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님이 보고 계셔 - 홍칼리 무당 일기
홍칼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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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이 된 나를 걱정하는 상상과 다르게, 나는 행복해서 무당을 하고 있다. 무당이 된 후 가장 좋은 점은 누군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존재를 끌어안을 수 있고 정화할 수 있는 이 직업이 좋다. 낮에는 따뜻하게 사람들을 감싸고 밤에는 고요하게 기도할 수 있는 일상이 행복하다.
이 달콤한 케이크를 계속 먹고 싶어서 무당이 된 것 같다.
이 케이크를 사람들과 나누어 먹고 싶다. - P8

내 몸은 내 신당이다. 나의 신당에는 그림이 많다. 이곳에는 절대 지워지지 않는, 지우지 않을 상징들이 새겨져 있다. 손님들에게 고유한 기운을 담아 부적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부적을 만들어 신방에 걸어놓았다. 그림 많은 나의 몸은 그 자체로 부적이 된다. 손님들이 부적 타투 디자인을 의뢰하기도 한다. 나는 손님에게 꼭 필요한 기운을 디자인해 평생 간직할 타투 부적을 그려준다.

차별받고 밀려난 몸들이 나를 방문한다. 무당은 신이 되어 왕처럼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과신 외의 모든 것 사이에 서서 낙인찍힌 몸까지 끌어안는 존재다. 다양한 몸들과의 만남이 오늘도 설렌다. 그래, 내가 이래서 무당이 된 거지. - P41

나는 세상이 궁금하고 다른 이들이 궁금해서 표현을 시작했다. 그 연장선에 무당이 있다. 당신을 꿰뚫는 게 아니라, 당신도 잘 모르는 당신의 사연을 만나고 싶어서 무당이 됐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흥과 한을 나누는 직업을 가진 무당 스스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기존의 이미지를 넘어 내가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이 글을 ‘무당 일기‘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렇다. 무당이라는 이름표에 묻은 이런저 - P91

런 편견을 물어보고, 나아가 따져보면서 얼룩을 벗겨내고 싶다. 아무렇지도 않게 흥얼흥얼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내 몫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무당 홍칼리입니다." - P92

굳이 수식어를 붙이자면, 커리는 귀신을 보는 개가 아니라 보호자인 나를 잘 지켜보는 개다. 나는 커리의 보호자지만, 커리도 나를 돌본다. 커리와 산책하러 다녀오면 나는 흙이 묻은 커리의 작은 발바닥을 닦아주고, 드라이어로 말려준다. 내가 아플 때 커리는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나의 얼굴과 손을 핥아준다. 그런 커리의 체온에 통증을 잠시 잊는다.
나와 커리는 세상 많은 존재가 그렇듯 혼자 우뚝 솟은 게 아니라, 연약한 몸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커리와 함께 사는 이유를 굳이 말하자면,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여서요"라고밖에 답할 수 없다. 무당도 돌봄을 나누며 살아가는 지구의 구성원 중 하나라는 걸, 나는 이 새삼스러운 사실을 꼭 짚어야 한다. - P111

모든 제물에는 대가가 따른다. 제물을 바친 사람은 그보다 배로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야 온전히 자신에게 복으로 돌아올 수 있다. 덕을 쌓으면 복을 받는다는 당연한 말처럼, 굿에도 그런 이치가 작동한다. 굿은 무당이 신을 대접하는 무속의례로, 꼭 신만이 아니라 굿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위해 한을 풀거나 흥을 나누는 축제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굿을 하는 행위 자체가 먹을 것 없는 동네 사람들에게 베푸는 행위였기에 더 효험이 있었을 거다. 게다가 지금처럼 공장식 축산이 없었기에 굿판에 올라오는 돼지에게도 한이 덜했을 거라고 느낀다. 돼지를 죽일 때는 돼지를 위해 기도를 올렸을 거다. 그 돼지를 나누어 먹으면서 사람들은 감사함을 느끼고, 좋은 에너지를 교환하기도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한국에서 유통되는 대부분의 돼지는 공장식 축산으로 길러진다. 좁고 더러운 축사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먹기만 하다가 살 수 있던 생보다 훨씬 짧게 머물고는 죽임을 당한다. 이제는 손쉽게 값싼 돼지고 - P130

