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 가족
마민지 지음 / 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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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에는 감정적으로 힘들지 않았다. 부모님이 살아온 역사를 알게 되었고, 한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는 한국 사회의 역사를 구조적으로 돌아보면서 내 감정도 같이 정리가 된 뒤였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왜 부동산에 집착하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맥락을 이해하게 되면서, 부모님에게 일방적으로 향해 있던 분노, 짜증, 화와 같은 부정적 감정들이 여기저기로 분산되었다고 할까? 그 맥락을 이해한다는 것이 부모님이 가지고 있는 부동산 신화에 대한 희망에 - P221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부모님이 내 유년기에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끝내 설명해주지 않았던 빈칸을 카메라를 들고나서야 채울 수 있었기에 속이 시원하다는 것에 가까웠다.
종로의 한 카페에 앉아 있다가 대낮에 인파 사이를 걸어가고 있는 아빠를 우연히 발견한 뒤로 나는 아빠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이 작은 호기심은 단순히 나의 부모님으로서가 아닌 마풍락, 노해숙이라는 개인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생애사를 분석하며 두 사람이 살아온 삶의 풍파는 한국 사회의 부동산 개발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부모님이 지었던 주택들이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었던 장소와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하던 순간에 나는 비로소 해방감을 느꼈다. 부모님이 했던 사업이 도시개발정책에 영향을 받았을 거라는 가설이 사실로 증명되었고, 내 인생에 단절되어 있던 서사가 조금씩 메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미처 모르고 있을 나머지 이야기를 찾기 위해 우리 가족에 대한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영화를 만드는 나에게 카메라는 의사의 청진기, 과학자의 현미경과 같이 내가 속한 세계를 탐구하는 도구였다. - P222

나는 이 이야기를 IMF 외환위기를 겪어낸 또래의 관객들과 나누고 싶었다. 가세가 기울고 부모님의 언성이 높아지는 날들이 이어졌지만 친구들에게 차마 이런 속사정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혼자 마음속 깊은 곳에 짐을 진 채로 성인이 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흩어져 있는 서사를 각자의 방식대로 다시 채워나가고 있을 사람들과, 전기가 나간 방 한구석에서 두려움에 떨었던 순간에 대해, 등교하기 전 머리를 감기 위해 커다란 냄비에 물을 끓이며 지각할까봐 발을 동동 구르던 순간에 대해, 내가 살고 있는 초라한 집을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불안해하며 죄지은 사람처럼 골목길을 돌고 돌아 집에 가던 순간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다. - P229

처음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부모님을 인간 대 인간으로서 더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연을 끊다시피 하며 살았던 아빠가 왜 대낮에 종로를 거닐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고, 엄마는 하필 많고 많은 직업 중에 부동산을 파는 사람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부모님의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사람의 삶이 한국의 도시개발사와 촘촘하 - P252

게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인사를 그 시대의 맥락 속에 위치시켜 본다는 것은 부모님이 겪어온 삶의 지형을 다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중산층이었던 우리 가족은 왜 하루아침에 추락한 걸까? 부모님은 왜 부동산에 집착하는 걸까? 나는 왜 사춘기 시절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렸던 걸까? IMF 외환위기가 우리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걸까? 마음속에서 무수히 생겨났다 없어지길 반복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IMF 외환위기를 극복했다는 신화 뒤에 남겨진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어린 시절 갑자기 좁은 평수로 집을 이사가야 했거나, 양육자가 정리해고로 직업을 잃었거나, 중소기업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부도가 났거나, 양육자 중 특히 어머니가 실질적 가장이 되어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 시작한, 어떤 형태로든 정상가족이 해체되는 경험을 하며 자신의 속사정을 가까운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끝없이 치솟는 아파트값을 보며 더 이상 내 집을 가지지 못할 거라고 체념해버린 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조건들 위에 단단히 발을 딛고 서 있다가도, 그 땅이 언제든 다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해본 사람들과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
탐구의 과정을 따라가다보니 어느 순간 부모님은 물론 나의 욕망까지 더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요즘도 나는 컴퓨터를 하다가 문득 나에게 땅이 있다는 사실이 생각날 때마다 혹시 - P253

이천에 새로운 개발 정보가 있나 검색을 해보곤 한다. 끊임없이 발버둥 쳤지만 경제적인 문제는 늘 나를 무겁게 짓눌렀고 나 역시 지금보다 조금 더 잘살고자 하는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땅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일확천금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나은 주거 환경에서 안정적으로 마음 편히 사는 것이다. 부모님이 국민임대주택에 입주하고, 나 역시 청년전세임대주택에 살면서 공공주택의 효용을 많이 체감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방 한 칸에서 사는 것과 주방과 침실이 분리된 집에서 사는 것은 내 일상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보일러 가스가 샐 위험이 없는 집에서 잠을 자며 내일을 준비하는 것은 하루의 시작을 다르게 만들었다. 운에 기대는 것은 어쩌면 비슷해 보이지만 아파트에 당첨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내 아파트 가격이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다. 부동산이 주거에 대한 모든 해결방안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기 위한 집이 아니라 살기 위한 집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말은 도대체 언제쯤 실현될 수 있을까? 집 없이 사는 사람이 훨씬 많은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언제쯤 부동산을 뛰어넘어 이 문제를 함께 마주할 수 있을까?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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