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몸 1 - 몸의 기억과 마주하는 여성들 말하는 몸 1
박선영.유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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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식을 왜 하느냐고 누군가 제게 묻는다면, ‘씹으면서 괴로워진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씹는 동안에 괴로워진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한 가지 생각만 하지는 않아요. 한 가지 생각과 ‘동시에‘ 다른 생각을 한단 말이에요. 예를 들면, 우리 엄마가 골을 굉장히 좋아해요. 그런데 엄마가 아프다거나 해서 귤을 먹을 수가 없는 상황을 상상해보면요, 귤을 먹을 때는 귤 맛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엄마가 귤 좋아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괴로워지죠. ‘귤 맛있다‘와 동시에 ‘나는 귤을 먹는데, 귤을 좋아하는 우리 엄마는 귤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고 그 사실 때문에 슬퍼져요. 그런 현상이 제게 발생한 거예요.
저는 원래 구박덩어리였어요. 늘 가려 먹고 깨작거리면서 먹었어요. 삐쩍 마르고 병약한, 그런 이미지들이 초등학교 때 저를 따라다녔어요. 한번은 제가 김치찌개를 먹는데 김치 밑에 돼지고기가 있었어요. 검사를 마쳤다는 보라색 도장이 찍힌 돼지가 김치 밑에 있었어요. 그때 살덩어리가 확대되면서 마치 살아 있는 돼지의 등판처럼 보인 거죠. 그뒤로 고기를 씹으면 괴로워졌죠. 또 한번은 누군가 제게 닭 잡는 걸 보여줬어요. 푸드덕거리던 닭의 목을 딱 부러뜨렸는데 바로 죽더라고요. 그뒤로는 닭을 먹지 못한 것 같아요. 닭고기를 보면 그 생각이 나서 마음이 불편해졌어요. 고기가 살아 있던 생명으로 보이는 거죠. 점점 더 씹다가 불편해졌다. 씹다가 괴로워졌다, 씹다가 슬 - P25

퍼졌다……
살다보면 떳떳하지 않아도, 내 마음이 좀 불편해져도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게 되는 일들이 있어요. 괴롭죠. 저는 어딘가에서 그 무게를 줄이고 싶었어요. 에잇! 나 안 할래. 그런 게 필요했어요. 저는 먹는 것에서 그랬어요. 마음이 불편해지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 마음이 편해지는 어떤 장소를 찾은 것이죠. 그게 형태로는 편식이었죠. 요즘처럼 ‘비건‘이라는 말로 확장될 줄 모르고 언제부터인가 그저 내 마음이 편한 식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 P26

채식하는 사람들은 "너 그러면 채소도 먹지 말지. 채소는 안 아픈가"라는 말을 듣는다고 해요. 그것도 중요한 질문이에요. 식물은 뭘 느낄까. 알면 너무 좋겠어요. 그런데 더 중요한 건, 무엇을 바꾸지 않기 위한 근거로 어떤 말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어떤 말을 할 때 그것이 변화를 막는 도구로 이용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너 고기 안 먹어? 나도 안 먹어볼까" "사실 우리 고기 좀 많이 먹지?" 이렇게 말한다는 건 대단히 훌륭한 일이에요." - P27

엄청 홀가분한 경험이었어요. 누드모델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알몸을 보게 됐어요. 몸이라는 게 각각 다른 느낌과 에너지와 힘을 갖고 있더라고요. 모두가 조금씩 초라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예쁘다.
고 이야기되는 몸이나 뚱뚱한 몸이나 깡마른 몸이나 문신이 있는 몸이나, 체형이 어떻든 몸이라는 건 다 각각 다르게 예쁘고 각각 다르게 초라하다는 걸 느꼈던 것 같아요. 몸에 대해 생각을 너무너무 많이 하면서 자라다가 누드모델이 되면서 생각이 없어졌어요. 무던해진 느낌이 들었고 그 경험이 제겐 소중했습니다. - P52

다른 것에 대한 허기도 많죠. 넉넉한 생활비와 전세자금 모으기에 대한 욕망이 많아서 열심히 일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면에서 욕망덩어리라고 생각해요. 인스타그램도 많이 하고, 운동도 많이 하고, 연애도 왕성하게 해요. 여러 가지 욕망을 따라가다가 어쩔 수 없이 부지런히 살게 된 케이스인 것 같아요. 그 욕망이 계속될 것 같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건강하고 싶은 사람이고요. 크게 상처받지 않는 몸과 부서지지 않는 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 P56

제모 시술은 아직 안 해봤어요. 의외로 많은 분들이 겨드랑이털 제모 시술을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해본 적이 없어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데요. 감당하기 힘들지만 이 수치심을 내가 그대로 안고 가는 게 미완성인 나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처럼 느껴져서요. 이상한 반항심인 것 같아요.
(...)
극복은 못 했는데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털이 부끄럽다‘는 마음 - P63

과 ‘이걸 왜 부끄러워해야 하지‘라는 마음 중에 그래도 두번째 마음이 몸안에서 힘을 받고 있어요. 부끄럽지만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극복할 필요도 없다, 이게 지금 제 안에서 응원받고 있는 문장입니다. 적어도 저의 페미니즘은 털에서 시작됐거든요. - P64

폴댄스는 대상화되기 쉬운 운동이에요. 그런데 폴댄스를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대상화에서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많이 해요. 전에는 보들보들하고 가느다란 몸이 예쁘다고 생각했다가 이제는 피부도 하는 일이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피부 표면으로 폴에서 버티고 내 몸의 모든 부위가 폴 위에서 기능하기 때문에 대상화에서 굉장히 자유로워져요. - P69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해, 이런 말들 많이 하죠. 어떻게 보면 공허하잖아요. 저는 항상 저를 하체비만이라고 생각했어요. 친구들끼리 농담으로 "나는 하비야" 라는 말을 달고 살았는데, 저는 허벅 - P70

지가 굵은 편이기 때문에 허벅지로 버티는 자세를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빨리 배웠어요. 실제로 온몸이 하는 일이 있고 기능이 있으니까 마음에서 우러나서 믿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허벅지도 하는 일이 있는데 누가 제게 "네 허벅지 못생겼어"라고 하면 ‘넌 이게 어떤 일을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라는 생각이 들 것 같거든요. 편해지더라고요.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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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 출구 1
허새로미 지음 / 봄알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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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안다. 딸이 겪는 가족은 아들이 겪는 가족과는 다르다. 마치 같은 얼굴의 왼쪽과 오른쪽이 미묘하게 다른 것처럼, 그 미묘한 차이를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소름이 끼치는 것처럼. 그렇게 얻은 기억들은 극복하기 힘든 결절이 된다. 마땅한 내 것을 달라고 말하면서도 송구해하는 비굴한 인간이 되거나 파워 게임에 귀신같이 능한 학대자가 되기 딱 좋은 토양이다. 그러 - P15

나 나는 나의 결핍이 곧 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의 피해를, 나의 슬픔을, 나의 역경을 고발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한 발짝만 내디디면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았던 그때, 도박 빚을 진 것도 아니고 사람을 때린 적도 없건만 내 옷차림이나 성적 때문에 내 인생이 망할 것이라는 주문을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매일같이 듣던 그때, 바로 그때 지금 내가 아는 것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덜 죽고 싶었을까.
가족이 하는 말을 곧이듣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를 겁주는 사람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혼자서도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오랜 세월을 불안에 떨지 않고 보낼 수 있었을까. 그 얘기를 딸들에게 하고 싶다. 원가족을 벗어나 김장철에 김치 얻을 데가 없고 명절에 전화할 데가 없어도 큰일 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종류의 외로움은 골백번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나에게 책임이 있는 이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라. 책임의 이행을 요구하라. 사랑을 구걸하지 말라. 사랑을 인질로 잡은 어떤 관계도 나를 살리는 관계가 될 수는 없다. 그 밖에도 세상이 있다고, 훨씬 넓고 깊고 무섭 - P16

물론 세상에는 조건 없는 사랑이 존재한다. 이만큼의 세월 동안 얼마큼을 내가 주었으니 이제부터는 돌려 - P28

받아야 한다는, 그게 아니라면 감사하고 황송해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그런 종류의 조건부 사랑이 아니라, 네가 거기 있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내가 여기 있는 것을 확인한다는 유의 사랑이 아니라 그저 사랑하는 것이 목적인 사랑도 있다. 그러나 조건 없는 사랑은 조건이 없기 때문에 혈연을 조건으로 삼지 않는다. 너는 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거이므로 무언가를 증명함으로써 살아 있는 값을 하라는 치졸한 욕망을 투사하는 것을 조건 없는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조건 없는 사랑은 사실 혈연관계에 제한되는 사랑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랑이다. 우리가 인생의 가장 험난한 계곡에서 난데없이 신의 자비를 갈구하듯이, 갑자기 맥락 없이 신이 우리를 사랑하기를 바라듯이, 조건 없는 사랑은 상대가 나와 얼마나 DNA를 공유했나를 따지는 것과는 많이 다른 무언가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자기애와 겹칠 수밖에 없다. 혈육에 대한 애정을 다른 거룩한 것으로 포장해서는 안된다. 그 터무니없는 기대에 다치는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 P29

똑같이 아침을 못 먹고 출근하는데 누나는 등짝을 맞으며 빨리 시집가라는 소리를 듣고 연달아 현관을 나서는 아들은 빈속으로 출근하는 게 안쓰러워 죽겠다는 식의 어리둥절한 대비가 아무렇지도 않게 비쳐진다. 엄마를 끔찍이 위하며 그를 위해 목에 핏대 올리며 맞서 싸워주는 딸 캐릭터 역시 너무도 많다. 대단한 불균형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가 현실을 반영하는지 아니면 견인하는지 몰라도 ‘캐주얼하게 학대받는‘ 그룹이 널리 딸 집단으로 묘사되는 게으른 사회에서 실제 딸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염려를 빙자하여 가하는 언어 학대를 일상화하는 것은 사실 한국의 유구한 전통이기도 하다. - P31

