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복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잠복 / 마쓰모토 세이초

 

 

그녀는 집요하리만치 소키치에게 몸을 들이댔다. 여태껏 그의 기억에 없던 일이라, 그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는 흥분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두 사람은 마음 깊은 곳에서 공통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어두움이 한층 도취를 부추겼다. 그리고 절정에 도달했을 때, 오우메는 소키치에게 어떤 일의 실행을 요구했다. 소키치는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P.116-

1.

 

 리뷰를 쓰며 자주 언급했지만서도 저는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을 무척이나 좋아라 합니다. 왠만하면 편독하지 않고 골고루 읽으려 노력하지만, 대부분 마음이 가는책들은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들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는 사건이나 트릭보다는 인간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의 병폐와 부조리한 현실을 주로 다룹니다. 얼마전 개봉한 화차가 대표적인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이지요. 이런 사회파 소설의 원조격이라 할수 있는 작가가 바로 '마쓰모토 세이초'인데요. 이번에 읽은 단편집 <잠복>은 그가 쓴 최초의 추리소설 <잠복>을 포함한 총 8편의 단편이 실려 있었습니다.



 

나는 어느 파도 아냐. 20만 시민의 편이지. 시정 악과 싸워온 신념의 남자야. 시장, 보좌, 시의원, 공무원들이 모두 나를 눈엣가시로 보고 있어. 그래도 상관없어. 혼자라도 할 거니까. 하필 병으로 자리보전하고 있어서 유감이지만, 놈들은 좋아하겠지. 젠장.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지. 나 대신 우리 시의 시정 악을 철저하게 부수어주게. 누구 눈치를 볼 것도 없어. 광고 한 줄도 구걸하지 않아.

 

-P.144-

2.

 

 자극적인 현대의 이야기들에 비하면, <잠복>에 실린 이야기들은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을겁니다. 기괴하게 살해된 시체도 없고, 짜릿한 반전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편 한편의 단편들을 읽고나면 마음 한켠에 짠한 무언가가 남아 있습니다. 인간군상을 다채롭게 표현하며 무거운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서술해 나가는 작품은 전형적인 사회파 추리 소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표제작 <잠복>이였는데요. 한 여인을 관망하는 형사의 시각에 절로 마음이 동요하여, 마지막 한문장이 끝까지 찝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스포가 될까 줄거리 부분은 생략하려 했는데 출판사 책소개 부분에 짧막한 줄거리가 나와있어 첨부해 보겠습니다.

 

얼굴
한 극단의 단원으로 무명 배우인 이노 료키치는 이시이 감독의 신작 영화 <봄눈>에 캐스팅이 된다. 영화배우로 성공하는 것을 꿈꾸는 료키치는 다가온 행운에 감격하지만, 동시에 그는 파국을 맞을 것이라는 불안에 휩싸인다. 결국 료키치의 영화 데뷔는 성공하지만, 온갖 찬사에도 그의 불안은 계속 커지기만 한다. 그의 불안은 이시오카 사다사부로와 야마다 미야코에 관련된 9년 전 기억 때문이다.

잠복
도쿄의 어느 저택에서 강도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 당시에는 단서가 잡히지 않아서 수사가 난항을 겪다가 불심검문 중에 우연히 범인인 야마다가 채포된다. 야마다는 강도 행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살인은 부인한다. 그는 살인을 저지른 것은 공범인 이시이 규이치라는 남자라고 진술한다.
사건을 담당하는 경시청 조사 1과의 형사 유키는 야마다로부터 이시이가 ‘옛 연인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정보를 얻는다. 다른 형사들은 이 말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지만, 유키는 이시이가 분명히 옛 연인을 만나러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여자의 집 부근에서 잠복근무를 시작한다.
「잠복」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대표작으로 세이초가 추리소설을 본격적으로 집필하게 된 출발점이 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집필 의도에 대해서 저자는 “잠복근무를 하는 형사의 눈에 비친 한 여자의 처지를 그리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귀축
인쇄소의 말단 직원이었던 다케나카 소키치는 고생 끝에 겨우 인쇄소의 사장이 된다. 여우 같은 얼굴을 한 그의 부인 오우메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소키치는 요릿집을 드나들게 되고 그곳의 접대부인 기쿠요에게 반한다. 기쿠요를 책임질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든 소키치는 그녀와 관계를 맺고 3명의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그 뒤로 찾아온 불운으로 소키치의 인쇄소는 영락하게 되고, 소키치에게서 더 이상 생활비를 받지 못하게 된 기쿠요는 3명의 아이를 데리고 소키치의 집을 찾아온다.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오우메는 기쿠요와 그 아이들에게 가혹하게 처사하고, 그런 부인 앞에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 소키치에게 화가 난 기쿠요는 3명의 아이들을 소키치의 집에 두고 떠나버린다. 결국 버림받은 아이들은 오우메의 지시 아래서 한 명 한 명씩 처분된다.

