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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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자라난 주드의 외로움은 살아 있는 생물이 돼버렸고,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지만, 그가 숫자들을 가지고 놀 때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숫자는 그에게 구술이나 양철 병정 이상의 장난감이었다. 숫자는 막대사탕이나 자두 이상으로 그의 입안에 침이 고이게 했다. 세상은 엉망이었지만, 숫자는 예측 가능하고 정중하고 질서가 있었다. - P38

주드는 그때 깨달았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라 해도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그 깨달음을 뼈에 새겼고, 그때부터 모든 결정을 내릴 때 그것을 생각했다. - P43

서른 살이 됐을 즈음 주드는 지쳐 있었다. 그는 교가에, 그것들의 인장강도에, 그 아래로 흐르는 차가운 강물에 마음이 끌렸다. 피부 아래 멈이 맺히는 것처럼, 생각들 아래 결심이 굳고 있었다. - P46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목덜미에 머리를 묻고, 거기에 자신의 부족함을 내쉬고 그녀의 사랑과 끈적거리는 여행의 흔적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자신이 운이 좋았음을, 굶주린 어둠을 또 한번 모면했음을 깨달았다. - P60

모든 게 벅찼다. 다가올 세월을 보내며 그녀는 이 고요한 나날을 기억할 것이다. 한 해 두 해 서서히 시간이 끔찍한 것에서 견딜 만한 것으로, 이어 더 나은 것으로 옮겨갈 때 이 아름답고 온화한 나날을 가슴속에 담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성장하고 있음을, 날카롭게 벼려지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 울음이 터졌다. 잉크가 물속에서 퍼지듯 못된 소망이 그녀 안에서 퍼져나갔다. 그만큼의 세월 전에 소녀와 동생이 그 섬에서 계속 머물렀기를 바라는 소망, 그들이 굶주림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마침내 햇살과 먼지가 되었기를 바라는 소망. - P82

내 아이들. 인류 문화가 길러지고 있는 두 배양접시가 무한히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엄마가 된다는 것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성의 구분으로 떠맡겨진 듯한 것은 뭐든 모욕으로 느껴졌기에 그 역할을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 P93

그녀는 자신의 모든 실패를 독서라는 행위 안에 묻어버리는 것처럼, 이 부분에서의 실패도 묻어버린다. - P206

그녀는 모두를 지치게 만드는 존재다.
그녀 역시 자신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아니다. - P209

또 뭐가 사라졌을지 그녀는 궁금했다. 괴테, 셰익스피어, 몬탈레. 태양이 그 전부를 표백시켜 먼지로 만들어버렸다. 그녀의 굶주림이 그것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건 청소라고,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아름다운 단어들이 그녀를 구원할 수 없다면, 그 단어들을 잃는 것이, 또한, 최선이었다. - P222

청소는 그녀가 다른 삶의 시간에서 익숙하게 느꼈던 감각을 일깨웠다. 책 읽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했던 때의 감각을. 단어들은 삶에서 깎아낸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이었다. 창문을 닦아 완벽히 깨끗하게 만들고, 도기로 된 변기와 세면대를 닦고, 타일이 이처럼 반짝거릴 때까지 부식성 화학품을 바른다. 그런 일을 하고 있으면 그녀는 자신에게서 분리될 수 있었다. - P231

의사가 칼을 찔러넣을 때 그녀 안에서 견디기 힘들 만큼의 누르는 힘이 느껴졌다. 그 순간 오래된 공포가 되살아났다. 어둠, 자신이 상실된 느낌, 뱀의 송곳니에 물렸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팰머토 때문이었던 발목에 벤 상처, 목덜미에 뜨겁게 느껴지던 나쁜 영의 숨. 그 순간 그녀는 어둠 속에서 은은한 불빛을 보았고, 다시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휘청휘청 돌아갔다. 우리를 다른 뭔가에 묶어주는 끈은 얼마나 섬세하고 미묘한가. 어둠 속에서 뭔가가 반짝거린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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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타 마스터 클래스 마스터 클래스
백지혜 지음, 김보령 사진 / 세미콜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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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것을 아주 좋아하지만 직접 만드는 건 두려웠던 자에게 요리의 즐거움을 알려준 선생님! 간단하고 맛있는 레시피들 덕분에 퇴근하고 너덜너덜해져서도 후루룩 파스타 말아먹는 프로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우훗 레시피북 정말 기다렸어요 4계절 파스타 모두 마스터하리 다음 책도 어서 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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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 읽어본다
서효인.박혜진 지음 / 난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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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선물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피하는 쪽에 가깝다. 내가 준 책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신경쓰는 것도 내키지 않고, 실은 안 읽었단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받을 실망감이 엄두가 안 나기도 한다. - P41