아들의 집밥에 대한 그리움이란 얼마나 단단하고 평온한 것일지 상상해본다. 식탁이나 저녁상의 자기 자리를, 자기 발언권을, 혹은 자기의 음식에 대한 권리를 기각당하거나 미리 양보해야 한다는 염려를 조금도 하지 않고, 모자란 반찬이 있거나 누군가 음식을 흘렸을 때에 식사하다 말고 일어나야 한다는 지각이 전혀 없이, 아무 말이나 해도 혹은 아무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음식에 집중할 수 있는 자가 누릴 온전한 감각. 그런 상태에서 누릴 맛과 냄새 그리고 위장이 채워지는 행복감. 그는 자기 바로 옆에 앉은 누이와는 딴판으로 다른 식사를 매일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상의 아들들이 제 손으로 마늘 한 번 까보지 않고 집밥 집 - P34

밥 노래를 부르는 데엔 이유가 있다. 상상력을 동원하니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 옆에서 언제나 할 일이 생기면 재빨리 일어나야 했던, 혹은 신경 안 쓰는 척 앉아서 버텨보지만 뒷덜미가 따가웠던 딸들에게 혼자 먹는 밥이 왜 그렇게 편안했는지도 이해할 일이다. 남자들이 혼자 먹는 밥에 난리 법석을 떨며 스스로를 가여워하고 집밥이 사람 살린다며 가당찮은 공치사를 해댈 때 한 번도 공감한 적이 없다. 그들에게 집밥은 그저 한 끼 식사가 아니고 커뮤니티가 고추 달린 존재에게 주는 승인을 재차 수확해가는 자리인 것이다. - P35

지금에 와서는 누가 "왜 혼자 가르치기 시작했냐"고 물으면 "나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고 대답하지만 당시에 나를 정말 그만두게 만든 마지막 버튼은 모욕감과 좌절과 배신감이었다. - P41

내가 원가족과 항상 다투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나의 모부는 나에게 먹을 것과 쉴 곳을 제공했으며 성인이 되기까지 자신들의 방식으로 나를 보호했다. 여름이면 가족끼리 차에 올라 며칠이고 사람 없는 깊숙한 계곡을 찾아 헤맸다. 아빠가 내비게이션도 없이 전국 지도를 보고 길을 잡는 덜컹이는 차를 타고 밤새 달리다가 경치가 좋은 곳이면 어디고 멈춰서 텐트를 치고 얼음장처럼 찬 물에 수박을 담갔던 그런 소중한 기억도 많이 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엄마가 예절 수업 선생님으로 학교에 방문하는 날은 "너네 엄마 너무 예쁘고 젊다"며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엄마에게 떨떠름하게 아는 척 한 번 하는 것이 참 뿌듯한 기억이었다. 나는 죽거 - P55

나 다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대학 교육도 받았다. 겨우겨우 사회 구성원으로 기능하는 방법도 뒤늦게나마 찾아냈다. 여기에 나의 가족이 공헌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공동체로서 성공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것이 말하지 않고도 전달되어야 했고 너무 많은 감정이 그저 한 방향으로만 흘렀다. 로맨스 혹은 사랑으로 시작한 것이 가족만큼 무거운 것이 되어선 안 된다는 비명을 엄마는 평생 질렀다. 아빠는 그 비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로맨스에 납치당해 삶을 걸머진 여자가 지르는 크고 작은 비명을,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가 당연히 하는 잔소리나 푸념 같은 것이라고 온 세상이 이해했다. 엄마와 아빠 모두 왜 이렇게까지 삶이 무거운지, 미래가 두려운지, 실체도 없는 불특정인에게서 꾸중을 듣거나 경멸을 당할 거라는 환청을 들으며 사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다 그렇게 사니까‘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세월을 보내고 나서는 다음 세대에게도 ‘다 그렇게 산다‘는 주문을 반복했다. 정확한 대상도 없는데 속도는 너무도 빠른 분노와 더께가 얹힌 억울이 집안 공기에 항상 흘렀다. 그걸 배운 나도 주변에 화풀이를 했다. - P56

언젠가는 당하지 않을 만큼 강해져야지, 보호자가 자원을 통제해서 나를 학대하는 방법을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해야지, 내 돈으로 먹고 노는 인간들을 벌 줘야지, 나에게 속죄하게 해야지, 내 몸을 상하게 해서 나온 자식들이 나에게 보상하게 만들어야지, 내 몸을 상하게 해서 나온 내 자식의 돈을 쓰는 여자에게도 벌을 줘야지, 돈을 받지 못한다면 두려움과 존경을 얻어내야지………. 누구도 이런 것들을 견디면서 제정신으로 오래 생존하지는 못한다. 정말 많은 ‘정상가족‘이 서로에게 분노하고 복수하며 매일을 살아간다. 사랑은 분명 어디에나 있고 아주 강력하지만, 여자를 조금씩 돌게 만들면서 진군하는 가족의 삶은 더 이상 사랑만으로 지탱할 수 없게 된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캐낸, 놀라운 사랑의 힘에 대한 맹신은 대체 무엇인가. 에너지 총량이 일정하다는 준엄한 물리 세계에서도, 물이 증발하면 대기 중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 현대 세계에서도 여자의 사랑과 헌신은 당연히 자연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여자는 언젠가는 지친다. 혹은 곧잘 학대와 가스라이팅의 영역으로 납치당한다. 일상은 로맨스가 아니다. 대화는 프리젠테이션이 아니다. 삶은, 정말이지 드라마가 아니다. 끝나지 않는 매일의 삶 - P57

안에서 유한한 것의 무한한 공급을 책임지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여자가 한때 사랑으로 혹은 노력으로 기운차게 구축해 기능시킨 것은 그게 무엇이든 영구히 지속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가족의 불가능성이다. - P58

딸들에게는 보통 소속이 없다. 가끔 주어지는 따뜻한 소속감은 보통 조건부다. 주변의 눈치를 수시로 살피며 뭔가를 관리하고 유지하고 보수하면서 내 자리를 벌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꾸준히 수신한다. 여자들과 식사하러 갔을 때 번개같이 내 앞에 물이 그득한 잔과 반듯하게 줄을 맞춘 수저가 놓여 있는 일이 잦은 것도 이 때문이라 믿는다. 딸들은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스스로를 부정 및 교정당하며 살았기 때문에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환경에 편안하게 놓여본 경험이 드물다. 그래서 언젠가 원가정을 떠나 ‘내 집‘을 찾아야 한다고 어렴풋이 생각하지만 인류 역사의 오랜동안 갈 곳 없는 딸들이 달아날 곳은 오로지 또 다른 가 - P76

부장이 있는 가정이었다. 아버지가 남편에게로 넘겨주는 여자의 손. 남자들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는 여자들은 대체로 마녀가 되거나 미친 여자가 되었다. 거의 반드시 가난해지고 사회적 안전망도 희박한 처지가 되었다. - P77

이 가족들로부터 떠나온 딸들이 해야 할 일은 이해하고 용서하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절대 잊지 않고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다. 죽는 날까지 내가 받았어야 할 더 나은 대우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다. 나와 똑같이 느낄 누군가를 절대 만들지 않는 일이다.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너무 많은 남자가 사랑의 이름 아래, 가족의 비호 아래 두루뭉술 용서받고 도덕적 모호함 속에 몽롱하게 행복해하다가 갔다. 그 행복을 질투해야 한다. 이를 갈고 원한을 품어야 한다. 부술 생각으로 덤벼야 한다. 혹은 그런 부조리로부터 실낱만큼의 승인도 구하지 말고 떠나야 한다. 딸들은 사회적 승인이라는 면에서 아직도 수천 년간 공고했던 림보에 - P82

갇혀 있다. 우리는 누굴 용서할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의 승인도 용서도 바라지 않는다. 기대하는 상대도 없는데 용서를 베푸는 것부터가 자기 기만이다. 딸들은 누구도 용서할 필요가 없다. - P83

복수하기 위해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계속 접촉하는 것이 서로에게 해롭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것이다. - P85

용서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저주와 앙심을 품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최소한의 자기방어에 가깝다. - P88

다른 관대하고 훌륭한 딸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아도 된다.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용서하지 않고 살아지는 삶도 숭고한 것이다. 용서하지 않고 잊어버리지 않아서 외로워지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존엄은 혼자 죽기 위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합당한 존중을 주지 않는, 언제나 꿍한 채 내가 자신들에게 무언가를 빚지고 있다고 믿는 가까운 이들에게 투항하느니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편이 낫다. 남이 나를 한 대 치는 것은 용서해도 내가 남을 한 대 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딸들의 불균형한 정신은 세상의 온갖 가스라이팅에 취약한 토대다. 나는 남의 정강이를 걷어차지 않을 것이며 그러므로 나의 정강이를 걷어찬 인간도 용서하거나 이해하지 않는다. 거기부터 출발해야 한다. - P89

아무도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나를 세상에 내놓은 사람들이라도 그렇다. - P90

나는 최근까지 이 글을 쓰지 못했다. 집을 떠나 가족 혹은 친척 중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은 지 한 달이 지나고 세 달이 지나고 일 년이 흐르고 마침내 삼 년이 되기까지 나는 언젠가 아무렇지 않은 듯 집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아마 용서하는 법에 대해 쓰게 될 거라고, 많은 이가 그렇듯 이해와 존중과 그리고 마침내 용서와 합일로 가는 위대하고도 사적인 여정에 대해 쓰게 되리라 믿었다. 그래서 그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느라 혼자인 삶에 대해 함부로 쓰기 시작할 수 없었다. 언젠가 상담을 받고 책을 읽고 먼 나라의 해변에 앉아 모든 진실을 깨달은 후에 편안해지리라, 많은 영화에서 그렇듯 홀가분하게 응어리를 내려놓고 ‘건강한거리‘를 유지하는 가족이 되리라고 상상했다. 엄마와 - P90

