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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너의 목소리가 들려 / 김영하
"너는 우선 어른이 돼야 한다. 그럼 자연히 알게 돼.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지금 판단하지 못한다면 어른이 돼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저는 제 판단으로 행동한 거고, 그러니까 아무 후회가 없어요."
"너는 세상에 원한을 품고 있어. 그래서 네 알량한 정의의 이름으로 그걸 심판하고 싶은 거야. 그건 위험해."
제이는 마치 전자제품 사용에 대한 안내를 들은 소비자처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위험하죠. 저도 알고 있어요."
-P.73-
1.
김영하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했던건 라디오를 통해서였습니다. 평소 듣지 않던 라디오가 그날따라 듣고 싶었고, 하필 맞춰져있던 주파수가 음악방송이 아닌 교육방송이였던건, 그리고 그 시각 책을 읽어주는 방송이 들렸다는건 우연치고는 상당히 잘 끼워 맞춰졌다는 생각입니다. 누군가 읽어주는 웃기고도 슬픈 이야기는 담담하게 여동생의 시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작가의 단편집중 표제작인 <오빠가 돌아왔다>를 읽은게 아니라 듣게된건 '김영하'라는 젊은 작가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새로운 감각이였습니다. 아마 기말고사를 앞둔 즘이였을 겁니다. 한창 공부해야할 시기 저도모르게 서점에 들어가 문제집 대신 그의 책을 집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웃픈(웃기고도 슬픈)이야기들을 마음껏 즐겼습니다. 가벼운듯 툭툭 던지는 문체에 담긴 차가운 시선은 때론 풍자적으로, 때론 비극적으로 독자의 희비를 농락했습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고른건 문학동네 특유의 감각적인 표지와, 느낌있는 제목도 한몫했지만. 아마 그때 느꼈던 작가의 젊은 감각이 그리워서 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가 그의 문학적 학풍에 대해 논할수는 없겠지만 귀걸이를 하고 문학상 시상대에 오른 남자는 틀에 얽매이지 않은 젊음을 대표하듯이 보였습니다. 어쩌면 고루한 문학세계에서 새롭다는건 기존의 질서를 뒤집는 반역행위일지도 모릅니다. 소설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이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비슷비슷한 작품을 내보이는것도 이러한 이유때문이라고 생각하구요. 그런면에서 젊은 감각이라 불리는 그의 작품이 더욱 그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은 원래 그런 존재야. 신은 비대칭의 사디스트야. 성욕은 무한히 주고 해결은 어렵도록 만들었지. 죽음을 주고 그걸 피해갈 방법은 주지 않았지. 왜 태어났는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 그냥 살아가게 만들었고."
-P.134-
2.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동명의 노래를 좋아합니다. 메아리치듯 머리속에 남아있는 몽환적인 목소리.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반 이상을 차지하는 이 노래에서 목소리는 과연 무엇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요.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읽으면서도 같은 질문에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제이와 동규가 그토록 말하고 싶어했던 목소리는 무었이였을까,더나가 목란과 길위의 아이들이 그리고 그들을 비참하고 잔혹하게 만드는 소리는 무엇이였을까. 사실 지금에 와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그것을 슬픔이라고 얘기하던데 제가 느낀 이 책은 슬픔보다는 절망에 가까웠습니다.
글 속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은 제이 입니다. 누군가의 원치않은 임신으로 태어난 아이. 비극적인 출생은 아이의 인생 절반에 거쳐 참으로 불공평하게 이어집니다. 그가 평범할 수 있었던 시간은 돼지엄마의 품 속에서 동규와 함께 지낸 시간 뿐입니다. 돼지엄마의 가출로 고아원에 들어가게 된 제이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에게 따뜻했던 다방의 레지는 살해당하고, 불쌍한 개들을 도와주려 개장수의 차에 구멍을 냈을때 고아원의 원장은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며 어른이 되어야 한다 말합니다. 어른이 된다면 그런 부조리함을 자연스럽게 이해할수 있게 되는걸까요?
이런 세상에서 제이는 변해갑니다. 고아원을 나온뒤 흡사 노숙자와 같은 모습으로 동규를 찾은 제이. 그는 지옥도와 같은 세상속에서 나름의 방법으로 살아남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도덕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가출 소년 소녀들의 관계는 마치 동물들의 사회와 같습니다. 강자는 약자를 폭력으로 다스리고 그 속에서 난교는 자연스러운 일상입니다. 윤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어른들은 그들의 그런 관계를 눈치채면서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도 어른들은 그들의 부조리함을 껄끄럽지만 쉬쉬 넘어가려 합니다.
제이는 폭주족의 우두머리격이 되어 '고아'들의 이야기를 폭력으로 분출합니다. 배달이 늦으면 오만가지 짜증을 내면서, 밤에 폭주를 뛰는 아이들을 비난하는 어른들의 이중적인 잣대는 그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이들 역시 이해받기를 포기하고 의미없는 목소리만을 내고 있습니다.

"그런다고 세상이 우리를 이해해줄까? 사람들 잠 다 깨우고 길 막고 다 때려부순다고?"
...
"내가 보육원에서 배운 게 있어. 거긴 애들이 아주 많아. 보살피는 사람은 적고. 거기서 누구 하나를 때리면 어른이 나타나서 물어. 왜 그랬냐고. 나는 그게 대화이고 관심인 줄 알았어.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냥 묻기만 해. 그러고는 벌을 줘. 하지만 적어도 혼자 삭일 필요는 없는거지. 어차피 세상은 우리에게 벌을 줘. 나를 따라다니는 애들 사는 꼴을 봐. 저게 벌이 아니면 뭐야? 새벽부터 일어나서 자정까지 일하고, 욕먹고, 천대받고, 무시당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목숨을 걸고 배달하고, 명절도 휴가도 없이 일하고."
-P.164-
3.
동규는 어쩌면 제이의 또다른 자아일지도 모릅니다. 분명 다른 인물이지만 둘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출판사 서문에 의하면 이 인묻들의 관계와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결국 우리 모두는 '고아'이고 슬픔을 가지고 있다. 라고 설명하지만 아쉽게도 제게 그 슬픔은 전달되지 않은것 같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슬프기보다는 그들이 목소리를 내는 과정의 묘사가 지나치게 생생해 아프기만 했습니다.
4.
이야기는 완벽한 결말과는 거리가 멉니다. 중요한 부분에서 이야기가 끊기고, 현실인지 허구인지 불확실한 작가의 고백이 시작되거든요. 그 후분은 '페이크다큐'처럼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해줍니다. 동시에 제이가 언제 다시 등장할지 모른다는 가능성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하는건 그런 삶을 살아오지 않은 저로서는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들의 목소리를 끝끝내 들어주지 않은 세상에 대한 그리고 어른들에 대한 아이들의 목소리만은 똑똑히 기억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