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알았을까? 자기보다 한참 어린 막내가 면당위원장인 당신을 그렇게나 자랑스러워했다는 걸, 그 자랑이 당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걸, 그게 평생의 한이 되어 자랑이었던 형을 원수로 삼았다는 걸. 어쩐지 아버지는 알고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는 수시로 작은아버지의 악다구니를 들으면서도 돌부처처럼 묵묵히 우리 집이나 작은집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만 뻐끔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는 몰랐을 수도 있다. 아무도 보지 않은 그날의 진실을, 그날 작은아버지 홀로 견뎠어야 할 공포와 죄책감을 보지 않은 누군들 안다고 할 수 있으랴. 역시 작은아버지에게는 작은아버지만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독한 소주에 취하지 않고는 한시도 견딜수 없었던 그러한 사정이. - P130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하는 것이여."
자신도 고씨처럼 인심을 잃지 않았으니 빨갱이라도 고향서 살 수 있다는 의미인 듯했다. 한때 적이었던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살아가는 아버지도 구례 사람들도 나는 늘 신기했다. 잘 죽었다고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과 아버지는 어떻게 술을 마시며 살아온 것일까? 들을 수 없는 답이지만 나는 아버지의 대답을 알 것 같았다.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싫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관계를 맺지 않았다. 사람에게 늘 뒤통수 맞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탓인지도 몰랐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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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괜찮아."
자기 상태가 괜찮다는 것인지, 죽음이란 것도 괜찮다는 것인지, 살아남은 자들은 그래도 살아질 테니 괜찮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불현듯 눈물이 솟구쳤다. 그 눈물의 의미도 나는 알 수 없었다. 오빠는 우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고요한 눈빛으로. 아버지의 죽음뿐만 아니라 곧 닥칠 자신의 죽음까지 덤덤하게 수긍한, 아니 죽음 저편의 공허를 이미 봐버린 눈빛이었다. 그 눈빛 앞에서 차마 더는 울어지지 않았다. 내 울음이 사치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본디 눈물과는 친하지 않기도 했다.
오빠가 테이블에 손을 짚은 채 몸을 일으켰다. 왔을 때처럼 오빠는 휘적휘적 힘겨운 걸음을 옮겼다. 허리띠를 졸라맸는지 허리춤에서 엉덩이까지 어른 주먹 몇개는 들락거릴 정도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삶이란 것이 오빠의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듯했다. 나는 오빠가 밝은 햇빛속으로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오빠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조문을 마치고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 P85

언니는 두번 권할 새도 없이 주방으로 달음박질쳤다.
모르는 이의 장례라고 대충할 사람은 아니지만 오늘은 유달리 종종거리며 마음 쓸 게 분명했다. 아버지가 여느 망자들과 달리 당신을 애틋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손수 만든 제상을 받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죽으면 끝이라는 아버지의 유물론이 틀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언니가 가져다주는 반찬을 제일 좋아했다.
마지막 가는 길,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음식을 맛있게 먹는 아버지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한 단 한순간도 유물론자가 아닌 적이 없었다. 먼지에서 시작된 생명은 땅을 살찌우는 한줌의 거름으로 돌아가는 법, 이것이 유물론자 아버지의 올곧은 철학이었다. 쓸쓸한 철학이었다. 그 쓸쓸함을 견디기 어려워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사후의세계를 창조했는지도 모른다. - P97

그런 사연이 있는지 몰랐다. 그저 빨갱이 아버지 때문에 집안 망하고 공부 못한 것이 한이라 사사건건 아버지를 원망하는 줄로만 알았다. 아홉살 작은아버지는 잘난 형 자랑을 했을 뿐이다. 그 자랑이 자기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갈 줄 어찌 알았겠는가. 작은아버지는 평생 빨갱이 아버지가 아니라 자랑이었던 아홉살 시절의 형을 원망하고 있는 게 아닐까. 술에 취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던 작은아버지의 인생이, 오직 아버지에게만 향했던 그의 분노가, 처음으로 애처로웠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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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있잖아요.

농경의 환경 파괴랑지속 가능한 농·축업을 찾아보면서 이런저런 자료를 봤거든요?