싸우고 남동생에게 쌍욕을 퍼붓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내가 어렴풋이 환상처럼 그렸던 화해와 이해와 용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아는 것은 가족을 용서하고 가족에게 이해받고 딸로서 어떤 승인을 얻으려는 노력을 온전히 포기한 후에 내가 잠을 잘 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상상해온 고급하고 성스러운 용서와 사랑 같은 장면은 나에게 영영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혼자서 그들을 이해하려 분투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평화를 얻었다. - P91

여자가 망하지 않고 그냥 사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해야 한다. 남자 - P113

와 서사를 섞지 않아도, 그리고 또 눈부시게 성공하지 않더라도 여자가 안 망하고 삼시 세끼 잘 먹고 편안하게 따뜻하게 잘 자고 쫓기지 않고 친구와 잘 지내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여자 안 망하는 이야기를 앞으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해야 한다. - P114

딸에게 끊임없는 쓸모의 증명을 요구하는 곳을 떠나온 여자들은 항상 빼어난 인간일 필요가 없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줄 것‘을 들고 나타나는 빼어난 여자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그런 이들끼리 서로에게 무엇도 증명할 필요 없이 맺을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다. - P138

지긋지긋한 이사가 끝나고 내가 쟁취한 테라스에서 하늘을 보게 되었을 때 생각했다. 마동석 백 명이 와도 우리를 구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를 구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들여다보고 함께 분노하고 비상 연락망에 전화번호를 빌려주고 네게 그런 해코지가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하고 보살피면서 서로의 바위가 될 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 누가 우리에게 어떤 좌절을, 무시를, 혼란을 일으키고 또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기각하고 삭제하려 했는지 기억하고 기록할 것이다. 그들을 현장에서 잡아 불러낼 것이다. 서로에게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골목 끝에 혼자 살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미친 여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여자에게 무엇 때문에 분노했냐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옆집 여자가 될 것이다. 젊어서는 방긋방긋 웃고 나이 들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겨우 돌아버리지는 않은 - P152

여자라며 생존을 허락받는 세상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증인이 되어줄 것이다. - P153

나를 다시 살고 싶게 만든 것은 여자들이다. 젊은 나이에 억대 연봉을 받는다며, 사업체를 차렸다며, 외제차를 여럿 타봤다며 이 모든 게 정말 대단하고 칭송받을 일이니 너희도 나에 대해 잘 알아두라며 이름이며 얼굴을 드러내고 떠벌리는 또래 남자들과는 달리 정말 빼어난 능력을 갖고도 주변의 시기를 받을까 봐, 누가 해칠까 봐 조용히 사는 똑똑한 여자들이 있었다. 남의 외모나 나이를 헐뜯지 않고서는 농담 비슷한 것도 지어낼 수 없는 남자들이 지긋지긋했을 때, 저들이 정말로 인간의 평균을 대표하는가 하고 좌절했을 때 여자들이 있었다. 익명 뒤에서 진짜 알짜배기 충고를 해주는 능력자들이, 떠벌리지 않고 후원 계좌에 조용히 입금을 쏴 - P184

주는 ‘히어로‘들이 다 여자였다. 십오 년 전에는 떠들썩하게 제가 세상을 바꿀 기술을 개발해냈다고 하다가 이제는 자기들이 만들어낸 세상이 사람들을 외롭게 한다고 비장하게 평가를 놓으며 또 세상을 바꾸자고 하는 실리콘밸리의 남자 백만장자들에 신물이 날 때, 억대 연봉을 포기하고 직함을 버리면서 자기가 했던 일을 고백하고 회사가 하는 일을 고발하며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 여성 테크 거인의 기사를 읽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천천히 손을 바닥에 짚고 일어났다. 고개 돌려 어깨 너머를 힐끗 볼 생각도 못 할 만큼 무섭다가, 길을 건너다가도 ‘그럼 죽지 뭐‘ 하다가, 아주 천천히 내 호흡이 돌아왔다. - P185

원가정의 36평 집에서 신혼의 28평 아파트로 옮긴, 그런 인생을 사는 평행우주의 내가 있다면 지금의 나를 보고 인생 망했다고 슬퍼했겠지만, 지금의 나에게 - P186

는 매트리스에서 침대로의 변화가 인생의 분수령이다.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마을을 짓겠다는, 지금 여기서부터 진짜 집을 만들어보겠다는 결심이다. - P187

아무리 일상이 평온하고 날씨가 좋고 벚꽃이 떨어지고 하는 날이라도 가방 속에 맥주병을 품고 걸었다. 가부장이나 가부장 트랙의 로맨틱한 관계가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되레 그 무능력을 숨기기 위해 나를 제물 삼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포식자가 아무리 잔인했어도 그들이 "그런데……" 하고 돌아서서 나를 손가락질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울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술을 먹었기 때문에, 내가 씨발놈아 좆같은 새끼야 큰 소리로 욕하는 여자이기 때문에, 분노하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해서 내가 살아남았다고 확신한다. - P192

갈등이 생길 때마다 나는 사정을 정확히 설명하고 분명히 사과하고 무엇보다 상대에게 충분한 거리를 제공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나를 빨리 용서하라고 닥달하지 않고 혹은 어떻게 하면 좀 과장을 보태 전부 내 책임은 아닌 것처럼 만들까, 어떻게 하면 불쌍하게 보일 수 있을까 하는 비열한 트릭을 쓰지 않고 오직 정직하게 나의 과오를 마주하기로, 반대의 경우라면 화가 났을 때 바로 반응하지 않고 최소 하루 침묵의 시간을 갖기로. - P197

다 늦어 가족을 떠났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제때를 넘긴 후였다. 분노를 이해받거나, 상으로 주어지지 않는 종류의 순수한 친밀함을 제공받거나, 노력이나 성과에 대한 승인을 끝내 쟁취하지 못한 채로 사춘기를 지나 신체의 노화가 찾아오는 시점까지 그 갈구를 질질 끌었고, 내가 영영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원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고 그제서야, 귀엽지도 안쓰럽지도 않은 나이에 집을 나왔다. 모두와 연락을 끊었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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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모르겠고 내 집은 있습니다 - 지속 가능한 1인용 삶을 위한 인생 레시피
김민정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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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페미니즘 세계관‘ 안에서만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 적이 있었다. 친구들과의 대화가 소모적인 논쟁으로 번지는 게 더는 싫었다. 그래서 여성 이슈를 놓고 번번이 의견이 달랐던 선배와도 결코 친해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나의 ‘인간관계 롤 모델‘이자 절친이 된 선배를 보면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반성하게 된다. Y 선배는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나처럼 선을 긋지 않았기에 그런 인간관계가 가능했던 것이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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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 병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
리단 지음, 하주원 감수 / 반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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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병에 익숙해지는 것이지, 병을 좋아할 수 없다. 익숙해진 병과 앞날을 조금 함께 걸어볼 뿐이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칠 수 없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병이 마치 배우자라도 된 양 여겨볼 뿐이나, 병의 배신에 여상하게 굴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병과 대치하든 공존하는 함께 존재하면서, 다른 영역에 발을 디딜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영역이란 언제나 행복하고, 즐겁고, 재미난 곳이 아니며 모멸을 무릅쓰고, 수치감을 느끼며, 망칠 것을 재차 우려하면서 조심스럽게 때로는 과감하게 굴어야 하는 곳, 바로 사회다.
우리가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 까닭은 많이 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사회의 일원이 되면서 정신병을 얻는다. 게다가 정신병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을 때 더욱 심화된다. 이게 무슨 역설이란 말인가.
정신병은 당신이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과 거리가 멀고 관계 설정이 미미하고 동떨어져 있을 때 더욱 가중되어 당신의 ‘소중한‘ 짐이 된다. 그럴 때 당신은 자신의 유일한 끈과 영향력인 정신병적 상황과 상태를 붙잡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학교를 그만두거나, 인간관계가 파탄 나거나,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했을 때 당신을 제일 먼저 맞아주는 것은 병이다. 우호적으로? 우호적으로. - P369

하지만 밤은 가고 새벽이 오며, 몇 달 몇 해를 누워서 자신의 실책에 대해 생각만을 거듭해나갈 수는 없다. 결국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순간이 온다. 다만 그 순간은 사람마다 달라 어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툴툴 털어낼 수 있지만 어떤 이는(예를 들면 나의 경우 사직의 여파에서 일어나는 데에 3개월이 걸렸다.) 몇 달, 아니 몇 해가 걸릴 수 있다. 새로운 시작의 순간 전까지, 우리는 병의 얼굴을 쓰고 휴식하고 있는, 대기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이유도 제각각으로,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면 충분히 지원에 기대서쉬고 있어도 괜찮지만, 돈을 벌어야 한다면 그 사람은 실패 후 다시 사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에 뛰어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습관을 만들고, 건강한 생활을 지속하고,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수치의 기능을 하고, 자신의 ‘나쁜 사이클‘에 뛰어들지 않아야 하는 이들,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사회화를 선택하는 이들은 종종 자신이 수행해야 하는 이 모든 것의 무의미함을 느낀다.
결국 우리의 정신병은 이 무의미의 강을 건너 사회의 영역으로‘왜’ 돌아가야 하는지 탐구하는 데로 수렴한다. 여기서 정확한 대답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신을 설득하는 답변은 얻어야만 앞으로 걸어갈 수 있다.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음‘의 상태는 소위 스카우트 배지처럼 한 번 획득한다고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 P370

