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병에 익숙해지는 것이지, 병을 좋아할 수 없다. 익숙해진 병과 앞날을 조금 함께 걸어볼 뿐이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칠 수 없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병이 마치 배우자라도 된 양 여겨볼 뿐이나, 병의 배신에 여상하게 굴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병과 대치하든 공존하는 함께 존재하면서, 다른 영역에 발을 디딜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영역이란 언제나 행복하고, 즐겁고, 재미난 곳이 아니며 모멸을 무릅쓰고, 수치감을 느끼며, 망칠 것을 재차 우려하면서 조심스럽게 때로는 과감하게 굴어야 하는 곳, 바로 사회다. 우리가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 까닭은 많이 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사회의 일원이 되면서 정신병을 얻는다. 게다가 정신병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을 때 더욱 심화된다. 이게 무슨 역설이란 말인가. 정신병은 당신이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과 거리가 멀고 관계 설정이 미미하고 동떨어져 있을 때 더욱 가중되어 당신의 ‘소중한‘ 짐이 된다. 그럴 때 당신은 자신의 유일한 끈과 영향력인 정신병적 상황과 상태를 붙잡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학교를 그만두거나, 인간관계가 파탄 나거나,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했을 때 당신을 제일 먼저 맞아주는 것은 병이다. 우호적으로? 우호적으로. - P369
하지만 밤은 가고 새벽이 오며, 몇 달 몇 해를 누워서 자신의 실책에 대해 생각만을 거듭해나갈 수는 없다. 결국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순간이 온다. 다만 그 순간은 사람마다 달라 어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툴툴 털어낼 수 있지만 어떤 이는(예를 들면 나의 경우 사직의 여파에서 일어나는 데에 3개월이 걸렸다.) 몇 달, 아니 몇 해가 걸릴 수 있다. 새로운 시작의 순간 전까지, 우리는 병의 얼굴을 쓰고 휴식하고 있는, 대기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이유도 제각각으로,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면 충분히 지원에 기대서쉬고 있어도 괜찮지만, 돈을 벌어야 한다면 그 사람은 실패 후 다시 사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에 뛰어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습관을 만들고, 건강한 생활을 지속하고,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수치의 기능을 하고, 자신의 ‘나쁜 사이클‘에 뛰어들지 않아야 하는 이들,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사회화를 선택하는 이들은 종종 자신이 수행해야 하는 이 모든 것의 무의미함을 느낀다. 결국 우리의 정신병은 이 무의미의 강을 건너 사회의 영역으로‘왜’ 돌아가야 하는지 탐구하는 데로 수렴한다. 여기서 정확한 대답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신을 설득하는 답변은 얻어야만 앞으로 걸어갈 수 있다.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음‘의 상태는 소위 스카우트 배지처럼 한 번 획득한다고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 P370
어느 날 갑자기, 또다시 어떠한 요인으로 추락하고, 퇴보하고 탈락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상기하면 노력은 발동을 멈추고, 행동은 머뭇거리게 된다. 어차피 또 패배해서, 또 자기의 방(마지막 보루)으로 후퇴해 또다시 사회의 재진입을 꾀해야 하는데, 새로 시작되는 병증은 더 견딜 수 없을 것이고, 무엇이 새로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우리는 불가능한 고통에 대해서는 시지푸스가 되어 끊임없이 몸을 던져볼 수 있다. 계속해서 꼭대기로 끙끙거리며 돌을 굴릴 수 있다. 그러나 불확실함에 대해서는 수를 쓰기 어렵다. 어쩌면 영원히 자기 방에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기만 하는 생을 살게 할 것이라는 전망은 우리를 좌절스럽게 한다. (...) 불확실성에 맞서 정신병자를 지지하는 것은 바로 일관된, 계속되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들이 바로 병식, 약, 돈, 그리고 사람이다. - P371
정신병자인 우리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자책하거나, 인생이 손쓸 수 없이 망가졌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형용할 수 없는 허무함에 삶을 끝내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병과 있는 것만으로도 품이 든다. 일상을 사수하고, 자신을 돌보는 것이 언제나 도전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가장 작은 행동,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나날이 우리를 지킨다. 우리는 누가 이기고 지는 승부를 하는 게 아니다. 오늘 건실한 하루를 보냈다고 내일도 그러라는 보장은 없다. 정신병의 나라에서 우리는 몇 번이고 새로 시작하고, 몇 번이고 버리고 떠나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도망쳐도 좋고, 비겁해져도 좋다. 다만 충분히 말하고, 기록하고, 관찰하자. - P390
우리가 그리는 지도가 완벽할 필요는 없다. 병이 기상천외한 행보를 보이며 우리를 앞지를 수도 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안에서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정신병의 나라에서.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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