기를 구할 수 있다. 그들은 효험 있는 ‘제물‘이 아니다. 이미 이 세상의 희생자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제물로 생산되는 돼지를 굿판에 또 올리는 건 이미 죽은 존재를 다시 한번 난도질하는 것과 같은 행위가 아닐까.
돼지뿐 아니라 닭, 오리, 소도 비슷한 상황이다. 그들은 평생햇볕 한 줌 못 보고 몸이 겨우 들어가는 케이지 안에 갇혀서 강제로 임신당하고 생산성이 줄어들면 고기로 도축된다. 사육장에는 그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고, 그들의 고통은 한이 되어 몸에 저장된다. 우리는 식탁 앞에 놓인 그들의 한을 먹는다. 돌고 도는 한의 수레바퀴를 끊어내는 게 무당의 역할이라면, 나는 어떻게 이 광경을 마주해야 할까. 신령이 정말 억울하게 죽은 생명의 한을 먹고 싶어할까?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그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비거니즘을 결단하고 실행하는 게 신령의 힘 아닐까?

비건은 단순히 고기를 안 먹는 생활 방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 그 상태로 살아가겠다는 지향이다. 들리지 않는 고통에 귀 기 - P131

울이고, 내가 등진 아픔은 없는지 살피는 태도다. 공장식 축산으로 살아서 고통 받고, 인간이 만든 환경 때문에 병에 걸리고, 도축되거나 살처분당하는 동물들의 고통은 뉴스에서도 말해지지 않는다. 그들의 넋은 어떻게 되는 걸까? 무당마저 그들의 고통에 고개를 돌리면, 누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줄까.

나는 굿을 받으라는 이야기를 듣고 온 손님에게 동물을 올려야하는 굿판 대신 봉사활동을 하라고 말씀드리곤 한다. 봉사하는 것이 굿을 여는 것보다 더 효과적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굿을 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되면 돼지 머리나 닭의 살점이 필요하지 않은 굿판을 열면 된다. 나물 반찬과 과일로 꾸려진 제사상에 향을 피우고, 억울하게 죽은 돼지와 오리, 닭들을 위한 위령제를 함께 열고 싶다. - P132

무당은 인간과 신 중간에 있는 존재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생활하는 무당은 어쨌든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노동자이기도 하다. 많은 노동자가 그렇듯, 많은 무당도 불평등한 운동장을 살아가는 시민들이다. 그런 무당의 노동이 노동으로 인정받으면 좋겠다. - P139

무속신앙에는 뚜렷한 선과 악이 없다. ‘허주‘라는 잡귀신은 ㅆ지만 그 존재도 한을 품은 혼일 뿐이다. 우리는 그 존재를 내쫓기 위해 칼을 휘두를 수도 있고 불을 지르거나 닭 머리를 잘라서 살을 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전부가아니며, 전부여서도 안 된다. - P153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에너지도 그렇다. 차별받기 쉽고 존재가 지워지는 위치에 있는 어린 소녀가 늘 악령에 시달리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유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퇴마의식이 아니라, 그들이 죽겠다고 소리 지르지 않아도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회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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깻잎 투쟁기 -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한 1500일
우춘희 지음 / 교양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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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를 시작하기 전 나는 그들과 나의 삶이 무관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커피를 좋아해서 공정무역 커피와 아프리카산자들의 삶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깻잎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표정이 어떤지는 몰랐다. 동물복지 제품을 고르며 스스로를 ‘가치‘ 소비자로 여긴 적도 있지만 그 동물을 다루는 손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유기농, 무농약, 친환경, 로컬푸드, 동물복지, 무항생제 같은 표시에만 안심하며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를 주저한 시간들이었다.
4년이 넘게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들이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해 있음을 보았고, 그들의 눈물로 우리의 - P13

밥상이 차려지고 있다는 현실도 알게 되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건 우리 밥상 위의 인권이다.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들이 처한 문제를 같이 고민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따뜻한 밥상을 차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 P14

