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스는 가족 중 유일하게 특이한 아이, 수백만분의 일의 확률로 태어난 별종이었다. 특출나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운 적은 없었다. 평범한 소년처럼 구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의 두뇌가 다들 지루해하고 심지어 고통스러워하는 생각을 즐기는 이유가 무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짜 그를 괴롭힌 것은 자신의 우월한 정신이 아니라, 그것에 못 미치기는 해도 그의 주변을 둘러싼 그 수많은 정신들이었다. 우리 인간은 왜 이런 식으로 진화했는가? 이 행성의 다른 생명체들은 다들 무지하여 행복한 상태로 존재한다. 그들의 고통과 쾌락은 오직 현재 속에서만 느낄 수 있고, 우리가 느끼는 고통이나 영광과 달리 다음날까지 이어지지 않으니, 인간처럼 모두를 무한 고통의 사슬에 얽어매지 않는다. 그런 에덴동산적 의식의 결여 상태로 다들 살다가 죽어가는데, 왜 우리 존재는 의식으로 고통받는가? - P336
허사비스에게 말을 거는 투자자는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허사비스는 몇 주 동안 피터 틸이라는 인물을 연구해 캘리포니아의 어느 북적이는 행사장에서 그에게 접근했다. 틸이 체스 팬이란 사실을 알았던 허사비스는 체스가 왜 그렇게 매력적인지 아느냐고 대뜸 물었다. 호기심이 일어난 틸은 불안하게 앞뒤로 몸을 흔들고 있는 키 작고 안경 낀 청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허사비스는 몇 초 후면 억만장자의 관심이 딴 데로 돌아가리란 것을 알았기에, 체스판의 어느 위치에서건 비숍과 나이트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라고 냉큼 덧붙였다. 현저히 다른 두 말의 움직임이 역동적이고 비대칭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내어 게임을 좌우한다는 것이었다. 틸이 넘어오고 나서부터는 돈이 쏟아졌다. - P340
이 프로그램들은 인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체스를 둔다. 창의력이나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어마어마한 고속 처리 능력과 가차 없는 연산 능력으로 최상의 수를 선별한다. 보통의 프로 선수가 열 개에서 열다섯 개 수를 내다볼 수 있다고 한다면, 알고리즘은 일 초에 이억 개, 사 분에 무려 오백억 개가 넘는 수를 계산할 수 있다. 이렇게 컴퓨터가 수마다 발생하는 가능성을 모조리 검토하는 방식은, 참 적절하게도, 무차별 대입brute force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인간 선수는 기억과 경험, 고도로 추상적인 추론, 패턴 인식, 직관을 활용해 판 위에 자기 정신을 투영 해내지만, 체스 기계는 게임 자체를 이해한다기보다 그저 계산 능력을 사용해 프로그래머가 설계해둔 복잡한 규칙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 - P346
바둑의 복잡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둑에서는 모든 말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비숍, 폰, 나이트, 룩, 킹, 퀸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같은 등가의 흑돌과 백 돌만이 쓰인다. 나이트, 비숍, 폰과 구분되는 퀸만의 가치를 구분하도록 체스 컴퓨터를 프로그래밍하기란 비교적 쉽다. 하지만 바둑에서는 각 돌의 무게가 위치에 따라 달라지고, 다른 돌 들과의 관계와 돌 사이 공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무엇이 좋고 나쁜 수인지를 판단하는 건 철저히 주관적인 영역이다. 프로 기사들은 위치를 찬찬히 살피며 직관과 본능으로 다음 돌을 어디에 둘지 정한다. 판 전체를 읽고, 오르내리는 패턴을 감지하고, 거의 모든 바둑 게임에서 공통되게 나타나는 돌들의 배열을 구분하기 위해 수년간 훈련한다. 초보는 판 앞에 앉기 전 일단 그런 분류부터 숙달해야 한다. - P348
기사들은 판을 읽고 머릿속으로 앞일을 내다보며 돌 무리가 살지 죽을지를 판단해야 한다. 높고 낮은 공격을 번갈아 하며 조화로운 자리를 구축할 줄도 알아야 한다. 대형이 얼마나 두텁고 얇은지를 잘 분간해 보강해야 할지 아니면 공격을 버텨야 할지를 정해야 하며, 침범하고 반격하고 포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돌 하나하나의 잠재력을 의미하는 맛을 가늠하고, 응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타며 포위되는 상황을 피하고, 선수와 후수의 타이밍을 익히고, 정면으로 맞붙어 자리를 차지해야 할 때와 손빼기를 구사해 판 구석으로 슬쩍 빠져나가야 할 때를 익혀야 한다. 진짜와 가짜 눈을 구별해야 한다. 화점, 천원, 소목, 고목, 외목을 둘 줄 알아야 한다. 비이성적인 탐욕에 눈멀지 않고 경기 흐름을 지배할 수 있게 기세, 즉 투지를 길러야 한다. 비마끝내기. 들여다보기, 협공, 어깨짚기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희생으로 판을 살리는 선수활용도 터득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돌을 계속 내려놓으면서 상대 영토를 줄이고 나의 영토를 최대로 넓히며 승리를 가져와야 한다. - P349
서울 포시즌스호텔에서, 아니면 인터넷 중계로 대국을 보던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해 무섭게 달려드는 미래를 그 순간 부지불식간에 일별했다. 아직은 멀리 있어 희미해 보여도 이미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현재에 영향을 떨치는 미래. 희망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미래. 누군가는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한다고 믿지만, 대다수는 이 광기 어린 꿈이 우리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영원히 머무르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한다고 확신하는 미래. 하지만, 언젠가 우리와 우열을 다툴 지능의 지시에 따르는 인간의 손으로 바둑판 위에 점판암 하나가 올려지는 순간, 그 미래의 첫 메아리는 이미 울려퍼진 후였다. - P360
이세돌은 아주 충동적인 유형의 바둑 기사로 유명했다. 판단을 내리기까지 보통은 일 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언뜻 터무니없어 보이는 알파고의 수 앞에서는 십이 분이 넘게 고민했다. 눈을 끔뻑이며 엄지와 검지 사이의 살을 꼬집었고, 낯선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는 개처럼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생각이 고스란히 얼굴에 묻어났다. "초반에는 실수가 잦다 싶었어요. 알파고가 계속 우위를 점하 고는 있었지만 나도 만회하고 있었지요. 이후로도 알파고가 계속 실수하길래 ‘승산이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 기계도 아직 불완전하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수가 나온 겁니다. 실제 대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흑돌이 거의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거든요. 거기에 돌을 둘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37수를 그렇게 둔 거죠. 그때 나에게 기회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때 알파고는 일부러 공간을 내준 것이었어요. 머릿속에 이미 그 수를 생각해두었기에 다른 곳에 여지를 허용한 것이죠. 그냥 내가 갖게 내버려둔 거예요. 알파고가 나를 속였습니다. 그 수가 놓인 순간, 나는 끝난 겁니다. 승리는 이미 알파고의 것이었어요."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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