애초에 선생님의 글을 출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편집자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 글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그때 이후로 작가들에게 메일 보내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여전히 거절은 두렵지만 나는 편집자니까, 계속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 글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고 싶다. - P59

잘 쓴 보도자료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 땀 한 땀 책을 만들던 편집자가 일순간 밖으로 나오는 것도 보도자료를통해서다. 그때 편집자는 숨겨두었던 필살의 언어를 통해 이 작가의 이 책을 안 읽고도 버틸 수 있겠냐고 완곡하게, 그러나 필사적으로 설득한다. - P81

가장 먼저 드는 마음은 반가움과 안도감. 편집자도 새로운 스타의 출현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다음 드는 감정은 선배에 대한 존경심. 낯선 문학을 새로움으로 발견하는 감각은 끊임없이 갈고닦지 않으면 좀체 획득할 수 없는 능력이니까. 마지막으로 드는 감정은 질투심이다. 평가와 선택의 세계에서는 맨 처음 알아보는 게 제일 중요하다. 내가 먼저 알아보지 못한 데서 오는 부끄러움은 사실 두려움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 P93

읽은 소설들이 모두 생각으로 연결되는 날은 기분이 좋다. 일을 잘한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읽기가 일이기도 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얻는 게 없는 독서만큼 무서운 일도 없지. - P105

쓴 사람의 의도가 절대 권력이 아닌 문학 텍스트에서 작가와 편집자는 자칫하면 선생님과 학생, 시험 출제자와 시험 응시자 같은 관계가 되기 십상이다. 그때 나는 작가의 의도를 맞히려고 애쓰는 학생의 모습에 가까웠으리라.
문학 편집자에겐 두 개의 감각이 필요한 것 같다. 의도를 추측하려는 발생론적인 관점이 하나, 반응을 예상하려는 수용론적인 관점이 하나. 전자에만 매몰되면 소설을 따라가기 바쁜 실패한 독서로 그치게 된다. - P115

임상심리학자가 쓴 임상 실습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자꾸만 국내 버전을 상상하고 괜한 아쉬움과 결핍을 느끼는 건 어쩐지 부작용의 일환인 것 같다. 언젠가부터 내 읽기는 모두 생산을 위한 행위로 수렴되어가고 있다. 즐거운 독서가 그립다. - P125

한때 둘도 없이 친한 사이였다 해도 각자의 삶을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어떤 편집자도 ‘구간’이 되어가는 책과 영원히 가까울 수 없다. 밤낮없이 열과 성을 쏟아부으며 급기야는 세상에서 나보다 더 이 책을 사랑할 순 없다고 확신하는 날들이 있었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 책 역시 다른 책들 중 한 권이 되고 마는 건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법칙이다. 연락해야 된다는 생각이 좀체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 데서 오는 모종의 죄책감과 미안함은 편집자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 P185

한국 작가가 우리말로 쓴 소설을 읽을 때에는 일종의 각오가 필요하다. 이야기에 상처 입을 각오, 몸 한구석에 이야기를 각인시킬 각오, 그것으로 묵은 감각을 변화시킬 각오 같은 것. - P222

완벽하게 했다고 해서 누구도 칭찬해주지 않는 그런 일이야말로 디테일의 본질이다. 편집은 디테일의 예술이다. 이런 말은 잔소리처럼 들릴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실수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입 밖으로는 잘 안 나온다. 하지만 침묵하는 건 쉬운 일이다. 불안을 무릅쓰고라도 말하는 것이 어렵고 또 옳은 일이다. 하지만 역시 입 밖으로는 잘 나오지 않아서 이렇게 글로나마 기록해둔다. 그러면서 나도 한번 되새겨보고. - P279

작가와 작업을 계속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단단한 신뢰가 구축되어 있어야 하고 타이밍도 간과할 수 없는 요소다. 누구나 다 이장욱 작가의 시와 소설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마음으로는 안 되고 (거절을 불사하고) 제안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은 우리의 살벌하고 달콤한 일상이다. - P303

결국에는 어떤 소설도 계약하지 못했다. 국내 정서에 맞지 않을 거라는 우려와 파키스탄에 대한 저조한 관심은 사실이었고, 그런 비판을 넘어설 논리도 없었다. (...) 누굴까. 이 좋은 작가의 소설을 계약한 편집자는. - P319

