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직공이 되라 - 건전한 성경 해석의 비결 자세히 읽기 시리즈 1
김지찬 지음 / 생명의말씀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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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은 긴장하고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무척 ‘쉽게’ 풀어가고 있다. 공부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그냥 이야기를 듣는 느낌! 게다가 성경의 예, 신학의 예만이 아니라 그에 앞서 일반적인 내용들을 예로 들고 있어서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오히려 한 편으로는 ‘내가 신학 책을 읽고 있는 건가?’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평소에 생각해오던 ‘신학적/성경적 주제’를 ‘쉽게 쓰기’에 매치되는 책이다! 신학 책이라고 해서 꼭 어려워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편으론, ‘좀 가볍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 구어체 분위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어체 표현이 눈에 거슬린다. 특히 “아니 된다”라는 표현! 기왕 구어체로 글을 쓰려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 이 책의 목적은 29페이지에서 제시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추구하려는 목적은 한가지이다. 성경 기자가 탁월한 시인과 수사학자인 만큼, 성경 해석자인 우리도 시인과 수사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이 목적에 매우 ‘충실’하게 전개되어 간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도(355페이지 이하) 이 부분과 관련하여 결론과 적용을 내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도 언어의 직공이 되어야 한다. 성경 기자가 언어적 설득 장치들을 탁월하게 구사한 언어의 장인이라면, 우리는 이를 찾아낼 줄 아는 능력을 구비해야 한다.

① 우선 이것을 위해서 성경 기자가 탁월한 언어의 예술가였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언어의 직공이 되는 첫 번째 길이다.

② 두 번째로 언어의 직공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 기자가 사용한 언어 장치들을 통해 그가 본 것을 볼 줄 아는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

③ 세 번째로 이런 상상력을 소유한 언어의 직공이 되기 위해서는 언어와의 치열한 싸움이 있어야 한다.

④ 네 번째로 언어의 직공이 되려면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성경 해석의 문제는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생명이냐, 죽음이냐, 선택을 요구하는 삶과 행위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직공이 되는 것은 삶의 직공이 되는 것이리라.”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의미에 대한 판단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본문에 깔아놓은 저자의 의도의 단서들을 열심히 살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많은 성경 해석자들은 이 작업을 소홀히 하였다. 한 번의 독서에서 얻은 첫인상에 근거하여 쉽게 본문의 의미를 결정한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신학교 교수인 고든 피(Gordon D. Fee)와 더글러스 스튜어트(Douglas Stuart)는 “대학과 신학교 강단에서 수년간 경험한 바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본문을 잘 읽는 단순한 일도 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털어 놓는다.

인간의 언어는 다중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중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이를 해석하기 위해서 천천히 시간을 들여야 함을 의미한다. 요모조모로 뜯어보고, 곱씹어 보아야 한다. … 그러나 우리는 성경 본문을 대할 때 요리저리 뜯어가며 생각하는 자세를 갖지 않는다. 너무나 조건 반사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으레 알고 있는 내용이거니 생각하고, 건성건성 읽는다.

알프레드 코집스키(Alfred Korzybski)는 인간이 기호에 보이는 반응을 신호 반응(signal reaction)과 상징 반응(symbolic reaction), 혹은 의미 반응(semantic reaction)으로 나누었다. 신호 반응은 모든 동물이 보이는 조건 반사적 반응이다. 이 반응은 생각할 틈도 없이 일어나는 반응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신호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 성경을 대할 때 신호 반응보다는 의미 반응을 보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자세히 읽는 것뿐이다.

언어의 층에 대한 이해 없이는 본문 안에 들어 있는 어떤 요소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 언어의 층에 대한 세밀하고도 다각도적인 연구가 부족하였다. 그저 사전을 이용해 단어를 찾아내고 번역을 한 다음 바로 신학적 내용이나 역사적 내용에 대한 연구로 넘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나의 물건을 표현하는 데는 하나의 언어밖에 없다는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을 굳이 들먹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새로운 인식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언어의 형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성경 기자가 전달하려는 내용(신학적, 역사적)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이 될 수도 있는데, 단지 그 중에서 한 가지를 그저 선택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5-7) - 아주 설득력이 있다!!