어느 날 갑자기, 또다시 어떠한 요인으로 추락하고, 퇴보하고 탈락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상기하면 노력은 발동을 멈추고, 행동은 머뭇거리게 된다. 어차피 또 패배해서, 또 자기의 방(마지막 보루)으로 후퇴해 또다시 사회의 재진입을 꾀해야 하는데, 새로 시작되는 병증은 더 견딜 수 없을 것이고, 무엇이 새로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우리는 불가능한 고통에 대해서는 시지푸스가 되어 끊임없이 몸을 던져볼 수 있다. 계속해서 꼭대기로 끙끙거리며 돌을 굴릴 수 있다. 그러나 불확실함에 대해서는 수를 쓰기 어렵다. 어쩌면 영원히 자기 방에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기만 하는 생을 살게 할 것이라는 전망은 우리를 좌절스럽게 한다.
(...)
불확실성에 맞서 정신병자를 지지하는 것은 바로 일관된, 계속되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들이 바로 병식, 약, 돈, 그리고 사람이다. - P371

정신병자인 우리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자책하거나, 인생이 손쓸 수 없이 망가졌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형용할 수 없는 허무함에 삶을 끝내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병과 있는 것만으로도 품이 든다. 일상을 사수하고, 자신을 돌보는 것이 언제나 도전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가장 작은 행동,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나날이 우리를 지킨다. 우리는 누가 이기고 지는 승부를 하는 게 아니다. 오늘 건실한 하루를 보냈다고 내일도 그러라는 보장은 없다. 정신병의 나라에서 우리는 몇 번이고 새로 시작하고, 몇 번이고 버리고 떠나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도망쳐도 좋고, 비겁해져도 좋다. 다만 충분히 말하고, 기록하고, 관찰하자. - P390

우리가 그리는 지도가 완벽할 필요는 없다. 병이 기상천외한 행보를 보이며 우리를 앞지를 수도 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안에서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정신병의 나라에서.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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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 병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
리단 지음, 하주원 감수 / 반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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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굴처럼 여러 곳으로 사방팔방 이어져 있다는 말이었다. 돈이 있는 그의 눈은 예리하게 매번 새로운 빈 굴을 찾아냈고 그러면 그는 그것을 채우러 카드를 들고 백방으로 돌아다녔다. - P218

정신질환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배분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난은 병이 파고드는 취약한 부분들 중 하나다.
오랫동안 가난에 시달려온 이들을 관찰하면 그들의 위축, 수동성 등을 포착할 수 있다. 그들은 언제나 최악을 가정하고 차악일 때 안도감을 느낀다. 최선을 목적으로 놓고 차선을 이루려 노력하며 성취감을 얻는 것은 그들의 방식이 아니다. 그들이 절망하는 것은 현재 어떠한 곤경에 처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든 빌리는 무엇을 하든 삶이 나아질 일이 없다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벼랑같은 가난에 내몰린 이들이 이상사고나 사고장애를 겪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바닥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우울증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생은 부족하고 불안하며 절망적인 게 당연하므로, 야망도 이상 - P221

도 먼 이야기로 여겨 반응하지 않거나 그런 것들을 자꾸 환기시키려는 자에게 적대감을 표현한다. 이들의 상태는 우울증의 병적인 상태와 흡사한 양상을 보인다. 자연히 가난에 상시 내몰린 이들에게 정신질환이 발병했을 때 악화되기가 쉽다. 병이 불씨라고 하면, 빈곤은 그 불씨를 부채로 지피는 격이다. - P222

가난한 병자들은 거처, 거주가 안정적이지 않아 수시로 바뀐다.
이들은 주거 이동을 반복하는데 이때의 이동은 상향 이동이 아닌 비슷한 수준에서의 이동이거나 하향 이동인 경우가 많다. 새로운 거주지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또다시 많은 노고가 필요하며, 잦은 이사에 따른 심리적, 물질적 비용은 가난한 병자를 위축시킨다.
중독(알코올, 니코틴, 카페인, 게임, 약물, 행위)은 정신질환이 있을 때 더욱 쉽게 관찰되며, 가난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위축되었을 때에 더욱 심화된다. 술이나 담배, 커피, 게임, 스마트폰 등에 중독된 사람들은 자신이 가난하다면 다른 것들을 제한하지 중독 행위를 중지하지는 않는다. 중독 행위에 드는 비용을 ‘기본요금‘처럼 당연하게 취급하지만, 모두 합쳐 계산해보면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도 이들은 중독 행위가 그만한 값을 한다고 여긴다. 고도로 지속되는 스트레스의 압박에서 ‘한숨 돌리게‘ 해주는 것이 중독 행위이니 이들에게는 늘 최우선 순위에 있다. 식사나 병원비는 그다음, 아니면 안중에도 없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돈이 떨어져 이틀을 굶을 때는 방에만 있더니 마침내 담배가 떨어지자 성을 내며 즉시 털고 나가 바깥 골목을 돌아다니며 기다란 꽁초를 주워 좋다고 피워댔다.
가난한 병자들은 단조로운 정동을 보인다. 대체로 누워 있으며, 누운 채 동영상을 보거나 인터넷 서핑을 한다. 물을 마시고 눕고, 밥을 먹고 눕고, 화장실에 다녀와 눕는다. 특징적인 무망감이 그를 배 회한다. 그는 하고 싶은 것이 없고,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으 - P225

며, 지금에 대해서도, 아니 전부 다 생각하기 싫다. 그에게 있던 정신질환이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가난은 당신이 돈이 없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한다고(섭식장애가 있다면 더더욱), 돈이 없기 때문에 돈이 나가는 모든 곳에 가지 말아야 한다고 조른다. 특히 돈이 없으니 ‘이 돈으로 병원에 가는 것보다 다른 데에 쓰는 게 낫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비교적 흔한 패턴으로, 마침 정신과 치료에서 드라마틱한 효과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더더욱 단약 등의 치료 중단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복약은 우리의 정신을 잡아주는 보루이고 이 선이 무너지면 다시 쌓아 올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든다.
‘가난‘이 오랜 이슈인 정신질환자들은 생활습관이나 사고방식, 나아가 삶 전반에 병이 구석구석 뿌리를 내리는 것을 느낀다. 가난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가능한 선택지는 매우 협소하고, 쿠션 역할을 할 안전장치는 미비하기 그지없다. 생존을 우선해 필사적인 선택만 연이어 내려왔던 가난한 병자는 많은 경우 ‘이것이 아니면 안 돼. 이번이 아니면 끝이야.‘처럼 극단적인 사고를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크나큰 압박을 느끼므로 여유를 가질 겨를도 없다.
회피와 포기는 이들이 가진 장점이자 단점이다. 이것이 장점으로 발휘되면 빠르게 자신을 보호하고 원인 대상을 차단함으로써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 새로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다. 얻을 것은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잃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 - P226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계속 외부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방식은 결국에는 병자를 고립무원의 상태로 만든다.
고립 상황에서는 더더욱 자신을 돌보지 않고, 병으로 인해 망가진 생활습관은 고착되며, 심하게는 방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들기 쉽다. 의식주 생활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에서는 주변의 작은 도움이란 말라 죽어가는 화분에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에게는 좀 더 확실한 처방이 필요하다. - P227

정신질환이 있는 이들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는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완벽하고 완전하게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고 전제한다거나 은연중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정도보다 더욱더 잘하기를 요구하고 원한다. 새 학기에 우리는 갖가지 양장 노트와 펜, 필기구, 심지어 아이패드와 스마트펜슬 등을 구입하며 수학을 위해 돈을 바른다. 게다가 계획적으로 시간표를 짜고, 시간 단위도 아니라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생활을 해내고자 한다. 우리에게 ‘무리‘란 없으며, 누구도 절대 힘들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 생활을 수행해내는 자신과 그것을 해내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무능력한 자신만 존재한다. 분 단위의 계획은 흐름을 타면 하루를 쉽게 보내게 해주지만, 곳곳에 은신해 있는 변수의 존재는 계획이 모래성처럼 무지게 한다. 그리고 정신병이 있는 이들은 자신의 계획이 무너졌을 때 함께 주저앉아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혹자는 계획 중 하나만 어긋나도 모든 계획이, 인생 전체가 끝난 것처럼 여기고 자살하려 하거나 사람들 사이에서 영영 사라져 연락 두절된다. 여기에서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우리는 단계 단계를 착실히 밟아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따금 다른 곳으로 건너가기 위해 점프를 하거나 징검다리를 건너야 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정신병에 시달리 - P239

고 있는 이들은 돌다리가 아니면 절대 건너지 않는다. 사소한 문제도 그들에게는 위험의 징조나 불길함으로 읽히며, 속수무책으로 ‘나는 이렇게 무능력해. 죽자.‘와 같은 극단적 사고로 빨려 들어간다. 따라서 쉽게 포기하고, 쉽게 도망가며 쉽게 숨어버린다.
꼭 완벽주의자가 아니라도 주석을 제대로 달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 된 과제를 제출하지 않고, 출석 점수가 아슬아슬할 때까지 결석했다는 이유로 그 학기 자체를 포기하며 학교에 가지 않는 등, 병자들은 자신이 세워놓은 기대치에 못 미치는 상황이 되면 손을 놓고 숨어버린다. 여기서 문제는 ‘완벽하지 않고 내 기준 미달이니 남들에게 보일 가치도 없다.‘와 같은 생각은 굉장히 비장하다는 데에 있다. 정신병이 있다면, 비장함과는 거리를 두어야 살아남는다. 자신에게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이들은 너무 빨리 죽는다.
때때로 학교에 아는 이나 친구 없이 다니는 병자들이 있는데 수업을 들을 때 최소한의 정보 공유는 필요하며(갑작스런 휴강이라든지, 시험 시간이 변경된다든지) 따라서 자신의 병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도 그냥 서로 아는 사람 정도의 지인들이 있어야 한다. 일찍부터 고립된학 교생활을 해온 이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인간들이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가 없는지 따위가 아니라 사회에서 고립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자기 자신이다.
다음은 정말 큰 착각으로, 내 경우에는 이게 특히 심했다. 마치수업시간에 졸면서 ‘오늘의 필기는 내일의 나에게 맡긴다…….‘라고 - P240

