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길고 끝이 뾰족한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밀려들 때 그 신발을 바라보면 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신발에 매달린 작은 단추들이 지혜 롭고 다정한 눈처럼 주디스를 향해 깜박였다. 작은 신발 눈, 너희는 늘 그 자리에 있구나. - P149

『군주론』에서 그랬잖아. 니콜로 마키아벨리, 위대한 이탈리아인의 책. 무슨 구절이었더라? 한 국가에서 악이 솟구치면 그 악 속에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더욱 확실한 해결책이다. 기어코 악을 부수려는 자는 오히려 악의 힘을 키워 주고, 악에게 결박당한 이들이 더 많은 피해를 입도록 만든다. 그렇지. 그 말을 지금 상황에 적용해 봐. 결과를 개의치 말고 그 악에게 명예를 보여라. 니콜로는 자신했지. 그러면 악이 사라지거나, 적어도 최악의 결과는 미뤄질 거라고. 영국 통치자들의 처세도 그랬지. 분열과 정복 말고도 수단이 하나 더 있었어. 개선. 위대한 이탈리아인 니콜로가 그의 손으로 해냈던 것처럼, 멋진 아일랜드 사람인 나도 해낼 수 있을 거야. 이 베르나르투스 리치오! 공작이 해내는 거야. 내 이 손으로. - P161

시청 건물의 거대한 돔 아래에 자리한 광장. 잊힌 기념물에 둘러싸인, 아일랜드 독립 추모공원이 곁을 지키고 있는, 그야말로 벨파스트의 모든 게 뚜렷이 보이는 곳. 신문팔이가 단조롭고 시시한 북아일랜드 사투리로 세상에서 일어난 위대한 사건들을 외쳐 대는 곳. 칙칙한 건물들의 정면이 모여 무역의 미덕과 까다로운 거래와 장로교의 정의를 선언하는 곳. 질서있고 말끔하게 늘어선 채 조명등의 빛을 받고 있는 기념비들, 아일랜드 늪지에 반쯤 잠긴 채 무성하게 퍼져 있는 하얀 말뚝버섯들, 쾌활함이 없는 개신교, 질서를 지나 치게 신봉하는 개신교. 그리고 이토록 진부한 기념물 사이를 당당하게 걸어 다니는 뚱한 아일랜드 시민들. - P173

회한에 찬 주디스는 벽난로 선반으로 시선을 돌려 벽 쪽으로 돌아선 액자를 바라보았다. 이모 말이 맞아요. 그녀는 말했다. 이모 말이 옳다고요. 이모가 그랬죠. 오언 오닐 같은 남자한테는 절대 저를 소개해 줄 수 없다고요. 댄 브린한테도요. 사냥의 달인이자 변호사 회사를 운영했던 남자. 아니, 매든 씨는 달라요. 그 사람이 미국에서는 일을 잘했을지 몰라도 여기서는 아닐 거예요. 그러니 그냥 그 사람을 내려놓아야겠죠. 혹시라도 그 남자와 얽혔다가는 다 포기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뭘 포기하죠? 주디스가 말했다. 이제는 아무도 절 신경 쓰지 않아요.
댄 브린, 댄 브린이 더블린으로 이사한 후로는 그 사람이나 그의 가족들하고 말 한마디 나눈 적이 없어요. 단 한마디도요. 일요일이 오면 우나 오닐 그 어린애마저 제 말투를 따라하며 놀려요. 제가 뭘 하든 누가 신경이나 쓸까요? 제가 더 포기할 게 있나요? 제임스 매든은 평범해요. 하지만 그는 남자고, 독실한 가톨릭신자고, 흔해 빠진 직업은 이제 다 집어치웠고, 점잖게 살 만한 돈도 있다고요.
그래요, 대체 뭐가 문제죠? 그녀는 액자 뒤에 가려진 얼굴에게 물었다. 그렇게 점잖은 남자와 결혼하는 게 대체 왜 잘못이라는 거예요? 만약 우리가 미국에 가기만 한다면, 그가 뭘 했던 사람인지 누가 알겠어요? 이쪽에 있든, 저쪽에 있든 남자는 다 똑같아요. 누더기부터 부자까지, 전부 다요. 제임스 매든한테는 좋은 여자가 바꾸지 못할 단점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게다가 그 남자는 바보가 아니에요. 잘만 배우면 살아 온 방식을 바꿀 수도 있다고요. - P187

한 잔 마시면 바로잡을 수 있을 거야. 술은 망각을 돕는 게 아니라 기억을 도왔고,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불쾌한 사실들을 이성적이고 아름답고 완벽한 패턴으로 재정리해 주었다. 알코올 중독자. 주디스는 위험하고 실망스러운 순간을 떨치려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술을 마시는 건 이 모든 시련을 좀 더 철학적으로 바라보고 더욱 꼼꼼히 따져 보기 위해서였다. 이성을 거절하는 각성제의 힘을 빌려서. - P205