 

2. 성경 기자가 전달하려는 신학적 역사적 내용은 여러 가지 방시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데 단지 그 중에서 한 가지를 그저 선택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가 전달하려는 정확한 내용은 그가 실제 선택한 언어적 형식으로만 표현이 가능했기에 그런 형식을 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가 취한 언어적 형식을 통해 그가 하려는 말을 표현했다고 보기보다는, 그가 택한 언어적 형식 자체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구체적이고도 정확한 내용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16) - 흠…

 

3. 어거스틴은 창세기 10:9의 “니므롯이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라고 할 때 “여호와 앞에서”란 표현을 가지고 고민을 하였다. 헬라어로는 ‘엔안티온 퀴리우 투 데우’인데 “앞에서”란 의미의 전치사 ‘엔안티온’이 때로는 “대항하는”이란 의미로도 쓰인다. 이 때문에 어거스틴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라고 번역해야 하는지, 아니면 “여호와에게 대항하는 특이한 사냥꾼”이라고 번역해야 하는지에 대해 길게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논의는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쓸데없는 것임이 드러난다. ‘엔안티온’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전치사 ‘리프네’는 “대항하는”의 의미가 없이 항상 “앞에서”의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거스틴이 히브리어로 이 본문을 읽었다면 이런 식의 번거로움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23) - 어거스틴이 큰 교부이기는 하지만 그가 성경의 원문을 모르고 라틴어 성경만을 읽었다는 점은 깊이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다.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내용들을 얼마나 놀랍게 다루었는가 하는 찬탄과,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의 본래적인 의미와 무관한 사색도 많이 있지 않겠느냐는 염려를 함께 느낀다.

 

4. (성경) 문예성에 대한 지식 없이는 순수한 신학은 결코 제자리에 설 수가 없다. 문자들에 대한 이해가 시들어지고 쇠퇴할 때, 신학 또한 비참하게 쓰러지고 쇠퇴하게 된다. 마치 세례 요한을 보내셔서 준비를 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언어와 문자를 먼저 흥왕시킨 다음에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셨다. 가능한 한 많은 시인들과 수사학자들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이 같은 연구를 통해서만 거룩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고 능숙하게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분께서는 여러분의 젊은이들에게 시와 수사학을 열심히 하도록 권면하시기를 바란다.(25) - 저자의 말이 아니다. 마틴 루터의 말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두 가지가 떠올랐다.

하나는, 얼마 전에 읽었던 백금산의 [큰 인물 독서법]에 나온 존 스튜어트 밀에 교육에 대한 내용이다. 그는 학교에 다니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는데 어려서부터 헬라어를 배워서 헬라 원전들을 읽었고, 8살 때부터인가는 라틴어를 배워서 라틴 원전을 읽었다고 한다. 이런 철저한 교육을 바탕으로 했기에 그에게서 놀라운 저작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는 지금 읽고 있는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에 나오는 몽테뉴에 대한 내용이다. 몽테뉴 역시 어려서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에 아버지가 프랑스 말을 모르는 독일인 교사를 불러서 라틴어를 배우게 했고 그의 주위에서는 아무도 프랑스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 아예 라틴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세계적인 학자가 나올 수밖에 없음을 보게 된다. 어려서부터 히브리어 헬라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받은 사람이 신학을 한다면 얼마나 대단할까! 결혼 초에는 ‘아들을 낳으면 어려서부터 히브리어, 헬라어를 가르쳐야지!’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는데… --;;

 

5. 성경 해석자들은, 최근까지는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에 소리의 부분에 대해 관심을 많이 기울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소리는 의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중립적 용기가 아니다. …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는, 본래 언어는 사고나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감동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말하는 자의 감정과 감동을 알려면, 이를 표출하는 기본 장치인 소리에 민감해야 한다.(35) - 소리… 히브리어, 헬라어의 발음이나 억양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중국 사람은 다양한 억양에 익숙하니 유리할까? ^^;

 

