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 출구 1
허새로미 지음 / 봄알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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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안다. 딸이 겪는 가족은 아들이 겪는 가족과는 다르다. 마치 같은 얼굴의 왼쪽과 오른쪽이 미묘하게 다른 것처럼, 그 미묘한 차이를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소름이 끼치는 것처럼. 그렇게 얻은 기억들은 극복하기 힘든 결절이 된다. 마땅한 내 것을 달라고 말하면서도 송구해하는 비굴한 인간이 되거나 파워 게임에 귀신같이 능한 학대자가 되기 딱 좋은 토양이다. 그러 - P15

나 나는 나의 결핍이 곧 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의 피해를, 나의 슬픔을, 나의 역경을 고발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한 발짝만 내디디면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았던 그때, 도박 빚을 진 것도 아니고 사람을 때린 적도 없건만 내 옷차림이나 성적 때문에 내 인생이 망할 것이라는 주문을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매일같이 듣던 그때, 바로 그때 지금 내가 아는 것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덜 죽고 싶었을까.
가족이 하는 말을 곧이듣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를 겁주는 사람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혼자서도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오랜 세월을 불안에 떨지 않고 보낼 수 있었을까. 그 얘기를 딸들에게 하고 싶다. 원가족을 벗어나 김장철에 김치 얻을 데가 없고 명절에 전화할 데가 없어도 큰일 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종류의 외로움은 골백번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나에게 책임이 있는 이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라. 책임의 이행을 요구하라. 사랑을 구걸하지 말라. 사랑을 인질로 잡은 어떤 관계도 나를 살리는 관계가 될 수는 없다. 그 밖에도 세상이 있다고, 훨씬 넓고 깊고 무섭 - P16

물론 세상에는 조건 없는 사랑이 존재한다. 이만큼의 세월 동안 얼마큼을 내가 주었으니 이제부터는 돌려 - P28

받아야 한다는, 그게 아니라면 감사하고 황송해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그런 종류의 조건부 사랑이 아니라, 네가 거기 있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내가 여기 있는 것을 확인한다는 유의 사랑이 아니라 그저 사랑하는 것이 목적인 사랑도 있다. 그러나 조건 없는 사랑은 조건이 없기 때문에 혈연을 조건으로 삼지 않는다. 너는 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거이므로 무언가를 증명함으로써 살아 있는 값을 하라는 치졸한 욕망을 투사하는 것을 조건 없는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조건 없는 사랑은 사실 혈연관계에 제한되는 사랑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랑이다. 우리가 인생의 가장 험난한 계곡에서 난데없이 신의 자비를 갈구하듯이, 갑자기 맥락 없이 신이 우리를 사랑하기를 바라듯이, 조건 없는 사랑은 상대가 나와 얼마나 DNA를 공유했나를 따지는 것과는 많이 다른 무언가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자기애와 겹칠 수밖에 없다. 혈육에 대한 애정을 다른 거룩한 것으로 포장해서는 안된다. 그 터무니없는 기대에 다치는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 P29

똑같이 아침을 못 먹고 출근하는데 누나는 등짝을 맞으며 빨리 시집가라는 소리를 듣고 연달아 현관을 나서는 아들은 빈속으로 출근하는 게 안쓰러워 죽겠다는 식의 어리둥절한 대비가 아무렇지도 않게 비쳐진다. 엄마를 끔찍이 위하며 그를 위해 목에 핏대 올리며 맞서 싸워주는 딸 캐릭터 역시 너무도 많다. 대단한 불균형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가 현실을 반영하는지 아니면 견인하는지 몰라도 ‘캐주얼하게 학대받는‘ 그룹이 널리 딸 집단으로 묘사되는 게으른 사회에서 실제 딸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염려를 빙자하여 가하는 언어 학대를 일상화하는 것은 사실 한국의 유구한 전통이기도 하다. - P31

