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스는 가족 중 유일하게 특이한 아이, 수백만분의 일의 확률로 태어난 별종이었다. 특출나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운 적은 없었다. 평범한 소년처럼 구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의 두뇌가 다들 지루해하고 심지어 고통스러워하는 생각을 즐기는 이유가 무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짜 그를 괴롭힌 것은 자신의 우월한 정신이 아니라, 그것에 못 미치기는 해도 그의 주변을 둘러싼 그 수많은 정신들이었다. 우리 인간은 왜 이런 식으로 진화했는가? 이 행성의 다른 생명체들은 다들 무지하여 행복한 상태로 존재한다. 그들의 고통과 쾌락은 오직 현재 속에서만 느낄 수 있고, 우리가 느끼는 고통이나 영광과 달리 다음날까지 이어지지 않으니, 인간처럼 모두를 무한 고통의 사슬에 얽어매지 않는다. 그런 에덴동산적 의식의 결여 상태로 다들 살다가 죽어가는데, 왜 우리 존재는 의식으로 고통받는가? - P336

허사비스에게 말을 거는 투자자는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허사비스는 몇 주 동안 피터 틸이라는 인물을 연구해 캘리포니아의 어느 북적이는 행사장에서 그에게 접근했다. 틸이 체스 팬이란 사실을 알았던 허사비스는 체스가 왜 그렇게 매력적인지 아느냐고 대뜸 물었다. 호기심이 일어난 틸은 불안하게 앞뒤로 몸을 흔들고 있는 키 작고 안경 낀 청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허사비스는 몇 초 후면 억만장자의 관심이 딴 데로 돌아가리란 것을 알았기에, 체스판의 어느 위치에서건 비숍과 나이트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라고 냉큼 덧붙였다. 현저히 다른 두 말의 움직임이 역동적이고 비대칭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내어 게임을 좌우한다는 것이었다. 틸이 넘어오고 나서부터는 돈이 쏟아졌다. - P340

이 프로그램들은 인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체스를 둔다. 창의력이나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어마어마한 고속 처리 능력과 가차 없는 연산 능력으로 최상의 수를 선별한다. 보통의 프로 선수가 열 개에서 열다섯 개 수를 내다볼 수 있다고 한다면, 알고리즘은 일 초에 이억 개, 사 분에 무려 오백억 개가 넘는 수를 계산할 수 있다. 이렇게 컴퓨터가 수마다 발생하는 가능성을 모조리 검토하는 방식은, 참 적절하게도, 무차별 대입brute force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인간 선수는 기억과 경험, 고도로 추상적인 추론, 패턴 인식, 직관을 활용해 판 위에 자기 정신을 투영 해내지만, 체스 기계는 게임 자체를 이해한다기보다 그저 계산 능력을 사용해 프로그래머가 설계해둔 복잡한 규칙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 - P346

바둑의 복잡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둑에서는 모든 말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비숍, 폰, 나이트, 룩, 킹, 퀸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같은 등가의 흑돌과 백 돌만이 쓰인다. 나이트, 비숍, 폰과 구분되는 퀸만의 가치를 구분하도록 체스 컴퓨터를 프로그래밍하기란 비교적 쉽다. 하지만 바둑에서는 각 돌의 무게가 위치에 따라 달라지고, 다른 돌 들과의 관계와 돌 사이 공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무엇이 좋고 나쁜 수인지를 판단하는 건 철저히 주관적인 영역이다. 프로 기사들은 위치를 찬찬히 살피며 직관과 본능으로 다음 돌을 어디에 둘지 정한다. 판 전체를 읽고, 오르내리는 패턴을 감지하고, 거의 모든 바둑 게임에서 공통되게 나타나는 돌들의 배열을 구분하기 위해 수년간 훈련한다. 초보는 판 앞에 앉기 전 일단 그런 분류부터 숙달해야 한다. - P348