사람이 온다는 건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이라는 시구를 좋아한다. 이주노동자는 단순히 ‘인력‘이 되어 우리 사회의 노동력 빈칸을 메우러 오는 것이 아니다. 이주노동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 보따리 짊어지고 오는 사람들이다. 그 보따리 안에는 삶도 있고, 꿈도 있고, 울음도 있고, 웃음도 있다. 특히 이주노동자의 인권이 있다. 이주노동자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밥상도 건강하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 P15

앞서 언급한 컨테이너 2개로 만든 집에 다섯 명의 노동자가 살면 얼마를 기숙사비로 내야 할까? 한 사람당 기숙사비 약 15만 원에 각종 공과금 5만 원을 더해 약 20만 원씩 내야 한다. 열 평 남짓 화장실도 없는 그 집에 고용주는 이주노동자로부터 월세 1백만 원을 합법적으로 받을 수 있고 실제로 그랬다.
단독 주택이나 빈집을 개조해 기숙사를 만든다면, 이는 상시 주거 시설로 간주되어 고용주는 한 사람당 월급의 15퍼센트인 약 30만원을 받을 수 있다. 여기에 전기세, 수도세, 인터넷통신비 등을 합하면 한 사람당 5만~10만 원이 추가된다. 따라서 이주노동자 다섯 명을 고용한 사업주가 농촌의 빈집을 고쳐 기숙사로 제공하면 월세 2백만 원을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서울 한복판에 있는 집의 월세가 아니다. 농촌의 논밭 한가운 - P32

데 다 쓰러져 가는 폐가를 대충 고쳐놓은, 한겨울에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집의 월세가 2백만 원인 것이다.
이주노동자는 월급에 비례해서 기숙사비를 내기에 매년 최저임금이 올라도 월급 인상 액수가 그리 크지 않다. 세입자의 월급이 올랐다고 해서 그때마다 집주인이 월세를 올려 달라고 요구한다고 생각해보라.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주노동자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좁고 더러운 공간에 여럿이 함께 살면서도 어마어마한 월세를 낸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인에게 상식적이지 않은 정책은 이주노동자에게도 부당한 정책이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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깻잎 투쟁기 -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한 1500일
우춘희 지음 / 교양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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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도급제는 불법이죠. (나: 네? 불법이라고요?) 네. 박스당 가격을 매기니까 그런 도급제는 불법이죠. 그런데 이만큼 깻잎을 따주지 않으면 우리가 남는 게 없어요."
고용주연합회의 한 임원이 한 말이었다. 한 사업주는 "우리가 하는 일은 법이랑 맞지 않으니까"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힘없는 농민들이 "힘을 합치고 단합해서" 농업 "실정에 맞지 않는" 최저임금을 주지 않아야 하며, "우리(농민)끼리 룰(규칙)을 정해서 외국 애들 꼼짝 못 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소수의 고용주만 이런 인식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만나본 한 고용주는 고의적 임금 체불을 시인하며 이주노동자들은 자기 나라로 곧 떠날 것이기 때문에 돈을 안 주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를 고용해서 돈을 제법 벌었지만 여전히 이들에게 최저임금을 주는 것이 불만이었고, 어떻게든 법을 어기면서까지 이주노동자들을 조금이라도 일을 더 시키고 월급을 덜 줄지 궁리하는 고용주도 있었다. 성희롱을 일상적으로 저질렀지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사업장 변경은 안 된다고 소리친 고용주도 있었다. 또 다른 고용주는 근로기준법 위반과 갑작스런 해고 통보로 인한 해고 예고 수당(근로기준법 제26조에 의해 사용자가 적어도 30일 전에 예고하지 않고 해고했을 때 지 - P83

급해야 하는 30일분 이상의 통상 임금)을 더해 합의금을 물어주게 되자 "농민이 당했다"고 표현했다.
사업주들과 인터뷰할 때마다 "농민은 힘이 없다" "농민이 힘들다" "농민이 피해를 본다" 같은 표현을 많이 들었다. 그들은 ‘피해자/약자는 농민‘이라는 생각이 강해 보였다. 우리나라 절대 다수의 농가 형태가 기업농이 아닌 가족이나 소농인 것을 감안하면 농민들이 소득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에 우리 사회에서는 정책적으로 농업인에게 많은 혜택을 주고 있다. 대부분의 농업인들은 "직불금부터 시작해 각종 보조금과 유류·전기세 혜택, 국민연금·의료보험 감면, 농협 조합원가입이나 농자금 대출"을 비롯해 각종 정부 지원과 세제 혜택을 받는다.
농민이 아무리 사회에서 인정하는 약자이고 농가의 현실이 아무리 열악하더라고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것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들은 고용주가 지켜야 하는 법에 대해 귀를 기울어야 한다. 이주노동자들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생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 P84

