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식민지 근대와 여성공간
태혜숙 외 지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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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국의 식민지 근대와 여성공간』은 서구추수적인 인식론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여성주의 시각에서 한국의 식민지 근대를 재조명하려는 여이연판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약칭) 탈식민 페미니즘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보편적인 기획으로 행세해왔던 서구적 근대성을 "젠더" 관점에서 새롭게 읽어내려는 의도 아래 1920, 30년대 한국 식민지 근대의 여성 공간을 화두로 삼은 점이 눈에 띤다.  
 무엇보다, "탈식민"을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일제 식민 압제의 잔여물에 대한 극복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가장 주변화되고 박탈당한 여성들의 시각과 공간으로부터 우리의 근대성을 재조명해내는 분석은 우리의 식민지 근대가 지닌 복잡성을 여하한 단순화나 환원을 피하면서 잘 포착하고 있다. 식민지 근대 시기의 여성 공간이 제국주의적 폭력, 계급적 갈등, 봉건적 잔재, 민족주의적 욕망, 가부장적 권력이 교차되는 심급이라는 것이다.

 "젠더화된 하위 여성 공간"이라는 방법론적 개념틀은 소위 "주체적" 입장을 표방하는 민족주의적 연구들에 이론적으로 생산적인 위기를 가져다 줄 것이다. 토착 민족주의, 우파 민족주의, "선한" 민족주의 등 그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어 있다고 할지라고 민족주의 자체가 가부장제에 바탕하고 있는 한, 여성에 대한 맹점을 안고 있다. 

 또한, 토착성을 강조하는저간의 민족주의적 논의들은 식민지 근대 상황에서 피식민 주체의 자발성과 자생성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도 근대성을 여전히 따라가야 할 무엇 혹은 완성되어야 할 규범으로 상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의 식민지 근대와 여성공간』에 실린 몇 편의 탁월한 논의들은 서구적 근대성을 전제하는 한, 애초의 연구 의도와는 달리 서구중심적 패러다임의 주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 

 이런 문제 의식에서 이 책의 연구자들은 식민지 근대의 여성들을 "역사적 주체"로서 전면에 내세운다. 한국 식민지 근대의 심장부에서 탄생했으면서도 가장 주변화된, 여성들의 삶과 경험은 이전 시대와 달리 새롭게 부상했던 주체화 양식이 시간성보다는 공간성을 통해 촘촘하게 구축되는 과정을 징후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한국이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편입되는 역사적 과정은 식민성을 근대성의 내재적 구성 요소로 보게 한다. 우리는 한국 식민지 근대의 식민성과 근대성을 여성이 말 그대로 역사의 동력으로서 적극적으로 편입되었던 특정한 역사 시기의 집단적 체험을 아우르는 것으로 설정된다. 

 젠더 유물론에 기초한 식민지 근대의 여성 공간을 부각시키는 페미니즘 문화론이야말로 한국판 탈식민 페미니즘을 진전시키는데 의미있고 유용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식민지 근대라는 특수한 역사적 국면에서 여성과 남성이 함께 그러나 차별적으로 구조화되는 양식을 잘 규명하고자 하는 가운에, 그 속에서 다양한 여성 하위주체들이 그 나름의 역사 인식과 정치적 교섭을 창출했던 집단적 노력을 밝히는 대목은 자못 감동적이다. 

 한국 식민지 근대의 복잡한 주체화 양식과 여성을 역사적 주체로 인식하고 여성의 일상과 체험을 조밀하게 분석해내고 있는 이 연구서는 서구추수적이고 남성중심적인 근대적 인식론을 내파, 외파하는 지점들을 짚어낸다.  

 2년여에 걸친 연구작업을 통해서 도달한 이 연구의 잠정적 결론을 보자면, 1) 여성의 몸이 식민지 근대의 모순을 가장 복잡하게 체현하고 있는, 최종심급으로 작용한다는 점. 2) 여성들의 몸이 최종심급이 되었던 식민지 근대의 주체화 양식은 시간성보다는 공간성을 통해 구축된다는 점. 3) 식민지 근대 공간에서 새롭게 형성되거나 상당한 변형을 겪어야 했던 여성 공간들은 가부장적 식민주의 자본의 가혹한 착취, 남성주의적 민족주의 담론, 유교적 가부장제의 여성 섹슈얼리티 단속 및 모성을 포함한 여성성의 재구성, 생존 자체가 문제시되는 거의 절대 빈곤 상태의 식민지 상황의 모순들이 복잡하게 교직되는 장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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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위치
호미 바바 지음, 나병철 옮김 / 소명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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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바바의 혼종적 양가성 논의는 글로리아 안잘두아가 <경계지대>에서 쓴 메스티자와 대결시켜 읽어야 한다.  

서구에서 지난 20세기 후반 50년은 아마도 "포스트-"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난 50년 간 자주 회자되어 온 "포스트-"가 붙은 여러 이즘들을 거칠게나마 시간 순으로 말해 보자면 이렇다. postindustrial age (후기 산업 시대), postmodern (후기/탈 모던), poststructualism(후기/탈구조주의), post-feminism(제3세대 페미니즘으로서 후기 페미니즘), postcolonial (후/탈식민), post-metaphysical(탈형이상학적), post-psychoanalytic(탈정신분석학적), post-human(탈인간적) 등.

