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어디로든 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떠난 곳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 많은 사람이 삶의 방향을 찾거나 바꾸었다는 그 길을 걸으면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기만 하면 되는 그 길은 몸은 고단하지만 마음은 평화로운 안전하고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나는 화살표를 따라 꾸역꾸역 씩씩하게 걸어갔다. 그리고 40일 후 그 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나는 몹시 당황했다. 그 많던 화살표가 일제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지?‘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내가 정말로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했다. 나에게 방향을 알려주던 화살표 같은 존재들이 이젠 내 곁에 없다는 것도, 나는 화살표 없이 살아본 적이 없고 살아갈 능력도 없는 인간이라는 것도, 그때 절절하게 깨달았다. - P12
글쓰기는 사랑했던 것들을 불멸화하려는 노력이라고 했는데, 나의 글쓰기가 정말로 그랬던 것이다. 나는 떠나는 그 기차를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었다. 몇 번째 칸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어느 정류장에서 누가 타고 내렸는지, 그것이 우리의 방향을 어떻게 조금씩 바꿔 놓았는지에 대해 밤새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내가 쓴 한 시절 우리의 역사는 내 몸에 고스란히 새겨져서 나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 있었다. 그 시절이 나로부터 영원히 떠나가고 있었지만 전혀 아깝지도, 미련이 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허물을 벗고 빠져나오듯 후련했다. 이제 다른 기차를 타야 하는 것이다. 어떤 기차를 타야 할지는 여전히 알 수없었지만 똑같은 기차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나 - P16
는 더 이상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 P17
도서관에서 특강을 하던 그가 유럽에서 공부했다면 나 - P21
는 노들장애인야학에서 공부했다. 그것은 평생을 방구석과 집안과 시설에 갇혀서 여전히 조선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21세기의 한국 사회를 배웠다는 뜻이다. 그것은 21세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게 아니라 21세기를 전혀 다르게 겪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그것이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란 걸 안다. 하지만 이전의 나는 내가 우물 안 개구리이기 때문에 우물 밖 세상에 대해 배워야만 세상에 대해 아주 작은 소리로라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내가 만난 우물 밖 사람 역시 자기만의 우물 안에 갇힌 듯 보였고, 그게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다. 내가 그의 세계를 몰랐으니 그도 나의 세계를 모르는 게 공평하다고. 그러니까 인간은 모두 각자의 우물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세상은 그런 우물들의 총합일 뿐이라고. 더 거대하고 더 유구한 우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다른 우물들이 있을 뿐이라고. 그날 나는 나의 우물을 처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계관이란 나의 우물이 어디쯤에 있고 다른 이들의 우물과 어떻게 다르게 생겼는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보다 생각했다. 나는 다시 신문을 펼쳤다. 장애인, 형제복지원 피해생존 - P22
자, 세월호참사의 피해자 같은 내가 아는 사람들의 세상은 거기에 없었다. 나의 우물은, 한 시절 나의 우주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왜 없지? 어떻게 이렇게 없을 수가있지?‘ 하며 신문을 넘기다가 금세 나는 또 그것을 의아해하는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노들에서 매일 들으며 살았던 소리들, 나를 힘들게 하고 때론 도망치고 싶게 했던 사람들의 한숨이나 신음, 비명이나 절규 같은 소리는 노들을 그만두자마자 마치 방음설비가 완벽하게 갖춰진 방의 문을 꾸욱 닫고 나왔을 때처럼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대신 세상엔 재밌고 신나는 것투성이었다. 노들은 먼지처럼 미미해서 보이지 않았다. 빛나고 화려한 무언가를 위해 기꺼이 쓸어버려도 좋은 어떤 것이 아니라 무엇이 쓸려나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존재 같았다. - P23