아들의 집밥에 대한 그리움이란 얼마나 단단하고 평온한 것일지 상상해본다. 식탁이나 저녁상의 자기 자리를, 자기 발언권을, 혹은 자기의 음식에 대한 권리를 기각당하거나 미리 양보해야 한다는 염려를 조금도 하지 않고, 모자란 반찬이 있거나 누군가 음식을 흘렸을 때에 식사하다 말고 일어나야 한다는 지각이 전혀 없이, 아무 말이나 해도 혹은 아무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음식에 집중할 수 있는 자가 누릴 온전한 감각. 그런 상태에서 누릴 맛과 냄새 그리고 위장이 채워지는 행복감. 그는 자기 바로 옆에 앉은 누이와는 딴판으로 다른 식사를 매일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상의 아들들이 제 손으로 마늘 한 번 까보지 않고 집밥 집 - P34

밥 노래를 부르는 데엔 이유가 있다. 상상력을 동원하니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 옆에서 언제나 할 일이 생기면 재빨리 일어나야 했던, 혹은 신경 안 쓰는 척 앉아서 버텨보지만 뒷덜미가 따가웠던 딸들에게 혼자 먹는 밥이 왜 그렇게 편안했는지도 이해할 일이다. 남자들이 혼자 먹는 밥에 난리 법석을 떨며 스스로를 가여워하고 집밥이 사람 살린다며 가당찮은 공치사를 해댈 때 한 번도 공감한 적이 없다. 그들에게 집밥은 그저 한 끼 식사가 아니고 커뮤니티가 고추 달린 존재에게 주는 승인을 재차 수확해가는 자리인 것이다. - P35

지금에 와서는 누가 "왜 혼자 가르치기 시작했냐"고 물으면 "나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고 대답하지만 당시에 나를 정말 그만두게 만든 마지막 버튼은 모욕감과 좌절과 배신감이었다. - P41

내가 원가족과 항상 다투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나의 모부는 나에게 먹을 것과 쉴 곳을 제공했으며 성인이 되기까지 자신들의 방식으로 나를 보호했다. 여름이면 가족끼리 차에 올라 며칠이고 사람 없는 깊숙한 계곡을 찾아 헤맸다. 아빠가 내비게이션도 없이 전국 지도를 보고 길을 잡는 덜컹이는 차를 타고 밤새 달리다가 경치가 좋은 곳이면 어디고 멈춰서 텐트를 치고 얼음장처럼 찬 물에 수박을 담갔던 그런 소중한 기억도 많이 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엄마가 예절 수업 선생님으로 학교에 방문하는 날은 "너네 엄마 너무 예쁘고 젊다"며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엄마에게 떨떠름하게 아는 척 한 번 하는 것이 참 뿌듯한 기억이었다. 나는 죽거 - P55

나 다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대학 교육도 받았다. 겨우겨우 사회 구성원으로 기능하는 방법도 뒤늦게나마 찾아냈다. 여기에 나의 가족이 공헌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공동체로서 성공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것이 말하지 않고도 전달되어야 했고 너무 많은 감정이 그저 한 방향으로만 흘렀다. 로맨스 혹은 사랑으로 시작한 것이 가족만큼 무거운 것이 되어선 안 된다는 비명을 엄마는 평생 질렀다. 아빠는 그 비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로맨스에 납치당해 삶을 걸머진 여자가 지르는 크고 작은 비명을,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가 당연히 하는 잔소리나 푸념 같은 것이라고 온 세상이 이해했다. 엄마와 아빠 모두 왜 이렇게까지 삶이 무거운지, 미래가 두려운지, 실체도 없는 불특정인에게서 꾸중을 듣거나 경멸을 당할 거라는 환청을 들으며 사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다 그렇게 사니까‘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세월을 보내고 나서는 다음 세대에게도 ‘다 그렇게 산다‘는 주문을 반복했다. 정확한 대상도 없는데 속도는 너무도 빠른 분노와 더께가 얹힌 억울이 집안 공기에 항상 흘렀다. 그걸 배운 나도 주변에 화풀이를 했다. - P56