포스트식민주의는 역사적 식민주의 시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 식민지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문화와 역사를 비판적 시각을 통해 재조명해 왔다. 또한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와 과정을 통해 "제3"세계인들이 "제1"세계에 이주해 들어가 살게 됨에 따라 발생하기 마련인 "제국"의 메트로폴리스 내부에서 일어나는 재식민화에 맞서서 문화적 혼종성(hybridity)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들은 제국의 텍스트를 분석하고 그 서사구조와 내용을 분석한다. 그리고 제국의 담론을 되받아치는 행위로서 글쓰기 혹은 언술행위의 중요성을 제기하며, 그 글쓰기의 행위로서 대항언술행위 중 알레고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문화의 혼종성이 열어주는 가능성, 흉내내기와 틈새전략으로 균열적, 해체적 읽기, 협상과 번역의 중요성 등을 제안한다. 

 우선,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에 탄탄한 기반을 마련한 이론가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명저 {오리엔탈리즘}(1978)에서 "동양"에 대한 서구의 지배 방식과 인식 방식의 긴밀한 상관성을 밝힌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식민주의적 팽창 과정에 있던 서구인들이 피식민 주체를 인식하는 방식과 식민주의적 지식들이 생산, 재생산되는 기제를 일컫는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서구인의 동양관인 "오리엔탈리즘"은 실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동양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없다는 점이다. 식민 주체인 서구인에게 "동양"은 실제 동양이 아니라 서구인의 지배 욕망이 투사된 "상상적" 동양 이미지일 뿐이라는 말이다. 식민 지배담론("오리엔탈리즘")은 식민 주체가 지닌 기원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피식민주체의 열등성을 고정시키고자 한다. 지배주체는 문명화된 우월한 존재인 반면, 피지배주체는 야만적인 열등한 존재라는 이분법에 근거해서 피지배대상을 야만의 상태로부터 구출하여 근대화 혹은 개화시켜준다고 함으로써 억압과 착취를 윤리로 포장한다.  


이런 식의 상상적이고 욕망 투사적이며 식민 폭력을 정당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에 대한 교묘하고 공고한 지식 생산 제도가 되어 감에 따라, 실재 동양인도 스스로를 "영원한 야만 상태의 미개인"으로 인식하게 되는 위력을 발휘한다. 이것이 바로 식민사관 혹은 식민 이데올로기의 현실적 힘이다. 

이 지점에서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의 선구적 이론가인 프란츠 파농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피식민 주체(동양)가 식민 주체(서구)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방식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피식민 주체의 물질적 심리적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는 단점을 지닌다. 사이드보다 2-30년 앞서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 (1952)과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1963)에서 식민상황으로 인해 겪는 피식민 주체들의 개인적 집단적인 심리 구조를 설득력있게 설명한다. 파농에 따르면, 지배와 착취로 점철된 식민 사회는 피지배자요 피착취자인 앙틸레스 흑인들에게 비참한 생활만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열악한 물질적 조건이란 인간 개인의 심리를 구조화하는 위력을 갖는 법. 식민 지배는 문화와 교육을 통해서 끊임없이 피식민 주체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열등한 것, 혹은 비존재(non-being), 무인(no-man)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피식민 흑인들이 보이는 존재의 소외감, 끊임없는 정서적 탈선과 열등콤플렉스를 파농은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피식민 주체의 삶은 이중적으로 왜곡된다. 첫째는 경제적으로, 다음에는 심리적으로. (내적) 억압(repression)은 외부로부터 오는 탄압(oppression)과는 달리 자기생성적인 성격을 갖는다. 백인의 압제 하에 있었던 앙틸레스 흑인들의 경우, 벗어나기 힘든 열악한 물질적 조건과 인종차별적 세계와 식민주의적 세계관의 영향 하에서 자기 부정, 검은 육체에 대한 수치심, 자기비하, 무력감, 백인에 대한 선망과 증오(라는 부들부들 떨게 만드는 양가적 감정), 공격적 성향 등을 내면 심리에 키우게 된다. 파농이 더 무서운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식민적) 탄압 자체보다는 탄압 속에서 파생하기 마련인 (자기)억압과 그로 인한 자기 부정이다. 자기를 부정하는 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정신과 의사답게,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파농은 모름지기 인간 해방이란 인간들 자신의 존재 조건, 즉 외적이고 내적인 존재 조건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를 기반으로 해야만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식민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에 기반한 피식민 주체들에게 폭력적 저항은 정치적 심리적 해방과 정체성 회복을 꾀하는 유일한 수단일 수밖에 없다고 파농은 쓴다. 


포스트식민주의의 "빅 쓰리"(사이드, 바바, 스피박)에 들어가는 주도적인 이론가인 호미 바바는 파농의 정신분석학적 통찰을 좀더 복잡하게 정교화한다. 포스트구조주의, 특히 라캉, 데리다, 푸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바바는,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의 저자 사이드를 비판하는데서 출발한다. 바바는 사이드가 제국주의 지배담론의 시간적 연속성과 공간적 보편성을 전제함으로써 피식민 주체의 적극적인 저항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고 비판한다. 또한, 바바는 민족주의 담론 역시 비판한다. 신생독립국들은 식민담론이 왜곡, 훼손시킨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식민상태 이전의 순수한 기원으로, 과거로 퇴행하여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이미지를 복원시킨다. "우리" 민족이 과거에 얼마나 찬란한 문명을 가졌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바바는 이런 민족주의 담론 역시 순수한 기원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을 스스로에게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사이드가 논증했던 "오리엔탈리즘"식의 식민 담론과, 식민 해방 후 고유한 독립적 정체성을 수립하고자 "찬란한" 과거로 눈길을 돌리는 민족주의 담론 모두 이분법적인 정체성에 고착되어 있다는 점을 바바는 비판한다. 바바의 작업은 "식민적 양가성"(colonial ambivalence)을 내세워 소극적인 저항의 주체까지 저항 주체에 포섭함으로써 "탈"식민주의 시대에 걸맞는 주체를 찾아내려는 것이다.

