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멜의 산길
십자가의 성요한 지음, 최민순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7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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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목적은 268페이지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다. “분별 있는 독자는 항상 이 책이 지향하는 목적을 잘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일체 자연의 그리고 초자연의 지각을 통하여 속음과 거리낌이 없이 순수한 믿음 안에서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 이 책은 미완성인 채로 끝난다. 더구나 ‘설교’에 대한 내용을 다루다가 중간에 끝나버리는 바람에 아쉬움도 있다.

* 아빌라의 테레사의 책들을 읽을 때에도 느낀 것이지만, 이들의 저술은 사적이고 친밀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장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정리된 느낌이 덜하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정독’하기에 힘들다. 죽죽 읽어나가게 되지 부분 부분에 집중하여 차근히 읽어나가기가 힘이 든다(관심을 끄는 주제가 나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럼에도 그 가운데서 종종 ‘숨겨진 보화’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기쁨이다!

* 저자가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보면서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하게 된다.

1) 어쩌면 그렇게 적실한 구절들을 뽑아내는지! 아마도 그만큼 성경에 통달하다는 이야기이리라.

2) 하지만 반대로 성경 구절들을 그 원래 의미와 무관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내용에 끼워 맞추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그의 성경 인용 및 해석에는 무리한 부분이 자주 보인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예로 든다면…

① 저자는 제욕이 영혼의 힘을 약하게 한다고 하면서 “그러니 불행하도다, 그 날에 몸가진 여자들과 젖먹이는 여자들은!”(마 24:19)이라는 구절을 인용하고는, “여기 아기뱀과 젖먹임은 욕을 배고 기름을 뜻하니, 이 욕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욕은 항상 영혼의 힘을 앗고, 나무의 곁순처럼 무성해서 영혼을 해치게 된다.”고 말한다(75p). 일반적으로 말해서 욕심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저자가 인용하는 구절은 예루살렘에 심판이 임할 때에 쉽게 피할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여자들은 불행하다는 지적일 뿐이다. 그것은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영혼을 해치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사야는 이를 놀랍게도 저 권위스런 말로 표현했다. ‘하느님이 누구의 모습이라도 닮았다는 말이냐? 어떤 모습이 그를 닮을 수 있다는 말이냐? 대장장이가 부어 만든 우상, 은장이가 금박을 입히고 부어 만든 은사슬을 걸친 우상과 같다는 말이냐?(사 40:18-19)’ 여기 대장장이는 이성을 뜻하니, 영상과 이미지의 쇠를 닦아서 인식을 만드는 것이 이성의 일이다.”(136p).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하다. 하지만 이사야 본문에 나오는 ‘대장장이’를 뜬금없이 ‘이성’을 뜻한다고 말한 것은 저자의 자의적 해석이지 본문의 의미는 아니다.

“저 다윗이 하느님께 어느 때 직접 문의한 것은 자신이 예언자인 까닭이었고, 그럴 때라도 그가 사제의 옷을 입고야 문의했다는 사실이 사무엘 상권에 적혀있다. 다윗에 에비아달 사제에게 ‘에봇을 모셔오게 하였다(23:9)’라는 대문이 거기 나오는데…”(231p). 하지만 다윗이 에봇을 모셔오게 했던 이유는 그가 그 옷을 입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에봇의 가슴 부분에 있는 ‘판결 흉패’와 그 안에 들어있는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이다. 제사장들도 하나님께 물은 뒤 우림이 나오는지 둠밈이 나오는지를 가지고 Yes인지 No인지를 판단한 것이지, 예언이나 하나님께 문의하기 위해서 에봇을 입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청되었던 것이 아니다. 에봇은 오히려 제사장의 복장이지 예언자의 복장도 아니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습니다.(마 18:20)’ … 여기서 주의할 말은 혼자 있는 거기에 내가 있노라 하시지 않음이다. 말하자면 적어도 둘이라야 한다는 뜻인데 아무도 교회나 그 사제들을 제쳐놓고 저 혼자서 무엇을 하느님 일이라 믿거나 따르거나 다짐함은 하느님의 뜻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니, 그런 사람의 마음 안에서 하느님께서 진리를 밝혀주시거나 다져주시지 않는 법이므로 그는 진리에 약하고 냉랭한 채로 있을 것이다.”(234p). 이 말씀이 교회나 사제에 대한 내용으로 해석되는 것을 보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거기 어디에도 ‘둘이나 셋’에 반드시 ‘교회’나 ‘사제’를 포함해야 한다는 암시조차 나타나있지 않은데!