내가 만난 일부 사업주들은 이주노동자에게 공짜 노동을 시키며 사실상 최저임금을 주지 않으면서 그마저도 주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쟤네(이주노동자들) 못사는 나라에서 왔어. 캄보디아에서는 한 달 최저 월급이 20만~25만 원인데 여기에서는 일고여덟 배 더 벌어가잖아. 그러니까 한국인과 똑같이 최저임금을 적용하면 안 되지. 쟤네 월급 조금만 줘도 여기서 일할 거잖아. 쟤네 퇴직금도 받잖아. 한국만 손해 본다니까." - P92

매년 최저임금 책정을 두고 보수 언론과 경영계는 ‘최저임금 차등 적용‘을 주장한다. 소상공인이나 영세 사업자의 임금 인상부담을 완화하고 노동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한 이들의 고용을 촉진하기 위해, 주로 지역·업종·규모별로 차등하거나 다소 생산성이 낮은 청년과 고령자를 차등 적용하자는 제안이다. 농업인 사업주도 이주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인다. 이에 대해 2019년 9월 캄보디아에서 만난 한국산업인력공단 캄보디아EPS(고용허가제)센터 여동수 센터장은 이렇게 말했다.
"고용허가제는 ‘원조‘가 아닙니다. 내국인이 일하지 않는 곳에서 외국인을 고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저임금으로 노동력을 공급받으니 오히려 우리가 더 혜택을 보는 것입니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최저임금보다 더 낮게 임금을 주는 것은 차별입니다."
고용허가제는 외국인 고용을 신청하는 사업주에게 내국인 구인 노력을 의무화하고 있다. 그 취지 자체가 내국인(선주민)이 일하지 않는 곳에 외국인(이주민)을 고용한다는 것이다. 선주민이라면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지 않을 곳에 이주노동자가 그 자리를 촘촘히 메우고 있다. 여동수 센터장의 말대로, 한국과 사업주 입장에서는 최저임금으로 구하지 못할 노동력을 이주노동자가 제공하니 더 혜택을 보는 셈이다. - P93

캄보디아 출신 여성 노동자 비스나(20대) 씨에게 한국의 사업주들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한국인 노동자보다 낮은 최저임금을 주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는 눈을 부릅뜨며 내게 반문했다.
"그래요? 우리가 못사는 나라에서 왔으니까, 최저임금의 절반만 준다고요? 그럼 못사는 나라에서 왔으니까 세금도 절반만 낼게요. 못사는 나라에서 왔으니까 음식 값도, 버스 값도 절반만 낼게요. 그러면 될까요?"
비스나 씨의 지적대로 이주노동자가 ‘못사는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보다 최저임금을 더 적게 책정해야 한다면 식비, 주거비, 교통비, 각종 세금도 더 적게 내야 할 것이다. 이주노동자가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것이 이주노동자에게 최저임금보다 더 낮은 급여를 주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 P94

2019년 고용노동부는 최저임금 차등 적용은 타당하지 않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최저임금위원회는 최저임금 차등 적용이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전문가 18명으로 구성된 ‘최저임금 제도개선 태스크포스(TF)‘를 꾸려 그 타당성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말해 다수의견은 최저임금 차등 적용은 어렵다는 것이었다. TF의 권고안에는 자세한 이유가 나와 있다. 업종별 구분은 어떤 업종을 차등하든 그 타당성을 찾기 어려운 데다 최 - P95

