깻잎 투쟁기 -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한 1500일
우춘희 지음 / 교양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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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를 시작하기 전 나는 그들과 나의 삶이 무관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커피를 좋아해서 공정무역 커피와 아프리카산자들의 삶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깻잎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표정이 어떤지는 몰랐다. 동물복지 제품을 고르며 스스로를 ‘가치‘ 소비자로 여긴 적도 있지만 그 동물을 다루는 손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유기농, 무농약, 친환경, 로컬푸드, 동물복지, 무항생제 같은 표시에만 안심하며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를 주저한 시간들이었다.
4년이 넘게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들이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해 있음을 보았고, 그들의 눈물로 우리의 - P13

밥상이 차려지고 있다는 현실도 알게 되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건 우리 밥상 위의 인권이다.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들이 처한 문제를 같이 고민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따뜻한 밥상을 차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 P14

사람이 온다는 건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이라는 시구를 좋아한다. 이주노동자는 단순히 ‘인력‘이 되어 우리 사회의 노동력 빈칸을 메우러 오는 것이 아니다. 이주노동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 보따리 짊어지고 오는 사람들이다. 그 보따리 안에는 삶도 있고, 꿈도 있고, 울음도 있고, 웃음도 있다. 특히 이주노동자의 인권이 있다. 이주노동자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밥상도 건강하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 P15

앞서 언급한 컨테이너 2개로 만든 집에 다섯 명의 노동자가 살면 얼마를 기숙사비로 내야 할까? 한 사람당 기숙사비 약 15만 원에 각종 공과금 5만 원을 더해 약 20만 원씩 내야 한다. 열 평 남짓 화장실도 없는 그 집에 고용주는 이주노동자로부터 월세 1백만 원을 합법적으로 받을 수 있고 실제로 그랬다.
단독 주택이나 빈집을 개조해 기숙사를 만든다면, 이는 상시 주거 시설로 간주되어 고용주는 한 사람당 월급의 15퍼센트인 약 30만원을 받을 수 있다. 여기에 전기세, 수도세, 인터넷통신비 등을 합하면 한 사람당 5만~10만 원이 추가된다. 따라서 이주노동자 다섯 명을 고용한 사업주가 농촌의 빈집을 고쳐 기숙사로 제공하면 월세 2백만 원을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서울 한복판에 있는 집의 월세가 아니다. 농촌의 논밭 한가운 - P32

데 다 쓰러져 가는 폐가를 대충 고쳐놓은, 한겨울에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집의 월세가 2백만 원인 것이다.
이주노동자는 월급에 비례해서 기숙사비를 내기에 매년 최저임금이 올라도 월급 인상 액수가 그리 크지 않다. 세입자의 월급이 올랐다고 해서 그때마다 집주인이 월세를 올려 달라고 요구한다고 생각해보라.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주노동자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좁고 더러운 공간에 여럿이 함께 살면서도 어마어마한 월세를 낸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인에게 상식적이지 않은 정책은 이주노동자에게도 부당한 정책이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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깻잎 투쟁기 -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한 1500일
우춘희 지음 / 교양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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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도급제는 불법이죠. (나: 네? 불법이라고요?) 네. 박스당 가격을 매기니까 그런 도급제는 불법이죠. 그런데 이만큼 깻잎을 따주지 않으면 우리가 남는 게 없어요."
고용주연합회의 한 임원이 한 말이었다. 한 사업주는 "우리가 하는 일은 법이랑 맞지 않으니까"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힘없는 농민들이 "힘을 합치고 단합해서" 농업 "실정에 맞지 않는" 최저임금을 주지 않아야 하며, "우리(농민)끼리 룰(규칙)을 정해서 외국 애들 꼼짝 못 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소수의 고용주만 이런 인식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만나본 한 고용주는 고의적 임금 체불을 시인하며 이주노동자들은 자기 나라로 곧 떠날 것이기 때문에 돈을 안 주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를 고용해서 돈을 제법 벌었지만 여전히 이들에게 최저임금을 주는 것이 불만이었고, 어떻게든 법을 어기면서까지 이주노동자들을 조금이라도 일을 더 시키고 월급을 덜 줄지 궁리하는 고용주도 있었다. 성희롱을 일상적으로 저질렀지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사업장 변경은 안 된다고 소리친 고용주도 있었다. 또 다른 고용주는 근로기준법 위반과 갑작스런 해고 통보로 인한 해고 예고 수당(근로기준법 제26조에 의해 사용자가 적어도 30일 전에 예고하지 않고 해고했을 때 지 - P83

