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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
박영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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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크든 작든 고난을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있다면 그 곳은 죽음이다. 죽지 않는 한 우리는 고난을 피할 수 없다. 죽기도 싫고 고난도 싫으니 답이 없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하는 데 그럴 대상이 못 된다. 그래서 고난을 포장한다.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정당함이라는 이름의 포장이다.

 

첫 번째 포장, “고난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인과응보의 논리다.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는 거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일어나는 일들이 반드시 인과응보의 논리로 딱 떨어지지 않는다. 때론 너무 억울해 보이고 속상한 일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난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최근에 네팔에 일어난 지진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두 번째 포장, “고난에는 유익이 있다!” 물론 고난을 통해 유익을 얻을 때도 있다. 작은 고난은 큰 고난을 예방하기도 한다.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시킨다고나 할까.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처럼 고난을 이겨내면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때도 있다. 그렇다고 고난이 유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고난은 고난일 뿐이다. 아프고, 고통스럽고,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대상이다.

 

세 번째 포장, “고난은 숨겨진 하나님의 뜻이다!” 문제는 숨겨져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써 먹는다. 가해자는 지불해야할 책임 회피용으로 사용하며, 피해자는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하는 체념용으로 강요된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고난 속에 숨겨져 있지 않다. 다시 말해 고난이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한 필수품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난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뜻을 알 수 있다면 하나님을 사랑이 많으신 분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고난의 크기가 클수록, 깊이가 깊을수록 고난의 원인은 더 헷갈린다. 저자는 말한다. 무리하게 정리하지 말고 헷갈리는 대로, 모르는 대로 놔두라고. 모른다고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깊은 고난 앞에 ?’(Why)에서 어디?’(Where)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고난 속에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은 고통 속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 아버지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고통 앞에서도 침묵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과 끝까지 함께 하셨다.

 

고통 속에 하나님만 계시지 않는다. 우리도 그 곳에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셨다(고전3:9). 고통의 현장에 우리도 동참해야한다.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침묵함으로 함께 해야 한다. 더 나아가 그들의 고통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적극성이 필요하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항변해야한다. 세상의 부조리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기 소망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고민하고, 행동해야한다. 결국 하나님께 향한 질문은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그 날 우리는 어디 있었는가? 지금 우리는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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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도시
스카이 제서니 지음, 이대은 옮김 / 죠이선교회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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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학교 시절 싫어했던 질문이 있다. “비전이 뭐에요?” 아마도 이 질문에 거부 반응을 보인 건 워낙 이상한(?) 비전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전부처럼 말하는 분위기를 싫어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반작용으로 비전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정말 비전이 없는 걸까. 있다면 무엇을 비전이라고 말할까. 비전을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볼 질문이 있다. 오늘이 내일을 위해 존재할까? 내일이 오늘을 위해 존재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내일이 오늘을 위해 존재한다. 내일이 있어야 오늘이 있다. 비전이 무엇인가. 오늘을 살기 위해 내일을 보는 것이다. 오늘은 보이는 내일이다!

 

바라 본다는 것은 이미 무엇이 존재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만들어 보는 게 아니라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무엇을 보는가. 하나님이 완성시킬 나라를 보는 것이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인가. 세 가지 특성이 있다. 질서, 아름다움, 그리고 풍요로움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 특성을 통해 이론적인 하나님 나라가 아닌 실제적인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현재 진행 중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오늘이라는 광야를 살아간다. 광야의 특징은 결핍이다. 질서의 결핍, 아름다움의 결핍, 풍요로움의 결핍이다. 결핍은 두려움을 만든다. 광야에서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힘으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이 생긴다. 또한 전쟁이라는 잘못된 힘은 많은 사람을 더 큰 두려움으로 밀어 버렸다. 광야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길을 선택할 수 있다. ‘대피대응이다.

 

광야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 인간의 노력으로 광야의 결핍을 풍족함으로 바꿀 수 없다. 하나님은 곧 광야를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의 역할은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더 이상 광야에 관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대피다. 이런 맥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역할은 개인 영혼구원을 담당하는 선교사와 목사다. 나머지 역할들은 평가 절하된다. 문제는 주님이 아직 오시지 않고 있고 광야에서 언제까지나 숨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길은 대응이다. 대응은 광야에서 사는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이러한 대응 모델이자 근거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 나라다. 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직접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다. 우리의 힘으로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광야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줄 수 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결국 비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누구인가. 에덴동산의 흔적을 가지고 광야를 살아가는 순례자, 동산지기들이다. 그렇다. 우리는 동산지기로 부르심을 받았다. 다른 말로 소명이다. 소명은 다 똑같지 않다. 최고의 소명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각자 동산 지기의 역할이 생긴다. 이것이 특수 소명이다. 각 자 받은 대로, 다양한 영역에서 예수님처럼 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교회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지체들로서 한 몸인 교회를 세워가야 한다. 광야와 달리 하나님 나라가 소외 없는 곳이라면, 그 출발점은 교회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신자로서 누구나 해야 할 공동 소명이다. 저자는 구제와 식탁의 현장에서 소외 없는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교회를 통해 온 우주에 드러날 것이다. 결국 동산지기는 최고의 소명(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공동 소명과 특수 소명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소명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무슨 소명이든 순종하는 것이 동산지기의 자세다.