언젠가는 당하지 않을 만큼 강해져야지, 보호자가 자원을 통제해서 나를 학대하는 방법을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해야지, 내 돈으로 먹고 노는 인간들을 벌 줘야지, 나에게 속죄하게 해야지, 내 몸을 상하게 해서 나온 자식들이 나에게 보상하게 만들어야지, 내 몸을 상하게 해서 나온 내 자식의 돈을 쓰는 여자에게도 벌을 줘야지, 돈을 받지 못한다면 두려움과 존경을 얻어내야지………. 누구도 이런 것들을 견디면서 제정신으로 오래 생존하지는 못한다. 정말 많은 ‘정상가족‘이 서로에게 분노하고 복수하며 매일을 살아간다. 사랑은 분명 어디에나 있고 아주 강력하지만, 여자를 조금씩 돌게 만들면서 진군하는 가족의 삶은 더 이상 사랑만으로 지탱할 수 없게 된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캐낸, 놀라운 사랑의 힘에 대한 맹신은 대체 무엇인가. 에너지 총량이 일정하다는 준엄한 물리 세계에서도, 물이 증발하면 대기 중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 현대 세계에서도 여자의 사랑과 헌신은 당연히 자연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여자는 언젠가는 지친다. 혹은 곧잘 학대와 가스라이팅의 영역으로 납치당한다. 일상은 로맨스가 아니다. 대화는 프리젠테이션이 아니다. 삶은, 정말이지 드라마가 아니다. 끝나지 않는 매일의 삶 - P57

안에서 유한한 것의 무한한 공급을 책임지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여자가 한때 사랑으로 혹은 노력으로 기운차게 구축해 기능시킨 것은 그게 무엇이든 영구히 지속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가족의 불가능성이다. - P58

딸들에게는 보통 소속이 없다. 가끔 주어지는 따뜻한 소속감은 보통 조건부다. 주변의 눈치를 수시로 살피며 뭔가를 관리하고 유지하고 보수하면서 내 자리를 벌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꾸준히 수신한다. 여자들과 식사하러 갔을 때 번개같이 내 앞에 물이 그득한 잔과 반듯하게 줄을 맞춘 수저가 놓여 있는 일이 잦은 것도 이 때문이라 믿는다. 딸들은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스스로를 부정 및 교정당하며 살았기 때문에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환경에 편안하게 놓여본 경험이 드물다. 그래서 언젠가 원가정을 떠나 ‘내 집‘을 찾아야 한다고 어렴풋이 생각하지만 인류 역사의 오랜동안 갈 곳 없는 딸들이 달아날 곳은 오로지 또 다른 가 - P76

부장이 있는 가정이었다. 아버지가 남편에게로 넘겨주는 여자의 손. 남자들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는 여자들은 대체로 마녀가 되거나 미친 여자가 되었다. 거의 반드시 가난해지고 사회적 안전망도 희박한 처지가 되었다. - P77

이 가족들로부터 떠나온 딸들이 해야 할 일은 이해하고 용서하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절대 잊지 않고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다. 죽는 날까지 내가 받았어야 할 더 나은 대우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다. 나와 똑같이 느낄 누군가를 절대 만들지 않는 일이다.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너무 많은 남자가 사랑의 이름 아래, 가족의 비호 아래 두루뭉술 용서받고 도덕적 모호함 속에 몽롱하게 행복해하다가 갔다. 그 행복을 질투해야 한다. 이를 갈고 원한을 품어야 한다. 부술 생각으로 덤벼야 한다. 혹은 그런 부조리로부터 실낱만큼의 승인도 구하지 말고 떠나야 한다. 딸들은 사회적 승인이라는 면에서 아직도 수천 년간 공고했던 림보에 - P82

갇혀 있다. 우리는 누굴 용서할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의 승인도 용서도 바라지 않는다. 기대하는 상대도 없는데 용서를 베푸는 것부터가 자기 기만이다. 딸들은 누구도 용서할 필요가 없다. - P83

복수하기 위해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계속 접촉하는 것이 서로에게 해롭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것이다. - P85

용서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저주와 앙심을 품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최소한의 자기방어에 가깝다. - P88