저임금보다 낮은 저임금 업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낙인 효과가 발생한다. 지역별 구분은 사람들이 그 지역에 가서 일하는 것을 회피하게 만들 것이고 지역 균형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연령별 구분은 우선 청년층의 생산성이 다른 연령에 비해 특별히 낮지 않기에 임금을 감액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 고령층에 대한 감액은 연령을 이유로 한 차별이자 다른 선진국에서도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는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의 일부 주의 경우 주로 17~20세 미만 노동자에게 일정 기간에 한해서만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권고안에는 이주노동자 차등 적용은 국적, 인종과 관계없이 균등한 대우를 규정한 국제노동기구 제111호 차별 협약에 위반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외국인에 대한 최저임금 차등 적용은 일자리를 구하는 국내 노동자에게도 결코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 사업주는 더 적은 임금을 주면서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려고 하지 내국인 채용을 꺼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악영향을 문제 삼지 않더라도 본질적으로 최저임금 차등 적용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어긋난다. 최저임금은 한국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국적, 인종, 성별, 성적지향 등에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받아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그야말로 ‘최저‘ 기준이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 차등 지급은 ‘차등‘이 아니라 ‘차별‘일 뿐이다. - P96

고용허가제를 새로 도입함으로써 산업연수생제도의 폐해가 일부 해결된 것은 사실이지만 고용허가제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이주노동자를 옭아매는 조항 때문에 비판을 많이 받는다.
가장 문제가 되는 조항은 바로 사업장 변경 권한이 사업주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외국인고용법 제25조 제1항). 사업장 변경 제한은 우리 헌법에서 보장하는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 노동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을 오랫동안 받아 왔다. 앞 - P117

서 설명했듯이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변경하고 싶으면 근로계약해지에 대해 사업주의 동의를 얻거나 아니면 사업주의 위반 사항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사실상 이주노동자는 사업주가 동의해주지 않으면 일자리를 옮기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셈이다. - P118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읽는 동안 많은 이주노동자의 얼굴이 스쳐갔다. 전북 미나리밭에서 일을 한 캄보디아 남성 노동자 두 명은 한겨울에도 물이 차 있는 밭에 고무장화를 신고 들어가서 미나리를 수확했다고 말했다. 일이 너무 힘들어서 고용주에게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더니 사업주는 1백만 원을 내놓고 가라고 윽박질렀다고 했다. 전남 담양 딸기밭에서 하루 12시간 넘게 딸기를 따다가 정말 이렇게 일하다가는 죽을 것같다는 생각에 ‘지구인의 정류장‘으로 도망친 여성 노동자도 있었다. 경남 깻잎 밭에서는 하루 10시간씩 매일 깻잎 1만 5천장을 따야 하는데, 정해진 양을 채우지 못하면 월급에서 깎는다며 도움을 요청한 이주노동자가 있었다. 서울 서대문구 떡집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근로계약서에는 오후 3시부터 12시까지 일한다고 나와 있는데, 새벽에 갓 만든 신선한 떡을 납품해야 한다는 이유로 오후 5~6시쯤부터 새벽 4~5시까지 하루 - P123

12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하루만 쉬었다고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입에 들어가는 떡을 밤새 만들어냈지만, 정작 본인들은 일하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적도 많다고 하소연했다. 이들은 모두 사업장을 옮기고 싶었지만 고용주가 사업장 변경에 동의해주지 않아서 발이 묶여 있었다. 고용허가제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사실상 이들의 강제 노동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도우리 헌법 정신에 부합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일까? - P124

그동안 정부는 이주노동자의 인력만 이용할 뿐 그들이 한국에 정주해서 살 수 있는 기회는 결코 주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 왔다.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에게 ‘인력‘만을 요구한다. 이주노동자의 삶은 ‘영원히 일시적인(permanently temporary)‘ 상태이다. 이주노동자는 한국에 와서 일을 하지만 여기에서 정착해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지는 못한다. 정해진 기간이 다 되어 비자가 만료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며, 그 빈자리를 다른 이주노동자가 와서 채운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는 단순히 ‘인력‘ 그 자체가 아니다. - P127

이주노동자는 그의 손과 더불어 그의 일생이 함께 온다. 이 나라의 국민은 아니더라도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간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해먹고, 축제를 열고, 마을과 사회에 어울려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이주노동자가 온다는 것은 단순히 ‘인력‘이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오는 일이다. 이주노동자의 손과 함께 삶과 꿈도 온다. - P128

