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작가 김탁환은 이야기꾼이다. 2004년부터 햇수로 3년 남짓 개화기를 공부한 그는 <파리의 조선 궁녀, 리심>을 만들어냈고, 이번에는 <노서아 가비>(살림.2009년)를 탄생시켰다. 책의 제목인 노서아 가비(露西亞 加比)는 ‘러시아 커피’를 말한다. 저자는 조선말 우국지사인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실린 김홍륙의 일화를 모티브로 이 책을 썼다. 김홍륙은 러시아어에 능통한 재주로 아관파천 시절 권력을 누렸다가 몰락한 사람이다. 몰락한 그는 복수의 일념으로 왕이 마시는 노서아 가비에 치사량의 아편을 넣었다. 이 역사적 사건에서 힌트를 얻고 문학적 상상력을 보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게다가 추리 소설처럼 반전을 거듭하는 내용을 통해 독자들에게 팩션 소설의 진수를 보여준다.

따냐! 이 책 주인공의 이름이다. 그녀는 역관의 딸이었고, 대대로 역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걸음마와 함께 더듬더듬 뿌쉬낀이나 고골의 책을 밟고 다녔으며 러시아 인사법을 배웠다. 아버지가 러시아 어를 딸에게 가르친 까닭은 러시아 물품이 비싸기에 러시아 어를 배워 러시아 상인과 직거래를 하면 큰 이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아버지의 가르침에 대해 따냐는 “아버지가 옳았다”고 생각한다. 즉 이 책의 시작에서 그녀가 러시아를 배운 것에 대해 잘 했다는 의미는 중요한 복선으로 작용한다.

아버지가 역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오는 길에 조선 국왕을 위한 천자의 하사품을 챙겨 러시아로 달아나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다. 아버지는 나라의 물품을 훔친 사람이 된 셈이다. 아버지의 머리는 서대문 밖에 효시된다. 당연히 그녀에게는 연좌제가 적용될 터. 그녀는 노비가 될 운명에 처한다. 19살인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는다. 청나라를 거쳐 러시아로 건너간 그녀는 사기꾼의 세계에 빠진다. 그녀는 러시아의 광활한 숲을 유럽의 귀족들에게 파는 사기단에 소속된다. 사기단에서 그녀는 귀족들이 숲을 구매하게끔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녀는 팜므 파탈이었다.

귀족들이 어수룩해서 그랬는지, 그런 사기단은 또 있었다. 그녀의 사기단과 라이벌격인 사기단에는 동양인이 있었다. 이반이란 이름의 남자로, 그는 그녀에게 운명처럼 다가온다. 이반과 그녀는 인생의 파트너가 된다. 이반도 조선인이었다.

따냐는 말과 글씨 쓰기, 그리고 인장을 위조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이반과 한 팀이 되어 사기행각은 계속한다. 그 시절 러시아에서는 니꼴라이 2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대관식에 전 세계에서 축하사절이 온다. 물론 조선사절단도 있었다. 이반은 유창한 러시아어를 바탕으로 사절단의 역관 역할을 수행한다.

사절단과 함께 귀국한 이반은 아관으로 피신해 있던 고종 밑에서 역관으로 채용된다. 천민의 신분이었던 이반은 왕과 고문인 베베르 사이의 통역을 담당하기에 이른다. 그의 출세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반은 자신의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 그 자리에 있으면서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뇌물을 받는 등 개인적인 치부에 몰두한다.

이즈음에서 이 책의 제목에 담긴 의미를 이야기해야겠다. 따냐가 커피를 처음 맛본 때는 16살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집에서 커피를 처음 맛보았다. 그녀에게 커피의 향과 빛깔과 맛은 아버지를 생각나게 해 주는 추억어린 식품이었다. 커피와의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고종의 바리스타까지 된다. 새벽에 아관으로 출근해서 고종에게 커피를 끓여 올리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한양에서도 따냐는 이반과 함께 살지만, 둘 사이에는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반을 믿지 못한다. 그녀의 팜므 파탈 기질은 이반에게도 행사된다.

아관파천을 끝내고 고종은 환궁한다. 이에 따라 그동안 권세를 누려왔던 친러파들은 된 서리를 맡게 된다. 당연히 이반도 몰락한다. 이반은 바로 역사속의 인물이었던 김홍륙이었다. 작가의 상상력이란 정말 대단하다.

소설의 마지막 무대는 뉴욕이다. 따냐는 조선을 떠나 러시아 뻬쩨르부르크를 경유해서 뉴욕에 정착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가게를 시작한다. 사람들은 이 가게를 ‘따냐의 문학카페’라고 불렀다. 카페에 오는 사람들은 노서아 가비를 마시며, 팜므 파탈의 사랑 이야기를 듣게 된다.

노서아 가비는 이 책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고 있다. 또 그녀의 삶 가운데, 지속적으로 등장하여 독자들에게 향과 맛을 잊지 않게 해준다. 재미있는 이야기꾼 김탁환의 재능이 반짝이는 소설이다. 책의 띠지에는 ‘출간 즉시 영화화 결정’이라고 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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