“주께서 어느 영혼에게 형상적으로 (똑똑하게) 말씀하시기를 ‘착하거라.’ 하셨다면 영혼은 그 말씀이 계시자마자 착하게 될 것이다. 또 ‘나를 사랑하라’ 하셨다면 영혼은 즉시 하느님 사랑의 실체를 스스로 가지고 느끼게 되고, 무서워 떠는 영혼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면 당장 마음이 가라앉고 대담한 힘이 솟을 것이다. … 아브라함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으니, 당신이 ‘내 앞을 떠나지 말고 흠 없이 살아라.(창 17:1)’ 하시자 그는 이내 흠 없는 자가 되어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았다.”(282-283p) 저자는 ‘영어의 셋째 형’인 ‘실체적 언어’를 설명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치 천지를 창조하실 적에 사용하신 언어처럼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그런데 그것의 적용은 좀 묘하다. 그가 예로 들고 있는 아브라함의 경우는 더더욱 이상하고 황당하기까지 하다. 그가 하갈과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자 오랜 기간 동안 그에게 나타나지 않으신 하나님이 어느 순간 그에게 나타나 책망조로 온전하게 살 것을 말씀하신 것인데… 저자는 그것이 하나님의 ‘실체적 언어’로 된 말씀이고 즉시로 아브라함이 흠 없는 자가 ‘되었다’고 하니…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하느님의 속성 중에 아름다우심처럼 까맣게 잊혀진 속성도 아마 없으리라.(폴레-기에렌스)”(9) - 번역자가 “독자에게”에서 인용하고 있는 한 구절이다. 토저는 오늘날의 신학에는 ‘Oh!’가 없다고 한탄했다. 정작 하나님에 대해 살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감탄과 찬사가 없이 머리로만 연구할 뿐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신학은 하나님의 전지와 전능, 편재 심지어는 공의와 사랑까지 논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윗과 같은 심정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2. “피조물의 모든 유(有)는 하느님의 무한유(無限有)에 비기면, 무(無)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 무에 집착하는 영혼은, 하느님 앞에 무요, 오히려 무보다 못하다. … 집착하는 영혼은 하느님의 무한유와 절대로 결함되지 못하니, 없는 것이 있는 것과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다.”(46) - 이 부분을 읽으면서 불교의 4성체가 떠올랐다(무의식적으로!). 인생은 고해(苦)인데, 그것은 우리가 욕심을 내기(集) 때문이며, 그 욕심을 제하면(滅) 열반에 이르게 된다(道)는 가르침… 신비주의는, 그리고 신비에 대한 사람들의 철학적 진술은 서로 통하는가?…

 

3. “이 세상의 모든 주권과 자유를 하느님 영의 주권과 자유에 비기면, 그것은 가장 심한 종살이, 고생살이, 볼모살이이다.”(47) - 아!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비하면 노예의지와 같다!!!

 

4. “여기 한 마리의 새가 묶여 있다 하자. 가늘거나 굵거나 간에 묶은 줄이 끊어지지 않아 새가 날지 못한다면, 줄이 가늘다 해도 굵은 줄에 묶인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가는 줄은 끊기가 쉽다. 그러나 아무리 쉽다 해도 안 끊으면 못 나는 법이다. 이와 같이 어느 것에 집착을 끊지 않는 영혼은, 비록 덕이 많다 할지라도 하느님과의 합일의 자유에 도달하지는 못한다.”(79-80) - 집착을 끊어야 함을 설명하면서 든 비유인데, 무척 마음에 든다. 줄이 가늘든 굵든 끊지 않으면 못 난다는 지적! 정곡을 찌르고 있다!

