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세계를 스칠 때 - 정바비 산문집
정바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평소에 외롭다며 연애하고 싶노라고 노래를 부르고 주변에 유난을 떨던 사람이 시작한 연해는 그다지 로맨틱하지 않은 것 같다. 이젠 더 이상 사랑이 필요하지 않다고, 혼자인 편이 훨씬 오롯하고 행복하다고 확신한 이가 마치 문앞에서 땅이 꺼져버리듯이 확 빠지는 연애가 훨씬 더 낭만적이지 않냐 말이다. 그러니까 연애의 본질은 승리가 아니라 패배, 그것도 아주 처참한 대패여야 하지 않을까. '당신이 보고 싶다'는 기분 앞에 보기 좋게 당하고만 루저들끼리 의기소침하게 시작하는 연애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운 사랑이 아닐는지.

 

-P.13, '패배로서의 연애 中'-

1.

 

 인디음악의 감성을 좋아라 합니다. 어쩌면 마이너함을 추구함에서 얻어지는 자기만족일지도 모르겠다만, 그 신선하고 공감가는 가사들을 듣고 있는 것 만으로 행복해지는 것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인디밴드들 중에서도 제 취향에 꼭 맞는 음악을 하는 밴드가 바로 '가을방학' 인데요. 계피의 따뜻한 목소리와, 정바비의 소소한 일상을 다룬 감성적인 음악이 오래 들어도 질리지 않고 들을때 마다 새로운 감정을 자아냅니다.

 그런 '정바비'의 에세이가 나온다기에 출간 전부터 기대를 했었습니다. 블로그를 통해 몇 편의 글을 접했던지라 이러한 내용들을 담은 책이 나오면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한편으로는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저만 읽고 싶은 이야기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읽어 버리는건 아닌가 하는 괜한 소유욕 때문인데요. 그만큼 유쾌하고 감각적인 글들로 에세이집은 가득 차있습니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이탈리아 북서부에 '브라'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고 한다. 인구 3만이 채 안 되는, 비유하자면 A컵쯤 되는 아담한 마을인 듯하다. 언젠가 그곳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다.

 

-P.120, '마이브라 中'-

2.

 

 정바비의 글을 읽으며 전반적으로 든 느낌은 대범한 척 하지만 속으로 앓고 있는 남성의 찌질하면서 솔찍한 심리를 무척이나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였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겪는 헤어짐에서 이렇게 찌질하면서 솔찍한 고백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또한 인문학 전공자답게 사고가 철학적이고 독특합니다. 정치 문제와 남녀 관계 사이의 공통점을 유추하는 과정은 나중에 논문으로 고증하고 싶을 만큼 흥미로웠고 인상적이였습니다. 정말 인간관계에 시사하는 바가 큰 ‘아무것도 하지않기’는 실소를 머금게 만들었습니다.

 에세이 전반적으로 성에 대한 솔찍한 담론들이 많이 담겨 있었는데요. 낯 뜨거울 정도의 수위로 불편했던 에세이들이 있었습니다. ‘커플 사이의 이야기’역시 상당히 노골적인 이야기들이 담겨있는데요. 이러한 부분을 더럽지 않고 야하게 보여줍니다. 성에 대한 농담성 발언이 아닌 솔찍하고 위트있는 이야기로 느껴졌는데요. 이 애매한 경계에서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웠던 이야기였습니다.

 


 

 

 

 가족이나 손에 꼽을 수 있는 친지를 제외하면 우리는 한정된 시간 동안 정해진 한두 가지의 역할로 서로를 만나게 된다. 역할로조차 만나지 않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모여 '세상'이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거대한 추상이 된다. 나는 더 이상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내가 한 투표가 그 일과 관계가 있는 일이었는지도 이제 와서는 잘 모르겟다. 대신 '좋은 나'가 어떤 건지는 스스로는 좀 알고 있을 거라 희망한다. 나는 좋은 나로 살고, 나머지는 내가 책임지거나 지지할 필요가 없는 어떤 이치에 맡길 수 밖에 없겠지.

 

-P.172, '좋은 택시기사 中'-

3.

 호불호가 분명하게 나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에세이였습니다. ‘성적인 표현’, ‘정치적 성향’등 찬반이 분명하게 나뉠 수 있는 소재의 글들이 들어있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였고. ‘진지함과 가벼움의 애매한 경계’, ‘지식과 병맛’ 극단을 오가는 에피소드들이 실려 극단을 오간다는 점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독창성과 더불어 현대 젊은이들의 연애관이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는 이야기는 정바비라는 개인에 관한 신변잡기보다 사고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개방적인 사람이라면 분명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지만, 단순히 정바비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읽고 나서 실망할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을 했습니다. 한가지 확실한 점은 기존에 볼 수 있었던 에세이와는 많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감각적이면서 현학적인 그러면서 동시에 위트 넘치는 이야기는 한 자리에서 다 읽게 되지만, 다시 펴보고 싶은 책이였습니다. 두번째 책이 출간되었으면 좋으련만 생각이 없다 하시니 기다려 보는 수 밖에요. 다음번엔 소설류의 기타 장르로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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