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잃어버리든 버리든 아무튼 내가 옆에 없으니까, 진짜엄마는 분명 불행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지금 나처럼. 그래야만 한다. 우린 만나서 행복해져야한다. 따로 떨어져서 행복할 순 없다. 행복하다면, 그건 배신이다. 무엇에 대한 배신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배신이다.

 죽은 자의 입술처럼 사방이 시커멓게 되었을 때, 나는 머릿속의 서랍을 탈탈 털어내고 그곳에 나의 진짜엄마가 갖춰야 할 조건을 하나 하나 챙겨넣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 심장에, 내 배꼽에, 내 손바닥 발바닥에 모조리 스며들도록 오랫동안 응시하며 하나하나 외웠다.

 

-P.121-

 

1.

 

 개인적으로 잘 알려진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나 황순원문학상 수상작보단, 한겨레문학 수상작이 마음에 더 와닿습니다. 수상작들을 살펴보세련되고 참신한 맛은 떨어지지만, 그 주제면에 있어 사회문제에 대한 명확한 주제의식을 품고 있다는 특징이 있는데요. 쉽게 읽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들이라고 이야기하면 잘 맞을 것 같네요.

 

 이번에 읽게된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제 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데요. 역시 사회의 부조리함에서 어린 소녀가 겪게되는 세상의 풍파를 다루고 있는 소설입니다.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무관심에 지친 소녀는 자신의 진짜 엄마를 찾아 집을 나와 이곳 저곳을 떠돌며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유쾌하게 진행되는 듯 가슴을 후벼파는 담담한 소녀의 이야기는 순수하기에 더욱 아리게 다가왔습니다.

 


 

 

 

 나는 대장이 불을 마구 내뿜고 또 불을 잘 삼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장의 속은 이미 까맣게 타버려서, 더 이상 탈 것도 없는 거다. 대장의 속엔 오직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만 있는 거다. 그러니까 아무리 불을 삼켜도 괜찮은 거다. 삼십년이 지나도록 진짜엄마를 찾지 못하면, 내 속도 그렇게 될까? 그럼 굳이 불을 삼키는 방법을 배우지 않고도 절로 불을 삼키게 될까?

 

-P.172-

 

2.

 

 책은 아직 채 생리를 끝내지도 않은 소녀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가짜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진짜 부모를 찾으러 가는 길. 어린 소녀에게 그 길은 험난하기만 합니다. 소녀는 진짜를 찾아 떠난 길에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황금다방의 장미, 태백식당의 할머니, 교회의 청년, 폐가의 사내, 각설이 패, 불량 소녀들까지 많은 이들이 소녀를 스쳐갑니다. 이들은 모두 소녀처럼 불행합니다. 같은 불행을 공유한 이들이기에 소녀가 더욱 눈에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모두 소녀에게 따뜻함을 주지만, 동시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소녀는 깨닫습니다. 자신이 가짜라고 치부해왔던 그 모든 사람들이 어쩌면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들이였다는 것을요. 그리고 더이상 진짜를 찾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이죠.  소녀의 기구한 삶은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어보입니다. 악한 사람이 되기를 자처했던 소녀. 동화가 아닌 현실과 마주한 소녀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는 소녀의 이미지와는 달리 너무나 비현실적이였습니다.

 

 

 

 

 불길은 그것들을 닥치는대로 먹어 삼켰다. 나는 내가 불태운 숱한 가짜들을 떠올렸다. 그땐 그것들이 모두 가짜인 줄 알았지만, 그것들이 가짜라면 세상에 가짜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온통 가짜투성이고 진짜는 하늘에만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아니, 진짜 따윈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이제 와 내가 무언가를 불태워야 한다면, 이 세상을 통째로 태워서 까만 재로 만들 것이다. 진짜 따윈 없다. 진짜인 척하는 가짜로 세상은 이미 가득 찼다.

 

-P.271-

 

3.

 

 문뜩 의문이 들었습니다. 소설속 소녀가 과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일까, 그 제목처럼 언젠가 나도 모르게 외면했던 누군가의 모습은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이요. 소녀는 진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결국 진짜는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진짜가 때론 더욱 가짜와 같아 보이는 차가운 현실을 마주한 것이죠.

 소녀에겐 죄가 없습니다. 죄가 있다면 참혹한 세상에 태어난 것이 죄일 겁니다. 그렇기에 이야기는 더욱 아프게 다가옵니다. 누가 어린 소녀를 이렇게 일찍 철들게 만들었는지. 그 이름도 알 수 없는 소녀의 잔상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쓰리게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건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이 소녀를 그냥 스쳐가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 가짜일지라도 따스함을 나누어주는 것뿐이지만, 소녀는 아마 알고 있을 겁니다. 그것이 지친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원동력이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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