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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증명 ㅣ 증명 시리즈 3부작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인간의 증명 / 모리무라 세이이치
옥상의 냉각탑 역시 등롱을 연상케 하는 작은 빛들로 둘러싸여 있다. 저곳이 호텔의 '스카이 다이닝'이다. 아름답고 화려한 광경이었다. 무네스에는 먼 이국땅에서 칼에 찔린 채 저 휘황찬란한 호텔 건물을 바라보았을 이방인의 심정을 떠올렸다. 절망을 담은 눈동자에 세상 모든 행복을 모아놓은 듯한 하늘의 식당은 마치 별세계처럼 아름답게 비쳤으리라. 그것은 다 죽어가는 피해자를 충분히 끌어당기고도 남을 반짝이는 빛의 윤곽을 도시의 밤하늘에 아로새기고 있다.
-P.33-
1.
왜 저는 이 책을 이제서야 읽게 된 걸까요. <제노사이드> 이후 이렇게 마음을 설레게 만든 소설은 처음이였습니다. 취향이 사회파 미스터리에 편중되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읽고난 후 그 울림이 아직까지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듭니다.
<인간의 증명>, <야성의 증명>, <청춘의 증명> 세편의 증명 시리즈가 정식 한국어판으로 한국에 출간되었습니다. (기존에 해문에서 나왔던 책은 정식 계약이 되지 않은 해적판이라고 하네요.) 작가인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마츠모토 세이초'와 더불어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유명 작가라고 하는데, '마쓰모토 세이조'에 비하면 아직 낯설게 느껴지는 작가입니다. 하지만 드라마 '로얄 패밀리'의 원작이 작가의 작품이였다는 이야기는 작가를 좀 더 가깝게 느끼게 도와줬습니다.
책의 배경은 70년대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일본입니다. 물질적 풍요와는 대조적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는 인간성은, 작가의 눈에 무척이나 인상적이였나 봅니다. 인간의 가치가 돈으로 환원되는 물질 만능주의 사회의 폐해를 무척이나 잘 나타내는 작품은 오늘날 읽어도 위화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마 이러한 문제가 최첨단 지식정보 사회를 살아간다는 우리에게도 일상적이기 때문일 겁니다.

돈은 그야말로 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사람 사이를 오가고, 인간은 무기물로 변한다. 오로지 돈만이 존재한다. 아무도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고도로 발달한 물질문명 속에서 인간의 정신과 온기는 저 멀리 뒤쳐졌고, 물질만이 앞서 나갔다. 이리저리 날뛰는 이 물질의 악마에 가장 영향을 받기 쉬운 것이 바로 미국 같은 다민족 국가다. 애초에 같은 땅에서 살던 같은 민족이 만든 국가가 아니다. 성공의 기회를 찾아, 또는 고향에서 살 길이 막막해진 이들이 모여 이룬 집단이라 모두가 경쟁자다.
-P.323-
2.
부를 상징하는 화려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한 흑인사내가 시체로 발견되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호텔의 아름다움과는 대조적으로 추례한 옷차림의 시체는 어울리지 않는 그림처럼 보입니다. 어릴적 억울하게 아버지를 잃은 후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져버린 형사 무네스에는, 외국인의 이상한 죽음을 수사해 나가는데요. 풀리지 않을것 같던 사건은 우연히 발견된 낡은 밀짚모자와, 시집 한권으로 반전됩니다.
한편 다른곳에서는 잃어버린 아내를 찾기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내가 있습니다. 자신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접대부로 나선 부인은 어느날 종적을 감췄습니다. 불륜으로 시작된 가출이라 생각하고 아내를 찾아 나서지만, 아내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는 물질로 모든것을 해결하려는 부모에게 질린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히피를 모방하며 자유롭게 성관계를 가지며, 약을 합니다. 부모는 그들을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할 뿐,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베풀지 못합니다. 모든걸 돈만으로 해결하려는 어른들에 질린 아이들은 끝없이 방황합니다.
각기 다른 조각의 이야기들이,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짜맞춰지는 과정은 무척이나 짜릿합니다. 이야기를 짜맞추는 과정뿐만이 아니라, 이야기가 담고있는 무거운 주제역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데요. 인간이 스스로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해 봤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준비된 인생이었다. 누군가의 기대에 항상 부응하며 엘리트 코스를 차곡차곡 밟아가는 삶, 그 끝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까지 이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모두 자신이 바란 선택이며 삶이었다고 굳게 믿어왔다. 그런 자신을 흔들어놓은 것이 바로 오야마다 후미에였다.
-P.424-
3.
작품속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우리가 당연하다 생각하는 도덕성을 반하며 살아갑니다. 책 속에서 가장 정상적으로 보이는 인물이 불륜을 저지른 '니이미'일 정도니까요. 모두 인간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들의 이면엔 욕심과, 불안, 시기가 가득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것을 어기고, 욕심내며 살아갑니다.
책속의 누군가는 그 욕심에 침식당해, 자신이 소중하다 생각했던 모든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것을 내려 놓은 순간, 아마 그때가 누군가가 가장 인간적으로 보였던 것은 아마 저만 느낀 감정이 아닐겁니다. 어쩌면 작가는 인간이 인간다울수 있는 '인간성'이라는 선한 마음을 결말에 제시함으로 그 희망의 끈을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나는 과연 자본에 침식된 그들을 욕할 자격이 있는지 말이죠. 무척이나 묵직한 책이였습니다. <야성의 증명>과 <청춘의 증명>역시 무척이나 기대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