급해야 하는 30일분 이상의 통상 임금)을 더해 합의금을 물어주게 되자 "농민이 당했다"고 표현했다.
사업주들과 인터뷰할 때마다 "농민은 힘이 없다" "농민이 힘들다" "농민이 피해를 본다" 같은 표현을 많이 들었다. 그들은 ‘피해자/약자는 농민‘이라는 생각이 강해 보였다. 우리나라 절대 다수의 농가 형태가 기업농이 아닌 가족이나 소농인 것을 감안하면 농민들이 소득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에 우리 사회에서는 정책적으로 농업인에게 많은 혜택을 주고 있다. 대부분의 농업인들은 "직불금부터 시작해 각종 보조금과 유류·전기세 혜택, 국민연금·의료보험 감면, 농협 조합원가입이나 농자금 대출"을 비롯해 각종 정부 지원과 세제 혜택을 받는다.
농민이 아무리 사회에서 인정하는 약자이고 농가의 현실이 아무리 열악하더라고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것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들은 고용주가 지켜야 하는 법에 대해 귀를 기울어야 한다. 이주노동자들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생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 P84

내가 만난 일부 사업주들은 이주노동자에게 공짜 노동을 시키며 사실상 최저임금을 주지 않으면서 그마저도 주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쟤네(이주노동자들) 못사는 나라에서 왔어. 캄보디아에서는 한 달 최저 월급이 20만~25만 원인데 여기에서는 일고여덟 배 더 벌어가잖아. 그러니까 한국인과 똑같이 최저임금을 적용하면 안 되지. 쟤네 월급 조금만 줘도 여기서 일할 거잖아. 쟤네 퇴직금도 받잖아. 한국만 손해 본다니까." - P92

매년 최저임금 책정을 두고 보수 언론과 경영계는 ‘최저임금 차등 적용‘을 주장한다. 소상공인이나 영세 사업자의 임금 인상부담을 완화하고 노동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한 이들의 고용을 촉진하기 위해, 주로 지역·업종·규모별로 차등하거나 다소 생산성이 낮은 청년과 고령자를 차등 적용하자는 제안이다. 농업인 사업주도 이주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인다. 이에 대해 2019년 9월 캄보디아에서 만난 한국산업인력공단 캄보디아EPS(고용허가제)센터 여동수 센터장은 이렇게 말했다.
"고용허가제는 ‘원조‘가 아닙니다. 내국인이 일하지 않는 곳에서 외국인을 고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저임금으로 노동력을 공급받으니 오히려 우리가 더 혜택을 보는 것입니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최저임금보다 더 낮게 임금을 주는 것은 차별입니다."
고용허가제는 외국인 고용을 신청하는 사업주에게 내국인 구인 노력을 의무화하고 있다. 그 취지 자체가 내국인(선주민)이 일하지 않는 곳에 외국인(이주민)을 고용한다는 것이다. 선주민이라면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지 않을 곳에 이주노동자가 그 자리를 촘촘히 메우고 있다. 여동수 센터장의 말대로, 한국과 사업주 입장에서는 최저임금으로 구하지 못할 노동력을 이주노동자가 제공하니 더 혜택을 보는 셈이다. - P93