 

5. “영혼이 감성의 밤에 들어가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능동적인 것, 또 하나는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능동적이란, 영혼이 밤에 들기 위한 일을 제 편에서 할 수 있고 실제 하는 것으로서, 다음에 있는 일러두기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수동적이란, 영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다만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일하시고, 영혼은 수동적인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88) - 이 책, [가르멜의 산길]은 능동적인 부분을 다루고, 다음 권인 [어둔 밤]은 수동적인 부분을 다룬다. 한편, 이 부분을 보면서, 이 가르침이 신비주의에서 ‘하나님과의 합일’을 교훈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신학에서 ‘성화’의 신인협동을 연상시키게 된다. [어둔 밤]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신비주의를 너무 ‘신비화’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학이 주로 이성을 도구로 사용한다면, 신비주의는 ‘감성’과 ‘영성’을 사용하는 것일 뿐 실상 지향하는 바는 같은 것 아닐까?…

 

6. “하느님의 빛이 드높고 까마득할수록 그만치 인간 지성에는 어둔 법이다.”(171) - 이와 비슷한 사상이 이 책은 물론이요 [어둔 밤]에서도 반복적으로 지적된다. 왜 이 경험을 ‘어둔 밤’이라고 하는지,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비춰지는 ‘빛’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둔’ ‘밤’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하나님의 빛이 너무 밝기에 오히려 연약한 인간에게는 그것이 어둠처럼 보여진다는 것. 마치 다메섹 도상에서 너무 밝은 빛을 본 사울이 오히려 눈이 멀어버린 것처럼!!

 

7. “하느님께서는 마치 샘과 같으셔서 사람은 저마다 제 그릇대로 그 물을 푸기 마련인데 때로는 이상한 대롱으로 물을 퍼내게도 하신다. 그러나 하느님 당신이 아닌 그런 것으로 물을 퍼냄은 옳지 못하니,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사람에게 그리고 원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뜻에 구애됨이 없이 주실 수 있으시다.”(217) - Amen! 나는 무엇을 가지고 그 물을 푸고 있을까?

 

8. “그러나 그들이 문의하지 않았던들 잘못할 뻔했고 또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금과 같이 은총의 신약 시대에 와서는 어찌하여 옛날같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한 그럴 법한 답변은 아래와 같다. 구약 시대에 하느님께 문의함이 옳았고, 사제들과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시현과 계시를 원함이 무방했던 그 주요 원인은 그 당시엔 아직 믿음의 바탕이 잘 굳어지지 못했고 복음의 율법도 미처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느님께 묻는 것이 필요했고, 한편 당신은 말씀, 시현, 계시, 또 형상 따위 아니면 다른 여러 가지 상징으로 일러주시는 것이 필요하였다.

… 그러나 지금은 은총의 시대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 믿음의 바탕이 굳어지고 복음의 율법이 나타났으니, 구태여 저런 식으로 문의할 까닭이 없고 옛날처럼 당신이 말씀하시거나 응답하실 까닭도 없다.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당신 아드님 - 즉, 둘이 아닌 오직 하나인 당신 말씀 -을 주심으로써 일체를 우리에게 한꺼번에 그리고 단 한 번에 말씀하신 것이니, 다시 더 말할 것을 지니지 않으신 까닭이다.

성바오로가 히브리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에 의한 예전 식대로 하느님과 사귀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께 눈길을 모으라 한 것도 이 뜻이었으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예전에는 여러 번 여러 모양으로 예언자들을 통해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 1:1-2)’ 이 말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하느님께서는 말없이 계시고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는 것이니, 옛날엔 예언자들에게 부분적으로 말씀하시던 것을 이제는 당신 아드님이신 ‘전부’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그분을 통하여 다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오늘에 이르러 아직도 하느님께 문의한다든지 어떤 시현이나 계시를 받고 싶어 한다든지 하는 사람은 바보짓을 할 뿐 아니라 하느님을 욕되게 하리니, 그리스도 하나만을 우러러보지 않고 다른 엉뚱한 것, 신기한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그를 어여삐 여겼노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 17:5)’고 말한 그때로부터 그 전에 하던 대답이나 가르치던 일체에서 손을 떼고 이분에게 넘겨주셨으니 이분의 말씀을 들으라. 다시 더 계시할 신앙도 나타낼 아무것도 내게는 없다.

… 그러므로 옛날식으로 하느님께 물음은 마땅치 않고 당신이 말씀하실 필요도 없으니, 일체 신앙의 진리를 그리스도 안에 말씀하신만큼 계시할 진리가 다시 더 없고 앞으로도 있을 리 만무하다. 따라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아직도 무엇을 초자연의 길로 받고 싶어 한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게 모든 것을 충분히 아니 주신 양 하느님R 모자람이 있다고 주장함이니, 아무리 믿음을 전제로 하고 믿으면서 하는 짓이라도 이것은 믿음이 약한 데서 오는 호기심뿐인 것이다.