6. 이것은 주로 읽혀질 목적으로 기록된 구약성경 본문에는 더 더욱 잘 들어맞는다. 구약성경 본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오랜 구전(口傳) 단계를 거쳤을 뿐 아니라, 기록된 문서도 읽혀질 목적으로 성문화된 것이기에, 우리는 성경 본문이 지니는 소리의 차원에 대해서 무관심해서는 아니 된다. 특별히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흔히 성경을 큰 소리로 읽었다. 다시 말해서 성경 본문은 원래 눈으로 보도록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귀로 듣도록 기록된 것이다. … 따라서 소리의 요소는 현대의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성경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유대인들이 지금까지도 그들의 성경을 미크라(reading aloud, 크게 읽기)라고 부르는 것은 이에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 성경 학도들은 성경을 눈으로 읽는 데 익숙해 있을 뿐, 소리를 내어 읽는 것은 등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읽도록 의도된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성경 해석자들과 설교자들은 원문을 읽고, 원문의 소리가 메시지 전달에 끼치는 효과를 살펴보는 훈련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38) - 성경이 ‘읽혀질 목적으로 기록’되었으며 ‘귀로 듣도록 기록’되었다는 것은 중요하다. 현대의 책과는 그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부분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7.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는 성경 기자의 결론은 때늦은 헌신이라도 헌신이 아주 없는 것보다는 나음을 보여 줌으로 늘상 때를 놓치는 우리에게 또 다른 희망이 되고 있다.(76)

 

8. 문장에서는 이차적인 의미, 즉 함축적이고 비유적인 의미가 일차적인 의미, 즉 일상적이고 문자적인 의미보다 중요하다. … 비유적 언어의 사용은 문장의 핵심적 의미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비유법은 일반적 의미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하나의 대상 또는 사상과 접촉을 가지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언어를 서술적으로, 기술적으로 사용하는 데만 익숙하기 때문에 비유적 언어를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늘날 일반인들은, 언어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실의 언어와 감성적이고 시적인 비유적 언어로 구분되어 있다는 고정 관점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비유적 언어는 실재를 바루고 묘사하는 데는 부족한 수단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비유적 언어의 사용은 언어의 기능상 필수적인 것이며, 시 뿐 아니라 모든 양식의 글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 인간의 언어는 어떤 수식도 없이 그저 사실의 언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비유적 형상을 옷 입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가장 사실적인 데에 바탕을 둔 지적 활동에서조차 비유가 존재한다.(102, 104)

 

9. 비유는 지식의 가장 귀한 원천 가운데 하나이며, 알려진 것으로부터 미지의 것으로 나아가는 왕도이다. 비유는 일상적인 언어로 이루어져 있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신학적 용어가 비유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105)

비유란 일종의 렌즈이다. … 렌즈는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것을 보게 해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렌즈를 통해 그것을 본 다음에는 그 렌즈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비유라는 렌즈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얻고, 하나님에 대해 친숙하게 되는 것이다. 비유는 새로운 인식을 가능케 하는 인식 장치이다.(106)

두 가지 사실이 비교되어 사용될 때에는 모든 면에서 이 둘이 비교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특정한 관점에서 둘이 유사하기 때문에 비교되고 있는 것일 뿐 모든 면에서 둘이 유사하다는 점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 이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109)

 

10. 성경은 종교적 문헌이나 역사 문서로 이해해 왔는데, 이런 문학적 기교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성경은 종교적 문헌이면서 동시에 문학보다 더 문학적인 글이다. 성경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 위에 근거해 있으면서도 독자를 설득시키는 능력은 어떤 세계 문학 고전보다도 탁월하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할 때에 이런 언어적 장치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성경의 성격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성경의 성격에 합치하는 것이다.(111)

 

11. 토끼와 자식, 여우와 마누라의 유사성은 이미 습관화되어 있는 인식이다. 이를 죽은 비유(dead metaphor)라 한다. 상투어가 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인식이 이처럼 습관화되어 있는 비유를 우리는 죽은 비유라고 한다. 사물과 세계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돕기보다는 일종의 상투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의 비유는 당시 고대 근동 아시아의 문헌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신선하고 개성적이며 독창적임을 볼 수가 있다.(114, 121)

 

12. 정의와 공법은 힘 있게 그러나 자상하게 운용되어야 한다. … “정의는 단순한 규범이 아니다. 그것은 투쟁하는 도전이요 쉬지 않는 돌진이다.”(아브라함 조슈아 헤셀) (132-133)

