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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엔 까미노 - 산티아고로 가는 아홉 갈래 길
장 이브 그레그와르 지음, 이재형 옮김 / 소동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처음 이 책과 마주 했을 때, 단순히 산티아고에 대한 여행만을 생각했었다.
수없이 늘어선 길가의 이름 모를 나무들과 지나치는 도시 곳곳에 자리한 오래되고 거대한 건물들만을.
하지만 책은 단순 여행기라기 보다, '순례길', '순례자'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내고 있다.
산티아고로 가는 아홉갈래 길 속에 숨어있는 도시의 역사와 이야기, 풍경, 매력 등이 책 속 곳곳에 묻어 난다. 도시의 화려한 장관을 보기 위해 찾았던 여느 여행보다도 순례길로 통하는 아홉 길들은 걸으면서 스스로를 단련시킨다. 아무런 이유 없이 단순히 육체나 영혼 상처 치유의 희망만을 품고 주저없이 여행을 시작한 사람들의 모습 또한 이 책에서 볼 수 있었던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왔다.
산티아고 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네 삶과 가까운 제주도 올레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은 올해 내가 세운 목표 중 하나였다. 흙을 밟으면서 그 섭리에 동화되어 사는 며칠은 아무런 욕심도, 도시 속에서 끊임 없이 흔들리던 나도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내가 세운 계획 은 그냥 걷기를 통한 심신수양 정도의 목표가 있었던 듯 싶다. 이 책과 마주하는 내내 올레길에 대한 결심이 더 간절해졌다.
순례길 걷기는 개인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처럼 아무런 종교도 갖고 있지 않은 이들은 웬지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책 속에서 순례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도 나와 같은 이들이 많은 수를 차지했다.
물론 종교적이며 영적인 탐색을 위해 스스로를 길 위에 올려놓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와 같이 드넓은 자연과 동화되면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찾기 위해 떠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P.38
순례길 걷기는, 우리가 시공간과 맺고 있는 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우리의 감각과 세계관을 일거에 뒤바꿔놓고 맙니다. 그것은 삶의 새로운 의미, 새로운 정신성의 탐구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책의 저자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10년 동안 돌아다니고 나서야 자신이 아주 어릴 때부터 이런 여행을 꿈꾸어 왔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걷기는 스스로를 다독거리기에 충분했다고.
긴 순례는 결국 자신을 위한 여행이자 고독한 여행이기도 하다고.
오랜 시간의 침묵은 자신을 돌이켜보는 능력을 키우기에 모자람이 없었다고 말이다.
내가 책을 읽으며 빠졌던 길은 은의 길과 피니스테레 곶 순례길이었다.
지리적 방향으로나 역사로 보나 모든 순례길 중에서 가장 특이하다고 손꼽히는 '은의 길'은 화려했던 옛 도시나 풍경들이 곳곳에 드리워진 곳이라고 한다. 또 한 곳은 피니스테레 곶인데 콜럼버스가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할 때까지만 해도 유럽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끝으로 기억된 곳이다.
이 두 갈래 길만 해도 걷는데 48일 정도가 소요된다고 하니 이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엄청난 체력과 용기가 뒷받침 되어야 할 것 같다.
책을 통해서 가보지 못한 도시의 골목과 사이사이에 펼쳐진 역사를 만났다.
쉬어갈 수 있는 카페와 식당은 물론 이름 모를 포도밭을 사진으로 감상하기도 하고 오랜 시간과 함께 버텨온 여러 수도원의 모습과도 조우했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웬지 성스러워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P.78
순례길에서는 생산성 같은 걸 따지지 않으므로 경쟁의식 따위는 버리는 게 좋습니다. 진짜 어려움은 정신에서 생기는데, 자기 집 문을 닫고 첫 걸음을 성큼 내 딛는 순간 최고조에 달한답니다.
책 속 지은이의 말처럼 경쟁의식을 뒤로 하면 성찰과 평가, 의미추구가 하루를 채우고 내일을 준비하게 만들어 줄 것만 같았다.
순례길로 첫 발을 내딛는 여행자의 마음처럼 오늘 하루를 산다면 보다 의미있는 시간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황량한 사막을 홀로 걸을 때의 적막을 이겨내고 진정한 행복을 순례길 걷기를 통해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웬지 부럽다. 당장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고만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