…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바를 항상 마음에 두는 것이 가장 옳은 일, 그 밖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요 그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면 아니 믿어야 하니, 아직도 구약 식대로 하느님과의 교섭을 꾀하는 사람은 헛된 일을 할 뿐이다.”(227-231)

- 놀랍다! 신비주의의 대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의외이고 놀랄 일이다. 도널드 블로쉬가 [경건의 위기]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을 ‘복음주의적 신비주의자’라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성 요한이 이 부분을 이야기한 것은 새로운 계시나 시현을 구하는 자들을 책망하는 대목이 아니라, 영성의 능동적 밤 상태에서 주어지는 영적인 현상들에 치우치지 말라고, 비록 그것이 겉보기에 긍정적이고 좋아 보일지라도 그것에 집착하지 말 것을 교훈하면서 이야기하는 대목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모든 말씀이 ‘완결’된 지금에 와서 또 다른 이전 방식의 계시(꿈, 환상 등…)를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바보짓이라는 말이다! 이는 오늘날 신비적 성향을 갖고 있으며 추구하는 이들이 들어야 할, 신비주의의 대가의 말이다!!1

 

9. “이러한 계시를 두고 악마는 비상하게 손을 쓸 수 있다. 이러한 계시가 흔히 말과 형상 아니면 이와 비슷한 무엇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악마는 영으로만 이루어지는 다른 계시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조화를 부릴 수 있다. 그러므로 첫째 형이든 여기서 말하는 둘째 형이든 계시가 신앙에 관한 것일 때, 만일 색다르고 엉뚱한 무엇이 계시된다면 우리는 절대로 이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하늘의 천사가 말했다는 보장이 있다 해도 그러하니, 이 때문에 성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갈 1:8).

그런 까닭으로 우리 신앙의 근본 바탕에 관한 것은 이미 교회에 계시되어서 그 이상 더 계시될 것이 없는 만큼 새삼스러운 계시를 받아들여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그에 포함된 잡동사니도 받아들이지 않을 각오가 필요하다. 설령 이미 계시된 것이 새로이 계시되는 일이 있더라도 신앙의 순수성을 갖기 위해서는 새로이 계시된다는 이유가 아니라 벌써 교회에 충분히 계시되었다는 그 이유로 믿어야 한다.

… 더구나 속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리 그럴싸하고 참되게 보이더라도 새로 계시되었다는 그 신앙 진리를 믿거나 궁리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악마가 사람을 속이고 거짓을 꾸며내려 할 때면 진리와 그럴듯한 것을 미끼로 삼아서 우선 영혼을 잡아놓고 그 다음에 속여 넘기기 때문이다.

… 사도 성베드로는 타볼산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의 영광을 뵈었으면서도 그의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언자들의 말씀은 더욱더 굳건해졌으니 …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벧후 1:19)’ 이 말의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산에서 뵈온 것이 사실이지만 보다 더 든든하고 확실한 것은 우리에게 계시된 예언의 말씀이니 너희 영혼이 이에 의지함은 잘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 악마가 손을 쓰는 계시는 어찌나 그럴듯하고 사람을 방심하게 만드는지 애써 이를 물리치지 않으면 반드시 속아 넘어간다고 나는 본다. 왜냐하면 악마는 이를 믿게 하려고 참스런 모양을 그럴싸하게 꾸며내고 다시 이것을 사람의 감각과 상상에 깊이 심어놓으면 그 당자는 틀림없이 이것이다 하고 느끼게 되는 까닭이다. 이렇든 영혼을 안심시켜 사로잡아버리므로 겸손이 없는 영혼이면 거기서 헤어나기는 어려운 일, 도리어 나쁜 것을 믿게 된다. 그런 까닭으로 순수하고 조심성 있고 단순하고 겸손한 영혼은 비상한 힘과 주의를 기울여서, 마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유혹처럼 이 계시와 시현 같은 것을 물리치지 않으면 안 된다.”(264-266)

- 계시의 ‘완결성’에 대한 신학 교과서를 보는 느낌!

그리고… 요즈음 말이 많은, 소위 ‘금이빨’이나 ‘금가루’ 사역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별한 것, 새로운 것이 계시되고 행해질 때에 그것을 무조건 성령의 역사로 믿어버리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성경에 계시한 그 한도 내에서 행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기준을 잡는 것이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 말하는데(히 6:18) 이것이 주장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과 또 그 원리에 위배되게 행하지 않으신다! 성경은 절대 기준으로 제시되어야만 한다!