바바가 말하는 "식민적 양가성"은 정신분석학의 통찰을 활용한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양가성이란 하나를 원하면서 동시에 그 반대의 것을 원하는,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는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용어이다. 다시 말해 끌림과 혐오가 동시에 일어나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양가성 개념을 차용하여 바바는 식민 지배자와 피식민자 사이는 단순히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끌림과 혐오가 복잡하게 뒤섞이는 양가적 관계가 된다. 피식민 주체는 식민 주체에 완전히 대항하지 않기 때문에 양가적이고, 식민 주체 또한 착취적이면서 베푸는 것으로 재현되기 때문에 양가적이다. 따라서 양가성은 식민지배자에게는 식민담론이 갖는 부정적인 측면이 된다. 식민주의 담론을 통해 지배자는 순응적인 주체, 즉 지배자를 흉내내는 주체를 생산하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는 끌림과 밀어냄을 동시에 하는 양가적 주체들을 생산하게 된다.  식민 사회를 포함하여 모든 사회, 집단, 문화 안에서 작용하는 힘의 역학은 일방이 아니라 힘의 우위가 있긴 하지만 상호적이고 그래서 항상 양가성이란 틈새가 우글거리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식민 담론이 사이드가 논증한 대로 그렇게 일방적으로만 작용하는게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중심"에 의해 의심스러우며 분류될 수 없으며 경계선에 위치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주변부"가 "중심"을 불확적적이고 비결정적인 양가성을 지닌 것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제국"의 중심성을 교란시킨다.  

물론 그렇다고 "중심"과 "주변"이 "똑같이"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바바의 "식민적 양가성"은 문화적 혼종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혼종성은 식민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접촉으로 인해 새로운 문화적 형태가 형성된다는 점을 가리키는 용어이다.지배자의 것이든 피지배자의 것이든 모든 형태의 주체와 정체성, 그리고 담론은 차이와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주체의 정체성에는 이미 타자가 섞여 있고 따라서 모든 형태의 정체성은 이미 혼성체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식민담론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관계는 양가적이고 지배자 안에 이미 타자로서 피지배자가, 피지배자 안에 지배자가 타자로서 존재한다. 이미 언제나 지배자의 담론은 피지배자의 담론에 의해 분열되어 있는 이 상황은 제3의 공간을 만들며, 그 공간은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혼종/잡종의 공간이다. 바바는 피식민 주체의 흉내내기가 비아냥(mockery)이나 패러디라고 하면서 그 안에 이미 차이와 저항의 요소가 내재해 있다고 본다. 바바의 논지는 식민 담론은 피식민 주체를 전방위감시체계인 판옵티콘적으로 통제하면서 총체화하려고 하지만, 실제로 식민 담론과 식민 구조들이 그렇게 총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흉내내기, 양가성, 혼종성 등은 이 점을 논증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들이다. 예컨대 혼종성과 제 3의 공간은 여러 차이의 경계선들을 가로지르면서도 차이를 존중하게 하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론적 복잡성과 정교함에도 불구하고 바바의 포스트식민 논의는 동화주의자의 발상, 혹은 제국의 힘을 인정하는 발상이다. {백색 신화}(White Mythology)의 저자, 로버트 영은 바바의 식민 담론에 관한 분석이 "저항의 역사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정치성과 역사성을 결여한다고 비판한다. 사이드의 탈식민주의에 나타난 식민 담론의 일방적인 지배에 대한 반작용으로 바바가 지나치게 식민 담론에 내재하는 내적 불일치에 치중한 나머지 피지배자의 역사적 의식과 정치적 행위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바바의 정치적 저항은 지배자의 편집증에 기인한 것이지 피지배자의 정치적 의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그 결과 피지배자는 정치적 행위의 주체가 아닌 식민 담론의 지배 구조에서 발생한 자기 분열의 효과로서 "주체가 없는 행위자"로 전락한다. 영은 바바의 탈식민 전략들이 적극적인 정치행위로 연결되기 힘들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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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대산세계문학총서 7
조라 닐 허스턴 지음, 이시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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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라 닐 허스톤은 미국 흑인 문학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를 갖는 작가다. "흑인의식"이 예술혼을 통해서 꽃피던 1920년대 할렘 르네상스 시절에도 그녀는 겁나게 독립적인 정치적 입장("어떤 인종집단도 전체로서 간주할 필요가 없다"[자서전 171])을 지녔던 지라 흑인 "문학계"에서도 왕따 신세를 면치 못했다. 또한, "급진적"/"보수적", "흑인," "혁명적" 등등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그녀의 복잡성. 이러한 복잡성은 그녀의 자서전, 소설에 생생하게 구현되어 있다. 그란디 아이러닉하게도 바로 이 복잡성이 흑인성 추구 및 인종차별 "폭로"에 "혈안"이 되어 있던 (중산층) 동시대 흑인 문인들, 1930년대에 풍미했던 사회적 사실주의, 그라고 1960년대 (배타적으루 남성들로 우글거리는) 흑인민족주의 미학 운동이 그녀를 백안시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과 '민족/인종'의 맹안적 혹은 아포리아적 관계를 다시 목도한다. 

미국 문학사에서 "흑인" 문학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라 할 리차드 라잇(대표작: {토박이}) 역시 허스톤의 1937년 소설이 인종의식이 결여된 것이라고 맹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이에 허스톤은 자신은 흑인 소설을 쓰고 자픈 것이지 "사회학적 논문"을 쓰려는 게 아니다라고 맞받아 쳤다.