쓰듯, 나는 조증이 오면 현재 산재한 모든 과제를 극적으로 해결해줄 내가 생겨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내 기준 ‘상태가 좋은 나‘는 이미 미쳐 있는 상태였고, 그 상태에서 적어 내린 과제들은 마치 정신증의 지리멸렬을 매우 잘 보여주는 듯한 글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이 거의 ‘명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수업에서 모두의 앞에서 질타를 받았다.
이를테면 우울증에서 호전된 상태에서는 글을 잘 읽을 수 있고 또한 잘 쓸 수 있는데 지금 하필 우울 삽화라서 아무것도 못 한다는 생각, 우울증 자체가 주는 통찰력은 마음에 들지만 실행력은 제로여서 불만인 것, 또는 불안이나 초조가 너무 깊어 글 자체가 써지지 않는 것, 아니면 조증 상태에서는 기분이 좋아져서 텍스트도 잘 읽어내리고 해석이나 분석도 참신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상태를 기다리는 것. 이런 행위들이 병과의 유착을 만들어내며 병에 의존적인 인간이 되게 한다. 병에 의존적인 인간, 병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어, 병의 다정한 연인이 되어 손에 손을 잡고 병의 나라로 떠나는 것이다.
자율성이 높은 대학 생활에서는 자연히 병의 기운을 빌려 무언가 해보는 일이 잦다. 하지만 자신을 기분 좋게 하는 것들, 재밌어 보 이는 것들, 흥미로운 것들, 하고 싶은 것들만 한다면 머잖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많은 것들을 겪으며 성장한 것은 자아도 자신도 아니라 병이었음을. - P241

병적인 일의 특징은 휴식 시간을 갖지 않는 것이다. 설사 휴식하더라도 휴식에 죄책감과 수치심이 들게 하는 것이 병의 증거다. 정신병에 시달리는 이들은 스스로를 궁지로 내모는 경향이 있는데, 자신이 스스로를 혹사하는 것에 대해 사이코패스처럼 무감각하다. 적절한 휴식, 수면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일임에도 말이다. 병자들은 기분이 좋거나, 오름세에 타거나, 운 좋은 일들이 연이어 발생하면 기꺼이 그 흐름을 향해 몸을 던진다. 기타 과제나 업무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여력을 비축하는 행위를 일절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눈앞에 달성할 이것을 위해 수명을 깎듯이 움직인다. - P242

직업은 직과 업으로 구성된 글자다. 직은 돈을 받고 노동을 하면 그만인 것이고, 업은 인생에 걸쳐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당신의 병이 업이라면, 임금노동을 맡는 직이 당연 - P246

히 서로 쌍으로 있어야 균형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직을 구하는 데 있어 너무 양심적으로 굴 필요도, 고심해 선택할 이유도 없다. - P247

나의 정체성은 사람이라기보다 리튬 네 알에 가깝지 않은가. 종종 약물의 의인화나 약물의 자기화에 대해 생각한다. 특히 우울 삽화일 때 기분조절제와 항우울제 두 종을 각기 최고용량으로 복용해야 최소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나에게 약물은 무엇인가.
나와 긴밀한, 맹신하지 못하지만 긴밀한 약물. 가끔은 허우적대는 나 대신 하루 이틀 정도 몸을 움직여주는 약물. 언제나 믿지는 않지만 가끔은 사람보다 의지하게 되는 약물, ‘네가 언제까지 작용할수 있을까?‘ 시한폭탄을 인 것 같지만, 수많은 약물이라는 선택지가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돌고 돌아 몇 가지 약물에 정착하고 그래서 원망하고 그래서 좌절하며 그래서 무감각해지고 그래서 불신하게 되므로 나는 알아가야 한다. 내게 맞는 옷을 찾는 것처럼, 가게에서 거듭 바꿔 입어보며 거울을 보고 그리고 집에 와서 결국 잘못 샀다고 팽개치더라도, 실수와 허탕을 거듭하더라도, 우리는 찾아야 한다. 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앞으로 또 다른 내가 될 것이므로. - P270

퇴원 후의 사회 복귀는 언제나 내 고민이었다. 껍데기는 여기에 있지만 알맹이는 여전히 병동에서 과자를 까먹고 있었다. 나는 빽빽한 스케줄로 소화를 할 수 있든 없든 일단 일을 던져놓는 기질이 있었고, 그것을 해내야 하기 때문에 점점 무리하고, 기력은 점점 더 빈곤해졌다. 우리가 정신병동에 입원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기상과 취침 시간이 규칙적인 것, 삼시 세끼를 먹으며 충분한 영양 섭취를 하는 것, 복약을 제때 하는 것인데 혼자 사회 복귀 과정을 치르려니 병동에서는 당연했던 규칙적인 것부터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 - P284

폐쇄병동이란 기피할 곳도 아니고, 천국도 아니다. 친구를 사귀기에 적절한 곳도, 그렇다고 외로움에 사무치기만 하는 곳도 아니다. 시간을 버리는 곳도 아니고, 시간을 저축할 만한 곳도 아니다. 책을 산더미처럼 싸 가지 않아도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이며, 외부와 완전한 단절을 꾀할 수도, 혹은 꾀를 내 외부와 교류를 만들 수도 있는 곳이다. 모두 당신을 도우려 하지만 아무것도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입원 생활에 잘 적응했고 병세가 완화되는 모습을 보였어도 퇴원 후 급격히 나빠질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당신은 연기할 수도, 감출 수도 있다. 사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그것을 - P285

가장 견딜 수 없어 일부러 위험한 행위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비슷한 질병의 친구들을 만나서 사이좋게 지내거나, 사이좋게 전이될 수도 있다.
내가 갔던 곳에 비교적 따뜻한 병동임에도 폴라티를 입고 그 위에 환의를 입은 노년의 여성분이 있었다. 그분은 계절성, 양극성 정동장애 때문에 매해 겨울이 올 때 즈음부터 의례적으로 약 한 달여를 입원한다고 했다. 그분은 가만히 앉아 햇볕만 받는 일이 주목적이요 일과였다. 오전에 뜬 해는 정오를 거쳐 점점 그림자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만들었다. 나만의 목적을 가지고 입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이유로 입원한다. 입원 중에 자신의 병을 알게 되고, 마지막으로 사회로 돌아간다. 이곳의 경험은 인생에서 파내야 하는 단절의 부분도 아니며, 때로는 당신 병의 서사를 흐르기 용이하게 해줄 수도 있다.
폐쇄병동에 입원할 때에는 작은 목표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좋다. 목표는 너무 큰 것(병증이 모조리 해소되는 것, 자해를 평생 끊는 것 등)이 아니어야 한다. 만약 내가 다시 폐쇄에 입원하게 된다면 낙서 노트를 한 권 가지고 들어가 만화를 한 편 그리고 돌아올 것이다. 하나의 목적한 바를 달성하고, 사회에 복귀하기 전에 작은 연습을 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상태가 매우 나빠서 사고와 판단도 불명확 - P286

한 상태에 있다면, 목적이나 목표보다 그냥 있는 게 중요하다. 또 ‘빨리 나아야 해.’, ‘어제보다 나아진 것 같아.‘ 같은 비교형 생각,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같은 WHY형 질문보다 지금 있는 곳에서 출발하는 질문, 예를 들면 ‘여기서 뭘 할 수 있지? 아, 물 먹을 수 있군’이 도움이 된다.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고, 귀에 들리는 것만 생각하면 시간은 더 쉽게 간다. 자신의 질병 서사를 톺아보는 것보다 병원 안에서 주위와 주변 사람을 관찰하고 웃음 포인트를 찾아내려 하는게 중요하다. 치료받고 안정하는 것보다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우선하며, 때로는 그 ‘있다 가는‘ 것으로 폐쇄병동 경험을 인식하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덧붙여 입원했을 때 우리는 꽤 많이 자주 심심해하지만 퇴원한 뒤에는 그 심심함이 공허감이 되어 우리를 덮칠 것을 대비하자. 바깥으로 나가면, 퇴원하게 되면 잠시 미뤄두고 내려놓은 것들과 마주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괜찮다. 모두 제자리에 있을 것이고 우리는 제법 괜찮아졌을 테니까. - P287

처음에는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한다.
인과관계가 흐트러지지도 않았고, 나름의 이유를 알고 있다. 자신의 정상 행동과 이상 행동을 구분할 줄 알며 이상 행동에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느낀다.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행동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저질러진 일에 대해 단편적인 기억을 지니고 있다. 어떤 기억은 너무나 트라우마여서 수납해둔 채 다시는 꺼내 보지 않으며, 어떤 기억은 이미 오염되고 변색되었기에 ‘마음이 떨리지 않아‘ 버린다.
사람마다 자기 방식의 기억술을 가지고 있다. 정신병이 있는 자도 마찬가지이다. 기억은 온전히 보존되는 수장고가 아니므로 원하는 기억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듀이 십진분류법 같은 기술법을 가져야 편리하다. 아마 모두 자신만의 분류법을 가지고 기억을 - P289