주변엔 온통 책인데 마음속 책장은 점점 더 비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소원해진 책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오직 독자였던 시절로 돌아갈 순 없겠지만, 책을 잘 몰랐고 몰라서 더 좋아할 수 있었던 시간의 일부를 되찾고 싶었다. 독서 일기와 함께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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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아호 2020-09-25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 때문에 외롭고 슬퍼질 때마다 이 책을 다시 찾아 읽을 것이다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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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가 아이들의 이야기인 이유는, 아이들을 위해 쓰인 것이라서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인생의 초반기, 다른 사람들은 내게 힘을 행사하지만 정작 나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는 그 시기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화에서 ‘힘‘ 자체가 살아남기에 적합한 수단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보다는 힘없는 이들이 연합하여 성공을 이룰 때가 많은데, 이는 종종 서로에 대한 친절한 행위에서 비롯된다. 망가뜨리지 않은 벌집, 죽이지 않고 풀어 준 새, 존경의 마음으로 맞아 준 노파 같은 존재들이 그 행위를 되갚아 준다. 미약한 존재에게 씨앗처럼 뿌렸던 친절이, 동화에서 그리고 가끔은 현실에서도 위기의 순간에 결실을 맺는다. - P28

친구들이 아이를 가지기 시작하고, 어떤 생명을 계속 지켜 주기 위해 들이는 그 영웅적인 노력,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요구하기만 하는 어떤 존재를 돌봐야 하는 그 끝없이 소모적인 일을 이해한 후에는, 나의 어머니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시기에 그 모든 일을 했음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나를 먹여 주었고, 씻겨 죽었고, 입혀 주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말하는 법을 배우고, 그 밖에 수천 가지 도움을 받았다. 매시간, 매일, 매년 그런 일이 반복됐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내게 주었던 것이다.
내가 어머니를 돌본 이유는 그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시간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 P50

나는 내 안에 있던 어머니의 목소리와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경계심과 의무감의 목소리,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내는, 세상은 위험하고 언제나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말하는 목소리, 즐거움과 위험을 종종 혼돈하는 목소리. 내가 처음 도시로 이사를 하자 그 도시에서 강간, 살해당한 젊은 여성들의 기사를 오려서 보내 주었던 어머니의 목소리. 본인에게 평생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막연한 시련과 손해를 늘 생각하던 어머니,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고 해도 실수 자체를 두려워했던 어머니의 목소리. - P57

여성이 거의 아무런 권력도 가지지 못했던 시절에 젊고 가난한 여성이었던 메리는, 자신의 작품 안에서 전지전능한 지위에 오른다. 자신의 용어로 세상을 묘사하고, 잘못돼 버린 세상에 대한 자신의 전망을 그리고, 집단적 상상력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이라는 면에서 다른 낭만주의 시인 모두를 작아 보이게 만들어 버리는 걸작은 써 낸 것이다. - P79

자아라는 것 역시 만들어지는 것, 당신의 삶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자, 모든 이로 하여금 예술가가 되게 하는 어떤 작업이다. 늘 무언가 되어 가는 이 끝없는 과정은 당신이 종말을 맞이할 때 비로소 끝나며, 심지어 그 후에도 그 과정의 결과는 계속 살아남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만들어 가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아라는 작은 우주와 그 자아가 반향을 일으키는 더 큰 세계의 작은 신이 된다. - P85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혹은 지금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훗날 독자가 될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행위이다. 너무 민감하고 개인적이고 흐릿해서 평소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가끔은 큰 소리로 말해 보려 노력해 보기도 하지만, 입안에서만 우물거리던 그것을, 다른 이의 귀에 닿지 못했던 그 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적어서 보여 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눈앞의 인간관계보다는 깊은 어딘가에서 홀로 지내는 것 아닐까? 그것이 둘만으로 구성된 관계일지라도. 말이 전하기에 실패한 것을 글이, 아주 길고 섬세하게 전할 수 있는 것 아닐까? - P100

요리를 보통 삶이라 보면, 절임을 만드는 건 시간을 지연시키는 일, 금방 상하는 과일을 거의 무한하게 유지시키는 기술이다. 요리란 그 재료를 먹어 버림으로써 사라지게 하는 일, 음식을 먹는 이의 몸 안에 묻는 흥겨운 장례식이다. 그렇게 먹는 이의 몸 안에 들어간 음식은 변신을 거쳐 다음 생을 맞이하고, 분비물을 통해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무언가를 보존하는 일은 그 변신 과정을 무한히 연기하는 일이다. 어쩌면 절임이란 역사가의 요구와 요리사의 능력이 만나는 지점인지도 모른다. - P125

신경이 없는 신체 부위도 살아 있기는 하지만, 자아를 규정하는 것은 고통과 감각이다. 당신이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아니다. 느껴지지 않는 것은 선뜻 돌봐 줄 수가 없다. 당신의 손발이 당신에게서 잊힌다. 반면에 고통은 지켜 준다. 눈에 무언가가 들어가면 즉시 그에 대해 대처하기 마련이다. 매우 섬세하고 매우 조심스럽게. 그렇지 않으면 아플 테니까. 움찔하고, 눈을 깜빡이고, 눈물이 흐른다. - P153