 앨리스 워커는 1975년 {미즈}지에 [조라 닐 허스톤을 찾아서]라는 유명한 글을 발표한다. 이 글로 인해 허스톤은 흑인여성작가들이 "전통"을 찾아가는 은유가 되었다. 워커가 보기에 허스톤이야말로 흑인들을 온전하지만 복잡하고, 축소된 바 없는 인간으로 "제대로" 그려냈다는 것이다. 해롤드 블룸이 {서구의 정전}에서 논한 바 대로 남성 작가들이 자신들의 문학적 아버지를 맹렬하게 거부하는 전통에서, 허스톤과 그 딸들은 흑인들의 전통 개념을 벼리어 낸 셈이다. 전통속의 전통, 흑인 여성의 목소리.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1937)에서 허스톤은 흑인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흑인)여성들이 자기해방적인 여성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심오한 원천으로 그려낸다. 이 점은 소설 초두의 유명한 장면에서 이미 예고되는 바, 주인공 재니 크로포드가 자기 안의 성적인 에너지에 처음으로 반응하는 이 유명한 장면은 강렬함 그 자체이거나 그것으로 가득차 있다. 꽃이 활짝 그라고 무성히 핀 배나무와 배꽃 주위를 윙윙거리는 벌들을 봄시롱 자신의 성적 에너지와 이성애에 눈을 뜨는 이 장면은 생명, 생기,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또한 이 장면을 바라보는 재니가 어떤 인간인지를 잘 보여주는디, "무성한 꽃들에 먼지묻은 벌들이 빠져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재니는 생명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섹슈얼리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계시를 보게" 된다(11).  그녀는 또한 "하나의 신비를 물끄러미 바라봄시롱" "사랑의 포옹과 황홀한 떨림을. . . 기쁨에 젖어" 바라본다(11). 재니는 "저것이 바로 결혼일 것!"하는 결론에 다다른다. 여기서 우리는 재니에게 아무런 억압이나 부정이 없다는 점을 발견한다. 대신, 겁나게 자극을 받은 재니는 "회한없고 달콤한 고통"을 느낀다(11). 이 장면은, 성적 애(愛)너지와 이성애적 사랑에 대한 한 흑인 여성의 억수로 긍정적이고 생생한 반응은 노예시절에는 찾아 볼 수 없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활짝 꽃핀 배나무와 꽃들 속을 노니는 벌의 이미지는 이 소설 내내 자주 반복되는 주제 이미지이다. 재니가 "하나의 계시"로 느끼는 이 장면에서 그녀는 자신이 들은 "들리지 않은 목소리와 비젼을 확증"하고자 하는 갈망을 갖게 된다(11). 그녀는 해답을 찾으려 정원을 내내 서성인다. 그녀는 "세상의 시작을 노래하는 꿀벌들에게 키스를 함시롱" 자신의 삶을 축하하고 향유하기 위해서 "배나무가 -- 활짝 핀 여하한 나무"가 되고자 한다 (11). 열 여섯 살이던 이 때부터 꽃가루를 묻혀주는 꿀벌(자신의 삶과 사랑을 나눌 남자)을 찾아나서는 그녀의 탐색이 시작된다 

이 유명한 장면은 재니가 성적인 주체로서 그라고 새로운 세대로서 성장해나가는 긍정만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노예제도 시절에 살았던 재니의 할머니의 몸과 정신은 말그대로 식민화되었다. 재니의 엄마는 비참한 삶을 살다가 백인 선생의 강간질로 집을 나갔다. 즉, 재니의 엄마 세대에게도 흑인여성의 몸은 식민화되었던 것이다. 재니 할머니가 보기에, 흑인여성의 몸이란 안정적인 결혼을 통해서만 보호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래서 할머니 "존 테일러가 재니에게 키스를 함시롱 수작을 거는 짓거리"(12)를 보게되자, 재니를 60에이커의 땅을 지닌 로간 킬릭스에게 후딱 결혼시키려 한다. 하지만, 활짝핀 꽃나무가 되려고 하는 재니의 성적 에너지, 그라고 "꽃가루 묻히기"(pollination 즉 이성애)를 통해서 성적 에너지를 만족시키려는 재니의 갈망은 재산이 좀 있는 남자의 보호하에서 안온한 결혼생활을 하라는 할머니의 결혼관에 회의적이다. "로간 킬릭스 생각은 배나무를 망쳤다"(14).  


나중에 재니는 세 번 결혼하게 되는데, 매번 결혼을 결심할 때마다 그녀는 자신을 배나무와 연결시킴시롱, 그 나무 안에서 자신이 상상해 온 사랑하는 "꽃가루 묻히기"가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로간에 대해서 약간 회의적이긴 하지만, 할머니가 하라는 대로 로간과 결혼한다. 하지만, 로간과의 결혼 생활은 할머니의 말과는 달리, 자신의 몸을 실현시키는 것과는 동떨어졌다. 재니는 "결혼생활에 있을 법한 달콤한 무언가"를 욕망함시롱 할머니에게 충고쫌 해달라고 허지만, 이 할마씨는 아내로서의 희생만을 훈계한다. "아가, 좀 기둘려라. 살다보믄 니 생각도 바뀔거시여"(24). 재니는 "무성히 꽃필 시기"를 헛되이 기달리고 마침내 "이 결혼은 사랑을 피우지 못한다. 자신의 첫 꿈은 죽었고 그래서 그녀는 여성이 되었다"고 깨닫는다(25).  