 

이 책은 하나님 나라, 교회, 그리고 세상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동산지기로 교회와 세상에 필요한 소명을 부여 받았다. 교회냐, 세상이냐,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해야 할 대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개인구원 혹은 사회구원이라는 어느 한 쪽의 극단적인 반응은 피해야할 것이다. 비전은 명확하다. 그러나 비전을 이뤄가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다양함이 충돌이 아닌 조화를 이루는 현장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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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돌려드립니다
권일한 지음 / 좋은씨앗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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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삶이다. 신앙에서 삶은 만두속과 같다. 너무 맛있어 보이는 만두를 한 입 베었는데 속에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해보라. 제대로 속은 느낌일거다. 괘씸하다. 남이 만든 만두가 그렇다면 그나마 낫다. “왜 그러냐!?”고 따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만든 만두가 그렇다면 어쩔 텐가. 어느 시인이 내 만두를 먹었다면 이렇게 말했으리라. “껍떼기는 가라!”

 

좀 더 솔직해보자. 왜 껍떼기만 남았는가? 아니 왜 껍떼기만 남겼는가? 만두속을 채워야하는 부담감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삶으로 신앙을 채우기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어느 정도 괜찮아도 생활신앙은 뭔가 불편하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돌려준다는 말이 모두에게 환영할 만한 말로 안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을 받는다는 것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약과 파란약을 먹는 선택과도 같다. 빨간약을 먹으면 가상현실을 벗어나 현실을 보게 되고, 파란약을 먹으면 가상현실에서 계속 산다. 빨간약은 불편한 진실을 보여준다. 불편한 진실을 보지 않고 편안하게 살고 싶다면 파란약을 먹으면 된다. 성경은 빨간 약일까, 파란 약일까. 적어도 저자는 파란약을 돌려준다고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빨간 약을 먹었다면 불편한 진실과 싸워야 한다. 성경이 보여주는 진실을 내 삶에 채워야한다. 채우기 위해 먼저 읽어야 한다. 저자는 읽는 방법을 알려준다. 정황과 문맥으로 읽기, 시간과 공간으로 읽기, 질문하며 읽기, 낯선 이야기로 읽기 등. 다양한 방법을 말한다. 이러한 방법의 목적은 하나다. “스스로 읽기 위해서!”. 읽어야 생각이 나고 생각이 행동으로 연결된다. 로고스 서원의 김기현 스승님은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 당한다.” 끌려 다닐 텐가, 끌고 갈텐가.

 

스스로 읽었다면 나눠라. 나눔을 통해 내 생각을 검증받아야 한다. 나눔은 말보다 듣기가 먼저다.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말하지 마라. 어떤 이야기든 존중하고 수용할 마음이 없다면 나눔이 아니라 일방적인 가르침이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나눔은 밥과 함께 나누면 좋다. 밥과 함께 사소한 수다가 깊이 있는 나눔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줄 것이다. 나눔을 통해 서로의 것을 내 것으로 채운다면 훨씬 풍성한 읽기가 된다. 저자는 왜 성경을 돌려주는 가. 내가 읽고, 우리가 읽고 싶어서다.

 

남이 말해주는 것보다 내가 깨달은 것으로 살아내는 힘이 큰 법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나눔을 통해 살이 붙게 되고 더 큰 힘을 가지게 된다. 이 힘으로 당신의 삶을 살아내라. 누구만 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망설였다면, 이 책이 당신에게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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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 예수님의 심장
하재성 지음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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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다. 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장애다. 사스퍼거 증후군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 말이나 행동으로 피해를 준다. 이 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어디 남뿐이랴. 나도 그렇다. 우린 누군가에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 살아간다. 사람다운 사람이 그립다.

 

여기 참 사람이 있다. 예수다. 참 사람의 증거는 긍휼이다. 주님의 긍휼은 객체인 상대를 주체로 만든다. 그리고 주체로서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참 사람이 탄생한다. 구원은 죽어서 천국 가는 의미뿐만 아니라 참사람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열심이다. 하나님의 열심은 예수님의 긍휼로 드러난다.

 

긍휼의 모습은 다양하다. 무엇보다 긍휼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여기에 책망, 의심, 판단은 설 자리가 없다. 상대의 아픔에 주목하며 끝까지 존중함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주님은 때론 침묵하거나 분노하신다. 침묵과 분노는 상처 입은 자들을 지켜주는 견고한 성이다. 긍휼히 여김 받은 자는 긍휼히 여기는 자로 변화된다. 환골탈퇴(換骨奪胎).

 

예수님처럼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린 주춤거린다. 긍휼은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적이다.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주님처럼 긍휼을 베풀 수 없음을 고백하는 자는 긍휼을 베풀 수 있다. “주님은 긍휼을 베푸시지만 저는 아닙니다!” 라는 자기부인의 고백 속에 긍휼은 나타난다. 할 수 있다고 하면 못 하고, 못 한다면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며 긍휼의 비밀이다. 주님은 자신의 심장을 우리에게 주셨다. 내 심장이 아닌 주님의 심장을 누군가에게 주는 자리에 우리는 서있다. 긍휼은 공허하고 텅 빈 위로가 아닌 따뜻한 위로다. 내 안에, 우리 안에 긍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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