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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교회를 넘어 필요교회로 - 함께 고민하고 싶은 일과 쉼 이야기
이연우 지음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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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리뷰를 작성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저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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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교회를 넘어 필요교회로 - 함께 고민하고 싶은 일과 쉼 이야기
이연우 지음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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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 책의 저자 이연우입니다.


독자분들을 통해 다양하게 읽히고 있어서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온라인이라도 기회가 된다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요.

건강한 공동체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길 소망하며,

이 책이 그런 공간을 만드는 마중물, 초대장이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다시 한번 이 책을 읽고 다양한 의견을 내주신 분들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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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를 걷고 있는 그대에게 - 세상의 기준에 저항하고 하나님 나라를 창조하라 청년이 희망이다 2
김유복 지음 / 죠이북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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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겪는다. 청년들의 고통은 시대의 아픔을 보여주는 통증이다. 시대의 고통을 보고 싶다면 청년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보라. 이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가. 돈과 소유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거나 결정받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지배하는 피라미드 세상이다. 피라미드 밑바닥에는 선택받지 못한 비정규직, 강제 잉여가 된 실직자들이 있다. 또 희망 고문을 견디는 취준생과 마지막 생존 방식인 알바생이 있다.

 

무한 경쟁 속에서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착취하고 열심히 해보지만 돌아오는 건 실패와 절망이다. 될 때까지 열심히 하지 않으면 그것은 열심 부족인 자신의 책임이다. 청년들은 끝없이 추락 중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했지만, 그냥 추락이다. 지금이 밑바닥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밑바닥이 기다리고 있다. 추락하는 그들에게 자존감은 최악이 된다. 그들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누구도 사랑해주지 않을거라 생각하며 대놓고 혹은 아닌척하며 불안에 떤다.

 

청년들이 이러한 전방위적인 압박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월터 브루그만은 세상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따라가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했다. 청년들은 우상숭배라는 거창함보다 단순히 생존하기 위해 발악하는 것 같다. 우상숭배든, 생존이든, 어쨌든 삶의 최종 목표가 여기에 머물러 있다면 함께 나와야 하지 않을까. 출애굽해서 광야로 간 이스라엘처럼 말이다.

 

광야의 척박함 속에서 우리는 깨어진다. 광야는 영화 <매트릭스>의 파란약이다. 거짓된 세상의 민낯을 보게 하는 진실. 깨어짐의 고통 없이 진실을 알 수 없다. 만약 깨어지지 않고 붕괴 된다면? 어떤 메시지도 제대로 들을만한 힘과 여유가 없다면? 그만큼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광야가 어떤 곳이라는 것을 말하기 전에 고통의 자리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누구도 당사자가 겪는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고통받는 곁에 함께 할 수 있다. 고통의 크기는 달라도 누구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고통은 공동의 언어이며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결국, 깨어질 수 있는 힘은 광야를 함께 걷고 있는 우리에게 있다.

 

이렇게 생긴 작은 틈으로 채워야 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의 이야기다. 그 안에 담긴 소중한 가치들, 다들 알고 있지만 먹고 사는 일에 치여서 잊고 있었던, 누군가가 이것들을 보여주길 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남는 건 좋은 이야기다. 좋은 이야기는 우리의 오감과 온몸을 자극하고 다가오는 하나님나라를 상상하게 된다. 이러한 상상력이 우상과 생존을 넘어 창조적인 한걸음을 걷게 하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소외와 단절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가 여전히 함께 할 수 있음을 단호하며 따뜻하게 말하고 싶다면 이 책을 선물해보면 어떨까. 이 책은 언택트를 넘어 다시 컨택트의 길을 비춰줄 소망의 빛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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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청소년신학 - 청소년을 성장하고 꿈꾸게 하는 근원적 질문
딘 보그먼.마상욱 지음 / 샘솟는기쁨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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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말할 것인가? 당연히 말할 대상이 필요하다. 대상은 하나님 앞에 선 허수아비가 아니다. 혼잣말이 아닌 이상 하나님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도 잘 말하기 위해서!) 대상에 대한 이해는 필수다. 또한 말(언어)은 시대, 즉 대상이 살고 있는 시간과 장소가 만들어낸 메신저다. 다시 말해 같은 단어라도 어떤 시대나 배경에 따라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신학이란 하나님 말씀을 오늘이라는 시대 속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하는 과정이다. 하나님 말씀은 하늘에 있는 신령한(?) 언어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태초의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래서 지금, 여기가 중요하다. 드라마 <미생>에서 한석률이 대사가 떠오른다. 현장이지 말입니다! 그렇다. 현장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지 말입니다!

 

