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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라
토니 모리슨 지음, 김애주 옮김 / 들녘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여성문학에서 다른 여성들과 우정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던 여성들은 살아남는다. 그렇지 않을 경우 결국 사회의 구조적 억압 속에서 꽃필듯하다가 그렇지 못한 채 죽어간다. 이 소설은 투쟁하다가 죽어가는 삶과 생존 사이의 중간에 선 술라의 인생을 보여주면서, 생존으로 가는 사다리로서 때늦은 기억과 재평가를 통해 텍스트 속에서나마 살아남는 기억의 정치와 우정을 보여준다.
1993년에 국제 정치적 "농간"과 "나눠먹기"에 의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토니 모리슨의 1973년 소설 {술라}는 사실 노벨 문학상을 1970년대, 1980년대에 한 열 번쯤 더 받아도 되는 재미난 소설이다. 술라 매 피이스(Sula Mae Peace)라는 여성 주인공의 궤적은 어떻게 해서 사회적으로 구성, 강제되는 이성애 제도가 인종내부적이며(intra-racial) 남성중심적인 담론들 내부에 술라의 주체성을 '감금'/제한허는지를 그러면서도 어찌해서 술라의 성적인 몸이 이런 감금, 제한 장치들에 완전히 구조화되지 않는지를 잘 보여준다. 술라는 결국은 자신이 속한 흑인 공동체에 의해서 위반적인(transgressive) 성적 존재로 환원당하는데, 이 과정은 의미심장허게 흥미로운 지점들을 까발린다. 우선, 이런 환원 과정에서 가장 중요헌 역할을 허는 것은 술라의 <능동적인> 이성애적 도발('자유'라고 표현되는)이다.
자유로운 성적 관계를 '탐닉'허는 술라의 강항 성향은 일단은 "남자를 사랑허는(manloving) 피이스가 여성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묘사된다(41). 즉, 술라의 엄마인 한나는 재혼을 하지 않은 채 "섹스 가득헌" (42) 삶을 사는 여성이라서, 술라는 종종 엄마가 딴 남들이랑 열라 섹스허는 장면을 어려서부터 목격하며 자란다. 이런 엄마로부터 술라가 배우는 것은 "섹스란 유쾌하고 자주 있는 일"(44)이라는 점이다. 이 소설은 이런 유산과 더불어 술라가 <자유로운> 이성애 여성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소설 초두부터 보여준다.
좀더 중요하게스리, 술라는 결혼보다는 스스로를 여러 가지로 맹글어 볼라는 자기실험에 더욱 관심이 있는데, 바로 요점이 술라를 결국 위반적인 성적 흑인여성으로 환원시키고 마는 원인이 되야뿐다. 일단 자유롭게 연애질을 함시롱 '스캔달'을 뿌리고 댕기는 여성은 그녀가 태어난 공동체의 규범과 가치로부터 곱게 보일 수가 없는 법. 술라 역시 흑인공동체 내부의 제도화된 이성애의 가치들로부터 제대로 된 이해를 받을 리 없다. 이 점은 더 나아가 이런 술라'같은 년들'을 사회적, 담론적으로 위치시킬 필요롤 증가시킨다.
즈그들 맘대로 스캔들을 뿌리고 다니는 여성들을 사회적, 담론적으로 '어떤 여자'으로 위치시키는 과정을 술라를 통혀서 보자믄 이렇다. 술라는 열라 쇼킹한 위반적인 행위를 두 번 일삼는데, 하나는 자기의 할머니 이바(Eva)를 양로원에 칵 보내뻐리는 행위고, 다른 하나는 젤루 친한 칭구인 넬의 남편, 쥬드를 꼬드겨 잠자리를 같이 하고만 사건이다. 할머니를 양로원에 보내뿔자 술라네 동네는 왼갖 꼬십과 루머가 나돔시롱 술라를 뒷다마 치고, 칭구 남편과의 정사는 '착한 순정파 마누라'인 넬을 크게 상심시키게 된다. 결국 꼬리에 꼬리를 문 꼬십과 더불어 술라네 동네 커뮤니티는 그녀를 "내부의 악마"(devil within)로 규정헌다(117). 20대 10년 간 잠적했다가 돌아온 술라가 그 동네에 있는 동안 일어났던 "다양한 형태의 안 좋은 일들"을 모두 술라와 연관시킴시롱(118) 이 동네 커뮤니티는 갑닥 착해져뿐다. 예컨대 바람 열라 피던 남편쟁이들이 갑닥 가정적인 남자덜이 되질 않나, 아동 학대를 일삼던 부모쟁이들이 갑닥 자기 애덜을 공주와 왕자처럼 떠받들질 않나 함시롱 갑닥 '개과천선'하야 자기들의 흑인된 명예를 지켜야 한담시롱 동네 전체가 '단결'헌다. ('나쁜 년' 하나가 이렇듯 단결의 효과가 생기니 남성중심적인 사회엔 '마녀'가 항상 필요한 법?).