캄보디아 출신 여성 노동자 비스나(20대) 씨에게 한국의 사업주들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한국인 노동자보다 낮은 최저임금을 주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는 눈을 부릅뜨며 내게 반문했다.
"그래요? 우리가 못사는 나라에서 왔으니까, 최저임금의 절반만 준다고요? 그럼 못사는 나라에서 왔으니까 세금도 절반만 낼게요. 못사는 나라에서 왔으니까 음식 값도, 버스 값도 절반만 낼게요. 그러면 될까요?"
비스나 씨의 지적대로 이주노동자가 ‘못사는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보다 최저임금을 더 적게 책정해야 한다면 식비, 주거비, 교통비, 각종 세금도 더 적게 내야 할 것이다. 이주노동자가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것이 이주노동자에게 최저임금보다 더 낮은 급여를 주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 P94

2019년 고용노동부는 최저임금 차등 적용은 타당하지 않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최저임금위원회는 최저임금 차등 적용이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전문가 18명으로 구성된 ‘최저임금 제도개선 태스크포스(TF)‘를 꾸려 그 타당성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말해 다수의견은 최저임금 차등 적용은 어렵다는 것이었다. TF의 권고안에는 자세한 이유가 나와 있다. 업종별 구분은 어떤 업종을 차등하든 그 타당성을 찾기 어려운 데다 최 - P95

저임금보다 낮은 저임금 업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낙인 효과가 발생한다. 지역별 구분은 사람들이 그 지역에 가서 일하는 것을 회피하게 만들 것이고 지역 균형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연령별 구분은 우선 청년층의 생산성이 다른 연령에 비해 특별히 낮지 않기에 임금을 감액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 고령층에 대한 감액은 연령을 이유로 한 차별이자 다른 선진국에서도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는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의 일부 주의 경우 주로 17~20세 미만 노동자에게 일정 기간에 한해서만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권고안에는 이주노동자 차등 적용은 국적, 인종과 관계없이 균등한 대우를 규정한 국제노동기구 제111호 차별 협약에 위반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외국인에 대한 최저임금 차등 적용은 일자리를 구하는 국내 노동자에게도 결코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 사업주는 더 적은 임금을 주면서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려고 하지 내국인 채용을 꺼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악영향을 문제 삼지 않더라도 본질적으로 최저임금 차등 적용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어긋난다. 최저임금은 한국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국적, 인종, 성별, 성적지향 등에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받아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그야말로 ‘최저‘ 기준이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 차등 지급은 ‘차등‘이 아니라 ‘차별‘일 뿐이다. - P96

고용허가제를 새로 도입함으로써 산업연수생제도의 폐해가 일부 해결된 것은 사실이지만 고용허가제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이주노동자를 옭아매는 조항 때문에 비판을 많이 받는다.
가장 문제가 되는 조항은 바로 사업장 변경 권한이 사업주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외국인고용법 제25조 제1항). 사업장 변경 제한은 우리 헌법에서 보장하는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 노동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을 오랫동안 받아 왔다. 앞 - P117

서 설명했듯이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변경하고 싶으면 근로계약해지에 대해 사업주의 동의를 얻거나 아니면 사업주의 위반 사항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사실상 이주노동자는 사업주가 동의해주지 않으면 일자리를 옮기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셈이다. - P118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읽는 동안 많은 이주노동자의 얼굴이 스쳐갔다. 전북 미나리밭에서 일을 한 캄보디아 남성 노동자 두 명은 한겨울에도 물이 차 있는 밭에 고무장화를 신고 들어가서 미나리를 수확했다고 말했다. 일이 너무 힘들어서 고용주에게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더니 사업주는 1백만 원을 내놓고 가라고 윽박질렀다고 했다. 전남 담양 딸기밭에서 하루 12시간 넘게 딸기를 따다가 정말 이렇게 일하다가는 죽을 것같다는 생각에 ‘지구인의 정류장‘으로 도망친 여성 노동자도 있었다. 경남 깻잎 밭에서는 하루 10시간씩 매일 깻잎 1만 5천장을 따야 하는데, 정해진 양을 채우지 못하면 월급에서 깎는다며 도움을 요청한 이주노동자가 있었다. 서울 서대문구 떡집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근로계약서에는 오후 3시부터 12시까지 일한다고 나와 있는데, 새벽에 갓 만든 신선한 떡을 납품해야 한다는 이유로 오후 5~6시쯤부터 새벽 4~5시까지 하루 - P123

