, 눈부신 유리 구두를 오른발에 신은 채 한 여자가 달려가고 있다. 둥근 시계는 밤의 한가운데 박혀 있다. 꿈결 같은 드레스 자락은 미풍에 마구 흩날리고 뒤로 뻗은 아름다운 왼발엔 신발이 없다. 초록색 잔디 위 어디에도. 어디로 간 것일까. 나에 대한 사랑으로 눈먼 왕자님만이 그 신발을 줍게 될 것이다. 밤의 신데렐라. 그토록 아름답고 몽환적인 풍경이 어느 순간 달리의 그림처럼 뜨겁게 녹아내린다. 갈망과 특별함에 대한 집착과 사물에 대한 욕정도 뜨거울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집착이나 욕정보다 더.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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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간순이‘로서 새롭게 깨달은 바가 있다면, 음식의 맛에는 화학적 작용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마법적 작용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첫맛이 주는 놀라움 속에는 어린 나를 동료처럼 존중해준 어머니의 ‘신뢰‘라든가, 내게 맛있는 감자탕을 먹이고 싶어한 남자친구의 ‘애정‘ 같은 마법의 조미료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목구멍에서 국자가 튀어나오는 고통을 느끼며, 잊지 못할 첫 국물의 맛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 P184

음식은 위기와 갈등을 만들기도 하고 화해와 위안을 주기도 한다. 한 식구란 음식을 같이 먹는 입들이니, 함께 살기 위해서는 사랑이나 열정도 중요하지만, 국의 간이나 김치의 맛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식구만 그런 게 아니다. 친구, 선후배, 동료, 친척 등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다. 나는 사람들을 가장 소박한 기쁨으로 결합시키는 요소가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맛있는 음식을 놓고 둘러앉았을 때의 잔잔한 흥분과 쾌감, 서로 먹기를 권하는 몸짓을 할 때의 활기찬 연대감, 음식을 맛 보고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의 무한한 희열. 나는 그보다 아름다운 광경과 그보다 따뜻한 공감은 상상할 수 없다. - P189

모든 음식의 맛 속에는 사람과 기억이 숨어 있다. 맛 속에 숨은 첫 사람은 어머니이고, 기억의 첫 단추는 유년이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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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천천히 오고 있나 봐. 겨울이 섭섭하지 않게."

불현듯이
따스한 봄날의 오후.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한 줄기 햇살을 맞고 있으면 가끔 무언가가 바람을 타고 와 책상에 툭 떨어진다.
연분홍색 꽃잎이다.
보리랑 놀러 나가야겠다.
이 두근거림을 마음에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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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고 푸른 땡초가 뜬 검은 초간장은, 후배의 어머니가 만든 땡초전의 꽃 핀 초원에 어둠이 내린 풍경과도 같다. 그렇게 나도 어두워지고, 꽃 같던 후배와 친구의 기억도 점점 어둠 속에 묻혀간다. - P64

우리가 먹는 얘기를 그토록 끈질기게 계속하는 이유는, 먹는 얘기를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혀의 아우성을 혀로 달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혀의 미뢰들이 혀의 언어를 알아듣고 엄청난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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