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부터 제대로 산다면 인생은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단번에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는, 그게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는 모두 결정적이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제목을 보고 무슨 내용일까 궁금했다. 표지에 소녀가 있으니 소녀를 둘러싼 이야기일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의 글은 항상 간결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간결함 속에서 감성 깊숙이 파고드는 뭔가를 끄집어 내어 고민하게 하는

글들이 많았으므로 나는 이번에도 책을 읽기 전에 작가의 말에 먼저 눈을 돌려야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깊고 어둡고 서늘한 심연이다. 살아오면서 여러 번 그 심연 앞에서 주춤거렸다. 심연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다."

나를 혼잣말하는 고독한 사람으로 만드는 게 바로 그 심연이다. 심연에서, 거기서, 건너가지 못한 채, 그럼에도 뭔가 말할 때, 가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심연 저편의 당신을 향해 말을 걸 때, 그때 내 소설이 시작됐다.

나의 말(言)들은 심연 속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나는 다시 써야만 한다. 깊고 어두운 심연이, 심연으로 떨어진 무수한 나의 말들이 나를 소설가로 만든다. 심연이야말로 나의 숨은 힘이다.

가끔,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나의 말들이 심연을 건너 당신에게 가닿는 경우가 있다. 소설가는 그런 식으로 신비를 체험한다. 마찬가지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신비를 체험한다. 두 사람이 서로 손을 맞잡을 때, 어둠 속에서 포옹할 때, 두 개의 빛이 만나 하나의 빛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듯이.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심연을 건너가는 것, 우리가 두 손을 맞잡거나 포옹하는 것, 혹은 당신이 내 소설을 읽는 것, 심연 속으로 떨어진 내 말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_작가의 말

 

 

 

책은 입양된 카밀라가 양모의 죽음으로 생모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왜 자신을 버렸을까 하는 원망과 원인모를 궁금함이 카밀라에게도 책을 읽는 나에게도 책장을 넘기고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은 동기가 되었던 것 처럼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정지은, 그녀는 열 아홉에 세상과 이별한 카밀라의 엄마였다. 차례로 가족을 잃고 작은 생명 마저 빼앗겨버리고 홀로 넓은 파도에 던져지듯 그녀는 소리없이 자살이란 죽음을 선택했다. 그리고 역시 소리없이 진실은, 사실은 묻혀갔다.

 

소녀가 세상의 아름다운 시를 읽어주던 선생님의 아이를 가졌다. 반듯한 이미지의 소녀는 친구들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었다. 버팀목이던 아버지는 자살하고 없었다. 하나뿐인 오빠는 그런 사실을 알고 그 선생님에게 칼을 겨누었다. 사람들은 소녀를 비난했다. 선생님에게는 선생님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에 의해 많은 말들이 만들어 지고 오빠는 동생을 범한 부도덕한 인간이 되었다. 소녀는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었지만 그 여인에 의해 아이를 빼앗겼다. 아무도 소녀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선생님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오빠는 죄값을 치르기 위해 부재했으며 친구들은 외면했다.

바다뿐이었다. 말들이 커졌고 번졌고 맞설 수 조차 힘들 정도의 힘을 갖고 세상을 떠돌았다. 어린 그녀는 감당할 수 없었다. 자신을 지켜주던 유일한 바다에 몸을 내던지며 짧은 생일 마감했다.

 

책은 사람들의 '말'로 카밀라가 버림받아야 했던 이유와 생모의 자살, 한 번도 본 적없는 외삼촌, 한적한 바닷가 진남을 이야기 한다.

제각기 웅웅대는 것만 같은 '말'들 속에서 카밀라가 귀기울인건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었을 '소녀'의 삶이었다. 아직은 보호 받아야 하며 자신에 대해 생에서 가장 솔직할 수 있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을 그 소녀는 그렇기에 스스로를 지키기에는 미숙했다고, 어설펐다고, 그래서 엄마가 되기에는 조금 부족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정지은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고 미숙했을지라도 생 앞에 놓여있는 어린 생명을 선택하는것은 오롯한 당신의 몫이었노라' 위로해주고 싶었다. 적어도 그렇게 빼앗기게 놔두지는 말았어야 했다고...

 

사랑이라 믿었고 부끄럽지 않았고 가족을 이루지 못했으며 타인에 의해 아이와 아픈 이별을 했다.

검은 바다에 몸을 내던지면서 그 소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살한 아버지? 누군가의 손에서 커 갈 자신의 아이? 여동생을 간음한 누명을 쓰고 부도덕한 인간으로 각인찍힌 오빠? 한 목소리를 내주지 않았던 친구들? 세상의 아름다운 시를 읽어주던 선생님? 외로움을 나눴던 친구 희재?

그녀는 답이 없다. 그녀의 침묵 속에서 나는 약한 날개를 달고 심연을 건너왔다.

검은 바다에만 묻어둔 아픔이 파도가 되어 바다 멀리멀리 섞이고 휘몰아치길...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사람의 마음과 마음의 거리라고 한다.

내 마음 처럼 그대의 마음도 그렇다면 아프지 않을텐데, 상처받지 않을텐데, 외롭지 않을텐데, 어쩌면 소녀도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온전한 나와 당신의 마음이 만나야 하지만 그녀는 반쪽 사랑을 했었던 것일지도.

이제 소녀는 세상에 없다. 하지만 심연 속에 있는 소녀의 아픔을 그때의 자신보다 훌쩍 자란 딸이 세상 밖으로 데리고 왔다고 믿고 싶다.

울지 말라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당신이 미워한 모든 것들을 이제 내가 위로해주겠다고 더이상 아파하지 말라고 말해줄 것이라는 것도.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심연을 건너가는 것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한 일들은, 사랑했으나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것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일어날 수도 있었던, 하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은 일들을 들려주는 이야기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을 건너오지 못하고 먼지처럼 흩어진 고통과 슬픔의 기억들,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고 빛바램과 손때와 상처와 잘못 그은 선 같은 것만 보여줄 뿐인 물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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