재니가 원하는 것은 결혼생활이 주는 안정과 보호가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죽을 때꺼정 "모든 것에 흩뿌려지는 꽃가루와 봄철", 즉 "자신을 꽃피게할 꿀벌"(32)이었기에 재니는 로간을 떠나 조 스탁스와 함께 이튼빌(*자서전에 보면 이곳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자치 타운이며, 실제 허스톤의 고향이기도 하다)로 간다. (이 흑인 자치 타운에서) 조 스탁스는 나중에 돈많은 지주가 되고 또 시장님꺼정 된다. 로간을 버리고 조와 야반도주를 허는 재니에게서 우리는 할머니의 결혼관 대신에 자기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따르는 흑인여성의 모습을 본다. 즉, 할머니의 삶이 보여준 흑인여성의 헌신적인 여성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내는 개인적 여성주체로서 여성. (독립적인 여성 개인 주체. 이것은 허스톤의 자서전의 핵심 테마이기도 하다).  


"자신을 꽃피게 할 꿀벌"(32)을 꿈꾸는 재니. 그녀가 상상한 능동적이고 활력에 찬 결혼 생활은 조 스탁스와의 실제 삶에서도 여지없이 산산조각난다. 그녀는 다른 이들을 지배하려는 야심가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강제된다. 조와 살면서 재니는 "물건을 팔도록 상점 안에" 늘 있도록 강제되며 자신이 좋아하는 대화자리에도 참석하지 못하도록 금지당한다. 게다가, 남자들이 재니의 아름다움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게 안이나 주변에서는 머리를 꼭 쫌매라"는 남편의 잔소리에 시달림시롱 산다 (55). 즉, 남편의 복종 요구하에서 그녀는 능동성은 재갈이 물리며 감수성은 질식된다. "결혼 생활의 남모르는 상태를 곰곰히 생각하자니 그녀는 다시 그에게 열리지 않았다" (71).  

조가 죽고 난 후 재니는 독립적인 성적 주체로서 스스로를 분명히 한다. 그녀는 "사람들을 찾아서 지평선을 향해 가는 위대한 여행을 할 준비가 되었다"(89). 할머니와의 강력한 유대 대신에 정신적 분리와 독립을 발전시킴으로써, 이제 그녀는 자신의 신체적 에너지가 이끄는 대로 자기 실현을 할 준비가 된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살았던 대로 살 수 없더. 이제 나는 내 삶을 살 꺼야"(114).

티 케익과 재니의 사랑은 재니가 자기를 해방시킨 성적 여성 주체임을 잘 보여준다. 그를 만난 이후 그녀는 자신의 이성애를 유감없이 꽃피운다. 게임을 하고 한밤의 낚시하는 법을 마치 "규율을 깨는 어린애 마냥" 즐겁게 배움시롱 재니는 티 케익을 자신을 "꽃피워줄 꿀벌"로 받아들인다(106). 그들의 사랑은 젊은 넘들은 돈땜시롱 늙은 년을 잠시 쫓아다닌다는 관습적인 신념을 깨드리며, 활력과 기쁨에 찬 새로운 사랑을 보여준다 "춤추고 싸우고, 노래하고, 울고, 웃고, 매번 사랑을 얻고 읽고. 돈벌려고 낮내내 일하고, 밤새 사랑싸움허고"(131). 게다가 그들은 돈을 더 많이 벌려고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붙어)있으려고 함께 일한다. 이렇게 새로이 탐험되는 신체는 재니의 할머니 세대라면 상상할 수 없었던, 흑인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긍정하고 자신의 몸을 사랑하고 자신의 느낌과 뜻에 따라 움직여 가면서, 자신의 몸을 탈식민화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론, 자기를 해방시킨 성적인 주체로가는 이러한 탈식민화에는 나름의 (역사적) 통행세 혹은 대가를 요구하는 법. 허리케인이 몰아치고 티 케익은 재니를 구하려다 개에게 물려서 광견병에 걸리고 어찌할 바 없는 재니는 자신을 보호하려다 그를 쏘게 된다. 결국 재니는, 가슴에 단단히 쇠사슬을 묶어두었던 친구 비피 왓슨이 있는 곳으로 홀로 되돌아간다. 

이 소설에서 허스톤은 소위 흑인여성성의 절정판(cult of black womanhood)과 관련되지 않는 새로운 흑인 여성성과 섹슈얼리티를 보여준다. 재니의 몸과 섹슈얼리티는 백인과 흑인 남성들에 의해서 착취되고 유린될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다. 이제 흑인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는 과거보다 더 자유로운 장(field)을 구성하고, 그 안에서 점차적으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주체로서 흑인여성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깨닫고 실현한다. 재니가 활짝 핀 배꽃 아래서 성적인 에너지와 이성애에 긍정적이고 활기차게 반응하듯, 자기를 긍정하는 이 "새 여성"은 자신의 몸을 탈식민화하고 자신을 해방시킨 성적 주체가 되는 "먼지가득한 길"(dust tracks)을 향해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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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7
글로리아 네일러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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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국 흑인여성작가들은 흑인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이 만나는 교차로에서 작업하면서 인종문제를 젠더와 섹슈얼리티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다 복잡하고 정교하게 재검토함으로써 흑인 민족주의 담론과 흑인미학에 비판적으로 개입해 왔다. 글로리아 네일러(Gloria Naylor 1950-) 역시 여성의 종속을 당연시하는 남성중심적 흑인민족주의에 비판적으로 개입해 온 흑인여성작가이다. 네일러는 1960년대에 거의 동시적으로 발흥한 흑인민권운동, 여성운동, 급진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고 1980년대부터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해왔다.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성들>(The Women of Brewster Place 1982), <린든 힐즈>(Linden Hills 1985), <마마 데이>(Mama Day 1987), <베일리의 카페>(Bailey's Cafe 1992),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남성들>(The Men of Brewster Place 1998) 등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네일러의 기획은 페미니즘과 흑인 민족주의를 생산적으로 절합하는 것이다. 흑인 민족주의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모리슨, 워커, 엔토자케 샹게(Ntozake Shange), 존스 등과는 달리 네일러는 흑인 민족주의의 정치적 유효성을 보다 명시적으로 인정하면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이자 흑인 민족주의자로 규정하며 흑인여성의 입장에서 흑인 민족주의의 남성중심적 편향을 극복하려 한다. 네일러가 보기에 미국 사회에서 인종이 권력관계의 핵심축들 중 하나로 작동하는 한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흑인 민족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흑인 민족주의가 노정해온 남성중심적 문화는 남성만을 역사의 주체로 상정하고 흑인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을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흑인공동체에서 여성의 종속을 당연시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우선 이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보자. 