기사들은 판을 읽고 머릿속으로 앞일을 내다보며 돌 무리가 살지 죽을지를 판단해야 한다. 높고 낮은 공격을 번갈아 하며 조화로운 자리를 구축할 줄도 알아야 한다. 대형이 얼마나 두텁고 얇은지를 잘 분간해 보강해야 할지 아니면 공격을 버텨야 할지를 정해야 하며, 침범하고 반격하고 포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돌 하나하나의 잠재력을 의미하는 맛을 가늠하고, 응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타며 포위되는 상황을 피하고, 선수와 후수의 타이밍을 익히고, 정면으로 맞붙어 자리를 차지해야 할 때와 손빼기를 구사해 판 구석으로 슬쩍 빠져나가야 할 때를 익혀야 한다. 진짜와 가짜 눈을 구별해야 한다. 화점, 천원, 소목, 고목, 외목을 둘 줄 알아야 한다. 비이성적인 탐욕에 눈멀지 않고 경기 흐름을 지배할 수 있게 기세, 즉 투지를 길러야 한다. 비마끝내기. 들여다보기, 협공, 어깨짚기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희생으로 판을 살리는 선수활용도 터득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돌을 계속 내려놓으면서 상대 영토를 줄이고 나의 영토를 최대로 넓히며 승리를 가져와야 한다. - P349

서울 포시즌스호텔에서, 아니면 인터넷 중계로 대국을 보던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해 무섭게 달려드는 미래를 그 순간 부지불식간에 일별했다. 아직은 멀리 있어 희미해 보여도 이미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현재에 영향을 떨치는 미래. 희망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미래. 누군가는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한다고 믿지만, 대다수는 이 광기 어린 꿈이 우리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영원히 머무르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한다고 확신하는 미래. 하지만, 언젠가 우리와 우열을 다툴 지능의 지시에 따르는 인간의 손으로 바둑판 위에 점판암 하나가 올려지는 순간, 그 미래의 첫 메아리는 이미 울려퍼진 후였다. - P360

이세돌은 아주 충동적인 유형의 바둑 기사로 유명했다. 판단을 내리기까지 보통은 일 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언뜻 터무니없어 보이는 알파고의 수 앞에서는 십이 분이 넘게 고민했다. 눈을 끔뻑이며 엄지와 검지 사이의 살을 꼬집었고, 낯선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는 개처럼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생각이 고스란히 얼굴에 묻어났다. "초반에는 실수가 잦다 싶었어요. 알파고가 계속 우위를 점하 고는 있었지만 나도 만회하고 있었지요. 이후로도 알파고가 계속 실수하길래 ‘승산이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 기계도 아직 불완전하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수가 나온 겁니다. 실제 대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흑돌이 거의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거든요. 거기에 돌을 둘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37수를 그렇게 둔 거죠. 그때 나에게 기회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때 알파고는 일부러 공간을 내준 것이었어요. 머릿속에 이미 그 수를 생각해두었기에 다른 곳에 여지를 허용한 것이죠. 그냥 내가 갖게 내버려둔 거예요. 알파고가 나를 속였습니다. 그 수가 놓인 순간, 나는 끝난 겁니다. 승리는 이미 알파고의 것이었어요."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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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노이만이 침묵에 빠져 친구들이나 가족들과의 대화조차 거부하기 전, 그는 컴퓨터나 기타 기계가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면 무엇이 필요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해야 한다고.

언어를 이해해 읽고 쓰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놀 줄 알아야 한다고. - P303

국제적인 명성과 자국 내 영웅적인 지위로 사람들 앞에서 말할 자신감을 얻은 이세돌은 이후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의 바둑 스타일은 남다른 것, 새로운 것, 나만의 것. 누구도 이전에 생각 못한 것이었으면 한다." 그 무렵 그의 재능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 P326

이세돌은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었으나 겸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최연소로 바둑 최고 단수인 9단에 오른 기사였다. 번뜩이는 기교, 대국을 앞두고 상대를 놀리고 도발하는 버릇, 상대의 자신감을 꺾으려 드는 가시 돋친 말들("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스타일을 어떻게 알겠어요?"), 계속되는 잘난 체("이번 게임은 자신이 없다. 질 자신이"),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허세는 적뿐만이 아니라 팬을 끌어모았다. 세계 최고의 바둑 기사가 누구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세계 최고다. 나는 누구의 그늘에도 가려진 적이 없다. 기술에 있어서 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는 전설로 남고 싶다. 바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나의 대국이 오래 살아남기를, 예술작품으로 연구되고 회자되기를 바란다." 그의 대국 방식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위험이었다. - P327