12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하루만 쉬었다고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입에 들어가는 떡을 밤새 만들어냈지만, 정작 본인들은 일하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적도 많다고 하소연했다. 이들은 모두 사업장을 옮기고 싶었지만 고용주가 사업장 변경에 동의해주지 않아서 발이 묶여 있었다. 고용허가제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사실상 이들의 강제 노동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도우리 헌법 정신에 부합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일까? - P124

그동안 정부는 이주노동자의 인력만 이용할 뿐 그들이 한국에 정주해서 살 수 있는 기회는 결코 주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 왔다.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에게 ‘인력‘만을 요구한다. 이주노동자의 삶은 ‘영원히 일시적인(permanently temporary)‘ 상태이다. 이주노동자는 한국에 와서 일을 하지만 여기에서 정착해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지는 못한다. 정해진 기간이 다 되어 비자가 만료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며, 그 빈자리를 다른 이주노동자가 와서 채운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는 단순히 ‘인력‘ 그 자체가 아니다. - P127

이주노동자는 그의 손과 더불어 그의 일생이 함께 온다. 이 나라의 국민은 아니더라도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간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해먹고, 축제를 열고, 마을과 사회에 어울려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이주노동자가 온다는 것은 단순히 ‘인력‘이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오는 일이다. 이주노동자의 손과 함께 삶과 꿈도 온다. - P128

아이러니하게도 인력사무소의 세계에서 미등록 노동자들의 노동력은 최저임금이 보장되어 있었다.
인력사무소의 노동자들은 터무니없이 낮은 돈을 주는 곳에서는 일하지 않는다고 했다. 제대로 된 돈을 받고 일하는 것, 곧 자기가 생각하는 기준에 따라 일할 곳을 정하는 것, 김동규 씨의 말마따나 이곳에서는 그들의 ‘인권‘이 보호되고 있었다. - P175

고용허가제 업무 편람에 따르면 이주노동자가 성폭행 피해를 이유로 사업장 변경을 신청할 경우, 고용 센터에서 조사 후 피해 사례가 인정되면 ‘긴급 사업장 변경‘이 허용된다. 피해자의 진술 외에 증거가 없을 경우 상담 기관에서 상담을 받도록 안내하고 그 상담 결과를 토대로 삼아 사업장 변경 여부를 판단한다. 이 모든 사업장 변경 절차는 신속하게 진행하기 위해 3일 이내에 마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만일 수사 결과 허위나 거짓(혐의 없음)으로 판정이 날 경우, (긴급하게 사업장을 변경한 경우에도) 악용 사례 방지를 위해 해당 이주노동자에게 ‘불이익‘을 부과한다. 새로운 사업장 알선을 중단하거나 고용 관계 해지후 출국 조치를 단행하는 것이다.
‘이주인권사례연구모임‘에서 2020년에 펴낸 <고용허가제 업무편람 다시쓰기》에서 지적한 대로 "성폭력 피해자의 신고가 - P191