네일러는 매티와 시엘의 관계를 노예제 시절부터 미국에 존재해 왔던 흑인여성의 전통에 위치시키면서 경험의 공유뿐만 아니라 감정이입(empathy)의 윤리가 강력한 자매애를 형성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매티가 낙태와 사고로 인해 두 아이를 잃은 시엘을 치유하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들 중 하나다. 이 장면은 흑인여성이자 어머니로서 경험을 공유한 매티와 시엘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정이입이야말로 인종, 젠더, 계급, 성이 맞물려 작동하는 사회적 심리적 억압이 강요하는 비인간화에 대항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힘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세리나가 죽자 시엘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자신 역시 죽기를 기다린다. 시엘이 세리나의 죽음에 대한 절망과 유진에 대한 분노를 자기절멸로 표현하고 있음을 간파한 매티는 그녀를 꼭 안고서 말이 아닌 촉각의 언어와 제의를 통해 치유하려고 한다.

그녀는 시엘을 안고서 수정처럼 맑게 빛나는, 어머니의 품에서 강제로 떨려나와 넵튠 에게 바쳐진 아기들의 신선한 피가 분홍빛 포말처럼 찰랑거리는 에게해 위로 흔들었다. 그녀는 계속 그녀를 흔들며, 넋을 잃은 유태인 어머니들이 자기 아이들의 창자를 쓸어담았던 다추를 지났다. 노예선 갑판 위에서 내던져진 세네갈 아기들의 찢겨진 머리를 지났다. 그녀는 계속 흔들었다. 그녀는 [시엘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살해당한 꿈들을 보도록 시엘을 흔들었다. 그녀는 그녀를 계속 흔들어서 자궁속으로, 상처의 가장 깊은 곳으로 인도했다. . . . 몸이 멈추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들은] 고통의 악을 쫓아내는 중이었다. . . . 그녀는 천천히 그녀를 목욕시켰다. . . . 마치 새로 태어난 아이를 다루듯이.

시엘의 몸을 흔들면서 매티는 아이를 상실한 시엘의 고통을 여성전체 그리고 흑인노예여성의 경험과 연결한다. 그리고, 시엘의 구체적인 개별적 맥락에서 상처를 보듬어 줌으로써 시엘의 절망과 분노가 울음이 되어 터져 나오게 한다. 시엘의 “몸속 깊이 박혀있는”(103) 고통의 조각들을 쫓아내려는(exorcising) 매티의 의식은 상징이 아니라 몸을 통한 제식이다.  시엘 장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소리 내어 우는 시엘이 자기절멸의 욕망대신 세리나의 죽음을 애도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바-매티-시엘로 이어지는 하위주체 흑인여성들의 계보는 모성이나 혈연관계가 없는 여성들 사이의 자매애로도 연결된다(이경순; Andrews). 매티의 어린 시절 친구인 에타는 여러 흑인남성들과 만족스럽거나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하며 북부의 여러 도시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매티가 사는 브루스터로 온다. 브루스터에서 에타는 우즈(Woods) 목사를 통해 안정된 삶을 살려했던 마지막 시도 역시 좌절당하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매티의 “빛과 사랑과 위안”이라는 점을 깨닫는다(74). 매티와의 우정 속에서 에타 역시 브루스터의 젊은 흑인여성들을 도우며 대안 어머니로 살아간다. 대안 어머니들로서 매티와 에타의 삶은 하위주체 흑인여성들 역시 더 나은 삶을 향한 변화를 가능하게 할 집단적 정치적 주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네일러는 흑인여성 중심적 문화와 전통이 존재해왔다는 점을 분명하게 가시화하고 이를 통해 흑인민족주의 담론과 실천에서 배제되어 온 여성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 네일러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여성들 사이의 유대는 혈연을 뛰어넘는 어머니-딸 관계와 자매애 둘 다를 아우르며 한쪽의 일방적 희생에 기반하지 않는 상호성을 그 핵심으로 한다. 집에서 쫓겨난 매티를 거두어 주는 여성은 매티와 아무런 연고관계가 없는 이바 터너(Eva Turner)다. 외손녀 시엘(Lucielia)과 함께 사는 이바는 살 집을 구하지 못한 채 같은 거리를 맴돌고 있는 매티가 미혼모임을 알아보고 자신의 집에 들여 30년간 매티와 베이즐이 시엘과 대안 가족을 이루며 살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이바는 시엘과 베이즐을 돌봐줌으로써 매티가 육아에 대한 걱정없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30년 동안 매티에게 “또 다른 어머니”(39)였던 이바를 통해서 네일러는 하위주체 흑인여성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힘들 중 하나가 생물학적 모성을 넘어선 공동체적 모성 혹은 돌봄의 문화였다는 점을 시사한다.