먼 거리를 작은 공간에 압축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미로는 인간이 만들어 낸 다른 두 고안물과 닮았다. 하나는 실타래고, 다른 하나는 단어와 문단과 쪽을 하나로 묶어 놓은 책이다. 책의 문장이 실타래에 감긴 한 가닥의 실이라고, 그 문장도 실처럼 풀 수 있는 것이라고 상상해 보자. 그렇게 풀린 문장이 만들어 낸 선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실제로 걷고 있다고 말이다. 독서 또한 하나의 여정이다. 눈은 선처럼 펼쳐진 생각을 따르고, 책이라는 압축된 공간에 접혀 있던 그 생각들이, 당신의 상상과 이해 안에서 다시 차근차근 풀려 나간다. - P278

알츠하이머병은 무슨 일이 생기든 어머니가 가야 할 길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머니가 최대한 품위를 잃지 않고 그 길을 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 여정을 최대한 즐겁고 편안하게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뿐이었다. - P334

내 앞에 놓인 두 개의 유리병은 받아 적은 이야기 같다. 두 유리병에는 그렇게 보관하지 않았다면 사라졌을 것이 담겨 있다. 어떤 이야기는 사라지게 두는 편이 나았겠지만, 무언가를 적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그 이야기를 그 모습 그대로, 설탕물에 담근 살구처럼 고정시키는 일이다. 그러고 나면 그 이야기는 더 이상 작가가 아니라 독자에게 속하게 된다. 그리고 생략된 것은 영원히 잊힌다. - P349

"무엇이든 말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되었다."라고 버지니아 울프는 적었다.
그녀는 이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여기서 온전함이란 그것이 나를 다치게 할 힘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갈라진 조각을 하나로 묶어 내는 일이 커다란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글을 쓰다가 무엇이 무엇에 속하는지는 발견할 때 느끼는 희열도 그렇다. 여기서 나는 내가 철학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에 도달한다." - P350

물리치료사가 내게 해 준 이야기에 따르면, 만성 통증 같은 경우에도 환자가 그 고통을 다르게 경험하도록 훈련시키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한다. 단 환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그것이 자신의 비극일지라도, 그 이야기 때문에 본인이 불행할지라도 계속 이야기한다. 혹은 그 이야기를 멈추는 방법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편안함보다는 일관성을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어느 부분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죽음이 먼저 오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의 죽음은 스스로 익숙한 자기 모습의 죽음이기 때문에.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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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 남겨진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안희주 지음 / 수오서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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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춘기 때부터 아빠를 미워한 데에는 엄마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엄마도 어쩔 수 없었다는 걸, 남에겐 할 수 없는 말을 딸이니까 나에게 했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아빠를 향한 엄마의 미움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된 건 사실이라고. 나도 아빠에게 잘하고 싶지만 생각처럼 안 된다고. 기분이 나쁘면 나도 모르게 아빠에게 짜증을 내게 된다고. 잊고 있던, 가라 앉아 있던 그 감정이 올라와 괴롭다고. 엄마가 지금 아빠와 괜찮아졌다고, 엄마가 아빠를 용서하고 이해했다고 그걸 나에게 강요하지는 말라고. 엄마, 아빠를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아직 아무렇지 않을 만큼 가슴이 괜찮아진 건 아니라고. 나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 P28

몇 년 전의 나는 아마 사람들에게 상처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를 해침으로써 내가 상처받았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나를 해침으로써 나를 더 많이 사랑해주지 않은 걸 후회하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다.
지금은 그저 나를 아꼈던 사람들이,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나를 알았던 사람들이 내가 언제 어떻게 떠나더라도 너무 아파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P64

나에겐 나를 해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그 방법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을지라도 일단 어떤 일이 생기면 생각은 곧장 날카로운 칼을 빼달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회사 일을 잘못 처리하면 내가 멍청해서, 모자라서 일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먼저 찾아왔고, 다른 사람이 실수한 일에서도 내 잘못을 찾아내려 애썼으며, 게으르고 치열하지 않고 야물지 않은 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지를지 몰라 늘 전전긍긍했다. 도살장에 끌려나가는 소마냥 회사로 향할 때는 차라리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하면 좋겠다, 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일은 제자리걸음일 때는 계단에서 굴러 팔이라도 부러지면 좋겠다 생각했다. 누군가가 너무너무 미우면 그 사람의 잘못을 따지기 전에 나는 나를 먼저 죽였다. 유서를 써놓고 죽으리라, 너 때문에 내가 세상을 버린 거라고, 그 죄책감을 안고 평생을 불안하게 살아보라고, 칼에 베여 피를 흘리면서도 통쾌해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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