 

10. “스승이신 성령의 빛과 가르치심을 받은 이성이 저 진리들을 깨치고 나면 동시에 다른 데서 주어지는 여러 가지 진리에 대해서 스스로 언어를 구성해나가게 된다. … 물론 이성이 받은 빛은 그 자체로 보아 틀림이 없는 것이 사실이나, 이성이 이를 표현하는 말과 논리는 틀릴 수 있고 틀리기가 일쑤이다.”(271) - 언어에 대한 그의 관심은 놀랍다. 이제야 나오기 시작한 성경의 ‘언어적, 문예적 특징에 대한 관심’을 그는 이미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언어’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연구해야 한다! ‘문학’을 연구해야 한다! 물론 기존의 역사와 신학에 대한 연구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11. “이즈음 되어가는 일에 나는 여간 놀라지 않는다. 몇 푼짜리 생각밖에 없는 주제에 마음이 좀 고요할 때 이런 영어(靈語) 비슷한 것이 느껴지면 당장 그것에 세례를 주어 하느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느니 하느님께서 내게 대답하셨다느니 하면서 모두 다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내세운다. 하나 그렇지 않음은 물론, 우리가 이미 말한 대로 다만 자문자답이 있을 따름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에게 대답을 하는 것은 영어를 가지고 싶어 하는 그 소원과 애착하는 마음인 것을, 그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느니 답을 하시느니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 자신이 여기에 재갈을 되게 죄지 아니하고 그들을 다스리는 지도자가 이런 따위의 추리를 없애도록 금하지 않으면 가당찮은 일들이 생기고도 남을 것이니,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둥 예삿일이 아니었다는 둥 이렇게 생각하는 데서 겸손과 극기가 아닌 허튼소리와 영의 불순(不純)만이 나오기 때문이다.

… 성령께서는 차분한 이성이라야 비춰주시고 그 비추심은 차분함을 따라 있는 것, 그리고 이성이 그 차분함을 크게 얻음은 믿음 안에서만 가능하므로 성령께서는 믿음 아닌 딴 것으로 이성을 비춰주시지 않는다. 영혼이 믿음으로 닦여져 맑을수록 그만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많이 지닐수록 그만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많이 지닐수록 그만치 하느님께서 비춰주시고 성령의 은혜를 내리시는 까닭이니, 사랑이야말로 은혜가 오게 하는 길이요 원인이다.

…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의 이성은 어찌나 발랄하고 예민한지 어느 생각에 정신을 집중시키면 이내 수월하게 개념들이 떠오르고, 그 개념들은 위에서 말한 언어와 생동하는 논리로 짜여지므로, 그들은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다만 이성의 작용일 뿐이니, 이성이 감각 작용을 벗어나 자유롭게 되면 자연의 빛을 가지고도 다른 어느 초자연의 도움이 없이 이런 일 아니 이보다 더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흔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기도가 훌륭하고 하느님과 통하는 줄로 착각을 하고, 나아가서는 스스로 이것을 적든지 남을 시켜 적어두든지 한다.

그러나 그 따위 짓은 아무 쓸데없는 것, 어떠한 덕의 씨알도 없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자기 과장을 하는 결과밖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겸손한 사랑으로 마음의 터를 닦고 진실을 일삼으며 m 생애와 고업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을 본떠서 참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영혼의 모든 복으로 가는 길일 따름, 정신으로 숱한 추리를 해야 소용없는 것이다.

… 계속적인 영어가 이성 안에 생기는 원인이 세 가지임을 이상의 설명으로 알 수 있으니, 이성을 움직이고 비춰주시는 하느님의 성령과 이성 자체의 자연의 빛과 그리고 암시로써 이성에게 말할 수 있는 악마가 그것이다.