다른 관대하고 훌륭한 딸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아도 된다.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용서하지 않고 살아지는 삶도 숭고한 것이다. 용서하지 않고 잊어버리지 않아서 외로워지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존엄은 혼자 죽기 위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합당한 존중을 주지 않는, 언제나 꿍한 채 내가 자신들에게 무언가를 빚지고 있다고 믿는 가까운 이들에게 투항하느니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편이 낫다. 남이 나를 한 대 치는 것은 용서해도 내가 남을 한 대 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딸들의 불균형한 정신은 세상의 온갖 가스라이팅에 취약한 토대다. 나는 남의 정강이를 걷어차지 않을 것이며 그러므로 나의 정강이를 걷어찬 인간도 용서하거나 이해하지 않는다. 거기부터 출발해야 한다. - P89

아무도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나를 세상에 내놓은 사람들이라도 그렇다. - P90

나는 최근까지 이 글을 쓰지 못했다. 집을 떠나 가족 혹은 친척 중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은 지 한 달이 지나고 세 달이 지나고 일 년이 흐르고 마침내 삼 년이 되기까지 나는 언젠가 아무렇지 않은 듯 집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아마 용서하는 법에 대해 쓰게 될 거라고, 많은 이가 그렇듯 이해와 존중과 그리고 마침내 용서와 합일로 가는 위대하고도 사적인 여정에 대해 쓰게 되리라 믿었다. 그래서 그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느라 혼자인 삶에 대해 함부로 쓰기 시작할 수 없었다. 언젠가 상담을 받고 책을 읽고 먼 나라의 해변에 앉아 모든 진실을 깨달은 후에 편안해지리라, 많은 영화에서 그렇듯 홀가분하게 응어리를 내려놓고 ‘건강한거리‘를 유지하는 가족이 되리라고 상상했다. 엄마와 - P90

싸우고 남동생에게 쌍욕을 퍼붓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내가 어렴풋이 환상처럼 그렸던 화해와 이해와 용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아는 것은 가족을 용서하고 가족에게 이해받고 딸로서 어떤 승인을 얻으려는 노력을 온전히 포기한 후에 내가 잠을 잘 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상상해온 고급하고 성스러운 용서와 사랑 같은 장면은 나에게 영영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혼자서 그들을 이해하려 분투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평화를 얻었다. - P91

여자가 망하지 않고 그냥 사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해야 한다. 남자 - P113

와 서사를 섞지 않아도, 그리고 또 눈부시게 성공하지 않더라도 여자가 안 망하고 삼시 세끼 잘 먹고 편안하게 따뜻하게 잘 자고 쫓기지 않고 친구와 잘 지내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여자 안 망하는 이야기를 앞으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해야 한다. - P114

딸에게 끊임없는 쓸모의 증명을 요구하는 곳을 떠나온 여자들은 항상 빼어난 인간일 필요가 없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줄 것‘을 들고 나타나는 빼어난 여자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그런 이들끼리 서로에게 무엇도 증명할 필요 없이 맺을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다. - P138

지긋지긋한 이사가 끝나고 내가 쟁취한 테라스에서 하늘을 보게 되었을 때 생각했다. 마동석 백 명이 와도 우리를 구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를 구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들여다보고 함께 분노하고 비상 연락망에 전화번호를 빌려주고 네게 그런 해코지가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하고 보살피면서 서로의 바위가 될 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 누가 우리에게 어떤 좌절을, 무시를, 혼란을 일으키고 또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기각하고 삭제하려 했는지 기억하고 기록할 것이다. 그들을 현장에서 잡아 불러낼 것이다. 서로에게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골목 끝에 혼자 살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미친 여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여자에게 무엇 때문에 분노했냐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옆집 여자가 될 것이다. 젊어서는 방긋방긋 웃고 나이 들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겨우 돌아버리지는 않은 - P152

여자라며 생존을 허락받는 세상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증인이 되어줄 것이다. - P153

