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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하는 벽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2년 4월
평점 :

조정래 작가는 왠만해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한국 문학계의 거장 중의 한 사람이다. 특히나 우리 민족의 한 맺힌 애환을 서사하는 필력은 감히 어느누가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다. 나의 책장안에 흐른 시간만큼의 힘이 더해진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보이는 노랗게 바랜 <태백산맥>을 보고 있노라면 더더욱 작가의 대단함을 느끼게 된다. 작품 중에 <태백산맥> <아리랑><한강>은 20세기 한국 현대사 3부작으로 대학생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 등으로 세월이 지나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사실 말이 필요없는 작가가 아니겠는가! 요즘엔 예전에 출간했던 책들을 다시 장편으로 개정, 재출간되고 있어서 작가의 책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는 게 독자들에겐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이 쓰여진 1970년대의 시대적 배경을 잠깐 살펴보자면 박정희 대통령의 군부 독재 정치로 말실수나 의심난 행동을 했을 때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시대였고 '새벽종이 울렸네~'라는 노랫소리로 알려진 새마을 운동으로 가난을 벗어나고자 했다.
<외면하는 벽>은 1977~79년에 작가가 썼던 8개의 단편을 모아놓았고 여기에서 <외면하는 벽>은 이 책에 수록된 단편 중의 하나이다.
8개의 단편 모두 시대적인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힘없는 사람들의 외침을 처절하게 또 비참하게,그리고 아이러니하게 그려 놓았다.
"기약 없는 시간과 친숙해지고 상대 없는 대화에 친숙해지고
박수 없는 인내에 친숙해지기 위해 걷고 있는것이다." (p21)
힘있는 사람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 권력을 이용해 사람들의 인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시대에 힘없는 서민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 무엇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제 목소리를 감추고 가만히 있어야 뒷 탈이 없는 시대였고 맘껏 날개짓을 하고 싶어도 날아오르지 못한 비둘기처럼 힘이 없음이 죄가 되는 세상에서 그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첫 단편의 포문을 연 <비둘기>라는 작품에서는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또 쳐도 어쩔 수 없이 제자리일 수 밖에 없음을,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또 질러도 제 목숨만 사그러들고 마는 그런 시대의 아픔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살아생전에 절대 나갈 수 없다는 곳, 하늘마저 볼 수 없는 백골섬에 더 이상 사람이 아닌 물건이 되어 갇힌 한 사내의 이야기가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까지는....! 사실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뿐 그에게 앞날이라는 게 있었을까?
빽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갖은 애를 쓴다고 하더라도 항상 그 자리임을 <진화론>과 <한,그 그늘의 자리>에서는 동호와 경희를 통해서 보여준다. 어떻게 이리도 처절하게 인생을 그려놓았는지 작가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짠해서 가슴이 아리고 또 아린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미운오리새끼>에서는 혼혈아의 아픔을 섬세하게 그려 놓아서 선입견이라는 무서운 관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사람이 산다는 것도 저럴 것이었다.
산속의 바위나 나무나 짐승처럼 조금만 멀리서 바라보면 형체가 없는 것,
그러면서도 가까이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 고달프게
회초리질하는 것이다." (p388)
8개의 단편 모두 참 아프고 씁쓸하게 한다. 나라사정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이기심까지 같이 들어와서 서로를 밟고 올라갈려고 하는 모습들을 어찌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전기가 들어오고 TV가 들어오면서 사라지지 말아야 할 배려하는 마음까지 사라지는 모습들을 표현해 놓은 <마술의 손>을 통해서 지금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투영해보아도 좋을 듯 하다. 그리고 힘없는 자들의 허무한 외침의 비명까지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어찌나 함축적으로 스토리에 다 넣을 수 있는지 경외심이 들 정도이다.
단편임에도 전혀 단편처럼 읽혀지지 않았다. 단편임에도 전혀 짧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몰입하게 하고 각 단편들의 결론에는 모두 반전코드가 들어 있어서 흥미까지 잡았다. 각 이야기 속에는 인간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 그리고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마음이 뿌듯한데 모두에게 강력하게 추천해도 좋을 책을 한 권 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