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 꽃잎보다 붉던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품절


 

 

"오래전, 내,내가 대학 입학하던 해던가, 바로 여기서, 당신이 저, 저 골짜기를 올라오는 걸 내내 내려다본 일이 있었어요." 그의 목소리가 아득했다. "그해 여름요. 당신은 그때 흰 셔츠를 입고 있었지요. 당신이 숲 사이로 사라졌다 나타났다, 반복하는 걸 여기 서서 보았었지요. 숲에 가렸던 당신 모습이 툭, 하고 나타날 때마다 얼마나 목이, 목이 말랐던지, 당신 다 올라올 때까지 내가 마신 물이 아마 한 동이는 됐을 거요."


오랜만에 밤을새워 책한권을 읽었다. 아이를 재우고 종종 책을 보기는 하지만 쉬이 집중하지 못해 내려놓곤 했었다.
당신. 사실 일주일만에 들른 도서관에서 제목이 너무 아련하다 싶어 큰 기대없이 빌려온 책이었다.
꽃잎보다 붉던 당신이라니.


책은 몸이 불편한 그와 그를 보살피는 아내에 대한 글로 시작된다. 사랑하는 남편을 아내라는 이름으로, 희생하여 돌보는 노년의 로맨스인가 싶었다.
책을 다 읽고나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어서 오히려 다행스러웠고 조금은 슬펐던 것 같다.


마당 한가운데에 자리잡았던 매화나무가 죽었다. 그 자리에 구덩이를 파고 새로운 나무를 심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다.
날이 어두워졌고 다음날이 되었다. 아내는 남편의 실종신고를 하고 미국에 살던 딸이 아빠를 찾기위해 집을 찾는다.
갑작스런 그의 부재. 책에는 더이상 그날의 이야기가 묘사되어있지 않았고 다만 오래전의 시간으로 거슬러간다.
말을 타고 학교에 다니던 소녀와 코를 흘리며 그녀를 쫓던, 그녀보다 나이가 3살 적은 남자가 있었다. 그녀는 생에 처음으로 죽음을 보았고, 그녀의 눈에 비친 죽음의 대상은 그의 할머니였다.
얼마 뒤 그녀의 할아버지 역시 그가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그후로 그는 그녀의 곁을 그림자처럼 맴돌기 시작하고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그녀의 곁을 아프고 지난하게 마주한다.
그녀에게 사랑으로 채워지던 하루가, 그에게는 끝없는 기다림의 시간이었고,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진채 그와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게된다.

젊고 생기있던 여자가 누군가를 사랑했다. 상대는 세상 위에 큰집을 짓고 싶어하던 사람이었고 국가가 내세운 이념적인 이유로 그녀의 눈앞에서 끌려가 고문을 당해 결국 생을 마감했다.
그런 그녀의 사랑을 아무런 댓가없이 보듬어준 사람이 책의 첫페이지에서 아파 누워있던 남편이었다. 자신의 핏줄이 아닌 아이를 사랑으로 거두고 평생을 마음에 두었던 여인의 생을 온몸으로 받아들었다.

당신, 이란 말이 왜 이리 슬플까. 함께 견뎌온 삶의 물집들이 세월과 함께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눈물겨운 낱말이다. 그늘과 양지, 한숨과 정염, 미움과 감미가 더께로 얹혀 곰삭으면 그렇다, 그것이 당신일 것이다.


정말 당신이라는 말이 너무 어울리는 삶을 살아온 사람.
그리고 일흔이 되도록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 아내. 평생 사랑을 갈구했던 남자는 그녀로부터 외면 당했고 깊은 상처를 받았다. 자신만 아는 내면의 골짜기에 아픈 마음을 감추고 살아 온 세월이 병이 되었고 병이 들고 난 뒤,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과 행동들이 불쑥 나왔다.
그런 과정들 속에서 단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던, 자신에게 헌신했던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노년의 여자. 마음이 아리고 헛헛해왔지만 이제는 그녀도 그를 향해 '당신'이라고 서슴없이 불러줄 수 있겠구나 싶어 안도했다.


사랑해서 아팠고 사랑받기 위해 아팠던 노년의 부부가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들이 깊은 밤 책장과 동시에 빠르고 깊이 지나갔다.
살다보면 아무것도 아닌게 된다는 오늘의 고통과 슬픔의 시간들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었던 것도 같다. 모든것이 사랑 앞에서는 보잘 것 없다는 말도, 밥을 먹고 살아가는 일들이 누군가를 향한 애정의 시작이며 과정이라는 것이 아닐까도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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