접수되면 원칙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로 긴급 사업장 변경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 고용 센터는 "수사나 법률의 해석 및 판단을 하는 기관이 아니고, 이에 대한 권한도 없다." 또한 "성폭력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지원하고 사례를 다룰 수 있는 전문성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고용센터의 공무원에게 성폭력 여부를 판단하게 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볼 수 없다. 추가 피해나 보복 행위를 막기 위해서라도 빠른 분리가 필요하다.
게다가 ‘혐의 없음‘이란 판정만으로 이주노동자에게 불이익 조치를 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혐의 없음‘이란 피의 사실이 범죄로 인정되지 않거나 피의 사실을 인정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는 경우를 의미하며(검찰사건사무규칙 제69조), "검찰도 혐의 없음의 결과만 가지고 거짓 고소로 유추하지 않는다. 성폭력 사건의 경우, 둘만 있는 공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피해자의 진술 이외에 물적 증거가 확실치 않아서 법적인 입증이 어렵다. 상황이 이러한데 한국말이 서툴고 한국 문화도 낯선 이주노동자가 자신의 피해를 증명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따라서 ‘혐의 없음‘을 근거로 출국 조치를 한다면, 사실상 성폭행 피해신고 자체를 막는 효과를 가져올 뿐이다. - P192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현재 건강보험 의무 가입 제도가 인종 차별적이라고 비판했다. 첫째, 2020년 기준으로 보험료가 최소 113,050원으로 높게 책정되어 있다. 내국인은 소득과 재산 수준에 따라서 보험료가 산정되지만 외국인은 이런 과정 없이 내국인 보험 가입자의 평균 보험료를 낸다. 2017년 기준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월평균 근로소득은 147만 원으로 내국인의 67퍼센트밖에 안 되지만, 보험료는 내국인의 평균 보험료와 똑같이 냈다. 외국인은 더 적게 벌고 상대적으로 보험료를 더 많이 내는 셈이다. - P201

둘째, 내국인은 배우자, 직계존속, 직계비속 등이 피부양자로 묶일 수 있지만, 외국인은 배우자와 미성년 자녀만 피부양자로 묶일 수 있다. 따라서 성인인 외국인 자녀가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경우, 세 명 각자에게 113,050원으로 보험료가 부과되어 한달에 적어도 339,150원을 내야 한다.
셋째, 보험료가 체납되면 체류 자격에 불이익을 준다. 보험료가 3회 초과 체납되면 비자 연장이 안 되고 출국 조치를 당할 수 있다. 건강보험료를 체납하면 의료 시스템 사용에 불이익을 주어야지(보험료를 완납할 때까지 건강보험 급여가 제한되기에 의료 시스템 사용에도 불이익을 주고 있다), 이주민의 체류 자격까지 엮어서 불이익을 주는 것은 합당한 조치가 아닌 명백한 차별대우이다.
넷째,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이렇게 보험료를 매달 내더라도 이주노동자들은 이에 합당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주민의 의료 서비스 접근을 위한 정책 지원이 대단히 부실하다. 기본적인 통역 서비스조차 거의 지원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건강보험료 납부에 대한 정보 제공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 P202

그러나 오래전부터 유엔, 국제노동기구, 국제이주기구, 유럽연합 등 국제 사회에서는 초과 체류한 이주민을 ‘불법 체류자‘라 부르는 것은, 그들을 ‘불법적인 존재로 낙인찍어 혐오를 조장하기에 ‘미등록‘ ‘비정규‘ 같은 중립적인 용어로 써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되어 왔다. 초과 체류의 문제는 행정 절차 위반이지 형사상 범죄가 아니기 때문에, 체류 문제가 적발되면 정부가 정한 절차에 따라 조치를 취하면 된다. 교통 법규를 위반한 운전자에게 ‘불법 운전자‘라고 하지 않듯이, 초과 체류한 이주민에게 ‘불법 체류자‘라고 할 필요가 없다. 국내 인권·이주단체에서도 사람의 존재 자체가 ‘불법‘일 수 없기 때문에 ‘불법 체류자‘ 대신 ‘미등록 이주민‘ ‘미등록 노동자‘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다. 국가인권위원회도 ‘미등록 체류자‘ ‘미등록 노동자‘라는 표현을 권고했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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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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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보다 훨씬 고급 능력자. 그렇게 첨벙첨벙 다 잡아 없애고 돌아다니면 뭐 해요? 돈 되는 일을 해야지."
문득 아주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마음의 한 부분이 잠시 경련을 일으키듯 움직였다. 은영도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위험하고 고된데 금전적 보상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은영의 능력에 보상을 해줄 만한 사람들은 대개 탐욕스러운 사람들이었다. 좋지 않은 일에만 은영을 쓰려고 했다. 아주 나쁜 종류의 청부업자가, 도무지 되고 싶지 않았다. 은영은 다른 종류의 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어느새부터인가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버렸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은영의 일은 은영이 세상에게 보이는 친절에 가까웠다. 친절이 지나치게 저평가된 덕목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은영과 인표는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 P117