문밖에서는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눈앞에 닥친 삶에 바쁜 사람들. 사람들은 생계를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고, 계획을 세우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공유하고 있었다. 주디스는 홀로 성당을 되돌아보았다. 괴로움 없는 하느님의 집, 텅 빈 곳, 노래도, 의식도 빼앗긴 곳, 찬란한 활기를 와락 안겨 주었던 사람들마저 빼앗긴 곳.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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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은 질투심이 많다. 끓일 땐 딴 짓은 물론이고 딴생각도 하면 안된다. - P191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애매한 시간과 공간의 틈을 떠도는 이 아이들은, 느닷없이 닥쳐온 생의 불가해함이 견딜 수 없어 몸부림을 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P199

어디냐?
아들이 있는 장소가 궁금한 게 아니라 그저 눈앞에 보이지 않는 아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무의미한 발성에 불과하겠지만 그 질문은 매번 박으로 하여금 자신이 있는 곳, 진저리나지만 버텨야 하는 장소에 대한 이질감, 나아가 두려움에 가까운 혐오감을 즉각 환기시켰다. - P208

박도 요즘은 전화보단 문자질에 빠져들었다. 어리석고 맹한 세계만이 줄 수 있는 위로도 있었다. 무신경하고 무의미한 문자들 속에는, 박이 자신의 일상에서 좀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담겨 있었다. 사소한 것에 대한 감탄, 매사가 처음인 듯한 놀람, 진정 없는 후회, 회한 없는 망각,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하찮음에 대한 무감각. 이를테면 기이한 마술이나 지난한 역경없이 단숨에 도달할 수 있는 무중력의 차원 같은 것. 그러니까 어디냐?와 그만하시면 안돼요?의 세계로부터 아득히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말의 부스러기들이었다. - P213

둘 다 혹은 둘 중 하나가 부서져야 하는 순간이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말하겠지. 둘 중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살려야지, 당연히. 그런데, 그 둘 중 하나가 자기 쪽이 된다면 어떨까. 대부분은, 그렇다면 차라리 둘 다, 쪽을 선택할 것이다. 기쁨보단 고통에 동반자가 더 필요할 테니. 그렇다면 둘 중 하나를 정하는 문제는 어떨까.
사실 누가 그 자리에 서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불가피하게 제단 에 놓여야 한다면 단죄되어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 다. 누군가 희생양이 되었다면 그건 그 자신의 죄의 단독성 때문이 아니다. 죄란 얼마나 흔해빠진 것인가. 오래된 종교의 경전에서도 보았듯 오히려 가장 순결한 자가 제단에 오르곤 하는 것이다. - P240

대구를 생각하자 한 남자가 떠오른다. 바뗄이란 괴팍한 놈이 있었지. 프랑쑤아 바뗄. 사백년 전 당대 최고의 요리사였던 그는 어느 귀족의 잔치에 수석 요리정으로 초빙되었다. 많은 손님들이 초대되었고 정원에는 거대한 식탁이 줄지어 차려졌다. 호사를 극한 잔치는 사흘 동안 계속될 예정이었다. 바델은 마지막 날 오후가 기울어갈 무렵, 향락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성의 뒤편으로 조용히 걸어나가 인적이 드문 숲 언저리에서 자살했다. 마르쎄이유 항에서 보내기로 한 생선 – 정확히 어느 종류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이 약속한 시간을 지나서도 도착하지 않아 마지막 코스가 되는 그 날의 만찬 준비에 차질을 빚은 것이 까닭이었다. 새우와 관자와 생선살이 듬뿍 든 부야베스 대신 담백한 단호박 수프를 끓이거나 넙치구이 대신 송아지갈비를 내놔도 뭐랄 사람은 없었다. 그가 견디지 못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르와조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바델인 듯 선명하게 깨달았다. 갑자기 르와조의 피돌기가 격해졌다. 난, 최선을 다했어, 늘.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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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나절이었다. 제임스 패트릭 매든은 절룩이는 다리에 걸맞은 도시로 들어섰다. 그는 예측 가능한 꿈들만 꾸고, 오로지 축구 도박만이 엄청난 부를 약속하는 나라에 있는 도시로 돌아왔다. 결국 큰돈을 벌지 못한 채 돌아온 미국인, 타임스퀘어라는 넓은 광 장에서 잊힌 얼굴, 축축한 언덕과 척박한 바위로 뒤덮인 고향 도니골에서 자취를 감춘 아일랜드 사람. 지금이나 앞으로나 운이 없는, 그리고 할 일도 없는 인간. - P76