  근대의 특징은 다양한 제도(Institutions) 탄생이다. 병원, 학교, 군대가 대표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이러한 제도의 어벤저스다. 교회는 병원(치유), 학교(교육), 군대(훈련)의 요소를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교회는 충족할 수 있는 적절한 것을 제공했으며 그래서 부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근대 후기로 넘어오면서 교회는 시대 요구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 제도가 발전하기 위해 선택한 효율성이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교회에 필요한 사람만 선택되고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인간 소외와 차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교회의 문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제도적인 교회는 어쩔 수 없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근대 후기의 대표적인 특징은 다양성이다. “우리는 하나!”라는 이름으로 강제 통일이 먹히던 시대가 물러가고 있다는 말이다. 선택과 집중으로 주목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주목받지 못한 사람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를 넘어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종교적인 언어를 넘어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다양한 삶의 정황을 들여다보지 않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폭력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제는 단결을 외칠 때가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들의 공존과 공생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좀 더 말랑말랑해져야 하는데 여전히 딱딱하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잊혀지지만 이야기는 남는다.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각자 나름의 독특한 이야기도 있다. 강자의 이야기가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신학은 하나님과 다양한 이야기와의 만남이다. 따라서 청소년신학은 청소년들의 다양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 결핍 또는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물론 청소년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 즉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야기)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 정의, 평화다. 청소년의 다양한 이야기는 복음이라는 공동의 이야기와 버무려져 청소년신학이 되는 것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우리는 좀 더 청소년들의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들이 가진 다양한 감수성에 제대로 반응할 수 있는 능숙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떻게 능숙할 수 있을까? 먼저 복음 이야기에 능숙해야 한다. 복음은 오늘, 여기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한 기쁜 소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본래 의미 찾기에만 혈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청소년들의 삶의 모든 방식,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이 능숙함의 완성이다. 물론 단순히 책 한두 권 읽고 청소년을 이해할 수는 없다. 청소년들의 행동 양식에 대한 관찰이 필요하다. 관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의 현장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누군가의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는 것은 상대의 민낯을 보는 일이기 때문에 신뢰 관계 없이는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친밀한 관계만큼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은 위험한 도전이다. 뭐든지 함께 있으면서 물들지 않고 경계하거나 갑질하지 않으면서 공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90년생이 온다에서 말하듯이 이들은 기성세대를 꼰대로 바라본다. 00년생이라고 다를까. 사실 누구나 꼰대가 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나도 언젠가 꼰대가 될 수밖에 없음을, 꼰대가 되었을 때 스스로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됨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며 훈수 두는 꼰대, 말은 번지르르 하지만 행동과 거리가 먼 진정성 없는 꼰대. 적어도 이 두 꼰대는 피하자. 이런 의미에서 청소년신학은 꼰대의 자기 성찰 고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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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설교 룻기 읽는 설교 시리즈
조영민 지음 / 죠이선교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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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종합적으로 이해해야한다. 예를 들어 십대 청소년이 빵집에서 빵을 훔쳤다고 해보자. 명백히 범죄다. 그런데 이 청소년은 잠잘 곳도, 먹을 것도 없는 고아였다면, 주변에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 단순히 절도범이라고만 하고 끝날 수 있을까. 물론 어떤 이유로든 절도를 미화시킬 순 없다. 하지만 여기엔 절도라는 죄만 있는 게 아니다. 절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 구조도 죄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죄는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구조)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먼저 엘리멜렉 가족이 모압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주목해야한다. 그들의 고향은 베들레헴, 떡집이다. 떡을 만들만큼 소출이 풍성한 지역이다. 그런데 기근이 들었다. 룻기의 배경은 사시시대다. 사사시대의 기근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을 심판하실 때 주변 나라를 강하게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을 치셨다. 이 과정에서 많은 약탈이 있었고, 이스라엘은 고통당했다. 그래서 엘리멜렉 가족이 떠난다. 떠나는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떠난다고 손가락질만 할 수 있겠는가.

 

떠나서 잘 살면 좋았겠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빠졌다. 나오미는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은 과부가 되었다. 이제 나오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오미는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이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여기에 며느리 룻이 함께 한다. 늙은 과부는 아무 소망이 없지만 룻은 아직 젊다. 고향(모압)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고향을 선택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헤세드(긍휼)를 본다. 헤세드? 헤세드는 강한 자가 약한 자와 하나 되어 약한 자를 세우는 것이다.

 

헤세드는 단순히 성격이나 품성이 아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신앙 반응이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다!”는 룻의 고백은 그 어떤 신앙 고백보다 위대하다. 풍족한 상황이 아닌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텅 빈 상태에서의 나온 고백이기 때문이다. 텅 빈 나오미와 룻, 앞으로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나오미의 가족의 텅 빈 부분들을 채워 가신다. 보아스를 통해 양식을 채우시고 엘리멜렉의 가문을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체적으로 헤세드를 실천할 율법을 가르쳐 주셨다. ‘이삭줍기고엘’(기업을 무르는 제도)이다. 보아스는 율법보다 더 적극적으로 지켰다. 율법은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라고 했지만 보아스는 종들에게 일부러 이삭을 더 흘리도록 했다. 엘리멜렉의 가문을 회복시키는 일은 손해다. 당장 땅을 사면 좋을지 모르지만 결국 엘레멜렉 가문에게 돌려줘야 한다. 남 좋은 일이다.

 

저자의 말대로 룻, 나오미, 보아스는 자기 이익을 챙길 줄 모르는 바보. 약자가 일어설 수 있도록 제한 없이 자신의 것을 나누는 바보다. 바보 원조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죄로 인해 죽었고,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던 우리가 예수님으로 꽉 채워진다. 사랑 받지 못하면 사랑 할 수도 없다. 룻기는 이 자리에 우리를 끊임없이 초청한다. 손해와 희생, 위기를 감수해야 하는 바보의 삶은 위험하다. 계산적인 세상은 바보를 어리석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귀하게 생각한다. 세상이 보기에 자신의 이익에 밝았던,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은 무명한 자가 되었고, 바보처럼 사는 자는 유명한 자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모든 이야기를 기억하시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실 것이다.

 

그러니 바보가 되기를 부끄러워하지 말자. 하나님은 오늘도 이러한 바보들을 통해 자신의 헤세드를 보여 주신다. 바보들의 행진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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