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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傳 2 - '인물'로 만나는 또 하나의 역사 ㅣ 한국사傳 2
KBS 한국사傳 제작팀 엮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5월
평점 :
“활쏘기에서 50발을 쏴 49발을 맞추고, 100발을 쏴서 98발을 맞추었다.” 마치 올림픽 경기에서 한국의 양궁선수를 기록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활을 잘 쏘았다면 아마 유명한 장군이었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는 조선시대의 한 왕의 이야기다.
위의 인용문에서 활을 쏜 사람은 바로 조선에서 제일 학문에 밝았던 왕인 정조다. 공부만 했었다고 생각한 정조에게 이런 면모가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정조의 활쏘기 성적은 <어사고풍첩,御射古風帖>이라는 책에 나와 있다고 한다.
정조가 활을 쏘던 145미터의 거리에서 국내 최고의 궁도 선수들이 쏘면 어떨까? 선수들이 아무리 잘 쏴도 40발을 맞히지 못했다고 한다. 국내 최고의 선수라도 50발을 모두 명중시키는 일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어려운 기록이라고 하니 정조의 활솜씨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정조가 50발 중에 49발을 맞춘 것은 마지막 한 발을 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강신엽 욱군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말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군주로서 신하들에게 겸양을 보여주기 위해서 였다고 설명한다. 정조가 이렇게 명궁이 된 것은 당연하게도 연습을 엄청나게 했다는 말인데, 정조는 왜 이렇게 활을 잘 쏘게 되었을까.
그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혀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의하면 영 정조시대에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없앴다고 나오는데, 실제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정조는 죄인(사도세자)의 아들이었기에 제왕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신하들의 반대와 또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많은 신하들이 권력집단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정조가 즉위한다면 그 사건에 관련된 신하들의 목숨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정조는 즉위 자체도 문제가 많았지만 제왕으로서 권력을 행사하기에도 어려웠던 것이다. 특히나 군권이 신하들에게 있었기에 정조는 자신이 직접 무예를 익히고 나아가 정예 군사를 발굴하고 키워 자신의 권력을 지탱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왕권과 신권의 경쟁으로 말미암아 결말은 정조의 암살로 이어졌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아무튼 <한국사傳 2>(한겨레출판.2008년)에는 이처럼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정조의 이야기가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정조 이외에도 9명이 소개된다. 그들이 누구인지를 살펴보자. 소현세자빈 강씨, 토정 이지함, 승장 김윤후, 내시 김처선, 김춘추, 조완벽, 단원 김홍도, 백헌 이경석, 정약용이다.
수록된 사람들 가운데 조완벽과 벽헌 이경석은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아주 색다른 인물이었다.
조완벽이란 사람의 이야기부터 알아보자. 이 사람을 소개하는 장의 제목은 ‘베트남을 찾은 최초의 한국인’이다. 그러나 그가 베트남으로 간 것은 사신이나 무역을 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그가 베트남으로 간 것은 조선의 슬픈 역사 때문이었고, 조완벽 개인에게도 역시 아주 가혹한 일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10만 여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고 한다. 그들은 일본에 가서 노예로 살았다. 조완벽은 포로 가운에 한 명이었다. 일본에서 조완벽은 상인에게 팔려 베트남으로 가게 되었다. 한문을 자유롭게 쓰고 읽을 수 있었던 그에게 베트남은 기회의 땅이었다. 베트남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유교의 영향이 미치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한다. 그런데 조완벽의 이야기가 어떻게 지금까지 전해졌을까. 그것은 조완벽이 기적적으로 조선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포로 중 일부는 조선과 일본의 합의에 의해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그 수는 1418명에 불과했다. 조안벽은 그 중 한 명으로 생환하여 그의 고향에서 남은 생애를 선비로서 훌륭한 못브을 보여주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번에는 벽헌 이경석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조선 중기 한반도는 전쟁의 폭풍우에 휘말려 있었고, 이로 인해 조선 사회는 크게 변화했다. 병자호란은 조선이 패배한 전쟁이었다. 병자호란이라고 하면 우리는 명분과 실리를 이야기하고는 한다. 전쟁의 원인도 그것 때문이었고, 전쟁 중에 신하들의 다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명분과 실리는 그대로 살아남아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청은 조선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청을 한다. 요청이 아니라 명령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만한 일이었다. 삼정도비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과연 이 치욕적인 비에 비문을 누가 쓸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이 비문을 쓰는 사람은 후대에까지 오명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쓰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써야만 했다. 그것은 조선왕조를 지키기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경석은 조선과 인조를 위해 비문을 썼다.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를 배우는 것에 대한 의미를 읽어야 한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역사 그 자체를 배운다’는 의미와 ‘역사를 통해 배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병자호란에 관련한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움의 장을 열 수 있다.
유교 세계관에 있어서 명분은 선비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던 가치관이었다. 그렇기에 임진왜란에서 우리를 도운 명나라 편을 들어야 했고, 오랑캐나라인 청에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그 결과 조선은 온통 전쟁터가 되고 말았고, 그 결과는 백성들의 죽음과 피폐한 삶으로 이어졌다. 선비들은 자신의 명분을 지킬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로 말미암아 고통은 모든 백성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여기에서 조완벽이 삼전도비문을 쓴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누군가는 꼭 써야할 비문을 자신이 쓰기로 결정한 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이나 가문에게 오명으로 남을지 모르지만, 그가 생각한 것은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생명과 백성들의 삶이었다. 개인적인 가치관을 앞세워 자신은 독야청청하고자 했던 무리들은 바로 백성을 어려움에 빠뜨린 무리배나 다름없었다. 그에 비해 이경석은 진정한 선비이고 관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KBS에서 다큐멘터리로 방영하고 있는 내용이다. 소개되는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우리들이 역사교과서에서는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그들의 진면목을 소개해주고 있다. 이런 프로그램과 책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또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