 

13. 은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의 실제 삶을 지배하고, 우리의 세계 인식을 통제하고 있다. 은유는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은유는 사고와 행위의 문제이다.… 결국 은유란 한 종류의 사물을 다른 종류의 사물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비유의 일종이다. … 은유는 표현 기능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사고와 행동을 요구한다. 은유는 이런 점에서 명령적인(injunctive) 힘을 가지고 있다. … 이같은 은유의 힘을 가리켜 ‘자기 달성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의 능력이라고 부른다. 어떤 은유를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인생이 미래가 바뀌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142, 146, 155, 156)

 

14. 이런 강한 신뢰감은 언뜻 보기에 하나님에 대한 무례한 태도로 보이는 요구도 가능케 한다. “여호와여…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시 35:2). 우리는 여기서 상당히 충격적인 표현을 발견한다. 현대 독자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고대 근동 아시아인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방패를 드는 일은 하급자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방패를 드는 일을 부탁하는 것은 하급자의 일을 부탁해도 기분 나빠하지 않을 만큼의 친밀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결구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친히 손 방패를 드시고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며 도우시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은유인 것이다.(160)

 

15. 에센파는 제7일에 노동을 쉬는 문제에 관해서 유대의 어떤 종파보다 엄격하였다. 그들은 안식일 하루 전날에 미리 음식을 장만하였을 뿐 아니라 안식일에는 불도 지피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안식일에는 어떤 그릇도 있던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았으며 학교도 가지 않았다. 그들은 조그만 연장으로 안식일 외의 다른 날에 30cm 가량의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면 빛을 정면으로 받지 않기 위해서 몸을 옷으로 감싼 후에 파놓은 구덩이 안에 들어가 편히 누웠다. 그리고는 파낸 흙을 몸 위에 덮었다. 그들은 이런 일을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에서만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일부러 그런 곳을 물색해 두었다.”(204) - 요세푸스의 기록이다. 특이한…

 

16. 바벨론에 잡혀간 이스라엘 포로들의 상황은 정말 그러하였다. 물론 그들의 포로 생활이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처참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이나 그 밖의 자료들에 의하면 당시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들은 주로 엘리트들이었는데다가, 포로지에서 상당한 자유와 경제적 자립을 누린 것을 되어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 아우슈비츠 같은 집단 수용소를 연상해서는 아니 된다.

바벨로 포로들에게 임한 가장 심각한 위기는 경제적 위기나 정치적 위기나 신체적 위기가 아니었다. 이들의 위기는 정체성의 위기, 신학적인 위기였다. 한때는 여호와는 살아계신 유일하신 참하나님이시요, 자신들은 이 여호와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믿었으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오면서 이 같은 신앙에는 커다란 균열이 일기 시작하였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훼파되고 지성소마저 이방인들의 발에 짓밟히고, 다윗 계열의 왕이 눈이 뽑혀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과연 여호와는 한 분뿐이신 참하나님이신가라는 점에 회의가 들기 시작하였다.(229)

 

17. 우리는 여기서 선지서의 한 특징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상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징을 대할 때 상상력이 필요하다. 마음대로 지어 내는 상상력이 아니라 ‘상징을 뚫어보는 좋은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238)

 

