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쁨으로 꽃을 피워요. 다른 건 할 수 없으니까요. 해는 따뜻하게 비치고 공기는 신선하고, 나는 맑은 이슬과 촉촉한 비를 마셔요. 나는 숨을 쉬고, 살아나가요! 흙에서는 어떤 힘이 내게로 올라오고 저 위에서도 어떤 힘이 내려와서 난 언제나 새롭고 큰 행복을 느끼고, 그래서 꽃을 피워야 해요. 그게 내 삶인걸요. 달리는 살 수가 없어요!"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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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를 내지 못하면 내지 못하기 때문에, 성과를 내더라도 그 성과는 대체 가능하기 때문에 나는 곧 잊힌다. 다른 사람들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들은 나라는 존재를 잊어버리게 된다. 성과를 내는 사람은 대체되어 잊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성과를 낼 기회조차 없는 사람은 애초에 기억조차 되지 않는 존재감 0인 상태가 되는 것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이 둘 모두 공포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 P145

사랑이 구제되고 사랑을 통해 모욕이 아닌 존재감을 고양시킬 수 있는 길은 딱 하나밖에 없다. 서로 사랑하는 존재를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지 않고 오직 ‘그‘로 보고 ‘그‘로 대하는 것 말이다. 그가 남자든 여자든 그 남자와 여자라는 것으로부터 차이가 있는 만큼 그가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사랑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랑하는 이를 ‘성별‘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개체적 인격으로 대하는 것이다. - P159

현존의 기쁨에 대한 확신이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친밀성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유익한 존재‘가 되어 그의 관심을 끄는 수밖에 없다. 유익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유익한 것인 한 그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그의 관심을 붙들어두기 위해서는 무엇이든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적 존재감을 상실한 상태에서 존재감을갖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마지막 영역이자 방법이 사랑과 우정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영역처럼 친밀성 영역에서도 존재감은 ‘현존‘이 아니라 필사적인 ‘관심 끌기‘로만 가능한 것이 되었다. - P161

기쁨에는 ‘더‘라는 요구 사항이 없다. 더 기쁘게 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가 나를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지 내가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그저 그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의 현존에 감사할 수 있을 뿐이다. 기쁨의 관계에서 받는 이는 요구하는 게 아니라 돌려주는 것만 가능하다. - P170

소수자들이 느끼는 고통은 그 이외의 다른 존재로 존재감을 가질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존재감이 대체 불가능성이라는 고유함에서 온다고 한다면, 소수자들은 각각의 자기 이름을 가진 개별적 존재, 즉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는 언제나 범주화된 집단의 이름인 ‘소수자‘로만 불리고 사회적 가치를 가지게 된다. 심지어 그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조차 그가 말해야 하는 고통은 소수자로서의 고통이지 그 외의 다른 고통은 무시되고 삭제된다. 소수자를 비하하고 조롱하여 얻는 웃음은 이들의 개별성, 즉 인격과 존엄을 파괴한 고통의 등가물이다. - P177

관종들이 바라는 주목은 주목을 재생산하여 지속적으로 주목받는 것이지 주목을 그만두고 주목받지 않아도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안정적 자리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주목을 이끌어내고 지속시키기 위해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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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렇게 말해주기를 바랐는데
아이는 내가 돌볼게
당신은 계속 그림 그릴 수 있을거야
기저귀는 내가 갈게
분유도 내가 먹일게

언니는 어렸을 때 아이는 갖고 싶지만
남편은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만약 아이가 생기면
엄마가 아니라 아빠가 되고 싶다고 했다.

우리 둘 중에 누가 더 페미니스트 였을까?

"아이들 장난"이라는 말에
항상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내가
가족의 옛이야기를
간직했을 것 같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여자들의
옛이야기를
간직한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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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은 것들은 우리의 내부에서 부패한다.
골리아르다 사피엔차

어떤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아빠는 농담조로 말했다
"여자들이 한 일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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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고통과 피해에 대해 아무리 이야기하더라도 법에 기입된 것이 아니면 그것은 무가치하게 여겨진다. 법에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법에 근거가 없다는 것은, 법의 언어로 그 고통을 의미 있게 들리게 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런 경우 고통을 호소하는 말은 의미를 가진 ‘말‘이 아니라 ‘소리‘에 불과하다. 소리를 들으며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동정심밖에 없다. "안됐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이 법에 호소했을 때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이다. 자신의 고통이 사회적으로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절벽에 부딪히면 사람은 더욱 더 격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고통 그 자체도 무의미한데 고통을 해결하려는 자신의 호소조차 사회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사람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극단의 고통을 겪게 된다. - P101

민중신학자 정용택은 이를 "고통에서 고난으로의 전환"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내가 당한 고통의 실존적 무의미를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고통이 사회적·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고난‘이 될 때 사람은 비로소 무의미를 딛고 ‘겨우‘ 일어나는 근거를 만들 수 있다. - P102

고통의 특징이 ‘호소‘라고 한다면, 고통이 곁을 파괴하는 이유는 호소의 일방성에서 비롯된다. 고통을 호소하는 말은 일방적으로 들을 수만 있을 뿐 응답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 P106

내가 겪고 있는 ‘것‘인 고통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겪고‘ 있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그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과정, 말할 수 없는 것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 대한 것 말이다. 고통을 명료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과 싸울 수 있게 된다. 불가능에 좌절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과 대면하고 싸움으로써 우리는 그 둘을 동시에 기록하고 나눌 수 있게 된다. 고통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그 과정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서로가 고통받고 있음을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다. 주문은 이 길을 봉쇄한다. - P114

고통은 거의 대부분 비교 불가능하다. 비교를 통해 자기가 좀더 나은 상태임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대개 실패한다. - P115

고통은 절대적이기에 소통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절대성은 보편적이다. 그렇기에 고통은 사람을 나‘만‘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 절대성이 바로 나‘만‘을 나‘만‘에게만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한다. 내가 외로운 만큼 너도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서로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고통 자체는 절대적이라서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지만, 바로 그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공통의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된다. 고통의 절대성 자체가 ‘공통의 것‘이 되는 것이다. - P125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고통이 무엇인지와 그 의미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당한 사람이 그 고통과 거기서 비롯된 외로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고통에 어떻게 맞서며 넘어서려고 했는지, 그 고군분투에 관한 이야기다. 자기의 겪음에 대한 기록이며 겪고 있는 자기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이것이 통하게 된다. - P126

왜 남성의 노동은 높게 평가받고 여성의 노동은 보조적인 것으로 취급되는가. 왜정신노동은 육체노동보다 값어치가 더 비싼가. 사실 한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이 인정 체제를 바꾸는 것과 같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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