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세월 / 마이클 커닝

 

 

그를 조금만 더 알게 되면, 그에게 그대란 존재는 그 자신이 비극과 희극을 엮어내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능력으로 창조해낸, 본질적으로 허구인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도 그 허구의 인물은 그대의 진정한 본질이 아니라, 리처드 자신이 극단적이고 당당한 인물들이 사는 세상에 살 필요가 있어서 만들어낸 그런 인물이다.

 

-P.88-

 

1.

 

 쉽게 읽혀나간 책보다는 문장 하나 하나를 탐미하며 오랜기간 읽은 책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집중력이 부족한 제게는 수사가 조금만 길어지고, 묘사가 치밀해지는 책들은 뇌속의 산소부족을 일으킵니다. 때문에 이런책들은 몇장 읽다 책장 장식용으로 전락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아직 책읽는 내공이 부촉한 저에게 고전이라는 딱지를 붙은 녀석들은 무척이나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비채에서 출간한 모던클래식 시리즈는 알려지지 않은 고전문학부터, 문학적 가치가 뛰어난 현대의 작품들까지 독자에게 폭넓은 세상을 보여줍니다. 개중에는 저와는 맞지 않았던(나쓰메 소세키의 문) 작품도 있었고, 책을 넘기기가 아까워 한편 한편 조금씩 읽어나간 작품(오헨리 단편선)도 있었습니다. 이번에 읽은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후자쪽에 속하는 책이였는데요. 등장인물 개개인의 아프리만큼 세세한 감정의 묘사가 책을 덮은 이후에도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로라가 후회하는 것은, 참아내기 힘든 것은 바로 케이크다. 케이크가 그녀를 당혹스럽게 만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건 단지 설탕과 밀가루와 계란에 지나지 않아. 케이크의 맭은 오히려 그 불완전함에 있어. 물론 그녀는 그 사실을 안다. 그래도 자신이 만들어낸 것보다 더 훌륭한 무엇인가를, 좀 더 의미 있는 무엇인가를, 적어도 겉이 매끈하고 축하 메시지 글씨가 반듯하기를 희망했다.

 

-P.199-

 

2.

 

  책이 상당히 어려울것 같다는 판단에 읽기전 동명의 영화를(The Hours) 먼저 봤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고 바로 책을 봤다면 아마 책은 책장 장식용 서적 중 하나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영화가 제게 준 임팩트는 강렬했습니다. 각기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세명의 여인들. 얼핏 완벽할게 보이는 겉모습 속에서 그녀들의 자아는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델러웨이 부인>의 저자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시간을 살고싶어합니다. 현실과, 자신의 작품속 두개의 세계를 살아가는 그녀에게 시골에서의 생활은 삶을 억압하는 갑갑한 코르셋입니다. 런던의 자유분방한 생활을 희망하지만 그녀의 남편 레너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가두어 두려 합니다. 그녀 역시 남편의 사랑을 잘 알고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다잡아보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딱딱한 원칙주의자 남편과,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 그 답답함 속에서 그녀가 선택할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죽음입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델러웨이 부인>을 읽고있는 브라운 부인 역시 겉보기에는 아무런 불화도 없을것같은 완벽해 보이는 가정의 구성원입니다. 그녀에게는 참전용사로 추앙받는 남편이 있고, 똑똑하고 귀여운 아들이 있습니다. 그녀는 그 완벽한 이상에 있어 자신이 이물과 같이 느껴집니다. 완벽한 케이크를 만들어 남편을 기쁘게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이러한 그녀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보여주는 좋은 예일겁니다. 세상의 이목은 그녀에게 완벽한 이상을 요구합니다. 그 완벽한 옷은 그녀에겐 맞지않는 옷임에도 말이죠. 그래서 그녀는 자살을 결심합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그러했듯이요.

 

 마지막으로 '델러웨이 부인'이라 불리는 클래리사가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와, 브라운 부인이 90년대 여성상을 상징했다면 클래리사는 21세기 현대의 여성상을 상징합니다. 동성애가 인정되고,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일반화 되며 얼핏 그녀의 삶은 자유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녀 역시 결국은 리차드라는 남성에게 속박당해 있습니다. 그가 그녀를 델러웨이 부인이라고 말한 순간 그녀는 델러웨이 부인처럼 살아갑니다. 아니 그녀의 삶을 '델러웨이 부인'에 투영해 살아가려 노력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해보이려는 모습. 그 모습은 클래리사 본인뿐 아니라, 리차드도 슬픔 속에 침식시킵니다.


 

 

그리고 여기 또 한 여인은 이제 댈러웨이 부인이 아닌, 클래리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있다. 이제 이 세상에는 그녀를 그렇게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 앞에는 또 다른 시간이 놓여 있다.

 

-P.307-

 

3.

 

 아마 마지막에 인용한 저 문장이 아니였으면 저역시 무척이나 우울했을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녀 앞에는 또 다른 시간이 놓여 있다." 리차드의 죽음과 동시에 클래리사는 '델러웨이 부인'이 아닌 '클래리사' 본인의 시간을 되찾았습니다. 아마 그녀는 또 다른 사랑을 만나 그녀가 아닌 누군가의 시간을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행복할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야기는 각기 다른 시대의 각기 다른 주인공을 배경으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만들어 갑니다. '델러웨이 부인'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완성되는 이야기는 세 여자의 일생보다 농밀한 하루를 공감하고 이해하게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멋진 소설이였습니다. 잊혀지지 않을 마지막 문장이 한동안 가슴속에 남아있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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