폭력적인 죽음의 흔적들은 너무나 오래 남았다. 어린 은영은 살아간다는 것이 결국 지독하게 폭력적인 세계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피할 수 없이 다치는 일이란 걸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 P185

"있잖아, 다음 선거에는 너희들한테도 선거권이 있어."
대흥의 설명을, 어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를 특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끄트머리에 그렇게 덧붙여 주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이의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흥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 얻었다. 뒤에 오는 이들은 언제나 더 똑똑해. 이 아이들이라면 우리보다 훨씬 나을 거야. 그러니까 그 바보 같은 교과서를 막길 잘했어. - P233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인표가 은영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크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잘못 들은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인표가 아니라 은영 스스로가 말한 것 같기도 했다. 거짓말이어서,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 P265

서로의 흉터에 입을 맞추고 사는 삶은 삶의 다른 나쁜 조건들을 잊게 해 주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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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입양했습니다 - 피보다 진한 법적 가족 탄생기
은서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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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입양 가족이 됐다는 소식에 누군가는 "어리가 결혼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하고 물었다. 우리는 결혼 대신 친구와의 동거를 선택했고, 남편과 아이로 이루어진 가족 대신 친구를 입양해 가족이 되는 방법을 선택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는 여전히 ‘미완‘ 상태인가 보다. 친구와 사는 것은 임시 가족이고, 언젠가는 각자 결혼할 거라고 전제한다. 결혼한 부부에게는 이혼하면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지 않으면서 우리에게는 둘 중 한 사람이 결혼하면 입양이 깨지는 거냐고 묻는다. - P7

우리가 입양 가족이 된 건 현재로써 서로의 법정대리인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생활동반자법이 있었다면 우리는 입양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끼리 반려인이라는 수평적인 관계가 아닌 부모 자식이라는 수직적인 관계가 되는 건 원하지 않았으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함께 살며 힘이 되는 존재에게 가족의 권리와 의무를 갖게 하는 건 개인을 위해서도 국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부디 다양한 가족 형태를 법적 테두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생활동반자법이 조속히 제정되기를, 다양한 형태의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의 법적 보호자가 돼 안정적으로 살게 되기를 소망한다. - P8

제주 시절에 만나 절친이 된 백은 내가 어리와 살면서 안정감을 느끼게 된 것 같다고, 우리가 사는 모습이 편안해 보여 부럽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나보다 생일이 빠른 그 친구에게 나를 입양하라고 했다. 그럼 딸도 생기고 더불어 손녀까지 생기게 된다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자고. 현재 법으로는 혼자 사는 사람이라도 입양을 통해 얼마든지 여러 명의 가족을 만들 수 있다. A가 B, C, D를 입양해 엄마(혹은 아빠)와 여러 명의 자녀를 만드는 게 가능하다. 아니면 A가 B를 입양하고, B가 C를 입양하고, C가 D를 입양해 딸(혹은 아들), 엄마(혹은 아빠), 할머니(혹은 할아버지),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까지도 만들 수 있다. 결혼과 혈연 중심의 가족 생태계를 교란시켜버리는 것이다. - P231