그는 무척 성실하게 훈련했으나 무엇보다 자기 창의력에 가장 의존했다. "나는 생각하지 않고 바둑을 둔다. 바둑은 게임도, 스포츠도 아닌, 하나의 예술이다. 체스나 쇼기 같은 게임은 판 위에 모든 말을 두고 시작하지만, 바둑은 빈 판으로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흑돌과 백돌을 추가하며 두 명의 기사가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바둑의 무한한 복잡성은 무에서 비롯된다." - P328

지금껏 눈 뜨고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을 바둑에 바치느라 놓친 것들이 아쉽지는 않은지, 사실상 정규교육이란 걸 받지 않았고 초등학교조차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은퇴를 앞두었는데 곧 닥쳐올 일에 맞설 준비는 되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바둑이야말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대답했다. 바둑의 무한한 복잡성은 인간 정신의 내적 작동 방식을 거울처럼 비추며, 바둑의 전술과 수수께끼와 풀 수 없어 보이는 난해함이 바둑을 우리 우주의 아름다움, 혼란, 질서와 유일하게 비견할 인간의 창조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누군가 바둑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돌의 위치와 관계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형세에 숨겨진, 거의 감지할 수조차 없는 패턴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게 신의 정신을 들여다보는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본다." 이세돌에게는 승패보다도 바둑의 가장 심오한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따라서 모든 수를 전부 이해하기 전까지는 절대 게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 P329

허사비스는 체스 상금으로 코모도어사의 아미가 Amiga 컴퓨터를 장만한 뒤 그걸로 코딩을 독학했다. […] 열한 살이 되어서는 처음으로 인공지능 에이전트를 만들었다. 능력은 아주 제한적이어서 바둑을 극도로 단순화한 버전인 리버시 게임을 겨우 할 정도 였으나, 데미스는 자신의 디지털 피조물이 동생을 다섯 판 연속으로 이기는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동생은 겨우 다섯 살이었으므로 유의미한 상대라 할 수는 없었으나, 데미스는 자신이 창조한 작은 AI가 자기 정신의 일부를 외면화한 듯 보인다는 사실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의 프로그램은 버그가 너무 많아 자꾸만 충돌을 일으켰고 컴퓨터를 과열시켰는데, 바로 그 점이, 독자적인 생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말하자면 약간의 개성을 프로그램에 부여한 듯했다. 스스로 판단해 수를 두며 게임을 진행한다는 사실보다는, 데미스가 아무리 노력해도 풀 수 없고 완벽히 없앨 수 없는 이상한 루프에 논리 회로가 엉키면서 나타나는 여러 결함과 변덕과 이해할 수 없는 실수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멈춰버리는 버릇이 그러한 인상을 주었다. - P332

왜 그렇게 졌지? 덴마크 남자보다 실력은 한 수 위였는데. 정신이 조금 딴 데 팔렸던 게 문제였다. 몇 달씩이나 맹훈련하고 대회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날이 갈수록 체스보다 더한 강박관념에 잡아먹혀 가끔은 한밤중에도 잠을 못 이루고 근본적인 질문을 고민했다. 불면증에 시달리며 어둠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작은 손전등을 들고 과학소설을 읽었다. 여동생과 남동생이 각자 침대에서 곤히 잠자는 동안 데미스는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집에서 설거지할 때나 숙제할 때. 핀칠리 센트럴 지하철역에 있는 아버지 가게에서 고장난 장난감을 조립할 때, 언제나 그는 자기 생각에 관한 생각을 했다. 그의 별난 지능의 뿌리는 어디서 시작 됐을까? 어떻게 그렇게 빨리 배울 수 있었지? 왜 그리 숫자를 잘 이해하는 걸까? 체스판에 펼치는 수와 전술을 어떻게 다 생각해냈을까?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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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손대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방대한 지식의 지형에 자취를 남겼기에 만약 정말로 세상이 그를 잊으려면, 어마어마한 지각변동이 일어나야 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기이한 지식의 망각은 집단 기억의 깊고 자발적인 퇴색으로 탄생할 피치 못할 암흑기의 귀환을 처음 알리는 사건이 될 것이다. 남편과 살면서 나는 그의 명성이 무로 돌아가려면 문명이 몰락하는 수밖에 없다고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그가 남긴 업적은 실로 대단해서 한 인간의 성취라기보다 신이 일으킨 발작의 흔적, 별 볼 일 없는 신이 세상을 갖고 놀다가 쏟아놓고 간 창조물에 더 가까웠다. - P245