그의 목적지는 케이브 언덕 가까이에 있는 벨뷰 시립 공원이었다. 이름만 공원일 뿐, 아무런 매력이 없는 장소. 그는 뉴욕의 팰리세이즈 공원이나 코니아일랜드를 어설프게 흉내 낸 그곳의 놀이기구를 보고서 진작에 실망한 터였다. 하지만 긴 산책로와 연안이 내려다보이는 경치는 괜찮았다. 전망대에 오르면 아일랜드 인근을 항해하는 배들을 바라볼 수 있었고, 다가오는 비구름 아래 차분하게 녹아내리는 언덕들도 볼 수 있었다. 그곳에 서면 마치 그가 남긴 모든 것, 그가 해왔던 모든 일로 향하는 관문에서 있는 것 같았다. 벨뷰 공원의 전망대는 그를 다른 세계와 이어주는 연결 고리였다. - P80

그는 눈앞에 술이 아른거릴 지경이 되더라도 하루에 1파운드 이상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캐슬 정션에서 하차한 그는 술집을 향해 몸을 돌렸고, 뻣뻣한 다리를 종종거리며 술집 문을 열었다. 술은 항상 골칫거리였다. 그리고 지금은, 채워 가야 할 기나긴 날들과 불확실한 미래와 더불어 귀향을 즐겁게 하는 위안거리였다. - P81

이게 종교였다. 종교란 숙취로 입이 바싹 마르고, 하녀와 있었던 어젯밤 일을 생각만 해도 괴로운 이런 아침에 하느님께 용서를 비는 것이었다. 그래서 1년에 한 번 부활절 의무를 다하고 일요일 아침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다. 게다가 종교는 일종의 보험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훗날 구원을 받을 거라는 뜻이다. 그러니 언제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삶의 최후를 맞기 전에 완벽히 회개하기만 하면 모든 준비가 끝나는 것이다. 매든 씨는 연옥이나 속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고해와 그에 따른 용서가 그의 신앙을 지탱하는 기둥 이었다. 그는 되도록 자주 과거를 잊고 새롭고 희망찬 미래를 시작하는 게 위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P111

그녀는 순수한 행복 속에서 기도했다. 하지만 미사가 끝난 직후부터 기쁨보다 두려움이 더 커지고 있었다. 통로를 따라 바깥세상으로 줄지어 나가는 사람들이 내뿜는 현실감, 그리고 모순과 불확실함으로 가득한 거리를 마주하자 그녀의 간절한 기도는 점점 쪼그라들었다. 그녀는 위대하고 전능한 심판관 앞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주장을 펼치며 열정적으로 발언했고, 이제는 변론도 논쟁도 모두 끝났건만, 거리에 있는 속세의 배심원들은 어영부영 그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것 같았다. 하느님의 집과 기도라는 보증금과 선한 의지를 외면한 채로. - P126

주디스는 비로소 깨달았다. 남자들의 시간을 기분 좋게 훔친 뒤, 그들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약속을 한 뒤, 그들과 다시 만날 거라고 굳게 언약한 뒤, 그녀 자신도 저렇게 홀연히 떠나곤 했었음을. - P131

사랑하는 이모가 돌아가신 뒤로는 과거로의 여행이 점점 잦아졌다. 이제는 뒤로 돌아가는 편이 훨씬 쉬웠다. 앞으로 나아가는 건 너무 두려운 일이었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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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다시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일랜드 특유의 부드럽고 끈질긴 비는 케이브 언덕의 그늘에 가려진 벨파스트만을 넘어오면서 점점 거세졌고, 도시 위에 자리를 잡더니 짙게 드리운 밤의 장막을 축축이 적셨다. 그녀는 비스킷과 치즈, 사과를 먹은 뒤 안경을 찾아 쓰고 도서관에서 빌린 캐나다 소설가 마조 드라 로슈 Mazo de la Roche의 책을 펼쳤다. 그러고는 난롯불에 맨발가락을 쬐며 안락의자에 몸을 기댄 채 기나긴 밤을 죄수처럼 기다렸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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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던 가에 있는 헨리 라이스 부인의 하숙집 식당에는 고인이 된 남편의 아버지가 사들인 물건들이 진열돼 있었다. 한쪽 벽에는 단단한 마호가니 찬장이 붙어 있었는데, 대리석을 덧붙인 그 찬장 위에는 꽃이 그려진 과일 그릇과 빈 위스키병이 즐비했다. 같은 나무로 만든 커다란 타원형 식탁이 식당 중앙을 차지했고, 덕분에 양쪽으로 지나가기가 퍽 어려웠다. 식탁 곁에는 여덟 개의 높은 의자가 닻을 내리고 정박한 배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회색 건물과 어둑한 뒷마당을 지나 식당으로 내려앉은 햇빛이 좁은 창문 두 개를 반쯤 가린 얇고 바랜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다. 빛은 찬장 너머로 나아가, 사냥꾼이 희미한 윤곽을 지닌 사슴을 향해 총을 들어 올린 모습이 담긴 금테 유화 액자를 가리켰다. 식당 문 옆에 있는 대형 괘종시계는 늙고 눈먼 개처럼 쉴 새 없이 째깍거리며 시간을 알렸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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