다루고 있을 것이다.
위의정신병이 계속되는 사람에게 기억은 반드시 봉착하는 난관이 된다. 내가 기억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 역시 많은 정신병자들이 기억력 감퇴, 왜곡, 곡해 등의 증상을 호소하기 때문이었다. 기억이 너무 큰 자발성을 갖게 되면 사람이 버티지 못한다. 사람을 버티지 못하게 하는 기억은 주로 감정적인 것, 기분의 이상, 충동, 공허, 허기, 고독, 불규칙성, 일회성, 왜곡, 맹점 등이다. 그것들이 모두 소위 과거의 정상 상태에서는 스스로 해결하고 위치를 지정할 수 있었던 것들이기 때문에, 기억력에 문제가 생기면 병자들은 특히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기억들은 고유의 좌표를 갖지만 상호 연계되지 못한다. 특히 어떤 감정과 기분이 일시적으로 폭발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다른 폭발의 연쇄로 이어져도 그 사이의 맥락이 금방 소거되어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아내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맥락 없이 치솟는 감정만 느낄 뿐, 기억으로 유의미한 흡수와 축적을 이루지 못한다.
단편적으로 이뤄진 기억은 그 자체만으로도 혼란스럽지만, 기억에 대한 통제를 상실했다는 점이 병자들에게 가장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어떤 이들은 지난날에 대해 잘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을 큰 흠이라 느끼지 않지만, 자신의 서사를 구성하는 기억력/기억법에 자부심을 느끼던 이들에게 이는 존재의 의의를 빼앗긴 것처럼 심각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정신병과의 난전에서 기억을 바탕으로 싸우던 이들에게 기억에 결함이 생기면 결과적으로 가장 유용한 창과 방패 - P290

를 모두 빼앗긴 셈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록을 시작한다. 가장 쉬운 접근은 일기다. 그러나 일기를 쓰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된다. 일기가 자신을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기록법이라는 것을, 혹은 일기라는 단어에 무색하게, 매일을 적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기에 미흡한 도구라는 것을 시차를 두고 깨닫게 되며 그 후로 일기를 굳이 적지 않는다. 일기를 적든, 적지 않는 유의미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기가 갖는 단점으로는, 감정과 생각의 편린들, 그들이 이루는 꼴의 지지부진에서 벗어나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병자는 변화의 양상을 관찰하는 동안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이것은 병자의 필력이 달리고 내용이 빤하고 재미가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일각이며 오히려 이것은 언어의 문제, 병자들은 자신의 상태에 부합하는 기호와 언어를가지고자 하나 정합한 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문제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우리의 고통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나는 매우 죽고 싶다.‘와 ‘의사가 나한테 아빌리파이 30을 줬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 병의 초기에 사람들은 으레 자신에게 찾아오는 불안과 초조, 견딜 수 없는 기분, 돌연 폭발하는 충동들을 설명하는 데 곤욕을 겪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 자신은 지금 역어(譯語)로 말한다는 것. 모든 고통은 번역어로서 존재한다는 것, 그러므로 자신은 평생 이 기분과 고통을 타인에게 전달할 - P291

수 없을 거라는 점.
(...)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언어라는 매미채로는 결코 병을 잡아챌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결국 언어, 바로 모국어가 자신을 버린 느낌 - P292

이야말로 정신질환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순간 중 하나다. 이미 죽고 싶어 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단순한 ‘죽고 싶다‘쯤은 죽음의 레이스에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입속으로 죽음을 곱씹으며 다니지만, 더는 자신이 표현하는 죽음에 무게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욱 죽음을 자조하며 우스꽝스럽게 말하지만 경박해 보일 뿐이다. 당신의 ‘죽고 싶다‘는 이미 널리 통용되는 ‘죽고 싶다‘ 아래에서 흐드러진다. 본인이 느끼는 바로 그 특별하고 특유한, 자신을 절망케 하는 유일한 ‘죽고 싶다‘를 아는 사람은 없다. - P293

정신병은 기존에 흐르던 기억의 물꼬를 막아 어디는 웅덩이를 만들고 어디는 메마르게 한다. 나의 경우 병의 경중에 따라 기억의 풍경이 달라진다. 다만 패턴이 있고, 패턴을 파악하는 것까지는 어려워도 포착할 수는 있다고 믿기 때문에 기록하는 것이다.
우리는 굳이 기록을 통해 기억과 만나지 않는다. 기억은 무시로 문을 두드리는 침입이고 불청객일 수도, 자애로이 굽어살피러 오는 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언제나 치밀하게 자기를 되짚어 흐트러진 모양을 다듬는 자일 수도 있다. 정신병자들에게, 특히 정신증자에게 기억은 모호하다. 기억은 아름답고 괴팍하며, 한 자리에서 서성이고 있다. 기억은 되려 기억하는 자를 구경하기도 하고, 실체가 없는 주제에 생물의 행동을 한다. 기억은 고유한 생명력을 갖고 있기에 기억과 인간 간의 균형이 어그러지면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기억을 넘지 못하고, 자신의 일부를 조금 두고 온다. 기록은 그것을 건지려 펴는 그물이며 기억을 유혹하는 낚싯대로, 모든 파편을 주워 완전한 형상이 다시 되기를 염원하나 이미 병자들의 삶은 기억에서 멀어지고 일상은 달라져 있기 때문에 그것은 주인 없는 기억으로 떠돈다.
병자들의 기록법은 비슷한 출발을 거쳐 저마다 다른 길로 향한다. 때로 기록이라는 것을 영구히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그렇다. 써도 잊고, 쓰지 않아도 잊는다. 반드시 써두어야 살아남는 건 아 - P294

니다. 하지만 기억을 기록하는 사람은 다시 기록으로써 기억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기록의 형태는 꼭 문자가 아니어도 된다. - P295

우리의 기록은 우리를 더 나아지게, 성숙하게, 교훈을 얻도록 유도할 만큼 거창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쓰고, 적고, 편집하고 찍으며, 외치고, 빚고, 소리내고 그려야 한다.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제나 다음 단계로 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록이 우리의 구원이 되지 못하고, 어떤 문도 열지 못하고 그리하여 기록에 패배하더라도, 그 패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생을 위해 제 기억을 조형해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 P297

사람마다 자해의 법칙, 규칙, 범주, 영역, 미학을 갖는다. 그 안에서 마치 스마트폰 농장 게임을 하듯이, 게임 속에서 ‘배 농사‘를 전문으로 짓는 농부와도 같이 자해 활동이 진행된다. 그리고 각자 자기 자해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간다. 어느 정도의 깊이, 강도, 흠집이 적절한지, 어떻게 시간대나 장소를 물색하는지, 후처리를 어떻게 하는지, 자해 흔적을 어떻게 은닉하거나 보이게/알게 하는지 등을 ‘관리‘하고자 한다. 자해는 통제에서 벗어난 일탈, 우발 행위이면서도 역설적으로 지극한 통제 아래에 놓여 있으며 이 통제가 바로 자해의 핵심 - P303

이기도 하다.
자해는 당신의 정신과 육체 사이에 균열을 내 관계를 정립한다. 그것은 처음으로 느끼는 정신과 육신과의 연결일 것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고립된 당신의 내면에서 너는 죽어 있지 않다고, 살아 있다고 속삭이는 나만의 비밀, 나만의 진실, 나만의 친구가 생겨버리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자해를 통해 두 번 존재한다. 첫째, 육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둘째, 내 기분이 나아질 수 있음을 확인한다. 자해로 인한 심신의 변형(흉터, 정신적인 흥분 고조)이 생긴다면 육체와 정신 사이에 직통으로 오가는 철도를 만든 것과 같다. 자해는 육체를 장악할 수 있게 하며, 거덜 난 육체성은 자기 자신의 무능력과 무력감을 해소해주고, 우리는 자해 후 잔해를 돌보면서 다시 한번 육체를 장악한다. 우리는 자해를 통해 신체에 상처를 입히고 훼손하며, 행위로 인한 상해를 수선하고 회복하며 육체성을 획득한다. 약물 자해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약물 오남용을 통해 신체를 순종시켜 기절, 구토 등 비일상적이고 극적인 반응이 일어나게 한다. 그렇다. 자해는 자신의 몸을 식민지로 인식해 열심히 그곳의 지도를 그리는 작업과 같다. 길게 늘어진 칼자국이나 바늘땀 같은 것들은 모두 이 고통의 세계에서 자신의 육체를 인식하는 증표가 된다. 자해를 통해 신체와 정신적 고통 사이의 괴리를 메우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해를 설명하기에는 아직 자해에 관한 언어가 부족하다 - P304

고 느낄 수 있다. 그렇게 공백의 영역에 있는 자해에 대한 감정, 상태, 분석, 설명 등등이 반드시 언어화를 거치지 않아도 괜찮으며, 오히려 그편이 나을 때도 있다. 핵심은 자해가 어떤 식으로든 고통을 경감시켜준다는 것이다. 분명히 매우 괴로웠고, 자해를 해서 덜 괴로워졌으며 자해를 계속하는 것은 그때 느낀 바가 있어서 계속 해나가는 것이다. - P305

과거 나는 자해를 "여기에서 저기로 가려는 마음"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조금 더 상술하면 자해는 이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에 가깝다. 그 때문에 자해는 한번 인생에 스며들면, 삶에서 다른 상태를 보려고 할 때 얼마든지 되불러올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자해를 하는 우리에겐 모든 것이 모호해져 이 세계가 상상의 것인지 경험된 상상의 것인지 정말로 물리적인 세계인지 모르게 된다. 누구도 자신의 자해를 설명할 수 없고, 어쩌면 이해받을 수도 없다. 그러니 아마도 100명의 자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 자해하는 방식이 있고 무한한 자해에 대한 감정이 있을 것이다. - P312

내게 자해는 많은 것을 주었지만, 점점 줄 수 있는 것이 줄어들기에 삶에서 멀어져갔다. 스스로를 해치고 싶은 마음 자체에 일어나는 균열이라곤 볼 수 없다. 지금도 나는 가끔 어떠한 상황에서 자해만이 가장 획기적인 수단이라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만 나의 자해 - P313

는 늙고 나이 들어 이제는 그 고무줄이 굳고 균열이 가 쓸 수가 없다.
앞서 자해는 몸과 정신의 균열을 메운다고 했다. 그러나 자해를 거듭해나갈수록 그 효과는 줄고 효용 없는 행위 위에 반복만이 축적되는 형국이 오면, 스스로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내가 정말 세계에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어느새 어두운 곳에 앉아 균열이 만들어지는 영상을 무한히 반복 재생하고 있는 것인지.