조니에 관해서는 무엇도 장담할 수가 없다. 천상의 존재가 지상에 내려오는 것은 정반대 존재들의 행복한 만남도, 물질과 영혼의 기쁜 합일도 아니다. 그것은 강간이며, 폭력적인 잉태이다. 갑작스러운 침략이자 훗날 희생으로 정화되어야 할 폭력. 조니가 생물학에 손대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가 그걸로 무얼 하게 될지 진지하게 걱정했었다. 수학이나 물리학과 달리 생물학이라는 영역은 여전히 논리의 손길 바깥에서 우리가 길들일 수도, 써먹을 수도 없는 우연과 혼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생물학적 존재들은 정신없이 복잡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히 이해 못할 리듬 안에 갇힌 채, 경이로운 무질서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몸과 마음 역시 그와 같은 조화로 형성되고 움직인다. 고통스럽지만 대다수가 받아들이는 이 단순한 진실이 나의 사랑하는 남편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어떤 대상을 통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면 그는 격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 P247

인간이 날씨를 정확히 예측하리라는 남편의 낙관은 철저히 매니악과 같은 컴퓨터 능력에 기댄 것이었다. "안정적인 과정은 예측하고, 불안정한 과정은 통제해야 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조니의 말을 믿었다. 그는 어떤 것에 관해서든 틀리는 법이 없었으니까. - P255

조니가 인사불성으로 취한 건 처음이었다. 그는 아주 요란한 모임에서도 용하게 제정신을 유지했다. 밤낮으로 술을 마시면서도 정신을 놓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 아래에서 잠든 그는, 커다란 머리 때문인지 물뇌증을 앓는 아기처럼 연약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나의 소꿉친구가 이제 죽음을 향해 붕괴하고 있음을, 아니길 바라지만, 아마도 광기에 빠져들 운명임을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이 슬펐으나, 한편으로는 약간 마음이 놓였고 그 사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래, 야노시도 결국 인간이었다. 천재이지만, 우리처럼 취한 바보이기도 했다. - P274

"우리는 둘 다 성질이 더러워. 그래도 덜 싸워보자. 나는 내 끔찍한 성질머리의 한계 안에서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당신 이 행복했으면 해. 최대한 많이, 최대한 자주." 아빠는 클라리와 막 결혼했을 때 이런 편지를 적어 보냈다. "당신은 당신에게 모질었던 삶을 두려워하지······ 당신이 산들바람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건 뒤에 몰려오는 폭풍을 감지하기 때문이고······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줬어. 당신을 괴롭히고 아프게 했지! 그래도 부디, 제발, 조금만 나를 믿어주길······ 그게 아니라면 자애로운 중립이라도." 아빠의 잘못이라고 판명된 일들에 대한 사과와 클라리에게 구하는 용서는 편지의 단골 주제였다. 클라리가 보기에 아빠는 올바르게 행동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우리는 왜 함께 있으면 싸우는 걸까? 난 당신을 사랑하는데. 내가 그렇게 넌더리 나게 싫은 거야? 그냥 서로를 용서하자!" - P281

아빠는 거의 마지막 순간 까지도 이성과 뛰어난 능력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아빠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다른 모든 생각을 몰아냈다. 아빠는 생각하는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그려보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따라서 마침내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품위를 전혀 보이지 못했다. 오히려 아빠는 죽음이란 게 남들에게만 벌어지는 일인 양, 그래서 자신은 죽음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듯, 그렇게 죽음에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어린애처럼 굴었다. 아빠의 의식은 뛰어넘을 수도, 그 너머를 바라볼 수도 없는 한계에 부딪혀 움츠러들었고, 아빠는 거칠게 반항했다. 여러 이유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숱하게 봐왔지만, 흐려지는 정신으로 고통받는 아빠만큼 힘겨워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아빠의 병세가 빠르게 나빠질 것이며 결국 목숨을 앗아가리란 것을 이미 다들 알고 있던 무렵,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은 적이 있다. 소련에 핵 공격을 먼저 단행해 수많은 이를 몰살할 방안을 태연히 고안했으면서, 자기 죽음을 대면할 때는 왜 평정심과 품격을 차리지 못하느냐고 말이다. "그건 전혀 다른 문제지." 아빠는 대답했다. - P283