처음 생활동반자법이 논의됐을 때 참 반가웠다. 다양한 형태의 생활공동체를 보듬어 누구나 특별한 한 사람을 서로의 법적 보호자로 지정할 수 있다는 것. 믿고 의지하는 사람과생을 나누며 외로움과 우울을 막을 수 있다면 돌봄으로 인한 복지 비용도, 고독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노인들에게 더 필요한 법이 아닐까 싶었다.
법과 제도가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포용하지 못한다면, 우리처럼 성인 입양이라는 방법으로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우리는 가족이 생겨 든든해졌지만, 우리 같은 방식으로 사는 사람이 늘어났을 때 그것이 과연 건강한 사회의 모습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우리 같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자꾸 생겨나 이것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면 좋겠다. 그렇게라도 생활동반자법의 필요성을 알리고 법 제정을 보다 앞당겨 - P240

사람들이 입양이라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아도 서로의 보호자가 돼안정적으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어쩌면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갈 수도 있다. 생활동반자법에 대한 논의가 더 진행되기 전에 자신만의 틀에 갇힌 사람들이 성인 입양부터 제한하려 들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생활공동체를 넓은 가족의 범주 안으로 끌어안는 대신 더욱 배척하기 위해서 말이다.‘정상가족‘ 프레임에 갇혀버린 이들에게 우리가 아무리 어떤 이야기를 한들 그들은 그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만 믿고 싶어 할 테니까. 안타까울 뿐이다. - P241

이미 오래전부터 다양한 형태의 가족은 존재해왔다. 다양한 가족 형태를 법적 테두리 안에 받아들인다면 우리처럼 입양이라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 함께 사는 구성원이 꼭 결혼으로 맺 - P241

어진 관계가 아니더라도, 나이 차가 많건 적건, 이성 간이든 동성간이든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서로 의지하며 살면 되는 거 아닐까? 그렇게 된다면 1인 가구의 돌봄 비용이 줄어들어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건 둘째 치고라도, 1인 가구의 외로움을 해소하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옆에 함께 있는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다. 1년에 몇 번 만나는 가족들이 채워줄 수 없고, 돈으로도 채울 수 없다.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과함께 살고, 함께 살며 힘이 되는 존재에게 가족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갖게 하는건 개인을 위해서도 국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성인 입양은 입양신고서 한 장만 제출하면 다음 날 바로 가족이 될 수 있다. 참 아이러니하다. 가장 구속력 있으면서 모든 행위에서 법적 권리를 강력히 주장할 수 있는 부모자식 사이가 되는 것이 이렇게 쉽다는 게. 입양은 이렇게 쉬운데 다양한 가족을 품어줄 수 있는 생활동반자법 제정은 왜 그리 어렵기만 한 건지, 참으로 모를일이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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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 가족
마민지 지음 / 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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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에는 감정적으로 힘들지 않았다. 부모님이 살아온 역사를 알게 되었고, 한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는 한국 사회의 역사를 구조적으로 돌아보면서 내 감정도 같이 정리가 된 뒤였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왜 부동산에 집착하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맥락을 이해하게 되면서, 부모님에게 일방적으로 향해 있던 분노, 짜증, 화와 같은 부정적 감정들이 여기저기로 분산되었다고 할까? 그 맥락을 이해한다는 것이 부모님이 가지고 있는 부동산 신화에 대한 희망에 - P221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부모님이 내 유년기에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끝내 설명해주지 않았던 빈칸을 카메라를 들고나서야 채울 수 있었기에 속이 시원하다는 것에 가까웠다.
종로의 한 카페에 앉아 있다가 대낮에 인파 사이를 걸어가고 있는 아빠를 우연히 발견한 뒤로 나는 아빠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이 작은 호기심은 단순히 나의 부모님으로서가 아닌 마풍락, 노해숙이라는 개인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생애사를 분석하며 두 사람이 살아온 삶의 풍파는 한국 사회의 부동산 개발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부모님이 지었던 주택들이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었던 장소와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하던 순간에 나는 비로소 해방감을 느꼈다. 부모님이 했던 사업이 도시개발정책에 영향을 받았을 거라는 가설이 사실로 증명되었고, 내 인생에 단절되어 있던 서사가 조금씩 메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미처 모르고 있을 나머지 이야기를 찾기 위해 우리 가족에 대한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영화를 만드는 나에게 카메라는 의사의 청진기, 과학자의 현미경과 같이 내가 속한 세계를 탐구하는 도구였다. - P222

