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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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나는 그를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은교, 그녀가 내게 왔다.

어느날 시인에게 싱그러운 젊음으로 다가왔다는 열일곱의 은교.

처음 책과 마주한 내가 그린 줄거리는 70을 앞둔 노인의 소녀에 대한 탐욕, 욕정, 애욕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문득 불쾌해졌고 책이 낯설게 느껴졌고, 도발적인 소재에 두렵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단지 그것만이 이 책을 감싸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젊음과 나이듦, 인간의 본능과 욕망, 사랑과 애정, 질투...

내가 아는 모든 통속적인 단어들을 머릿 속으로 나열하게 되면서 '소설이란 이런거야.'하며 무릎을 찰싹 두드리게 되었던 듯 싶다.

 

책 <은교>는 반전이 있고, 로맨스가 있으며 성공과 좌절이 있고 청춘의 푸름과 노년의 파르함이 묻어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까지 읽고 작가의 이야기를 몇 번이나 곱씹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 책의 어떤 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일까.'하고.

 

이야기의 중심에는 유난히 손이 희어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열일곱의 소녀 은교가 있다.

70을 앞둔 시인 이적요와 제자 서지우의 중심에 늘 위태하게 서 있는 은교는 싱그러운 소나무처럼 푸르디 푸르다.

책의 처음은 시인이 죽은 지 1년이 지난 후, 유언장이 변호사에게 공개되면서 부터다. 고결하게 시를 위해 일생을 바친 그는 자신의 손으로 계획 하에 제자를 죽였다는 것과 열일곱의 소녀를 사랑했다는 파격적인 고백을 시작한다. 그의 고백에 술렁이기엔 아직 이르다. 나는 앞으로 이어질 책의 분량에 괜스레 설레었으니.

이적요는 시인다운 삶을 살았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절제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에 자신의 영혼과 일생을 바쳤다. 세상은 그를 문인의 표본처럼 포장했지만 그는 순수하게 문학에 대한 열정만 욕심 내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음을 노트를 통해 알 수 있다.

은교를 소녀가 아닌 여자로 탐닉하면서 욕망을 표출하는 그를 보며 문득 그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한 번도 휩싸여 본적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설레고, 바라보면서 느낄 수 있는 삶 최고의 축복인 '사랑'이라는 감정을 글을 쓰는 삶 외에는 다른 것에 의미를 두지 못했던 젊었던 그는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런 감정이 은교라는 젊고 푸른 소녀를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화산처럼 큰 분화구를 만들고 폭발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 그래서 평범한 소녀를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어쩌면 그가 탐닉했던 것은 그 소녀의 모습이 아니라 '젊음'의 본연적인 아름다움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어린 소녀와 동행한 카페에서 맛있는 저녁과 함께 근사한 음악을 듣고 싶었던 그는,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며 자신을 외면했던 젊음을 향해 독설을 내뱉는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청춘은 주름져갈텐데 그런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젊음들에게 그는 적나라하게 적대감을 표출한다. 그리고 젊은 은교로 인해 시인으로 살아온 그의 칠십년이 통째로 흔들린다.

적대감은 자신이 마음에 담은 은교를 탐하는 제자 서지우에게로 향하고 질투를 넘어서 독기를 향해 서로의 가슴에 파고든다.

 

서지우는 시인보다 젊었고 문학을 탐했고 시인의 글을 동경했다.

그에 대한 지나친 존경은 그의 눈빛과 손길이 닿는 곳에까지 욕심을 불러일으켰다.

서지우는 이적요의 제자이면서 집사였고, 동행인이었고 문학이라는 세계 속에서 이적요라는 시인의 또 다른 이름으로 살아간다. 파격적인 소재로 엮인 시인의 글을 자신의 이름을 따 책으로 엮고, 시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말들을 주어 모아 인터뷰를 하고 그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 속에서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스승에 대한 겉잡을 수 없는 동경은 결국엔 그를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

 

시인의 노트와 서지우의 일기장.

뭔가 커다란 비밀만을 담고 있는 듯한 그 공간 안에서 나는 뜻밖의 여러 공감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문학에 대한 열정과 동경을 가지고 자신의 젊음 상당수를 할애했던 서지우에 대해서도, 평생 고결한 글쓰기만을 지향했던 시인 이적요에 대해서도.

하지만 나는 책의 끝까지 은교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다지 밝지도, 젊음이 주는 생기도, 삶에 대한 의지도 막연한 열일곱의 흔들리는 소녀의 모습은 끝내 싫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시인의 노트와 서지우의 일기장이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으면 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계획이든 간에 죽음으로 내몰린 그들의 마지막이 수많은 이들의 입을 통해 짓밟히는 것은 안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소설 속 은교가 그런 마지막을 만들어주었지만.

은교는 시인의 노트와 서지우의 일기장과 마주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불에 타는 수많은 진실과 하지 전하지 못했던 가슴 속 울림을 보면서 그녀가 흘린 눈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누군가에게 그런 의미일 수 있다는 것을 스무살이은교는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일까?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젊은 은교는 깨닫게 된 것일까?

이름처럼 고요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은 시인과 애증의 관계에 놓여있었지만 끝까지 스승에 대한 동경의 끈을 놓지 않았던 서지우의 삶. 그리고 은교.

 

안타까웠지만 아름다웠던 이야기 <은교>.

덕분에 젊음의 호기가 더이상 큰 호사가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가질 수 있는 사랑의 고귀한 울림을 알게

되었던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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