아빠는 자기 연구에 관해 말하는 대신, 기괴하고 충격적인 요구를 하나 했다. 유일무이하진 않더라도 금세기 최고의 수학자 중 하나로 손꼽히는 사람에게서 나온 말이기에 더욱 그랬다. 아빠는 무작위로 숫자 두 개를 고른 다음 두 숫자의 합을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갑자기 소싯적 유머 감각이 살아나기라도 한 건가? 웃어넘기려 했으나 아빠는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지난번 방문, 그러니까 한 달 전쯤만 해도 아빠의 정신은 언제나처럼 날카로웠다. 그런데 지금은 기본 산술이나 겨우 할 만큼 천재성이 퇴보하고 만 것이다. 아빠의 광대하던 지적 능력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아빠를 아빠답게 했던 능력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깨달음이 천천히 아빠를 압도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공포의 표정이 아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태어나 본 것 중에 제일로 가슴 저미는 모습이었다. 지켜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던 나는 숫자 몇 개를 겨우 더듬더듬 내뱉었다. 2 더하기 9는, 10 더하기 5는, 1 더하기 1은. 그러다 끝내 울며 병실을 뛰쳐나갔다. - P286

"현존하는 무시무시한 핵전쟁의 가능성이 더 끔찍한 것으로 바뀔지도 모르겠네. 문자 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우리가 설 공간이 점점 좁아지고 있어. 마침내 우리는 지구의 유한한 실제 크기가 미치는 영향을 심각하게 느끼기 시작했네. 기술이 무르익어 찾아온 위기지. 지금부터 다음 세기 초반까지 세계에 불어닥칠 위기는 이전 양상보다 훨씬 더 심각할 거야. 언제, 어떻게 끝날지,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 언젠가 인류의 관심사가 달라져 지금과 같은 과학적 호기심이 멈추고 전혀 다른 것들이 인간 마음을 차지하게 된다고 생각하면 아주 약간은 위안이 돼. 결국 기술은 인간의 배설물일 뿐 대단한 ‘무언가‘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거든. 거미줄이 거미의 일부이듯 기술도 우리의 일부일 뿐이니까. 하지만 기술은 갈수록 빠르게 진보하면서 불가피한 특이점으로, 우리가 아는 인류 역사가 더는 지속되지 못할 티핑 포인트로 나아가고 있는 듯해. 이제 진보는 이해를 초월할 만큼 빠르고 복잡해질 걸세. 기술력은 언제나 양면성을 가진 성과이고, 과학은 지극히 중립적이어서 어떤 목적으로든 쓰일 수 있는 통제 수단을 제공할 뿐 모든 사안에 무관심하지. 어떤 특정한 발명품의 비뚤어진 파괴력이 위험을 초래하는 게 아니야. 위험은 원래부터 내재해 있지. 진보를 치유할 방법은 없어."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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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을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향하는 밀항선을 타려고 먼 길을 걸었던 어머니. 어머니는 어린 여동생을 등에 업고 남동생의 손을 이끌며 경찰의 삼엄한 검문을 빠져나가기 위해 집 근처를 산책하는 척했다. 짐도 음식도 없이 맨손으로 출발해서 애월부터 조천항까지 30킬로미터를 꼬박 걸어 새벽에 밀항선을 탔다. 일본에 도착한 후 항구에서 경찰에 포위되긴 했으나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오사카까지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 사진이 다 무어겠는가. - P156

도쿄에 있던 나의 마음속에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으로서 뻔뻔한 구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미 오륙 년 전부터 제주4.3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어머니의 증언을 조금씩 촬영하면서 어떻게 영화로 만들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다루지 않았던 그 일에 대해 말해야만 데뷔작인 〈디어 평양〉을 겨우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주도에 뿌리를 둔 부모님이 한국을 부정하고 북한을 지지하며 살아온, 논리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이유가 거기 있을지 모른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 P166

가족이란 혈연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절히 믿게 되었다.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기능하는 관계성이 있어야 집합체가 비로소 가족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기억을 공유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비록 당사자는 될 수 없지만, 타인의 삶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윤곽 정도는 알고 싶다는 겸손한 노력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알고자 하는 것이다. 사건과 사실을, 감정과 감상을,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상상과 망상까지도. - P175

