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고통과 피해에 대해 아무리 이야기하더라도 법에 기입된 것이 아니면 그것은 무가치하게 여겨진다. 법에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법에 근거가 없다는 것은, 법의 언어로 그 고통을 의미 있게 들리게 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런 경우 고통을 호소하는 말은 의미를 가진 ‘말‘이 아니라 ‘소리‘에 불과하다. 소리를 들으며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동정심밖에 없다. "안됐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이 법에 호소했을 때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이다. 자신의 고통이 사회적으로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절벽에 부딪히면 사람은 더욱 더 격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고통 그 자체도 무의미한데 고통을 해결하려는 자신의 호소조차 사회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사람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극단의 고통을 겪게 된다. - P101
민중신학자 정용택은 이를 "고통에서 고난으로의 전환"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내가 당한 고통의 실존적 무의미를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고통이 사회적·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고난‘이 될 때 사람은 비로소 무의미를 딛고 ‘겨우‘ 일어나는 근거를 만들 수 있다. - P102
고통의 특징이 ‘호소‘라고 한다면, 고통이 곁을 파괴하는 이유는 호소의 일방성에서 비롯된다. 고통을 호소하는 말은 일방적으로 들을 수만 있을 뿐 응답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 P106
내가 겪고 있는 ‘것‘인 고통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겪고‘ 있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그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과정, 말할 수 없는 것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 대한 것 말이다. 고통을 명료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과 싸울 수 있게 된다. 불가능에 좌절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과 대면하고 싸움으로써 우리는 그 둘을 동시에 기록하고 나눌 수 있게 된다. 고통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그 과정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서로가 고통받고 있음을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다. 주문은 이 길을 봉쇄한다. - P114
고통은 거의 대부분 비교 불가능하다. 비교를 통해 자기가 좀더 나은 상태임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대개 실패한다. - P115
고통은 절대적이기에 소통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절대성은 보편적이다. 그렇기에 고통은 사람을 나‘만‘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 절대성이 바로 나‘만‘을 나‘만‘에게만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한다. 내가 외로운 만큼 너도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서로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고통 자체는 절대적이라서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지만, 바로 그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공통의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된다. 고통의 절대성 자체가 ‘공통의 것‘이 되는 것이다. - P125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고통이 무엇인지와 그 의미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당한 사람이 그 고통과 거기서 비롯된 외로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고통에 어떻게 맞서며 넘어서려고 했는지, 그 고군분투에 관한 이야기다. 자기의 겪음에 대한 기록이며 겪고 있는 자기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이것이 통하게 된다. - P126
왜 남성의 노동은 높게 평가받고 여성의 노동은 보조적인 것으로 취급되는가. 왜정신노동은 육체노동보다 값어치가 더 비싼가. 사실 한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이 인정 체제를 바꾸는 것과 같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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