… 대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니, 즉 영혼이 그런 언어와 상념 속에서 겸손 및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사랑하는 생활을 하고 사랑을 느끼면 이는 바로 성령이 작용하시는 표이니 성령께서 무슨 은혜를 내리실 적에는 항상 이를 사랑에 싸서 내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가 발랄한 이성의 빛에서 유래할 경우에는 저러한 덕의 작용이 없이(비록 의지가 저 진리들의 인식과 그 빛 속에서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도 있지만) 이성만이 모든 작업을 하기 때문에 묵상이 지나고 나면 마음은 메마른 상태에 있게 된다. 그 의지가 허영과 악에 기울지 않고 구태여 악마가 새삼스레 유혹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272-276)

- 영적인 현상에 대한 균형 잡힌 가르침이다! 신비 현상, 신비 경험이 없기에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그것에 정통한 대가(大家)가 지시하는 지침이다!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명심해야 한다! 어중이떠중이 다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고 하고 응답 받았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책까지 써내는 판에 찬물을 끼얹는 듯 여겨질지라도,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지침이 아닐 수 없다!

 

12. “그렇다면 윤리적 선에서 하느님께 그 기쁨을 향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주의할 것은 좋은 일, 단식, 자선, 고행 등의 가치가 그 양이나 질에 있지 않고 그 안에 담겨진 하느님 사랑에 있다는 것이다. 한결 맑고 옹골진 하느님의 사랑을 가지고 할수록 그리고 기쁨이나 낙이나 위로나 칭찬 따위에 도무지 무관심할수록 그만치 일은 가치로운 법이다.”(386) - 보통의 ‘양이냐, 질이냐’의 논의를 넘어서는 ‘사랑이다!’라는 답변! 미가의 글(미 6:6-8)을 읽는 듯한 기분…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13. “초자연엣 보배를 기뻐하는 데서 영혼에 생길 수 있는 해악이 주로 세 가지라 생각되는데, 속음 및 속임과 영혼 안에 있어 신앙의 파괴와 허영 및 어느 헛됨이라 하겠다.

그 첫째로 말하면, 이러한 일에 기뻐함은 남을 속이기와 스스로 속기가 매우 쉽다. … 초자연스런 일들을 과대평가하고 좋아하는 나머지 욕정이 고르지 못하게 되면, 때 아닌 때에 그런 일들을 하려고 서둔다는 것이다. 이같은 불완전이 없는 경우이면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언제 어떻게 그러한 일을 하라고 움직여주실 때에만 그들은 움직이고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동해서 안 되는 것이다.

… 이 기쁨에서 오는 해악은, 발람과 기적으로 백성을 속였다는 그들처럼, 하느님께 받은 은혜들을 나쁘게 잘못 쓰는 데에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 받지 않은 것까지 써가면서 제멋대로 예언을 하고 제가 꾸며냈거나 악마가 펼쳐 보이는 시현을 공개하는 데에 있다.”(399-401) - 중간에 나온 문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는 발람을 죽이려 하신 사건(민 22:22-23)과 사마리아에 불을 내리겠다고 했던 야고보와 요한(눅 9:54-55)이야기와 관련된 내용이고, 마지막 문장은 거짓 선지자들(렘 23:21, 32, 25)과 관련된 내용이다. 초자연적인 것이 잘못되었거나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스러운 일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추구 끝에는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뿐 아니라 스스로도 속을 위험성과 결국에 가서는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결과가 따라올 것이기 때문이다.

 

14. “많은 사람들이 성화상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그 그릇됨을 말하려면 할 말이 만다. 얼마나 어리석으면 그들은 어느 성화가 다른 것보다 더 영험이 있다느니, 이런 성상을 통해서 빌어야 하느님께서 더 잘 들어주신다느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상이 두 개라도 표현하는 것은 다만 하나뿐이니, 두 개의 그리스도상이 그렇고 두 개의 성모 마리아상이 그렇다. 그렇건마는 저렇듯 어리석은 생각이 드는 것은 하나의 만듦새에 다른 것보다 애착을 더 가지기 때문이다.

… 따라서 다른 것보다 어느 화상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기적을 베푸신다든지 은혜를 내리신다면, 사람들이 그 화상을 다른 것보다 더 높이 평가해서가 아니라 그 성화상이 잠자고 있던 신심을 새롭게 일깨워서 신자들의 정을 기도로 이끌어주는 까닭이다. …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느님께서 그런 일을 하시는 것이 결코 성화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화상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가 그림일 따름인 것, 하느님의 일은 다만 그 화상이 표현하는 성인께 대한 정성과 믿음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 많은 사람은 순례를 한답시고 정성보다도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믿음과 정성만 있으면 아무 성화라도 그만이고, 없으면 없는 대로 더 아쉬워할 것이 없다. … 많은 사람들이 다른 성화상보다 어느 하나에 신심을 두는데, 그런 경우 그것은 자연의 기호와 취미 이상이 아닐 수가 있다.”(415-17, 422)