1972년 초 도쿄의 조선대학교 문학부에 다니던 건오 오빠는 ‘김일성 주석님의 환갑에 바치는 청년 축하단‘의 일원으로 선정되어 편도 표를 들고 북조선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본인의 희망 여부에 관계없이 대학(조직)에서 선발되어 북조선 이주를 강요 당하는 터무니없는 프로젝트였다. […] 조직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면 김일성을 향한 충성심이 흐려진 증거라고 비난받았다. 조총련 오사카 본부의 중진이던 아버지의 입장을 염려한 건오 오빠는 자신이 거부하면 아버지가 곤란해질 것을 우려해서 ‘인간 선물‘의 일원으로 북에 건너갈 결심을 했다. 어머니는 출발 일정에 맞추기 위해 무아지경으로 짐을 쌌다. 후일담이지만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당시 부모님에게 ‘아들을 모두 바쳐 충성심의 모범을 보여라‘고 다그친 조총련 중앙 간부는, 자기 자식은 귀국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 P181

기억을 잃어가던 어머니가 김일성을 기리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잔혹하고 순수하고 활기차고 사랑스럽고 가엾고 성숙한 소녀 같았다. 인간의 불가사의한 면모가 응축된 이 장면은 〈수프와 이데올로기〉 118분 중에도 가장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떠올릴 때마다 숨이 답답해질 정도다.
살아가다 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픈 상황들을 조우한다. 그 순간을 카메라가 포착할 때 기적 같은 장면이 탄생하고, 그 작품을 보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다. 잔인한 이야기다. - P194

어떻게든 초상화를 치우는 장면을 넣고 싶었다. 넣어야 했다. 나 자신과의 결별로서, 새롭게 걸어나가기 위한 생의 마디로서. 낡 은 시대에 고하는 결별이자 가족과의 결별이기도 했다. ‘그런 시대는 이제 끝냅시다!‘ 하는 결별. 평양에 있는 가족이 걱정되지 않을 리가 있을까.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더 가족과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에 가족이 있어서 아무 말 못 했던 시대를 끝내고 싶었다. 이제 충분하지 않나. - P198

오사카의 영화관에서 〈가족의 나라〉를 본 어머니는 "네 각오는 알겠다. 앞으로 딸이 하는 일에 말 보태지 않을 테니까 건강만 조심하고"라고 했다. 그 후 매달 인삼과 마늘을 듬뿍 넣은 닭 백숙을 만들어 도쿄로 보내주었다.
오사카 집에 더 이상 초상화는 없다. 알츠하이머로 귀국 사업‘이라는 말도 잊어버린 어머니다. 어머니는 나와 남편을 포함한 가족 모두가 함께 있다는, 당신의 삶일 수 없었던 시간을 살고 있었다. 점차 온화해진 어머니는 매일 그림책을 보면서 당신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와 남편은 어머니의 어떤 이야기에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P199

"어릴 때 오빠들이랑 헤어져서 너도 외로웠겠다."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처음이었다. 여섯 살 소녀한테서 오빠 셋을 빼앗는 건 학대라고 했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P207

TV도 음악도 시끄럽다고 싫어했다. 거실 의자에 조용히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거나 콧노래를 불렀다. 카오루가 어머니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거나, 어머니가 그림책을 보며 그 자리에서 만든 이야기를 카오루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의자에 앉은 채 까무룩 잠이 들면 어머니 곁을 지키며 다다미에 앉아 있던 카오루도 잠을 잤다. 마치 옛날부터 어머니와 카오루와 나, 세 식구가 함께 살아온 듯한 착각에 빠질 만큼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 P208