나는 이 이야기를 IMF 외환위기를 겪어낸 또래의 관객들과 나누고 싶었다. 가세가 기울고 부모님의 언성이 높아지는 날들이 이어졌지만 친구들에게 차마 이런 속사정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혼자 마음속 깊은 곳에 짐을 진 채로 성인이 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흩어져 있는 서사를 각자의 방식대로 다시 채워나가고 있을 사람들과, 전기가 나간 방 한구석에서 두려움에 떨었던 순간에 대해, 등교하기 전 머리를 감기 위해 커다란 냄비에 물을 끓이며 지각할까봐 발을 동동 구르던 순간에 대해, 내가 살고 있는 초라한 집을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불안해하며 죄지은 사람처럼 골목길을 돌고 돌아 집에 가던 순간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다. - P229

처음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부모님을 인간 대 인간으로서 더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연을 끊다시피 하며 살았던 아빠가 왜 대낮에 종로를 거닐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고, 엄마는 하필 많고 많은 직업 중에 부동산을 파는 사람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부모님의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사람의 삶이 한국의 도시개발사와 촘촘하 - P252

게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인사를 그 시대의 맥락 속에 위치시켜 본다는 것은 부모님이 겪어온 삶의 지형을 다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중산층이었던 우리 가족은 왜 하루아침에 추락한 걸까? 부모님은 왜 부동산에 집착하는 걸까? 나는 왜 사춘기 시절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렸던 걸까? IMF 외환위기가 우리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걸까? 마음속에서 무수히 생겨났다 없어지길 반복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IMF 외환위기를 극복했다는 신화 뒤에 남겨진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어린 시절 갑자기 좁은 평수로 집을 이사가야 했거나, 양육자가 정리해고로 직업을 잃었거나, 중소기업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부도가 났거나, 양육자 중 특히 어머니가 실질적 가장이 되어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 시작한, 어떤 형태로든 정상가족이 해체되는 경험을 하며 자신의 속사정을 가까운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끝없이 치솟는 아파트값을 보며 더 이상 내 집을 가지지 못할 거라고 체념해버린 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조건들 위에 단단히 발을 딛고 서 있다가도, 그 땅이 언제든 다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해본 사람들과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
탐구의 과정을 따라가다보니 어느 순간 부모님은 물론 나의 욕망까지 더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요즘도 나는 컴퓨터를 하다가 문득 나에게 땅이 있다는 사실이 생각날 때마다 혹시 - P253

이천에 새로운 개발 정보가 있나 검색을 해보곤 한다. 끊임없이 발버둥 쳤지만 경제적인 문제는 늘 나를 무겁게 짓눌렀고 나 역시 지금보다 조금 더 잘살고자 하는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땅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일확천금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나은 주거 환경에서 안정적으로 마음 편히 사는 것이다. 부모님이 국민임대주택에 입주하고, 나 역시 청년전세임대주택에 살면서 공공주택의 효용을 많이 체감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방 한 칸에서 사는 것과 주방과 침실이 분리된 집에서 사는 것은 내 일상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보일러 가스가 샐 위험이 없는 집에서 잠을 자며 내일을 준비하는 것은 하루의 시작을 다르게 만들었다. 운에 기대는 것은 어쩌면 비슷해 보이지만 아파트에 당첨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내 아파트 가격이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다. 부동산이 주거에 대한 모든 해결방안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기 위한 집이 아니라 살기 위한 집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말은 도대체 언제쯤 실현될 수 있을까? 집 없이 사는 사람이 훨씬 많은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언제쯤 부동산을 뛰어넘어 이 문제를 함께 마주할 수 있을까?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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