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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여자, 축구 - 슛 한 번에 온 마을이 들썩거리는 화제의 여자 축구팀 이야기
노해원 지음 / 흐름출판 / 2024년 6월
평점 :
오래간만에
고등학교 동창들과 만났다. 1학년 때 같은 반에서 어울리던 친구들이니까 20년도 넘게 알고 지낸 아이들이다. 고깃집에 앉아 각자 사는 얘기를
하는데 한 친구가 나를 보더니 웃으며 한마디 한다. “우리 고은이~ 새댁인데
너무 몸 관리 안 하는 거 아니야? 너 옛날에 운동 엄청 잘 했잖아,
맨날 달리기도 선수 나가고. 나 졸업앨범에서 너 사진 봤어, 너가 달리기 하는 사진이 스냅으로 찍혀있잖아, 근데 이렇게 살이
찌면 어떡해?”
그
친구의 말처럼 나는 말도 못하게 살이 쪘다. 오죽하면 내 몸에서 중학교 1학년 아이가 태어나줘야 꽤 보기 좋은 몸이 될 거라고 말할 정도니 말이다. 수확하기
직전 쌀의 낟알처럼 가득 차 있는 나의 몸이 꿈꾸는 건 4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내가 꿈꿔도 되는 건가
하는 것들인데, 그것은 1. 달리기 2. 서핑 3. 물구나무 서기 이다. 괜찮을까? 나는 이미 양 어깨와 한 쪽 무릎을 수술했고 근막 이상으로
등과 목이 좋지 않고 자궁과 눈 한쪽도 큰 수술을 한 전천후 환자인데 말이다.
내면의 “적당히 해?!”와 “그래도
괜찮아!”라는 두 가지 자아가 전투를 벌이는 요즘 새로 나온 책 한 권에 대한 소개글을 보았고 귀여운
표지와 글에 이끌려 덜컥 신청해버렸다.
제목은 <시골, 여자, 축구>, 정말 시골에서 여자들이 축구를 하는 내용을 담은 직관적인 제목의 글이다. 미리 나의 감상을 쓰자면 이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그래, 나도 할 수 있어!”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
글의 작가 노해원 님은 글 속에 나오는 반반FC라는 여자축구팀의 주장이자 세 아이의 엄마이다. 충남 홍성 작은 마을의 강아지 이름을 따서 지은 축구팀에서 조조, 봄봄, 은근, 노지, 민달팽이
코치 등 축구로 똘똘 뭉친 이들의 인간미 넘치는 이야기로 이뤄져 있다.
나는
불야성의 도시 한 가운데에서 살다가 저녁 8시만 되도 상점이 셔터를 내리는 지방으로 이사를 온 지라
아이들을 모두 재운 뒤 어둑하고 고요하기만 한 길을 지나 공을 차기 위해 나가는 느낌을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갈수록 ‘각자 인생’이
강해지는 요즘 같은 때에 각자 워킹맘, 골드미스, 전업주부, 엄마 등 여자에게만 독특하게 부여되는 이름표를 내려두고 육각형 무늬로 이뤄진 공 하나에 집중하여 달리는 모습이
얼마나 신날지! 허리나 무릎을 다칠까봐 전전긍긍하는 내 물리적인 외형과는 달리 내 머리와 마음은 필드를
달리는 이 여인들에게 푹 빠져들어 이미 축구장을 함께 누비고 있었다.
에세이를 읽다 보면 불필요한 걱정을 달고 사는 내 머리는 말끔히
정리되곤 한다.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다 그렇고 그런 것! 모두
같은 고민과 걱정을 하고 있고, 무거운 감정들은 너무나 쉽고 가볍게 풀리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함께 뛰는 선수들 사이에 손발이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것도, 상대방과의
과격한 몸싸움에 거친 말이 툭 튀어나오는 것도 모두 이해와 배려를 통해 해결된다.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 할 것, 잘
못한 일들은 반드시 사과할 것! 단순하지 않은가?
타 축구팀의 요청으로 차출되어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지만 윗선의
행동으로 인해 남은 경기를 떠나며 아무리 좋아하는 축구라고 하더라도 자존심까지 버릴 필요는 없다는 부분을 읽으며 그간 상황에 맞추느라 불편한 감정이
있음에도 꾹꾹 참기만 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 하지만 자신을 다쳐가면서까지 억지로
맞춰 나갈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축구와 함께 뛰는 사람들, 그리고
면 단위의 작은 마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잘 풀려 있는 것이 이 책의 큰 매력이라 하겠다. 무엇보다
중심인물들 모두가 특출 나게 뛰어난 영웅적인 인물이 아닌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평범한 한 명 한 명이기 때문에 글에 더 정감이 묻어난다.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이는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공을 차는 영희, 철수 엄마들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이런 평범한 듯 독특한 소재의
글이 이 책을 제11회 브런치북 출간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하게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책을 덮고 나서 생각해본다, 내
몸에서 당장 20~30kg가 쏙 빠져 나와준다면 참 좋겠지만 일단 좋아하는 것을 차근차근 시작해보자고. 작가가 축구를 이야기 한다면 나는 내가 애정하는 줌바부터 해야겠다. 먹는
것도 당장 끊으면 부작용만 날 테니 내 몸에 맞게 조절해야지, 그럼 언젠가 달리기도, 서핑도, 물구나무서기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축구에 대한 마음을 키워 가고 있을 때 마을에 여자 축구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호기심 정도였다. 여전히 나는 애 엄마고, 서른이 다 되어가도록 제대로 된 운동 한번 안하고 살아 왔으니 축구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계속 선긋기를 했다. 그런데 그 팀에 3남매, 4남매를 키우는 언니들이 나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때부터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소식은 내가 축구를 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였던 ‘애 엄마’라는 수식어를 깨끗이 지워 버렸기 때문이다. 속으로 그어 놓은 경계선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 언니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축구를 하러 운동장에 나갔다."
- P18
"항상 아이들과 함께하던 평소와는 달리 혼자서 고요한 차를 타고 축구를 하러 가는 길은 마치 해방의 터널을 지나는 기분마저 든다. 훈련장에 도착해 두 줄로 서서 운동장을 뛰는 스무 명 남짓한 여자들의 뒤통수를 보면 마음이 벅차다. 흩날리는 머리칼을 보며 ‘이 사람들도 집 밖으로 나오는 길에 나처럼 해방의 터널을 지나는 기분이었을까?’행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축구하는 여자들을 볼 수 있는 이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 P52
"운동장에서처럼 우리의 삶도 정확한 내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더 이상 헷갈리고 싶지 않다. 내가 뛰어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 내가 지켜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 뛰어야 할지를 정확히 알아야 힘껏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언젠가 나도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 P84
"축구를 하고 글을 쓰기 전까지 나는 내 안에 경계와 마주할 때마다 자꾸 뒷걸음질 쳤다 .축구 보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할 수 없는 이유만 수없이 늘어났다. 한 번도 축구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고, 애 키우느라 할 시간과 체력도 없고, 무엇보다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축구 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와 같은 상황에 놓여있는 언니들이 축구를 하고, 나처럼 경험도 시간도 없고 무엇보다 축구랑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던 여자들이 모여 달리는 모습을 보며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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