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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3월
평점 :

흑백 / 미야베 미유키
나와 바둑을 두는 적수들의 경우에는 이곳에서 그야말로 승부의 흑백을 다투었지만 네 경우는, 그렇지,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의 흑과 백을 견주어 본다는 뜻이 되려나. 반드시 백은 백, 흑은 흑이 아니라 관점을 바꾸면 색깔도 바뀌어 그 틈새기의 색깔도 존재한다는-음, 그래
-P.95-
1.
숨겨왔던 내 비밀을 털어놓는것 만으로도 답답했던 속이 시원해질 때가 있습니다. 이야기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이 아닌 경청은 말하는 이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위로가 됩니다. 말을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지만 일단 속에 있는 문제는 나누면 나눌수록 작아지니까요. 이것은 비밀을 말하는 사람만의 기쁨이 아닙니다. 듣는 사람 역시 세상에는 나 외에도 이런 고민을 가진 사람이 많구나라는 생각에 안도하고 이겨나갈 힘을 얻게 되고도 하지요.
미야베 미유키의 <흑백>은 잊을수 없는 과거를 안고 살아가는 소녀가 흑백의 방에서 사람들의 기이한 이야기를 들어가며 타인의 상처는 물론, 자신의 아픈 마음까지 치유해가는 이야기 입니다. 옴니버스식의 이야기가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참으로 짜릿했는데요.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도 '모든 인물'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드러납니다. 미미여사의 특유의 따뜻함이 베어있는것이죠.
오치카는 표정에 드러내고 말 정도로 강한 의구심을 느꼈다. 이헤에가 괴담을 들을 사람으로 오치카를 둔 의도는 이제 알았다. 넓은 세상에는 온갖 불행이 있다. 갖가지 종류의 죄와 벌이 있다. 각각의 속죄가 있다. 어둠을 껴안고 있는 사람은 오치카 혼자가 아님을, 뻔한 설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체험담을 들려줌으로써, 오치카가 뼈지리게 깨닫도록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P.238-
2.
이야기는 주머니 가게인 미시마야에서 시작됩니다. 이곳의 주인 '이헤에'에게는 바둑이라는 취미가 있습니다. '흑백의 방'이라는 전용 공간을 만들어 놓았을 정도로 열성적이지요. 그러던 어느날 이 미시마야에 새로운 식구가 생깁니다. 가슴속에 크나큰 상처를 간직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는 소녀. 그녀의 이름은 '오치카'입니다. '이헤에'의 조카딸이기도 하지요.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스스로 하녀의 생활을 자청합니다.
사건은 '이헤에'의 부재로 '오치카'가 손님을 맞으며 전개됩니다. 무언가 사연을 지닌듯한 창백한 표정의 사내는 만주사화라는 붉은 꽃을 보고는 두려움에 떱니다. 그리고 '오치카'에게 자신의 기이한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무서워하는 만주사화에 얽힌 이야기를요. 타인과의 벽을 쌓은 오치카에게 누군가의 비밀을 듣는다는 행위는 참으로 새로운 경험이였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이해하고 치유해주는 것. 그것은 생각외로 뿌듯한 경험이였을 겁니다.
한편 이 이야기를 들은 '이헤에'는 '오치카'를 위해 새로운 일을 궁리합니다. 바로 ‘흑백의 방’에 이야깃거리를 가진 손님을 초대해 괴담 대회를 여는 것이지요. 좀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누구나 하나쯤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갖고있고, 그러한 어둠은 결코 부끄러운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위한 '이헤에'의 배려입니다. 하나 둘 자신들의 기이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오치카'는 스스로를 묶고있던 고통스러운 기억을 치유해갑니다.
"잊힌 게 슬펐군요. 잊혀 가는 게 슬펐군요."
오치카의 마음은 활짝 개고, 눈동자에는 맑은 눈물이 고였다.
"이제 그런 슬픔에 잠겨 있는 건 그만해요. 새로운 일을 하는 거예요."
-P.423-
3.
미미여사의 이야기에서 주가되는것은 결과보다는 과정입니다.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에서는 진정한 악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름의 이유를 갖고 벌인 행동들 속에서 주인공들 모두는 흑과 백을 뚜렷하게 구분할수 없는 보통의 사람들 입니다. 헐리우드의 영화들처럼 명확하게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는다는것은 어찌보면 답답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답답한것이 우리내 삶이고 현실입니다. 인간은 흑백의 바둑판처럼 극단적이지 않습니다. 죄를 저지르고도 마음속에 속죄하는 마음을 품고있다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백(白)색의 선이 남아있다는 증명일 겁니다.
인간에 대한 그녀의 따뜻한 시각은 마지막 장에서 잘 드러납니다. 작품에서 쉽게 지나간 피해자들의 모습이 드러나며 그들의 아픔마저 치유합니다. 여러 종류의 책을 읽다보면 '이사람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 싶은 조연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주인공이 아닌 주변 인물들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기에 잊혀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흑백'은 무섭지만 참으로 따뜻한 책이였습니다. 마지막 한문장까지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