자해는 자기를 망치고 흐트려놓는 즐거움을 준다.
를지지부진한 일상의 달리기에서 탈 것을 바꿔주고, 날게도 한다.
그러나 한 번 이 미친 열차에 타면 선로가 다할 때까지 내릴 수 없다.
그 속도감. 짜릿함. 변화무쌍. 활기!
선로의 끝에서도 기차는 계속 달린다. 그리고 끝의 끝에 가서야 멈춘다.
그리고 그곳엔 끝이 아닌 내가 있다.
-리단, 『자해장려안하는만화』 - P314

시도는 개인적일지라도 죽음은 모두의 것이 된다. 정신질환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살을 기도하는 것은 아니며, 자살한 사람들 모두가 정신질환자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병자들의 자살과 자살 기도, 자살 시도 후에 오는 것들, 그리고 자살한 정신질환자들의 주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일단 당신이 자살한다면 그 순간부터 당신의 서사는 모두의 것이 된다. 모두 당신을 오해할 것이다. 궁금하다는 명목으로 당신을 갑자기 알아내려 하고, 유언을 알려고 하고,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고 하고, 왜 죽었는지 알고자 한다.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히. 당신은 당신의 진실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이들과 당신을 기억 속에 묻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조금 더 존재할 뿐이다. 그 이후는 바랄 수 없다. - P315

본인이 직접 시도한 것이든 아는 누군가가 시도한 것이든, 성공한 것이든 실패한 것이든 자살은 깊은 공허를 남긴다. 깊고 고통스러운 병에 시달린 사람들은 자살이 보여주는 위태로운 달콤함을 안다. 대부분 수도 없이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자살에 도달할지에 대해 시뮬레이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살의 개념을 점점 익숙하게,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자살사고가 언제 올지, 얼마나 심하게 올지는 언제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따라서 언제나 너덜너덜해져 술병을 잡거나 이불 속으로 무한정 도피하기도 하고 또는 함께 휘뚜루마뚜루 자해 파티를 하기도 한다. 자살은 반드시 나와 병 둘이 동등한 국제식 다이를 두고 치는 포켓볼이 아니며, 당신 손이 두 개라면 병은 천수관음의 손을 하고 당신을 유린할 것이다. 자살은 공평한 상대가 아니다. 시작된 순간부터 이미 기울어진 것과 진배없다. 외려 점점 더 커져 이윽고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일단 발생한 자살사고는 당신을 온 구석구석 헤집어놓을 것이다. 사소한 자살 생각부터 몇 날 며칠을 가리지 않고 이어지는 자살사고는 차곡차곡 개켜지고 발라져 머릿속을 빼곡히 채우는 관념이 될 것이다.
자살을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꼭 자살 직전에 있던 사건 사고만이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살을 하는 이유야말로 암호처럼, 해독할 수 없는 고대 문자처럼, 기록은 했으되 다시 읽어보면 뭐라고 하는 건지 위화감을 느끼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과 같다. 자살 - P316

은 눈을 번득이며 도사리고 있다. 당신이 조금만 균형을 잃는 순간을 기다리며 말이다. 만약 당신이 치솟는 자살사고로 숱하게 자해나 파괴적인 행동을 한다면 조속히 내원해 자신의 증상을 가라앉히는 등 빠른 진정이 필요하다.
또 다른 위험한 자살사고가 바로 만성적인 자살 관념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특정 기간이나 사건을 정하고 이를 기점으로 자살을 행하겠노라 정교히 플랜을 짜둔 자살사고다. 이것이 위험한 점은 단지 실행력이 높으며 성공률도 높다는 점에 있다기보다는 병자로 하여금 이른바 ‘죽음의 스케줄‘을 철저히 믿고 따르게 한다는 점에 있다. 게다가 쉽사리 타인에게 노출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죽음의 색과 가까워지며, 계획이 타인에게 노출되어 저지당할 시엔 마치 자살을 실제로 시도한 사람처럼 공허감에 사로잡혀 현실과 사회로 복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자살자의 터널 사고(tunnel vision)는 오로지 자살만이 빛나는 선택지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심한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보이는 경향이기도 하다. 또 자신에게 너무나 당연한 논리이기에 최소한의 힌트만 주어도 모두가 당연히 알고 이해하리라 여긴다. 음성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상대 앞에서 했던 생각들을 마치 소리 내 직접 전달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전개에 당황하여 "네가 왜 자살을 해? 그런 이유로?" 따위의 질문을 던지게 되며, 이것은 자살을 생각하는 - P317

이들에게 좌절을 주고 다시 한번 자살을 결행코자 마음먹는 데에 일조하기도 한다. 결국 자신을 이해시킬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은 자신의 죽음뿐이라 여기는 것이다. 이때 자신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는것을 스스로 깨닫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고, 주변 사람의 태도를 살펴 그들이 위화감을 느끼는 것을 보며 자기 생각이 일그러져 있음을 파악해야 한다. 혹은 다른 사람에게 말을 먼저 꺼내 자신의 생각이 온전한 형태를 하고 있는지 확인받을 수도 있다.
자살 위험에 놓인 이들에게서 단번에 위기감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자살하고자 할 만큼 심각한 정신적 위기에 처한 사람들도 소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죽고 싶다‘라는 언어적 의사표현 없이 자살하는 이들도 있다. ‘죽고 싶다‘는 마음, 자살 충동의 형태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들은 사소한 일에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남들이 ‘저러고 어떻게 살지?‘라고 반응할 정도여도 자살 시도의 임계에 도달하지 않기도 한다. 다행인 얘기지만 자살을 생각하고 시도한 것만으로 자살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여부에는 시도의 심각성과 여파, 후처리, 의도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여타 정신병의 증상들처럼 한번 수위가 높아진 자살사고, 충동, 돌발 행위 등은 제어하기 어려워진다. 자살사고가 더는 자기에게서 발아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강림하듯 내려오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호소하는 자살사고의 첫째로 고통스러운 지점이 바로 여기에 - P318

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생각이 자신을 지배한다. 초조와 불안에 시달린다. 둘째는 자살사고가 너무 만성화된 나머지 미래에 대해 자살 이외에는 상상할 수 없으며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당연하게 전제된 경우다. 격한 감정이 요동치는 첫 번째 경우와 다르게, 이 지점에서는 이미 모든 결론을 자살로 맺어버렸기 때문에 삶에 애정도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는 상태이며 가장 불행한 것은 이 둘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자살이 최선의 해법이라는 사고방식은 비교적 흔하다. 사회와 소속집단에서 탈락하고 대인관계도 모두 망가진 사람, 연이은 실패를 겪고 건강도 회복도 희망적인 미래도 장담할 수 없는 이의 입장에서는 사회에 복귀해 ‘정상적 일원‘으로 살라는 요구는 어처구니없을 따름이다. 그쪽이 더 불가능하다는 것을 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지,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그는 확신도 없이 기나긴 고난의 재활을 수행하기보다는 자살을 택하는 편을 현명하다고 느낀다. 자신이 부딪힌 장벽을 일시적인 것이라 여기지 않으며, 이에 대한 영구적이며 합리적인 해법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다.
자살은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을 죽이는 행위라는 요지의 말을 다들 들어보셨을 것이다. 누군가는 자살은 타살이라는 말에 적극 동의하지만, 누군가는 자살은 마침내 자신의 의지로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에 타살이라 보기 어렵다고 본다. 어떤 이는 자신의 육체적 수명이 그보다 길었을지는 몰라도 자신의 삶을 여기에서 끝내고자 하 - P319

는 바가 명확해 죽음을 택하므로 여기까지가 제 수명과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마땅히 자연사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 뭇 사람들은 자살이 병사라는 점에 크게 토를 달지 않고 대부분 동의를 표하지만, 결국 투병의 고통이 그를 잠식해버렸는지, 아니면 자살이 마지막 저항의 제스처였는지 누구도 그 죽음의 성격을 명확히 단정지을 수 없다. 결국 자살은 자살이며, 자살을 병사라고, 타살이라고, 자연사라고 말하는 것은 그 증상의 어떤 측면, 이를테면 어쩔 수 없음, 불가피한, 만성적인, 저항해도 좌절되는 상황을 설명해보려는 시도일지도모른다.
하지만 결국 자살은 자살이다.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자살의 의미는 단순히 삶을 스스로 끝내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이들에게 자살은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며, 어떤 이에게 자살은 자신의 삶이 마침내 정신질환에 무릎을 꿇었다는 일종의 포기 선언일 것이다. 문제는 자살로 승리의 쾌감을 맛볼 사람도, 패배의 비감을 느낄 사람도 둘 다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자살의 성패를 결정할 수 있는 당사자인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므로 자살을 성공 혹은 패배로 양분해서 인지해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되돌아오는 것은 없다. - P320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넘어가 끝나는 방식이든, 스스로 해를 입혀끝을 내는 방식이든 자살 시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상한 공간에 도달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어떤 종말을 맞기 위해 다리를 넘 - P327

었든, 자신의 고통을 끝마치기 위해 치사량을 삼키든, 살아남아 고개를 돌려 확인하게 되는 세상은 전과 같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자신은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이 될 수 없음을.
(...)
정말로 자살은 미래를 앞으로 당긴다. 자살과 섞인 우리는 매우 응축된 사고를 하고 아주 밀도 높은 고통에 시달리며 앞으로 살면서 긴 시간 동안 느껴도 족할 고통이 매일 매 시 압축적으로 쏟아진다. 나는 지나간 시간과 과거사 때문에 자살을 택하는 비율보다 앞으로의 시간을 그렇게, 혹은 더 심하게 보내야 한다는 고통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 여긴다. - P328