18. 현대 성경 해석자들에게 있어서 알레고리 하면 곧바로 중세 성경 해석자들의 자의적인 영해(알레고리컬한 해석)를 떠올린다. 그러나 앞서 살핀 대로 우리가 여리서 다루고자 하는 알레고리는 풍유적 해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통상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예수께서 행하신 비유도 분류상 알레고리의 영역에 속한다. 물론 이같은 분류에 강력히 반대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지 알레고리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비유와 알레고리를 날카롭게 구분하다 보면, 예수님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구분상 알레고리에 들어가야 할 이야기들이 나온다는 데 있다. 만일 이 둘을 엄밀히 구분하여 비유는 하나의 중심적인 상응점을 보이고, 알레고리는 다양한 상응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씨뿌리는 이야기와 마가복음 12:1-9의 악한 농부들의 이야기는 알레고리에 속한다. 상응점이 여러 개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알레고리와 비유의 구별은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한 영어 학자는 알레고리와 비유는 상호 호환할 수 있는 용어이며 단지 관용어적 차이밖에 없다고 하였다. 물론 이는 너무 지나친 표현이지만,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케어드가 이야기했듯이 알레고리와 알레고리제이션(allegorization, 알레고리화)의 세계를 구분해야 한다. 알레고리는 저자가 숨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런 이야기는 마땅히 숨은 의미를 찾아내야 올바른 해석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알레고리제이션은 원래 저자가 의도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은 숨은 의미를 억지로 이야기 위에 부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원래 알레고리가 아닌 것을 알레고리처럼 해석하는 것이기에 문제가 된다. 결국 여기서도 모든 의미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저자의 의도가 해결의 열쇠이다. 시를 산문으로 해석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산문을 거부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듯이, 알레고리가 아닌 본문을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알레고리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결국 우리는 알레고리와 알레고리제이션의 차이를 인식하고, 한 본문이 알레고리로 쓰였다면 알레고리로 해석하여야 한다.(245-) - 흠… allegory와 allegorazation이라… 토저가 말하는 imagination과 imaginary에 대한 이야기와 비슷하다!

 

19. 문장은 그저 단어들의 합산이 아니다. 훌륭한 글, 독자를 감동시키는 글은 쓴 사람의 세밀한 계산에 의해 쓰여진 글이 대부분이다. 치밀한 구도와 정확한 언어의 선택이 없이는 독자를 설득시키지 못한다. 결국 성경 기자는 독자를 설득시키기 위해 다양한 기법과 기교를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설득 언어 장치를 우리는 흔히 수사법이라고 부른다.”(264) - ‘수사법’이라고 하면 보통 ‘말을 꾸미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것은 그런 ‘꾸밈’이 아닌 더 잘 ‘전달’하기 위한 장치이다. A. W. Tozer는 힘들여 쓴 글일수록 읽기 쉽다고 주장하곤 했는데, 이와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20. 성경에는 풍자와 아이러니가 많이 등장한다. 그 이유는 성경이 산출된 이스라엘의 문화가 수치 지향적인 문화이기 때문이다. 흔히 문화는 수치 지향적인 문화와 죄책 지향적인 문화로 구분된다. 수치 지향적인 문화(shame-oriented culture)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할 것인가가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죄책 지향적인 문화(guilt-oriented culture)에서는 죄를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으면 범죄자는 언제나 사회 안으로 복귀할 수 있다. 반면에 수치 문화에서는 범죄는 비판, 모욕, 거절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런 문화에서는 가장 무서운 것이 조롱이다. 우린 이런 모습을 히브리 성경에서 볼 수가 있다. 조롱거리가 되는 것보다 두려워하는 것은 없다.(290-291)

 

21. 셈족은 흑백으로 구분하는 사고에 능한 이들이다. 서양인들이 “나는 A보다 B를 더 사랑한다”고 표현한다면, 히브리인들은 “나는 A를 사랑하고 B를 미워한다”고 말한다고 볼 수 있다.(309)

 

22. 히브리어에서는 형용사나 부사가 많지 않기에 자칫하면 같은 형용사나 부사가 지나치게 많이 사용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신선감과 충격이 반감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과장법은 진부한 형용사를 효과적으로 대치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324)

 

23.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표현은 오경에 자주 등장한다. … 이 경우 꿀은 벌에서 나오는 꿀이 아니라 포도에서 나오는 꿀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다른 의미로도 해석이 된다. 고대 근동 아시아에서는 젖과 꿀은 신들의 음료요 음식이었다. 그렇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젖과 꿀이 풍요로운 신들의 동산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가나안을 일종의 낙원에 비교하는 것이다.(331-332) - 정중호 교수는 [레위기 만남과 나눔의 장]에서 소제에 꿀을 섞지 말라는 부분을 설명하면서, 여기에서 사용된 꿀이라는 단어는 벌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즙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벌꿀을 가리키는 단어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24. 욥의 이 말(욥 7:17-20)은 시편 8:4-5을 패러디한 것이다.(341) - 하지만 욥기는 시기적으로 시편보다 앞서지 않는가! 먼저 나온 말이 나중에 나온 말을 패러디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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