아이러니하게도 인력사무소의 세계에서 미등록 노동자들의 노동력은 최저임금이 보장되어 있었다.
인력사무소의 노동자들은 터무니없이 낮은 돈을 주는 곳에서는 일하지 않는다고 했다. 제대로 된 돈을 받고 일하는 것, 곧 자기가 생각하는 기준에 따라 일할 곳을 정하는 것, 김동규 씨의 말마따나 이곳에서는 그들의 ‘인권‘이 보호되고 있었다. - P175

고용허가제 업무 편람에 따르면 이주노동자가 성폭행 피해를 이유로 사업장 변경을 신청할 경우, 고용 센터에서 조사 후 피해 사례가 인정되면 ‘긴급 사업장 변경‘이 허용된다. 피해자의 진술 외에 증거가 없을 경우 상담 기관에서 상담을 받도록 안내하고 그 상담 결과를 토대로 삼아 사업장 변경 여부를 판단한다. 이 모든 사업장 변경 절차는 신속하게 진행하기 위해 3일 이내에 마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만일 수사 결과 허위나 거짓(혐의 없음)으로 판정이 날 경우, (긴급하게 사업장을 변경한 경우에도) 악용 사례 방지를 위해 해당 이주노동자에게 ‘불이익‘을 부과한다. 새로운 사업장 알선을 중단하거나 고용 관계 해지후 출국 조치를 단행하는 것이다.
‘이주인권사례연구모임‘에서 2020년에 펴낸 <고용허가제 업무편람 다시쓰기》에서 지적한 대로 "성폭력 피해자의 신고가 - P191

접수되면 원칙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로 긴급 사업장 변경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 고용 센터는 "수사나 법률의 해석 및 판단을 하는 기관이 아니고, 이에 대한 권한도 없다." 또한 "성폭력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지원하고 사례를 다룰 수 있는 전문성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고용센터의 공무원에게 성폭력 여부를 판단하게 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볼 수 없다. 추가 피해나 보복 행위를 막기 위해서라도 빠른 분리가 필요하다.
게다가 ‘혐의 없음‘이란 판정만으로 이주노동자에게 불이익 조치를 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혐의 없음‘이란 피의 사실이 범죄로 인정되지 않거나 피의 사실을 인정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는 경우를 의미하며(검찰사건사무규칙 제69조), "검찰도 혐의 없음의 결과만 가지고 거짓 고소로 유추하지 않는다. 성폭력 사건의 경우, 둘만 있는 공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피해자의 진술 이외에 물적 증거가 확실치 않아서 법적인 입증이 어렵다. 상황이 이러한데 한국말이 서툴고 한국 문화도 낯선 이주노동자가 자신의 피해를 증명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따라서 ‘혐의 없음‘을 근거로 출국 조치를 한다면, 사실상 성폭행 피해신고 자체를 막는 효과를 가져올 뿐이다. - P192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현재 건강보험 의무 가입 제도가 인종 차별적이라고 비판했다. 첫째, 2020년 기준으로 보험료가 최소 113,050원으로 높게 책정되어 있다. 내국인은 소득과 재산 수준에 따라서 보험료가 산정되지만 외국인은 이런 과정 없이 내국인 보험 가입자의 평균 보험료를 낸다. 2017년 기준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월평균 근로소득은 147만 원으로 내국인의 67퍼센트밖에 안 되지만, 보험료는 내국인의 평균 보험료와 똑같이 냈다. 외국인은 더 적게 벌고 상대적으로 보험료를 더 많이 내는 셈이다. - P201

둘째, 내국인은 배우자, 직계존속, 직계비속 등이 피부양자로 묶일 수 있지만, 외국인은 배우자와 미성년 자녀만 피부양자로 묶일 수 있다. 따라서 성인인 외국인 자녀가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경우, 세 명 각자에게 113,050원으로 보험료가 부과되어 한달에 적어도 339,150원을 내야 한다.
셋째, 보험료가 체납되면 체류 자격에 불이익을 준다. 보험료가 3회 초과 체납되면 비자 연장이 안 되고 출국 조치를 당할 수 있다. 건강보험료를 체납하면 의료 시스템 사용에 불이익을 주어야지(보험료를 완납할 때까지 건강보험 급여가 제한되기에 의료 시스템 사용에도 불이익을 주고 있다), 이주민의 체류 자격까지 엮어서 불이익을 주는 것은 합당한 조치가 아닌 명백한 차별대우이다.
넷째,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이렇게 보험료를 매달 내더라도 이주노동자들은 이에 합당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주민의 의료 서비스 접근을 위한 정책 지원이 대단히 부실하다. 기본적인 통역 서비스조차 거의 지원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건강보험료 납부에 대한 정보 제공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 P202