기도는 어머니의 일상이 되었다. 손을 모으고 있을 때 어머니의 표정은 온화하고 상냥했다. 손을 모으는 움직임, 모은 손을 푸는 움직임, 그 모든 행동이 우아했다. 기도란 무엇일까? 교회도 절도 신사도 가지 않고, 계속 자신이 사용하던 거실 의자에 앉아 손을 모으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때까지 내 안에 있던 ‘기도‘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렸다.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형식에 구애받지도 않는, 근원적인 ‘기도‘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해온 모든 행위가 기도였던 것이 아닐까. 남편을 바라보고, 아이들을 안아주고,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깨우고 꾸짖고 칭찬하는 그 모든 것이 기도였다는 생각이 비로소 든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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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 카메라 꺼. 셧다운! 셧다운!" 갑자기 선화가 캠코더를 끄라고 말했다. 비밀스럽고 심각한 상황인 걸까, 심장이 멎을 듯 바짝 긴장했다. 나는 캠코더를 껐다.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낼지 상상도 안 갔다.
"고모는 지금까지 어떤 연극을 봤어?" 선화는 호기심 가득한 생기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내 귀를 의심했다. 아주 일반적인, 사건성이라곤 없는 평범한 질문에 맥이 빠졌다. 이 아이는 이런 질문을 하려면 캠코더를 꺼야겠다고 판단했구나. 고작 연극에 관한 대화일 뿐인데 녹화를 하면 문제의 소지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춘기 소녀가 이렇게까지 위축되어 살아가야 하는 감시 체제란 대체 무엇인가. 이토록 민감하게 상황을 의식하는 아이에게 계속 렌즈를 들이댄 나의 무신경함이 부끄러웠다. 선화가 살아가는 불합리한 사회를 떠올리자마자 마음에 그늘이 드리웠다. - P132

아버지의 얼굴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는 어머니, 치아에 묻은 얼룩을 칫솔로 떼어주는 어머니, 욕창이 없는지 살펴보는 어 머니, 잠옷과 시트가 조금이라도 더러워지면 바로바로 갈아주는 어머니, 더러운 기저귀를 갈면서 ‘잘했네!‘ 하고 기뻐하는 어머니······.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도 이렇게 키워주셨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 P137

가족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동시에 큰 책임감이 밀려왔다. 언젠가 어머니가 몸져눕는다면, 어머니에게 치매가 온다면 어떨까. 어머니의 생애 마지막 순간들이 어떨지는 오롯이 나에게 달려 있었다. 나의 감정, 나의 도량 그리고 나의 경제력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완벽하게 간호하려는 어머니를 보조하면서 내 삶은 이미 파탄 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여력이 없었다. 언제쯤이면 혼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가족에게서 해방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또다시 죄책감에 시달렸다. - P139

어머니는 오랫동안 뚜껑을 덮어두었던 기억들을 꺼내, 조금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주4.3사건에 대한 어머니의 회고는 왜 오사카에 제주도 출신자가 많은지, 쓰루하시란 어떤 장소인지 알려주었다. 설마 어머니의 가라오케 친구인 ‘고씨 아줌마‘가 제주4.3사건의 생존자였을 줄이야.
"고씨 아줌마는 나보다 훨씬 더한 경험을 했어. 그러니까 한국을 지지하는 남편과 싸워가면서 조총련 부인부 활동을 그래 열심히 했지. 남편이 반대해도 아이들을 조선학교에 보냈고. 노래는 못해도 신념은 참 곧은 사람이야." 어머니의 말은 놀라웠다. 개인의 선택에는 모두 각자의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재인식했다. - P148

서로를 존중하며 배려하는 부모님이 부러운 한편, 자신들의 개인숭배에는 의문을 품지 않으면서 타인이 소속된 종교는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위화감을 느꼈다. 집에서도 정치적 지향성이 뚜렷한 노래를 부르는 부모님 모습은 좋게 말하면 앞뒤가 다르지 않은 순수의 화신으로, 나쁘게 말하면 시야가 좁은 맹신자로 보였다. - P152

인간은 어린 시절 반복해서 들었던 노래를 잊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도 초등학교 때 매일 TV에서 들었던 가요를 지금도 기억 한다. 아이돌 가수의 노래는 안무까지 선명하게 떠올라서 춤도 똑같이 따라 출 수 있을 정도다. 몇 번이고 거듭해서 들은 문장이나 멜로디는 세포에 스며드는 것이 아닐까. 옛 CM송이 멋대로 입에서 흘러나올 때도 있다. - P153

아버지가 병실에 누워 있을 때는 한국의 옛 가요에만 미소를 지었다. 북조선 노래와 조총련 노래에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사는 떠올리지 못해도 무너진 음정으로 〈목포의 눈물〉을 따라 부르려고 소리를 냈다. 어머니와 나도 함께 불렀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았고 어머니는 당신 손으로 박자를 맞췄다. 한국의 옛 가요만이 아버지와 공유할 수 있는 노래가 된 것이었다. 5년 하고도 반년의 투병 생활 동안, 셋이서 〈목포의 눈물〉을 몇 번이나 불렀을까. 어느새 이 노래는 내 몸에도 스며들게 되었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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