- 성화나 성상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것이 우리와는 거리가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한편 ‘우습게’ 여길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렇지도 않은 것이, 우리는 성화나 성상으로부터는 자유롭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이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신교 안에는 ‘자리’에 대한 이해가 이들의 성화나 성상, 또는 그것의 오용에 대한 저자의 지적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는 이들 가운데, 그 가운데서도 열심히 있는 이들 사이에서 기도 응답이 잘되는 자리, 기도원, 또는 특정한 장소나 집회가 있다는 생각은 일반적인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성화나 성상을 오용하는 이들과 동일한 책망을 들어야 할 태도가 아닐까?

책을 읽어가다 보니, 성 요한은 성화와 성상에 대한 이야기에서 점점 ‘장소’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를 확대 발전시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오래 전 사람이 이야기한다는 느낌 없이 많이 동의하면서 읽게 된다.

 

15. “하느님께서 흔히 사람의 마음을 신심으로 이끄시는 곳이 세 가지라고 나는 본다. 첫째는 풍수지리의 형국으로서, 그 아름다운 경치가 다채로워 산천초목이나 고요 적적함이 절로 사람의 마음을 경건하게 일깨워준다. 이를 이롭게 쓰려면 이러한 곳을 잊고 마음을 곧 하느님께 향해야 되는데, 목적을 지향하고 가는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방법이나 동기에 머물러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 따라서 그러한 곳에 있을 때는, 그 자리를 잊어버리고 마치 그런 자리에 자기가 없는 듯, 마음속으로 하느님과 함께 있기를 힘써야 한다. … 독수자와 은수자 같은 성인들을 보면, 매력 있고 그 넓고 넓은 사막에서도 겨우 운신할 만한 자리를 골라, 좁고 솔기 짝이 없는 방이나 굴을 만들어서 그 속에다 몸을 담는다. … 성인들께서 그와 같이 하신 것은, 영스러운 취미를 즐기려는 욕심을 끊지 않는 한 영성인이 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아신 까닭이다.

… 둘째는 아주 특수한 것으로 (사막이든 어디든 할 것 없이)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매우 흐뭇한 영적 은혜를 잘 내리시는 곳이다. 그러한 곳에서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이면 마음이 그 곳으로 쏠리는 것이 상정이라, 이따금 불현 듯이 그곳이 가고 싶어 못 견디나, 막상 가서 보면 전과 같은 은혜를 받지 못하니 은혜가 자기 자유에 매이지 않은 때문이다. 그렇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은혜를,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곳에서 주시는 것, 곳과 때와 받는 누구의 자유에 매지지 않으신다.

그럴지라도 집착의 욕을 벗은 사람이면 때로 가서 기도하는 것도 좋으니,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말하면, 방금 말한 대로 하느님께서 어느 한곳에 매이시지 않으나, 은혜를 그곳에서 내리신 만큼 찬미를 받으심도 거기를 원하시는 듯하기에 말이다. 둘째는 사람이 은혜를 받은 그 자리에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더 솟아나기 때문이다. 셋째는 기억이 새로운 자리에서 신심이 한결 일깨워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갈 일이지, 거기라야 하느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든가, 다른 데서는 못 주시도록 장소에 매여 계신다든가 하는 생각으로 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깨끗한 곳은 물체의 공간이 아니라 영혼이 당신의 자리인 까닭이다.

셋째는 어느 특정한 장소로서, 하느님께서 기도와 섬김을 거기서 받으시고자 선택하신 곳이니, 이를테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시나이 산이 그렇고(출 245:12), 자기 아들을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정해주신 자리가 그러하고(창 22:2), 우리 사부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호렙 산이 그러하다(왕상 19:8). 하느님께서 다른 자리를 제쳐놓고 왜 이런 곳을 찬미의 장소로 택하시는지, 그 까닭은 당신이 아시는 바다.”(433-435)

 