그러나 오래전부터 유엔, 국제노동기구, 국제이주기구, 유럽연합 등 국제 사회에서는 초과 체류한 이주민을 ‘불법 체류자‘라 부르는 것은, 그들을 ‘불법적인 존재로 낙인찍어 혐오를 조장하기에 ‘미등록‘ ‘비정규‘ 같은 중립적인 용어로 써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되어 왔다. 초과 체류의 문제는 행정 절차 위반이지 형사상 범죄가 아니기 때문에, 체류 문제가 적발되면 정부가 정한 절차에 따라 조치를 취하면 된다. 교통 법규를 위반한 운전자에게 ‘불법 운전자‘라고 하지 않듯이, 초과 체류한 이주민에게 ‘불법 체류자‘라고 할 필요가 없다. 국내 인권·이주단체에서도 사람의 존재 자체가 ‘불법‘일 수 없기 때문에 ‘불법 체류자‘ 대신 ‘미등록 이주민‘ ‘미등록 노동자‘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다. 국가인권위원회도 ‘미등록 체류자‘ ‘미등록 노동자‘라는 표현을 권고했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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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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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보다 훨씬 고급 능력자. 그렇게 첨벙첨벙 다 잡아 없애고 돌아다니면 뭐 해요? 돈 되는 일을 해야지."
문득 아주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마음의 한 부분이 잠시 경련을 일으키듯 움직였다. 은영도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위험하고 고된데 금전적 보상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은영의 능력에 보상을 해줄 만한 사람들은 대개 탐욕스러운 사람들이었다. 좋지 않은 일에만 은영을 쓰려고 했다. 아주 나쁜 종류의 청부업자가, 도무지 되고 싶지 않았다. 은영은 다른 종류의 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어느새부터인가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버렸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은영의 일은 은영이 세상에게 보이는 친절에 가까웠다. 친절이 지나치게 저평가된 덕목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은영과 인표는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 P117

폭력적인 죽음의 흔적들은 너무나 오래 남았다. 어린 은영은 살아간다는 것이 결국 지독하게 폭력적인 세계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피할 수 없이 다치는 일이란 걸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 P185

"있잖아, 다음 선거에는 너희들한테도 선거권이 있어."
대흥의 설명을, 어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를 특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끄트머리에 그렇게 덧붙여 주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이의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흥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 얻었다. 뒤에 오는 이들은 언제나 더 똑똑해. 이 아이들이라면 우리보다 훨씬 나을 거야. 그러니까 그 바보 같은 교과서를 막길 잘했어. - P233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인표가 은영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크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잘못 들은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인표가 아니라 은영 스스로가 말한 것 같기도 했다. 거짓말이어서,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 P265

서로의 흉터에 입을 맞추고 사는 삶은 삶의 다른 나쁜 조건들을 잊게 해 주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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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입양했습니다 - 피보다 진한 법적 가족 탄생기
은서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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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입양 가족이 됐다는 소식에 누군가는 "어리가 결혼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하고 물었다. 우리는 결혼 대신 친구와의 동거를 선택했고, 남편과 아이로 이루어진 가족 대신 친구를 입양해 가족이 되는 방법을 선택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는 여전히 ‘미완‘ 상태인가 보다. 친구와 사는 것은 임시 가족이고, 언젠가는 각자 결혼할 거라고 전제한다. 결혼한 부부에게는 이혼하면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지 않으면서 우리에게는 둘 중 한 사람이 결혼하면 입양이 깨지는 거냐고 묻는다. - P7