투영
상사와의 불화로 도쿄의 신문사를 그만두고 부인과 함께 지방으로 내려간 다무라 다이치는 그곳의 영세한 지역 신문사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이치는 시의 토목과장인 미나미의 익사 사건과 맞닥뜨리고, 사건을 조사하는 사이에 그는 점점 미나미의 죽음이 자살이나 추락사가 아니라 타살이라는 심증을 갖는다. 결국 다이치는 미나미를 죽음으로 빠뜨린 ‘트릭’을 발견하고, 그 트릭 속에 숨겨져 있는 거물급 인사의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목소리
신문사에서 전화 교환원을 하고 있는 다카하시 도모코는 사회부의 기자의 부탁을 받고 아카보시라는 성을 가진 학자에게 전화를 건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굵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한 사람은 ‘잘못 걸었다’며 신경질을 내면서 전화를 끊어버린다. 도모코는 실수로 아카보시 성을 가진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을 알았고, 잘못 건 곳의 주소를 찾아보았는데 그곳은 세타가야의 저택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석간을 본 도모코는 세타가야에 사는 아카보시라는 사람의 저택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기사를 읽고 경악한다. 도모코는 경찰에 출두해서 이전에 있었던 일을 진술하지만 범인의 실마리는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도모코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지방신문을 구독하는 여자
무사시노에 살고 있는 작가 스기모토 류지는 소설 「야도전기」를 고신신문이라는 지방신문에 연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쿄에 사는 시오타 요시코라는 여성으로부터 ‘「야도전기」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신문을 구독 하겠다’는 취지의 엽서를 받는다. 스기모토 류지는 감사의 뜻으로 요시코에게 답신을 보낸다. 그런데 신청 뒤 불과 1개월도 지나지 않아 ‘소설이 재미없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구독을 하지 않겠다’는 엽서가 도착한다. 기분이 나빠진 스기모토는 시오타 요시코의 마음이 변하게 된 이유를 생각하다가 그녀가 신문을 구독한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일 년 반만 기다려
생명보험 설계사로 일하는 스무라 사토코는 남편 요키치를 죽인 죄로 체포된다. 하지만 이전부터 계속된 요키치의 폭행과 나태한 행태가 매체에 보도되자, 세상은 사토코에게 동정을 보낸다. 여성 평론가 다카모리 다키코는 ‘일본 가정에서의 남편의 횡포’와 ‘일본 가족제도의 악습’을 비판하고, 평론가 동료들을 동원해서 감형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행동에 나선다. 결국 다카모리의 지원으로 사토코는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사회정의가 이루어졌음에 만족하는 다카모리의 앞에, 어느 날 한 남자가 나타난다.

카르네아데스의 널
역사학과의 교수 구무라 다케지는 종전 이후로 진보적 유물사관을 전개해서 일본 교직원 조합으로부터 갈채를 받은 전력이 있는 사람이다. 역사 교과서의 집필을 담당하게 되면서 올린 막대한 수입으로 집을 지을 정도다. 구무라는 강연 여행 중에, 이전의 은사인 오쓰루 게이노스케를 찾아가기로 한다. 오쓰루는 전쟁 중 국가적 역사관을 강의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추방되었다. 구무라를 만난 오쓰루는 그에게 자신의 대학 복귀를 위해 힘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예전 은사의 비굴한 모습에 묘한 자부심이 동한 구무라는 오쓰루의 요구를 들어준다. 결국 대학에 복귀한 오쓰루는 진보적 학자로 급속히 변모한다. 구무라는 풍족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상관하지 않는 옛 인사를 차갑게 방관하며 비웃고 있었다. 하지만 오쓰루가 참고서를 쓰게 되자 오쓰루는 점점 구무라에게 귀찮은 존재가 된다. 시대가 변해서 문부성이 좌익 편향 교과서를 불합격시키자, 구무라는 진보학자라는 타이틀을 반납하고 우익으로 전향하려고 했으나, 마침 그때 오쓰루가 가장 먼저 전향을 선언한다. 교과서와 참고서 집필로 얻은 풍족한 수입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한 구무라는 오쓰루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출처 : 교보문고)


 

 

연필을 끼워둔 곳은 구체적으로는 '카르네아데스의 널'을 서술하는 부분이다. 바다에서 조난당해서 널 하나에 매달려 있는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빠뜨리고 자기만 목숨을 건진다는 비유이다. 피고는 왜 그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을까?

 

-P.385-

3.

 

 단편집과 같이 쉽게 읽히는 책들은 대체로 쉽게 잊혀집니다. 방금 전에 재밌다고 읽었는데 책을 덮는순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단편집이 가진 큰 약점일텐데요. '마쓰모토 세이초'의 <잠복>은 쉽게 읽힘에도 그 여운이 한동안 떠나지 않습니다. 맛이좋은 차를 입에 머금고 있는 느낌이라는 표현이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대부분의 이야기가 씁쓸한 결말을 안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희극보단, 비극을 더 잘 기억하곤 하니까요.

 

작가의 책을 이 작품으로 처음 접했는데요.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데 감탄했습니다. 단편과는 다른 장편의 소설들은 어떤 느낌일지 무척이나 궁금해 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