'위반'을 일삼는 술라에 대한 낙인(social location)에서 가장 극적이고 주목할 만한 지점은 흑인 여성인 술라가 백인 남성들과 섹스를 열라 하고 댕겼다는 근거없는 <꼬십>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탁월한 흑인 페미니스트 비평가 매 그웬돌린 헨더슨이 [자신의 혀를 움직여 말헌다는 것](Speaking in Tongues)라는 유명헌 논문에서 지적한 대로, "흑인 공동체의 남성들은 술라를 최종적으로 섹슈얼리티로 환원시키는 인종적 담론을 구사한다"(28). 술라가 악의 화신이라는 증거들(알고보면 꼬십)이 산만큼 쌓이는 가운데, 자유로왔던 성적 주체인 술라는 "젠더화된 인종 담론"으로 그 사회적 위치를 '하사받는' 것이다(헨더슨 28). 흑인 여성의 주체성은 젠더화된 '하위-지배적 담론' 내부에서 위치지어진다.흑인 남성들은 인종간(inter-racially)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지는 못하지만 인종내(intra-racially)에서는 젠더상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기 때문에 '하위-지배적인 담론'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술라는 이렇게 '나쁜 년'으로 낙인찍히고 마느냐? 이 소설이 주는 역동적인 재미는 이제서부터 시작된다. 남성중심적 흑인 담론의 대술라 낙인(social location)에도 불구하고, 술라의 성적인 몸은 그것을 넘어가는 포텐셜을 지닌다. 이 포텐셜을 보여주는 한 가지 상징은 술라의 왼쪽 눈위에 있는 몽골반점같은 것(birthmark)인데, 태어나면서부터 있는 이 자국은 헨더슨이 말한대로 "흑인 여성은 두 개의 사회적 영역(즉 흑인이자 여성이라는) 내부에서 위치한다"는 점을 나타내며 이렇게 두 영역에서 표식당헌 존재로서 술라는 "흑인의 하부-지배적 담론이 여성들을 각인하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상/재현"이다. 즉 사회구성주의적 견해를 지지하는 상징이랄까. 하지만, 이렇게만 읽으믄 재미 없것지. 다른 한편 이 자국(birthmark)는 성적인 존재로서 술라의 특정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하나의 기표이기도 하다. 즉, 그녀가 유동적이고 복수적이며 성차화된 주체성을 체현한 인물이라는 점 말이다. 이 자국이 관계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천차만별로 해석되는 것처럼, 술라는 단일하게 파악되는 여성이 아니다. 심지어 가족과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조차. 모리슨은 술라를 도덕성 운운하는 영역이나 제도화된 이성애적 사랑에 갇힌 존재일 수 없는 인물로 만들어내는데, 이 점이 바로 '흑인의 하부-지배적 담론'을 뒤집어 엎을 수 있는 포텐셜이 나오는 지점이다.
"예술 형식이 없는 예술가처럼 술라는 위험해진다" (121). 고향에 다시 돌아온 술라는 애시당초 결혼에는 관심이 없는데, 결혼같은 건 안허고 살것다는 술라의 단호한 결정은 알고보면, 내시빌, 디트로이드, 뉴 올리언즈, 뉴욕, 필라델피아, 샌디에고 등을 10년간 떠돌아다님시롱 자유롭게 맺어온 이성애적 사랑에서 얻은 교훈에 기초한 것이다. 10년 동안의 자유로운 '애정행각'을 통해서 그녀가 배운 것이라고는 "사랑이란 사랑의 속임수(love tricks)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걱정하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나눈 것이 없고 돈 말고는 아무것도 주는 것이 없는 그런 것"인지라 아마도 자신은 "그러는 사이 내내 한 명의 친구를 찾았던 것이고" 그 사랑이 결국은 "여성이라는 점"이다(121).
"예술 형식이 없는 예술가처럼" "위험한" 삶을 살다간 술라는 새로운 감수성의 바람을 몰고 온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포스트모던' 여성 주체의 흑인판이랄 수 있는데, 그 시대 배경(1960년대 및 70년대 초반)만큼이나 아직은 명료하게 설명절합되지 않는 인물로 남겨진다. '전통적으루 여성적인' 인물인 넬(술라가 옆에 두고서 찾아헤맸던 바로 그 친구)은 술라가 죽은 지 20년이 지나서야 술라와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디 이 대목은 자못 감동적이다. 자신이 평생 상실했던 대상이, 술라가 꼬드겨 바람을 피운 자신의 남편 쥬드가 아니라 술라엿다는 점. "'평생, 이 모든 시간 동안 내내 나는 내가 쥬드를 상실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상실감의 그녀의 가슴을 짓눌러 와 목이 매였다. '우리는 함께 노닐던 여자애들이었고요' 그녀는 마치 무언가를 설명하듯이 말했다. '오, 세상에, 술라' 그녀는 울부짓었다. '그녀, 그녀, 그녀그녀그녀.' 오랫동안 크게 잘 울었다. 하지만 이 울음에는 바닥도 없었고 꼭대기도 없었다. 오직 돌고 도는 슬픔뿐"(174). 술라를 통해서 그려지는 새로운 감수성과 주체성이 부상하는 데는 넬라가 뒤늦게나마 술라를 이해하고 그리하여 자신을 이해허는 데 걸린 시간만큼 걸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