아, 네.

사람들이 저마다 지속 가능한 식품 공급 방법을 찾다가

지속 가능한 축산업을 추구하는 현장에 가는데

거기에서 동물이 죽는 장면을 보고서 충격을 받는 거예요.


동물이 죽는다는 걸 상상도 못했던 것처럼요. - P28

머리로
‘동물을 죽여서 고기를 먹는다.‘고 알고 있는 거랑

살아 움직이던 동물의 목숨을 빼앗는 걸 이해하는 거랑은 차이가 정말 큰 것 같아요.

당장 저만 해도..…요즘 동물성 식품을 먹곤 하는데 예전처럼 선뜻 구매하지 못하겠더라구요.

공감 돼요.
알면 무시할 수가 없어지죠.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특별하다‘ 던가
‘그래서 다른 동물을 학대하는 데
죄책감을 안 느껴도 된다‘ 던가 그런 단순한 합리화를 못하게 되기도 하고….

요즘 전 학대랑 도살에 대해서 경험하거나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나? 자주 생각해요.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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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주로 먹는 게 1년생 작물이라

매년 경작할 때마다 땅을 갈아엎는데 이 과정에서 땅이 엄청나게 손상되고 흙이 잡아주던 탄소가 다 배출된대요.

그리고 작물을 키우려면 영양분이 필요한데 영양 공급을 화학 비료로 하고, 화학 비료 때문에 토양이 오염되고…

애초에 화학 비료의 원재료인 화석 연료때문에 발생하는 환경 오염도 있고…
이쪽도 총체적으로 문제더라고요. - P114

채식이 최선의 답이라 믿었는데 답 안에도 문제가 있었다.

찾아볼수록 문제가 너무 크고 깊다.

식물과 토양은 탄소와 물을 잡아두는 능력이 있다.
식물 뿌리를 통해 토양에 탄소와 물이 저장되고
건강한 토양은 생태계 전체에 물을 순환시킨다.

근대 농업에서는 경운, 농약, 화학비료를 이용해서 농사를 짓고 이 셋은 토양을 죽인다.

생산성의 떨어지면 화학 비료에 기대고
그럼 토양은 더 망가지는 악순환이 계속되다가 땅은 사막화된다.

사막화된 땅엔 극심한 일교차가 생기고 이는 대기후까지 변화시킨다.
이런 땅에선 인간이 살 수 없어서 사람들은 땅을 떠난다.
기후난민이 계속 늘고 있다. - P132

사막화로 인한 경작지 축소와 가뭄과 폭우

기후 변화로 인해 토양 성질이 바뀌어 쌀의 비소 함량이 2배로 늘 것이라는 예측

동물 전염병으로 인한 동물성 식품 공급 감소

식품 가격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고,
이건 점점 심화될 것이다.

우리 미래의 일상은 전염병과 공기 오염과 혹한, 폭염 속에서 굶주리는 나날일 것이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닥쳐오고,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해야 한다.
나는 왜 이렇게 무능할까?
그런데 내가 아무리 애써도 지구에 도움되는 것보단 해를 끼치는 게 크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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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 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아버지는 잘 못 참는 사람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가 득세하는 것도 참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라는 봉건잔재도 참지 못했으며, 가진 자들의 횡포도 참지 못했다. 물론 두시간의 노동도 참지 못했다. 그런데 얼어 죽을 것 같은 고통은, 굶어 죽을 뻔한 고통은,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은 동료들이 바로 곁에서 죽어가는 고통은 어떻게 견뎠을까? 신념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내려와봤자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라는 지극히 절망적인 현실 인식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 P68

오빠의 마음속에도 그날이 사무치게 남아 있을터였다. 그날을 마음에 품은 채로 오빠와 나는 멀어지면서 살아온 것이다. 빨갱이의 딸인 나는 오빠를 생각할 때마다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빨갱이의 딸인 나보다 빨갱이의 조카인 오빠가 견뎌야 했을 인생이 더 억울할 것 같아서였다. 자기 인생을 막아선 게 아버지의 죄도 아니고 작은아버지의 죄라니!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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