나를 다시 살고 싶게 만든 것은 여자들이다. 젊은 나이에 억대 연봉을 받는다며, 사업체를 차렸다며, 외제차를 여럿 타봤다며 이 모든 게 정말 대단하고 칭송받을 일이니 너희도 나에 대해 잘 알아두라며 이름이며 얼굴을 드러내고 떠벌리는 또래 남자들과는 달리 정말 빼어난 능력을 갖고도 주변의 시기를 받을까 봐, 누가 해칠까 봐 조용히 사는 똑똑한 여자들이 있었다. 남의 외모나 나이를 헐뜯지 않고서는 농담 비슷한 것도 지어낼 수 없는 남자들이 지긋지긋했을 때, 저들이 정말로 인간의 평균을 대표하는가 하고 좌절했을 때 여자들이 있었다. 익명 뒤에서 진짜 알짜배기 충고를 해주는 능력자들이, 떠벌리지 않고 후원 계좌에 조용히 입금을 쏴 - P184

주는 ‘히어로‘들이 다 여자였다. 십오 년 전에는 떠들썩하게 제가 세상을 바꿀 기술을 개발해냈다고 하다가 이제는 자기들이 만들어낸 세상이 사람들을 외롭게 한다고 비장하게 평가를 놓으며 또 세상을 바꾸자고 하는 실리콘밸리의 남자 백만장자들에 신물이 날 때, 억대 연봉을 포기하고 직함을 버리면서 자기가 했던 일을 고백하고 회사가 하는 일을 고발하며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 여성 테크 거인의 기사를 읽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천천히 손을 바닥에 짚고 일어났다. 고개 돌려 어깨 너머를 힐끗 볼 생각도 못 할 만큼 무섭다가, 길을 건너다가도 ‘그럼 죽지 뭐‘ 하다가, 아주 천천히 내 호흡이 돌아왔다. - P185

원가정의 36평 집에서 신혼의 28평 아파트로 옮긴, 그런 인생을 사는 평행우주의 내가 있다면 지금의 나를 보고 인생 망했다고 슬퍼했겠지만, 지금의 나에게 - P186

는 매트리스에서 침대로의 변화가 인생의 분수령이다.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마을을 짓겠다는, 지금 여기서부터 진짜 집을 만들어보겠다는 결심이다. - P187

아무리 일상이 평온하고 날씨가 좋고 벚꽃이 떨어지고 하는 날이라도 가방 속에 맥주병을 품고 걸었다. 가부장이나 가부장 트랙의 로맨틱한 관계가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되레 그 무능력을 숨기기 위해 나를 제물 삼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포식자가 아무리 잔인했어도 그들이 "그런데……" 하고 돌아서서 나를 손가락질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울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술을 먹었기 때문에, 내가 씨발놈아 좆같은 새끼야 큰 소리로 욕하는 여자이기 때문에, 분노하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해서 내가 살아남았다고 확신한다. - P192

갈등이 생길 때마다 나는 사정을 정확히 설명하고 분명히 사과하고 무엇보다 상대에게 충분한 거리를 제공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나를 빨리 용서하라고 닥달하지 않고 혹은 어떻게 하면 좀 과장을 보태 전부 내 책임은 아닌 것처럼 만들까, 어떻게 하면 불쌍하게 보일 수 있을까 하는 비열한 트릭을 쓰지 않고 오직 정직하게 나의 과오를 마주하기로, 반대의 경우라면 화가 났을 때 바로 반응하지 않고 최소 하루 침묵의 시간을 갖기로. - P197

다 늦어 가족을 떠났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제때를 넘긴 후였다. 분노를 이해받거나, 상으로 주어지지 않는 종류의 순수한 친밀함을 제공받거나, 노력이나 성과에 대한 승인을 끝내 쟁취하지 못한 채로 사춘기를 지나 신체의 노화가 찾아오는 시점까지 그 갈구를 질질 끌었고, 내가 영영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원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고 그제서야, 귀엽지도 안쓰럽지도 않은 나이에 집을 나왔다. 모두와 연락을 끊었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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