우리가 입양 가족이 된 건 현재로써 서로의 법정대리인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생활동반자법이 있었다면 우리는 입양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끼리 반려인이라는 수평적인 관계가 아닌 부모 자식이라는 수직적인 관계가 되는 건 원하지 않았으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함께 살며 힘이 되는 존재에게 가족의 권리와 의무를 갖게 하는 건 개인을 위해서도 국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부디 다양한 가족 형태를 법적 테두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생활동반자법이 조속히 제정되기를, 다양한 형태의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의 법적 보호자가 돼 안정적으로 살게 되기를 소망한다. - P8

제주 시절에 만나 절친이 된 백은 내가 어리와 살면서 안정감을 느끼게 된 것 같다고, 우리가 사는 모습이 편안해 보여 부럽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나보다 생일이 빠른 그 친구에게 나를 입양하라고 했다. 그럼 딸도 생기고 더불어 손녀까지 생기게 된다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자고. 현재 법으로는 혼자 사는 사람이라도 입양을 통해 얼마든지 여러 명의 가족을 만들 수 있다. A가 B, C, D를 입양해 엄마(혹은 아빠)와 여러 명의 자녀를 만드는 게 가능하다. 아니면 A가 B를 입양하고, B가 C를 입양하고, C가 D를 입양해 딸(혹은 아들), 엄마(혹은 아빠), 할머니(혹은 할아버지),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까지도 만들 수 있다. 결혼과 혈연 중심의 가족 생태계를 교란시켜버리는 것이다. - P231

처음 생활동반자법이 논의됐을 때 참 반가웠다. 다양한 형태의 생활공동체를 보듬어 누구나 특별한 한 사람을 서로의 법적 보호자로 지정할 수 있다는 것. 믿고 의지하는 사람과생을 나누며 외로움과 우울을 막을 수 있다면 돌봄으로 인한 복지 비용도, 고독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노인들에게 더 필요한 법이 아닐까 싶었다.
법과 제도가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포용하지 못한다면, 우리처럼 성인 입양이라는 방법으로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우리는 가족이 생겨 든든해졌지만, 우리 같은 방식으로 사는 사람이 늘어났을 때 그것이 과연 건강한 사회의 모습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우리 같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자꾸 생겨나 이것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면 좋겠다. 그렇게라도 생활동반자법의 필요성을 알리고 법 제정을 보다 앞당겨 - P240

사람들이 입양이라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아도 서로의 보호자가 돼안정적으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어쩌면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갈 수도 있다. 생활동반자법에 대한 논의가 더 진행되기 전에 자신만의 틀에 갇힌 사람들이 성인 입양부터 제한하려 들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생활공동체를 넓은 가족의 범주 안으로 끌어안는 대신 더욱 배척하기 위해서 말이다.‘정상가족‘ 프레임에 갇혀버린 이들에게 우리가 아무리 어떤 이야기를 한들 그들은 그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만 믿고 싶어 할 테니까. 안타까울 뿐이다. - P241

이미 오래전부터 다양한 형태의 가족은 존재해왔다. 다양한 가족 형태를 법적 테두리 안에 받아들인다면 우리처럼 입양이라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 함께 사는 구성원이 꼭 결혼으로 맺 - P241

어진 관계가 아니더라도, 나이 차가 많건 적건, 이성 간이든 동성간이든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서로 의지하며 살면 되는 거 아닐까? 그렇게 된다면 1인 가구의 돌봄 비용이 줄어들어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건 둘째 치고라도, 1인 가구의 외로움을 해소하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옆에 함께 있는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다. 1년에 몇 번 만나는 가족들이 채워줄 수 없고, 돈으로도 채울 수 없다.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과함께 살고, 함께 살며 힘이 되는 존재에게 가족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갖게 하는건 개인을 위해서도 국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성인 입양은 입양신고서 한 장만 제출하면 다음 날 바로 가족이 될 수 있다. 참 아이러니하다. 가장 구속력 있으면서 모든 행위에서 법적 권리를 강력히 주장할 수 있는 부모자식 사이가 되는 것이 이렇게 쉽다는 게. 입양은 이렇게 쉬운데 다양한 가족을 품어줄 수 있는 생활동반자법 제정은 왜 그리 어렵기만 한 건지, 참으로 모를일이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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