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 읽어본다
서효인.박혜진 지음 / 난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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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선물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피하는 쪽에 가깝다. 내가 준 책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신경쓰는 것도 내키지 않고, 실은 안 읽었단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받을 실망감이 엄두가 안 나기도 한다. - P41

애초에 선생님의 글을 출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편집자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 글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그때 이후로 작가들에게 메일 보내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여전히 거절은 두렵지만 나는 편집자니까, 계속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 글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고 싶다. - P59

잘 쓴 보도자료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 땀 한 땀 책을 만들던 편집자가 일순간 밖으로 나오는 것도 보도자료를통해서다. 그때 편집자는 숨겨두었던 필살의 언어를 통해 이 작가의 이 책을 안 읽고도 버틸 수 있겠냐고 완곡하게, 그러나 필사적으로 설득한다. - P81

가장 먼저 드는 마음은 반가움과 안도감. 편집자도 새로운 스타의 출현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다음 드는 감정은 선배에 대한 존경심. 낯선 문학을 새로움으로 발견하는 감각은 끊임없이 갈고닦지 않으면 좀체 획득할 수 없는 능력이니까. 마지막으로 드는 감정은 질투심이다. 평가와 선택의 세계에서는 맨 처음 알아보는 게 제일 중요하다. 내가 먼저 알아보지 못한 데서 오는 부끄러움은 사실 두려움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 P93

읽은 소설들이 모두 생각으로 연결되는 날은 기분이 좋다. 일을 잘한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읽기가 일이기도 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얻는 게 없는 독서만큼 무서운 일도 없지. - P105

쓴 사람의 의도가 절대 권력이 아닌 문학 텍스트에서 작가와 편집자는 자칫하면 선생님과 학생, 시험 출제자와 시험 응시자 같은 관계가 되기 십상이다. 그때 나는 작가의 의도를 맞히려고 애쓰는 학생의 모습에 가까웠으리라.
문학 편집자에겐 두 개의 감각이 필요한 것 같다. 의도를 추측하려는 발생론적인 관점이 하나, 반응을 예상하려는 수용론적인 관점이 하나. 전자에만 매몰되면 소설을 따라가기 바쁜 실패한 독서로 그치게 된다. - P115

임상심리학자가 쓴 임상 실습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자꾸만 국내 버전을 상상하고 괜한 아쉬움과 결핍을 느끼는 건 어쩐지 부작용의 일환인 것 같다. 언젠가부터 내 읽기는 모두 생산을 위한 행위로 수렴되어가고 있다. 즐거운 독서가 그립다. - P125

한때 둘도 없이 친한 사이였다 해도 각자의 삶을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어떤 편집자도 ‘구간’이 되어가는 책과 영원히 가까울 수 없다. 밤낮없이 열과 성을 쏟아부으며 급기야는 세상에서 나보다 더 이 책을 사랑할 순 없다고 확신하는 날들이 있었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 책 역시 다른 책들 중 한 권이 되고 마는 건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법칙이다. 연락해야 된다는 생각이 좀체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 데서 오는 모종의 죄책감과 미안함은 편집자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 P185

한국 작가가 우리말로 쓴 소설을 읽을 때에는 일종의 각오가 필요하다. 이야기에 상처 입을 각오, 몸 한구석에 이야기를 각인시킬 각오, 그것으로 묵은 감각을 변화시킬 각오 같은 것. - P222

완벽하게 했다고 해서 누구도 칭찬해주지 않는 그런 일이야말로 디테일의 본질이다. 편집은 디테일의 예술이다. 이런 말은 잔소리처럼 들릴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실수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입 밖으로는 잘 안 나온다. 하지만 침묵하는 건 쉬운 일이다. 불안을 무릅쓰고라도 말하는 것이 어렵고 또 옳은 일이다. 하지만 역시 입 밖으로는 잘 나오지 않아서 이렇게 글로나마 기록해둔다. 그러면서 나도 한번 되새겨보고. - P279

작가와 작업을 계속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단단한 신뢰가 구축되어 있어야 하고 타이밍도 간과할 수 없는 요소다. 누구나 다 이장욱 작가의 시와 소설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마음으로는 안 되고 (거절을 불사하고) 제안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은 우리의 살벌하고 달콤한 일상이다. - P303

결국에는 어떤 소설도 계약하지 못했다. 국내 정서에 맞지 않을 거라는 우려와 파키스탄에 대한 저조한 관심은 사실이었고, 그런 비판을 넘어설 논리도 없었다. (...) 누굴까. 이 좋은 작가의 소설을 계약한 편집자는. - P319

주변엔 온통 책인데 마음속 책장은 점점 더 비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소원해진 책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오직 독자였던 시절로 돌아갈 순 없겠지만, 책을 잘 몰랐고 몰라서 더 좋아할 수 있었던 시간의 일부를 되찾고 싶었다. 독서 일기와 함께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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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아호 2020-09-25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 때문에 외롭고 슬퍼질 때마다 이 책을 다시 찾아 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