네일러가 흑인 민족주의의 남성중심적 편향을 극복하는데 중요한 통찰로 제시하는 대안 어머니 전통은 매티와 시엘의 관계에서 그리고 매티와 에타(Etta)의 우정에서 잘 드러난다. 우선 매티와 시엘의 관계는 대안 어머니 정신이 어른-아이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폭력에 끊임없이 노출되는 흑인여성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실천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바의 손녀인 시엘은 이바가 죽은 후 부모와 함께 노스 캐롤라이나와 테네시 주에서 살다가 유진(Eugene)과 결혼하여 브루스터로 온다. 어느 직장이고 오래 버티지 못하거나 쉽게 해고되는 유진은 시엘을 온전히 자기 지배하에 두려고 함으로써 좌절된 남성성을 보상받으려고 한다. 네일러는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엘과 유진의 가정생활이 인종차별주의적 고용에 기인한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지배를 인종차별에 대한 보상으로 여기는 성차별주의를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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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라
토니 모리슨 지음, 김애주 옮김 / 들녘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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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여성문학에서 다른 여성들과 우정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던 여성들은 살아남는다. 그렇지 않을 경우 결국 사회의 구조적 억압 속에서 꽃필듯하다가 그렇지 못한 채 죽어간다. 이 소설은 투쟁하다가 죽어가는 삶과 생존 사이의 중간에 선 술라의 인생을 보여주면서, 생존으로 가는 사다리로서 때늦은 기억과 재평가를 통해 텍스트 속에서나마 살아남는 기억의 정치와 우정을 보여준다. 

1993년에 국제 정치적 "농간"과 "나눠먹기"에 의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토니 모리슨의 1973년 소설 {술라}는 사실 노벨 문학상을 1970년대, 1980년대에 한 열 번쯤 더 받아도 되는 재미난 소설이다. 술라 매 피이스(Sula Mae Peace)라는 여성 주인공의 궤적은 어떻게 해서 사회적으로 구성, 강제되는 이성애 제도가 인종내부적이며(intra-racial) 남성중심적인 담론들 내부에 술라의 주체성을 '감금'/제한허는지를 그러면서도 어찌해서 술라의 성적인 몸이 이런 감금, 제한 장치들에 완전히 구조화되지 않는지를 잘 보여준다. 술라는 결국은 자신이 속한 흑인 공동체에 의해서 위반적인(transgressive) 성적 존재로 환원당하는데, 이 과정은 의미심장허게 흥미로운 지점들을 까발린다. 우선, 이런 환원 과정에서 가장 중요헌 역할을 허는 것은 술라의 <능동적인> 이성애적 도발('자유'라고 표현되는)이다.

자유로운 성적 관계를 '탐닉'허는 술라의 강항 성향은 일단은 "남자를 사랑허는(manloving) 피이스가 여성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묘사된다(41). 즉, 술라의 엄마인 한나는 재혼을 하지 않은 채 "섹스 가득헌" (42) 삶을 사는 여성이라서, 술라는 종종 엄마가 딴 남들이랑 열라 섹스허는 장면을 어려서부터 목격하며 자란다. 이런 엄마로부터 술라가 배우는 것은 "섹스란 유쾌하고 자주 있는 일"(44)이라는 점이다. 이 소설은 이런 유산과 더불어 술라가 <자유로운> 이성애 여성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소설 초두부터 보여준다.

좀더 중요하게스리, 술라는 결혼보다는 스스로를 여러 가지로 맹글어 볼라는 자기실험에 더욱 관심이 있는데, 바로 요점이 술라를 결국 위반적인 성적 흑인여성으로 환원시키고 마는 원인이 되야뿐다. 일단 자유롭게 연애질을 함시롱 '스캔달'을 뿌리고 댕기는 여성은 그녀가 태어난 공동체의 규범과 가치로부터 곱게 보일 수가 없는 법. 술라 역시 흑인공동체 내부의 제도화된 이성애의 가치들로부터 제대로 된 이해를 받을 리 없다. 이 점은 더 나아가 이런 술라'같은 년들'을 사회적, 담론적으로 위치시킬 필요롤 증가시킨다.

즈그들 맘대로 스캔들을 뿌리고 다니는 여성들을 사회적, 담론적으로 '어떤 여자'으로 위치시키는 과정을 술라를 통혀서 보자믄 이렇다. 술라는 열라 쇼킹한 위반적인 행위를 두 번 일삼는데, 하나는 자기의 할머니 이바(Eva)를 양로원에 칵 보내뻐리는 행위고, 다른 하나는 젤루 친한 칭구인 넬의 남편, 쥬드를 꼬드겨 잠자리를 같이 하고만 사건이다. 할머니를 양로원에 보내뿔자 술라네 동네는 왼갖 꼬십과 루머가 나돔시롱 술라를 뒷다마 치고, 칭구 남편과의 정사는 '착한 순정파 마누라'인 넬을 크게 상심시키게 된다. 결국 꼬리에 꼬리를 문 꼬십과 더불어 술라네 동네 커뮤니티는 그녀를 "내부의 악마"(devil within)로 규정헌다(117). 20대 10년 간 잠적했다가 돌아온 술라가 그 동네에 있는 동안 일어났던 "다양한 형태의 안 좋은 일들"을 모두 술라와 연관시킴시롱(118) 이 동네 커뮤니티는 갑닥 착해져뿐다. 예컨대 바람 열라 피던 남편쟁이들이 갑닥 가정적인 남자덜이 되질 않나, 아동 학대를 일삼던 부모쟁이들이 갑닥 자기 애덜을 공주와 왕자처럼 떠받들질 않나 함시롱 갑닥 '개과천선'하야 자기들의 흑인된 명예를 지켜야 한담시롱 동네 전체가 '단결'헌다. ('나쁜 년' 하나가 이렇듯 단결의 효과가 생기니 남성중심적인 사회엔 '마녀'가 항상 필요한 법?).