렇지 않다. 나는 자살을 기도한 ‘그날‘ 앞으로 보낼 수 있을 많은 시간을 지불하고 일정 부분을 포기했다. 내가 버린 그 ‘나‘는 내 인생에서 계속 맴돌 것이다. 그날 그 시간에서 멈춰서 나의 일부는 그 시간에서 산다. 그 생각을 종종 한다.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의식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지만 사고의 회로를 빙빙 거치다 보면 자살을 시도한 나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미안해하지 않는다.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합리적이고 타당한 선택이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그렇게 드러나는 복잡한 심경들은 필연적으로 ‘그날‘ 이후로 흘러가고 있는 내 시간대로 스밀 것이다. 나이와 성별과 이름이 적힌 팔찌를 차고 오래 깨어나지 않던 나는 링거 줄이 줄줄 매달려 있던 병상에서 뒤척이며 일어나서, 간호사도, 보호자도, 병동의 잠금장치가 걸린 유리문도, 경비도 아무도 몰래 병원 밖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아, 이대로 도망가버릴까?‘ 했지만,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자살 얘기를 했지만 마치 농담거리인 양 밝고 산뜻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내가 살아온 얼마간의 인생을 죽음을 택한 내게 쥐어주고 그냥 떠났다. 그리고 내가 잃은 것은 지나온 삶이 아니라 앞으로의 시간이라는 것을 늦게 알았다. ‘그날‘ 내가 그에게 건넨 부피만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망실됐다. 이것은 상상된 두려움이 아니다.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이 제거하고 싶은 대상은 많을 거다. 자기 자신부터 시작해 특정 인간, 어떤 사실이나 기억등. 그러나 결국 지불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살아남았어도 - P329

당신은 살아나지 못했다. 그는 늘 거기에 있다. - P330

성정이 좀 더 느긋해져 ‘나를 싫어하는 적들은 강가에 앉아 구경하고 있으면 알아서 떠내려올 것‘ 같은 마음가짐이 되었을 때에 이제 자살사고는 이전만큼 강력하고 빠른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런 마음가짐은 사람들을 만나며 얻거나 풍파를 겪으며 습득하는 경우도 있고, 약물의 도움을 받아 누그러뜨린 상태를 만들어 유지할 수도 있다.
(...)
아마 언젠가 당신은 자살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며, 그런 조건과 환경을 갖출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은 자살하고자 하는 마음이 상시 존재해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괜찮은 축에 들게 될 수도 있다. 그때를 위해 지금부터라도 강가에 앉아 구경하는 놀이를 해보자. 강가에 앉아 여울을 피해 유영하는 오리들을 구경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 P335

섬 연애는 단순한 도식에서 시작된다. 섬 연애자들이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불행한 과거나 쉽게 이해받기 어려운 고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정폭력이나 집단 괴롭힘 등 성장 과정과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은 이들, 그래서 가정이나 또래집단 혹은 기존 환경에서 간절히 벗어나고 싶어 했던 이들, 자신의 병이나 정체성 등이 ‘우리 사회 보편적인 기준‘에 어긋나는 요소로 취급되어 외부 세계에서 배제당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표현을 검열해야 하는 이들, ‘나와 나의 상처나 이질적인 점마저도 공유할 수 있고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인정하는 누군가‘에 대한 열망을 가진 이들. 이들이 기존의 있던 곳에서 떠나려는 시도를 하고 마침내 성공해 새로운 환경이나 새로운 집단에 속하게 되었을 때, 이 새로운 곳에는 내가 나를 드러내도 될 만한 사람이 있을 거라 믿는다. 오랫동안 외로움에 시달렸던 사람은 자신처럼 상처를 가진 사람을 알아보고, 쉽게 이끌린다. 살면서 다른 사람하고는 나누지 못했던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나누며 단단해지는 결속은 타인이 이해할 수도 손댈 수도 없는 강력한 무언가가 된다. 불안정한 두 사람의 만남은 종종 격렬하고 배타적인 파국을 맞지만 물론 연애 초기에 당사자들은 이것이 섬 연애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연애와 우리가 말하는 섬 연애는 한 끗 차이, 종이 한 장 차이이기 때문에. - P338

퀴어-정신병-섬 연애라는 3단 콤보는 그 파괴적인 면모에 비해 의외로 흔하게 존재한다. 애초에 ‘이곳에서만 서로 이질성과 상처를 공유할 수 있다.‘라는 전제를 매개로 관계의 결속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비단 연애 감정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 아늑함을 포기하고 밖에 나가 또다시 자신을 이질적으로 대하는 외부로 나간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정체성들끼리 서로 연결돼 상호의존하기 때문에, 섬 연애를 포기하는 것이 곧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는 일이 되 - P340

어 이들은 결단코 헤어지지 않으려 노력하기도 한다. - P341

만약 당신의 많은 영역이 불안정하고 오로지 연애에서만 자기 자신을 성취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의존으로 인해 상대방이 지쳐가고 있는 것을 보고, 느끼고 있다면 자기 자신도 알 것이다.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섬 연애의 고립된 상태에서는 ‘나는 자살할 거야, 너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자신의 행동, 자신의 생각, 자신이 저지르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치가 없다고, 사라지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태도. 나는 사람들이 섬 연애를 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거나, 말려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다. 섬 연애는 그렇게 ‘되는‘ 거니까. 그러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이 연애 안에서만 존재가 성립된다는 생각, 그 생각으로 말미암아 저지를 수 있는 행동의 극단에 대해서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는 견해다. 그래야 지금 관계도, 그리고 언젠가 이후에 생길 관계들도 살 수 있다고 말이다. - P350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의사가 ‘나를 잘 알고 있다.‘라는 가정이다. 정보를 아무리 많이 제공하더라도 의사가 환자와의 관계에서 필요로 하는 정보는 그와 상이할 수 있다. 자신은 자기를 알리고자 제공하는 정보들, 이를테면 "제 이름은 리단, OO빌라 3층에 살고 검은 고양이를 키웁니다. 애인은 있습니다. 애인과 사이는 어떻냐면요 어쩌구 저쩌구 요새 걔가 어쩌구……" 같은 정보는 의사 입장에서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의사 입장에서 필요한 정보는 ‘밤에 잘 자는지, 몇 시간 정도 자는지, 식습관은 어떤지, 여전히 환청이나 이상한 감각은 계속되고 있는지, 외출은 하는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시작은 절박하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의 고통을 알아달라고 허공에 외치듯 시작하나 투병 생활이 장기화되면서 점점 의존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병 서사를 갖추게 된다. ‘의사에 - P364

게 아무리 말해도 결국 의사는 모른다.‘라고 생각하게 될수록 정신과 진료가 무의미하고 소용없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병과 홀로 싸운다는 것, 점점 병의 장악이 커지는 것에 대해 입을 다물고 무력감을 느낄 수도 있다.
‘나‘를 설명하고, 알리고, 이해시키고자 하는 그 절박한 표현들이 좌절되고, 결국 당신은 의사와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체념하게 될 수 있지만, 기억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내원해 의사의 진료를 받고 약을 타오고 복용하는 행위가 당신이 가진 것들, 잃고 남은 것들을 유지하기 위한 당신 자신의 의사 표시이며,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을 돕는다는 것을. 이 의사가 날 구원해줄 수 있을까? 잘못된 질문이다. 우리 병자들의 세계에는 구원이 없다. 행동의 연쇄, 행동의 축적만이 삶을 지탱한다. 병이 길어질수록 의사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고 주 행위자는 자기 자신이 맡는다.
반면 부모는 자식이 그들의 생각에 성체가 아니면 절대 떠나지 않는다. 부모는 간섭한다. 끝까지 간섭한다. 그래서 당신은 전혀 예상치 못하던 상황에 놓이게 된다. 당신이 병중에 진 채무를 부모가 대뜸 갚아주기도 하고, 때로는 집을 얻어주기도 하며, 일자리를 알아봐 주기도 할 것이다. 모이를 물어다 주는 새처럼. 당신은 기묘한 무력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무력감은 더욱 복잡미묘하게 관계를 재배치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갈등과 고성이 끊이지 않았던 집이 평화와 안정을 찾은 것처럼 변모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에 안착하는 병 - P365

자는 없다. 그들은 평화보다는 기이함, 일그러짐, 비틀린 듯한 위화감을 느낀다. 억지로 작은 새 둥지에 처넣어진 성체 새들마냥.
과거 어느 날 병원을 나서서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며 손에 들린 아버지의 신용카드와 영수증, 한 달치의 약이 든 봉투를 안고 생각했다. 비록 병원에 간다고 할 때 병원비를 기꺼이 내주겠지만, 그 돈이 무엇으로 교환되는지 집에서는 절대 알지 못하겠구나. 이 병에 대해서 부모가 이해를 할 일은 없고 우리는 그저 이 주제에는 거리를 두고, 다른 때에는 행복한 가족일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그 도시의 무연고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뭐 어때. 담배를 다 피우고, 버리고, 사거리의 횡단보도에서 조금 잰 발로 집으로 돌아갔다. 새 둥지에 떨어진 커다란 뻐꾸기면 어때, 나는 언젠간 날아갈 수 있다. - P366

고통을 맞닥뜨렸을 때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일은 숭고하다. 그러나 숭고한 일만 벌어질까. 사실 그의 내면은 정말로 비참과 아픔으로 고래고래 흉측한 소리를 지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의 내부는 너무나 망가졌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소리 지르는 것을 들으면서, 또 소리 지르는 이유를 알면서 시끄럽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비명, 소음으로 인해 또 병이 생겨난다. 이윽고 우리는 알게 된다. 고통에 노출될수록 인간이 단단해지고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고통과의 알력은 두더지게임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오락기의 나무 두더지들은 아무리 내려쳐도 까닥하지 않지만 우리의 고통은 입을 다물라고 망치로 내려칠수록 새로운 모습을 하고 와와 불어난다고.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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