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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 - 서양과 조선의 만남
박천홍 지음 / 현실문화 / 2008년 7월
평점 :
역사에서 가정은 불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가끔 우리들은 가정을 하곤 한다. 이를테면 한국사에 있어서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거나, 중국사에 있어서 ‘명나라가 해금(海禁)정책을 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생각해본다. 이 가정대로 되었다면 한국사도 세계사도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타임머신을 600년을 돌려서 중국을 보자. 명나라의 환관이었던 정화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대선단(大船團)을 지휘하여 동남아시아에서 서남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에 원정하였다. 당시 배의 규모는 길이가 122미터, 선폭이 52미터이고 9개의 돛대가 달려있었으며 배수량은 약 2700톤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1405년 제1차 원정 때에는 보선만 62척이었고 장병 2만 7800여 명이 분승하였으며 선단은 총 317척이었다. 1492년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 상륙했던 콜럼버스의 선단은 선단의 규모인 배 3척, 선원 100여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명나라는 선덕제가 즉위하면서 쇄국정책으로 돌아서면서 바다의 주도권은 서양으로 넘어가게 되며,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으로 이어지는 유럽의 해상세력은 바다를 지배하면서 21세기의 서양주도의 세계절서를 가져오게 된다. 명의 해금정책은 조선에도 똑 같이 적용되었다. 본격적인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돌입한 서양의 각국은 자국의 상품을 판매할 곳이 필요하였고, 인구가 많은 중국은 그들이 원하던 매력적인 시장이었다.
서양은 중국에 이어 일본에 까지도 자본시장을 넓혀 나갔다. 그러나 그들에게 조선은 아직도 낯선 땅이었다. 이 시대에 어쩌다 표류로 말미암아 조선의 땅에 발을 내딛은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은 어떤 나라였을까. 또 서양인을 본 조선인들의 생각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악령이의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현실문화.2008년)는 1797년부터 1860년까지 60여 년 간 바닷길로 조선에 들어온 서양인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조선에 다녀온 후 서양인들은 자국에서 자신들의 여행이야기를 책으로 발간했으며, 조선에서는 왕조실록이나 일성록 등의 책에 서양인들과 조선인의 만남을 적고 있다. 생김새도 다르며, 말과 글도 다른 그들 간에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야 한다.
“19세기 초까지 조선 해역을 찾아온 이양선들은 주로 우연히 표류해 오거나 지리학적 탐사활동에 나선 배들이었다. 하지만 19세기 중엽부터 이양선의 성격은 변하기 시작한다. 정부 대 정부 차원에서 정식 통상관계를 요구하거나 기독교 선교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목적의식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질적 양상을 달리하고 있었다. 이제 조선과 서양의 만남은 간헐적이고 의중을 떠보는 차원을 넘어 전면적인 접촉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215쪽)
위의 문장에서 보듯이 19세기 초까지 이양선이 한반도에 온 것은 세계 지도 완성과 안전한 항해를 위한 측량에 주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세기 중엽부터 그들은 상품시장을 원했고 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접근해왔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서는 명, 청 이래로 외국과의 해로 접근을 차단해 왔었기에 이양선의 접근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또한 서양의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좋지 못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공식적으로 배타적이었다. 그러나 이양선에 타고 있던 서양인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호기심은 억누를 수가 없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법으로 이양선과의 접촉 절차까지도 규정함으로써 물품교환이나 인적 교류에 대해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다만 이양선이 표류 등 어쩔 수 없이 상륙한 경우에 한해서는 그들이 돌아갈 때까지 필요한 물품을 무상으로 조달해주기는 했다. 즉 그들과는 인도적인 차원에서의 접근 이상은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해당 지방 관서의 책임자들은 처벌을 받았다.
“1849년 여름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Liancourt)호는 동해에서 고래잡이를 하다 독도를 발견하고 리앙쿠르 암초라고 이름 붙였다. 이후 독도는 서양인들에게 리앙쿠르 섬으로 알려지게 되었다.”(441쪽)
일본이 계속 자신의 영토라고 우기고 있는 독도는 1849년 서양에 리앙쿠르란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리앙쿠르란 이름은 지금도 통용되고 있는데, 이는 지극히 서양 우선주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이다. 거문도에 불법으로 상륙한 영국인들은 이 섬을 해밀턴 항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등 서양인들은 그들이 모르던 산이나 바다 섬을 발견하면 자신들의 입장에서 작명을 했던 것이고, 깃발까지 꽂으면서 자신들의 영토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 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누구든지 간에 상관없이 그들은 주인이 없는 공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바다를 통해 조선에 왔던 서양인들은 자국으로 돌아가서 지도를 그렸고 또 조선인들과의 접촉에 대해서 기록을 남겼다. 그들이 바라본 조선의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특히 재미있는 부분은 러시아의 작가이며 러시아 함대에 함께 타고 조선에 왔던 곤차로프는 조선인의 모자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그것은 털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더욱이 빛깔이 검었다. 그들이 어째서 이런 쓸모없는 모자를 쓰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투명해서 비나 햇빛이나 먼저로부터 머리를 보호하지 못한다.”(513쪽)
곤차로프의 입장은 바로 서양의 실용주의를 대표하고 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조선인의 모자는 바로 ‘갓’인데, 실상 이 모자는 실용적인 입장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지위를 나타내는 위세품이었는 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한 청나라는 서서히 침몰해간다. 바다를 지배하지 못했던 청나라는 해양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탈락하고 만다. 이에 반해 미국 페리제독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발하게 된 일본은 근대화와 아울러 해양국가로 급히 변모하게 된다. 일본은 서양 각국으로부터 배를 사들이고, 이후 자신들이 직접 배를 만드는 등 그 당시의 의미에서 세계화에 박차를 가한다. 그 후 중국과 조선, 일본의 운명은 변하고 만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명제가 그 시대의 핵심이었다.
무려 800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그동안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서양과 조선의 단순한 접촉에서부터 충돌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서로 간에 호기심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서양우월주의 입장에서 우리를 미개한 민족으로 바라보고 있는 입장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서양인의 시각은 지금도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그들의 사고방식은 바로 그들이 바다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21세기인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지금 우리가 어떤 부분을 지배해야만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