'위반'을 일삼는 술라에 대한 낙인(social location)에서 가장 극적이고 주목할 만한 지점은 흑인 여성인 술라가 백인 남성들과 섹스를 열라 하고 댕겼다는 근거없는 <꼬십>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탁월한 흑인 페미니스트 비평가 매 그웬돌린 헨더슨이 [자신의 혀를 움직여 말헌다는 것](Speaking in Tongues)라는 유명헌 논문에서 지적한 대로, "흑인 공동체의 남성들은 술라를 최종적으로 섹슈얼리티로 환원시키는 인종적 담론을 구사한다"(28). 술라가 악의 화신이라는 증거들(알고보면 꼬십)이 산만큼 쌓이는 가운데, 자유로왔던 성적 주체인 술라는 "젠더화된 인종 담론"으로 그 사회적 위치를 '하사받는' 것이다(헨더슨 28). 흑인 여성의 주체성은 젠더화된 '하위-지배적 담론' 내부에서 위치지어진다.흑인 남성들은 인종간(inter-racially)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지는 못하지만 인종내(intra-racially)에서는 젠더상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기 때문에 '하위-지배적인 담론'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술라는 이렇게 '나쁜 년'으로 낙인찍히고 마느냐? 이 소설이 주는 역동적인 재미는 이제서부터 시작된다. 남성중심적 흑인 담론의 대술라 낙인(social location)에도 불구하고, 술라의 성적인 몸은 그것을 넘어가는 포텐셜을 지닌다. 이 포텐셜을 보여주는 한 가지 상징은 술라의 왼쪽 눈위에 있는 몽골반점같은 것(birthmark)인데, 태어나면서부터 있는 이 자국은 헨더슨이 말한대로 "흑인 여성은 두 개의 사회적 영역(즉 흑인이자 여성이라는) 내부에서 위치한다"는 점을 나타내며 이렇게 두 영역에서 표식당헌 존재로서 술라는 "흑인의 하부-지배적 담론이 여성들을 각인하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상/재현"이다. 즉 사회구성주의적 견해를 지지하는 상징이랄까. 하지만, 이렇게만 읽으믄 재미 없것지. 다른 한편 이 자국(birthmark)는 성적인 존재로서 술라의 특정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하나의 기표이기도 하다. 즉, 그녀가 유동적이고 복수적이며 성차화된 주체성을 체현한 인물이라는 점 말이다. 이 자국이 관계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천차만별로 해석되는 것처럼, 술라는 단일하게 파악되는 여성이 아니다. 심지어 가족과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조차. 모리슨은 술라를 도덕성 운운하는 영역이나 제도화된 이성애적 사랑에 갇힌 존재일 수 없는 인물로 만들어내는데, 이 점이 바로 '흑인의 하부-지배적 담론'을 뒤집어 엎을 수 있는 포텐셜이 나오는 지점이다.

"예술 형식이 없는 예술가처럼 술라는 위험해진다" (121). 고향에 다시 돌아온 술라는 애시당초 결혼에는 관심이 없는데, 결혼같은 건 안허고 살것다는 술라의 단호한 결정은 알고보면, 내시빌, 디트로이드, 뉴 올리언즈, 뉴욕, 필라델피아, 샌디에고 등을 10년간 떠돌아다님시롱 자유롭게 맺어온 이성애적 사랑에서 얻은 교훈에 기초한 것이다. 10년 동안의 자유로운 '애정행각'을 통해서 그녀가 배운 것이라고는 "사랑이란 사랑의 속임수(love tricks)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걱정하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나눈 것이 없고 돈 말고는 아무것도 주는 것이 없는 그런 것"인지라 아마도 자신은 "그러는 사이 내내 한 명의 친구를 찾았던 것이고" 그 사랑이 결국은 "여성이라는 점"이다(121).

"예술 형식이 없는 예술가처럼" "위험한" 삶을 살다간 술라는 새로운 감수성의 바람을 몰고 온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포스트모던' 여성 주체의 흑인판이랄 수 있는데, 그 시대 배경(1960년대 및 70년대 초반)만큼이나 아직은 명료하게 설명절합되지 않는 인물로 남겨진다. '전통적으루 여성적인' 인물인 넬(술라가 옆에 두고서 찾아헤맸던 바로 그 친구)은 술라가 죽은 지 20년이 지나서야 술라와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디 이 대목은 자못 감동적이다. 자신이 평생 상실했던 대상이, 술라가 꼬드겨 바람을 피운 자신의 남편 쥬드가 아니라 술라엿다는 점. "'평생, 이 모든 시간 동안 내내 나는 내가 쥬드를 상실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상실감의 그녀의 가슴을 짓눌러 와 목이 매였다. '우리는 함께 노닐던 여자애들이었고요' 그녀는 마치 무언가를 설명하듯이 말했다. '오, 세상에, 술라' 그녀는 울부짓었다. '그녀, 그녀, 그녀그녀그녀.' 오랫동안 크게 잘 울었다. 하지만 이 울음에는 바닥도 없었고 꼭대기도 없었다. 오직 돌고 도는 슬픔뿐"(174). 술라를 통해서 그려지는 새로운 감수성과 주체성이 부상하는 데는 넬라가 뒤늦게나마 술라를 이해하고 그리하여 자신을 이해허는 데 걸린 시간만큼 걸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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