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 카메라 꺼. 셧다운! 셧다운!" 갑자기 선화가 캠코더를 끄라고 말했다. 비밀스럽고 심각한 상황인 걸까, 심장이 멎을 듯 바짝 긴장했다. 나는 캠코더를 껐다.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낼지 상상도 안 갔다. "고모는 지금까지 어떤 연극을 봤어?" 선화는 호기심 가득한 생기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내 귀를 의심했다. 아주 일반적인, 사건성이라곤 없는 평범한 질문에 맥이 빠졌다. 이 아이는 이런 질문을 하려면 캠코더를 꺼야겠다고 판단했구나. 고작 연극에 관한 대화일 뿐인데 녹화를 하면 문제의 소지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춘기 소녀가 이렇게까지 위축되어 살아가야 하는 감시 체제란 대체 무엇인가. 이토록 민감하게 상황을 의식하는 아이에게 계속 렌즈를 들이댄 나의 무신경함이 부끄러웠다. 선화가 살아가는 불합리한 사회를 떠올리자마자 마음에 그늘이 드리웠다. - P132
아버지의 얼굴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는 어머니, 치아에 묻은 얼룩을 칫솔로 떼어주는 어머니, 욕창이 없는지 살펴보는 어 머니, 잠옷과 시트가 조금이라도 더러워지면 바로바로 갈아주는 어머니, 더러운 기저귀를 갈면서 ‘잘했네!‘ 하고 기뻐하는 어머니······.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도 이렇게 키워주셨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 P137
가족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동시에 큰 책임감이 밀려왔다. 언젠가 어머니가 몸져눕는다면, 어머니에게 치매가 온다면 어떨까. 어머니의 생애 마지막 순간들이 어떨지는 오롯이 나에게 달려 있었다. 나의 감정, 나의 도량 그리고 나의 경제력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완벽하게 간호하려는 어머니를 보조하면서 내 삶은 이미 파탄 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여력이 없었다. 언제쯤이면 혼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가족에게서 해방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또다시 죄책감에 시달렸다. - P139
어머니는 오랫동안 뚜껑을 덮어두었던 기억들을 꺼내, 조금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주4.3사건에 대한 어머니의 회고는 왜 오사카에 제주도 출신자가 많은지, 쓰루하시란 어떤 장소인지 알려주었다. 설마 어머니의 가라오케 친구인 ‘고씨 아줌마‘가 제주4.3사건의 생존자였을 줄이야. "고씨 아줌마는 나보다 훨씬 더한 경험을 했어. 그러니까 한국을 지지하는 남편과 싸워가면서 조총련 부인부 활동을 그래 열심히 했지. 남편이 반대해도 아이들을 조선학교에 보냈고. 노래는 못해도 신념은 참 곧은 사람이야." 어머니의 말은 놀라웠다. 개인의 선택에는 모두 각자의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재인식했다. - P148
서로를 존중하며 배려하는 부모님이 부러운 한편, 자신들의 개인숭배에는 의문을 품지 않으면서 타인이 소속된 종교는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위화감을 느꼈다. 집에서도 정치적 지향성이 뚜렷한 노래를 부르는 부모님 모습은 좋게 말하면 앞뒤가 다르지 않은 순수의 화신으로, 나쁘게 말하면 시야가 좁은 맹신자로 보였다. - P152
인간은 어린 시절 반복해서 들었던 노래를 잊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도 초등학교 때 매일 TV에서 들었던 가요를 지금도 기억 한다. 아이돌 가수의 노래는 안무까지 선명하게 떠올라서 춤도 똑같이 따라 출 수 있을 정도다. 몇 번이고 거듭해서 들은 문장이나 멜로디는 세포에 스며드는 것이 아닐까. 옛 CM송이 멋대로 입에서 흘러나올 때도 있다. - P153
아버지가 병실에 누워 있을 때는 한국의 옛 가요에만 미소를 지었다. 북조선 노래와 조총련 노래에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사는 떠올리지 못해도 무너진 음정으로 〈목포의 눈물〉을 따라 부르려고 소리를 냈다. 어머니와 나도 함께 불렀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았고 어머니는 당신 손으로 박자를 맞췄다. 한국의 옛 가요만이 아버지와 공유할 수 있는 노래가 된 것이었다. 5년 하고도 반년의 투병 생활 동안, 셋이서 〈목포의 눈물〉을 몇 번이나 불렀을까. 어느새 이 노래는 내 몸에도 스며들게 되었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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