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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국 인문 기행 ㅣ 나의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24년 1월
평점 :
한 사람의 기행문을
보며 가슴이 먹먹하고 목이 메인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읽는 내내 고국을 떠나 생활하는 내 가족과
지인들이 떠올랐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외국인 노동자이자 이방인이라는 두 가지 명찰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그들의 깊은 고독감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공감empathy과
연민sympathy이라는 인간 고유의 감정을 생각하노라면 서경식 작가님의 유작인 이 책의 내용이 아프게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인권단체
방문만으로 말할 수 없이 지쳤지만, 미술관이라는 특별한 장소가 피로를 배가시켰다. 좋은 작품과 만나기라도 하면, 흥분 지수가 올라서 내 쪽에서 기가
빨리는 듯한 피곤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디를 가도 미술관에 들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일종의 병적인 심리 상태이다.” (99쪽)
작가님의 미국기행은 시간을
오간다. 군사독재 정권 아래 감옥에 있었던 두 형(서승, 서준식)을 비롯한 한국의 양심수에 대한 지원을 호소한 1980년대 여행부터, 트럼프가 위대한 미국이라는 기조 하에 ‘이방인’에 대한 차별을 캠페인으로 앞세워 대통령이 되었던 2016년까지.
그 가운데에는 늘
예술이 존재한다. 마치 이성으로 쌓인 좌뇌의 스트레스를 예술의 우뇌로 해소하는 것 같다.
“서구를
중심으로 한 범유럽 세계의 지도자와 주류 미디어, 체제 친화적 지식인의 레토릭에는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보편주의에 호소하려는 언사가 넘쳐난다. 그들이 ‘타자(상대적으로 빈곤하며 발전도상에 있는 국가의 국민)’와 관련된 정책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특히 그러하다.” (137쪽)
이 글을 읽으며 (위험한 인상을 주는 질문일 수 있으나) 민주주의의 진정한 정의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일종의 허상이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라고 하지만, 이 명분 하에 작가님의 두 형은
인혁당 사건으로 말미암아 부당한 옥살이를 하며 생사를 오가는 옥고를 치뤄야만 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이들을 ‘빨갱이’ 스파이로
규정짓고 사형을 선고하며 소위 사법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작가님이
다녀온 미국 역시 “미국(국제금융자본)이 제3세계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나간 부정과 비리의 역사가 자리하지만, 그 사실에는 굳게 입 다문 채 미국 본위의 서사를 이야기하고 (217쪽)”있는 모순이 자리잡고 있다.
‘선한 아메리카’란 과연 존재하는가?
인종차별주의자 대통령의 당선에 맞서 모마는 입국금지조치가 내려진 7개국 출신 화가의 작품전을
기획했다. 이런 투쟁에 대하여 “예술은 언제나 어떤 악몽의
시대에도 관용, 연대, 공감을 추구하려는 인문 정신이 살아
있음을 가르쳐준다. (157쪽)”라고 말하며 예술에게 남겨진
과제를 언급한다.
“사람은
승리를 약속 받았기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넘쳐나는 불의가 승리하기 때문에 정의에 대해 되묻고, 허위가 뒤덮고 있기에 진실을 위해 싸운다. 단적으로 말해 사이드는
우리에게 현대를 살아가는 자에게 있어 도덕의 거처는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233쪽)
작품의
원고를 정리할 무렵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학살이 심화되고 있었다. 자신과
동일한 ‘자기 분열 상태(243쪽)의 정체성을 가진 에드워드 사이드를 통해 작가님은 다양한 형태로 확산되는 ‘이산’ 디아스포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 속 사코의 말을 인용하자면 “전쟁이란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큰 부자가 되기 위한 짓거리(175쪽)”이다. 자유와 평화를 위한 시작인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갈등은 사실
누군가의 잇속을 위한 것이며, 이로 인해 고통 받는 것은 나약한 군중일 뿐이다.
이 책의 번역가인 최재혁 님이 남긴 “여는
글” 속 F. 후나하시 유코(서경식 작가님의 파트너) 선생이 조문객에게 건낸 인사말 중 한 문장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죄’를 두고 내내 괴로워한 사람이었습니다.” (9쪽)
이
문장을 통해 영화 <그린마일>에서 흑인이고 살인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억울한 누명을 쓴 뒤 확실한 증거 없이 사형을 선고 받았던 존 커피(John Coffey)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사형집행 직전 자신의 결백을 알고 있는 간수들에게 말한다.
“I’m tired, boss. … Mostly I’m tired of people being ugly to each
other. I’m tired of all the pain I feel and hear in the world, every day. There’s
too much of it. It’s like pieces of glass in my head, all the time”. 라고 하며
잔혹한 세상에 고통 받아 지쳤기에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영화의 극적인 장면을 작가님에게 대입하기엔
과한 감이 적지 않으나 그의 고뇌하던 삶이 투영되는 것 같았다.
이 책은 작가님의
유고작이자 나에게 있어 서경식이라는 분을 알게 해 준 첫 작품이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듯 그의
과거 작품을 하나씩 읽어보려 한다. 그것이 진정한 애도라 생각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