16. “성당에 대한 말부터 하자면, 어떤 사람들은 자기네 성당에다 몇 벌씩 성화를 벌여놓는 것만으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아서, 되도록 화려하고 돋보이게 꾸미기 위해서 아기자기한 멋을 부리는 것을 취미로 삼는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고작 이뿐이니, 이것은 도리어 덜 사랑하는 짓밖에 안 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려진 장식을 즐기느라고 살아 계신 분께 대한 기쁨을 앗기기 때문이다.”(422) - 성화상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이 글을 보면서 떠올랐던 예전 생각… 고등학교 다닐 무렵 성탄절을 맞이해서 강단 장식을 하게 되었다. 이례적으로 강단 뒤 벽면에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가는 그림을 그려서 붙이게 되었는데, 실루엣으로 된 그림을 크게 그려서 붙였던 적이 있다. 그런데 성탄절 분위기(?)를 살리려 붙여놓은 그림이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다. 사람들이 동방 박사 세 사람이 탄 낙타의 다리가 12개여야 하는데 11개밖에 없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12개의 다리가 서로 엉켜져 있는 상황에서 모두 보일 리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다리가 11개밖에 없다며 수군거리며 오히려 예배에 집중하지 못했던 씁쓸한 기억이 난다. 장식을 즐기느라, 또는 그것을 흠집 잡느라고 정작 성탄의 주인공을 잊어버린 사람들의 모습…

 

17.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보다 제 욕심 때문에 기도를 하는데, 말로는 하느님 뜻이면 들어주시고 아니면 안 들어주시리라 하지만 속에 있는 애착과 헛된 기쁨 때문에 자꾸만 빌어대는 것이다. 그러한 기원보다 차라리 그들에게 가장 긴요한 일, 이를테면 진정으로 양심을 깨끗이 한다든지, 실제로 자기 구원에 대한 것을 깨달아서 긴요치 않은 기원들을 제쳐두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438, 440) - 욕심을 가지고 자꾸만 보채는 기도에 대한 일침!!! 하나님을 설득하는 기도, 매달리고 떼쓰는 기도… 그것이 오히려 믿음의 기도요 자녀의 특권이라고까지 가르쳐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에 비하면 이 스페인의 옛 수도사는 얼마나 복음적인가!!

 

18. “설교자는 청중을 향상시키고 자신이 헛된 기쁨이나 자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 임무가 말보다 영에 있다 함을 깨달아야 한다. … 설교하는 교리가 제아무리 숭고하고, 이를 입히는 수사(修辭)가 제아무리 세련되고 그 수법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영을 지니지 못한 이상, 그 자체만으로는 이익을 낼 수 없는 것이 보통이다. … 무릇 교리가 제 힘을 내는 데는 두 가지 마음가짐이 필요한데, 그 하나는 설교하는 이의 것이고 또 하나는 듣는 이의 마음가짐이다.

… 하지만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가르치면서 자기는 지키지 않고, 좋은 정신을 말로 펴면서 자기는 지니지 않은 그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는 싫어하신다. … 흔히 우리가 보다시피, 설교자의 생활이 훌륭하면 아무리 말솜씨가 없고 수사가 모자라고 그 내용이 평범하더라도 좋은 성과를 거둔다고 판단할 수 있다. 싱싱한 영에서 뜨거운 열이 솟아 붙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화술과 교설이 썩 훌륭하더라도 거두는 성과가 아주 적은 수가 있다. 그렇다. 멋진 문체와 몸짓이며 고운 말, 깊은 도리가 사람을 움직이고 게다가 좋은 정신까지 곁들이면 대단한 교화를 내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정신이 없으면 감정과 이성에 재미나는 강론이라도 의지에 스며드는 진기는 아주 적거나 없거나 하는 것이다.

… 하나의 음악이 다른 음악보다 낫다 해도,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면 그 음악은 내게 있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말을 했다 해도 이내 잊어버리면 마음에 붙지 못한 불이나 다름없다. 그 자체가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 못함을 제외하고라도, 그러한 설교에 맛을 들이는 감정은 여에로 옮아가는 길을 막는 것이니, 말솜씨며 부수적인 것에만 정신이 팔린 사람들은 이런 일 저런 일로 설교사를 치키며 따를 뿐, 설교에서 배우는 자기 개선은 돌아보지 않는다.”(443-) - 설교에 대한 현대의 이론을 듣는 듯하다. 물론 그의 이론은 ‘청중 중심적’이어서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설교에 있어서 청중에 끼치는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도 옳지 않으므로,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주장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책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끝나버리고 만다. 뭔가 더~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남아있을 것 같다는 생각과 기대가 있었는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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