연말정산 철마다 그를 찾았다. 그리고 작년 겨울 그가 결국 말하고 말았다. "나가고 싶어." 시설 측은 가족의 허락을 받아오라고 했다. 가족은 물론 반대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가고 싶다는 그에게 나는 열번 스무 번 고쳐 물었다. "정말 할 수 있겠어요?" 사실 그는 가족의 허락 없이도 퇴소할 수 있고 주거와 정착금도 받을 수 있다. 시설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이 벽관의 문이 오래전에 풀렸다는 걸 갇힌 사람들만 모른다. 그러니 질문은 실상 나를 향한 것이다. 벽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저 앙상한 어머니를 밀칠 자신이 있는지. 문을 열면 곧장 나를 덮쳐올 그를 업고 얼마간 전력 질주할 체력이 있는지. 그의 손에 술이 아닌 다른 것을 쥐게 할 대안이 있는지. 나는 자신이 없었다. 어머니는 우리를 피했다. "잘 지내고 있는 사람 흔들지 마세요." 애원은 점점 호통으로 변했다. 닫힌 문 너머에 어머니의 - P35
일상이 있었다. 그것 또한 지켜져야 했으므로 나는 얌전히 돌아섰다. 그에겐 ‘어쩔 수 없다‘ 전하고 다음번 연말정산 철을 기약할 작정이었다. 그때 함께 간 동료가 어머니의 집 문틈으로 편지를 밀어 넣었다. "허락지 않으셔도 우리는 하겠습니다." 순간 나는 그녀가 벽관의 문을 여는 것을 보았다. 내가 온갖 사람들의 평화를 계산하는 동안 그녀는 그 계산에서 빠진 단 한 사람을 보며 그저 신발 끈을 묶었다. 부끄러웠고 부러웠다. 그녀는 멋있었다. 그런 방식으로 수십 명의 탈출을 도와온 그녀는 싸움닭처럼 세상을 들이받으며 시설 바깥에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냈다. 소록도 100주년을 맞아 고흥군이 40여 년간 한센인들을 돌보았던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를 노벨평화상에 추천한다고 한다. 한센 병력으로 인해 격리된 사람들의 섬 소록도는 오랜 세월 차별과 폭력, 단종과 학살이 자행된 인권의 사각지대이자 침묵의 땅이었다. 수녀님과 같은 이들이 있어 갇힌 사람들은 고통을 덜었을 것이나, 덕분에 그 고통은 100년이나 지속되었다. 그 지속 가능함은 분명 어떤 평화에 기여했을 것이나, 그것은 실상 갇힌 사람들이 아니라 가둔 사람들, 소록도가 아니라 소록도에서 바라본 - P36
육지의 것이 아니었던가. 오래전에 깨어지는 게 더 좋았을 ‘당신들의 평화‘ 말이다. (2016. 1. 25) - P37
2001년 처음 노들장애인야학의 문을 두드렸던 나는 살면서 장애인을 거의 본 적 없는 평범한 비장애인이었다. 야학 교사인 나는 방황하던 대학 졸업반이었고, 또래인 야학 학생들은 초등학교는커녕 변변한 외출도 해본 적 없는 중증장애인들이었다. 장애인이 차별받는 세상이란 저멀리 따로 존재하는 것이어서 일주일에 한 번쯤 ‘봉사‘하러 다녀오면 되는 줄 알았으나, 내 생각이 틀렸다. 학생들은 지나가듯 말했다. "나도 대학가고 싶어." "나도 연애하고 싶어." "나도 돈 벌고 싶어." 거기엔 모두 ‘너처럼‘이란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한가한 소리를 일순간 팽팽하게 당기는 말, 저항하는 사람들이 던지는 밧줄 같은 말, 그것은 주술처럼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 P81
세상엔 자신의 유서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싸움은 그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싸움의 지속은 타인의 유서를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김소연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의 울음을 이해한 자는 그 울음에 순교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의 구질구질함을 이해한 자는 그 구질구질함에 순교한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 누리던 그마저의 편리도 내려놓고 창살 ‘있는‘ 감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그들은 아름답다. - P102
박종필의 앎은 앓음이었다. 그는 다큐를 찍어 명예를 얻었지만 우정을 나눈 형들은 객사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부채감과 자괴감으로 크게 앓았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그 앓음이 박종필의 삶을 결정지을 만큼 대단했으리란 걸, 다큐를 보며 알았다. 이후 20년 동안 그는 장애, 빈민 현장의 영상활동가로 살았다. - P106
장애여성을 위한 글쓰기 교육에서 강의를 했다. 나는 당사자들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다며 내가 만났던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아마 조금 울먹였던 것 같다. 수업이 끝나자 한 여성이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은 감수성이 뛰어나신 것 같아요." 조금 부끄러워진 내가 손사래를 치며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 순간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나도 비장애인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당사자니까...." 그녀의 말엔 조금의 비아냥도 없었으므로 나는 마음이 처연해졌다. 한동안 그 말이 내 몸속을 돌아다니며 잊힌 기억들을 툭툭 건드리고 다녔다. 노동절 집회 도중 체포된 남편에게 구속 영장이 신청된 날이었다. 너무 무서웠는데 무섭다는 소리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질 않았다. 남편이 구속될 위기에 처한 아내에게 형사가 보인 멸시와 푸대접이 비현실적일 만큼 적나라해서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들은 남편을 가두거나 가두지 않을 권력을 쥐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납작 엎드리는 일뿐이라는 걸. 불타는 분노는 우리를 도우러 온 따뜻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의 몫이었다. 처음으로 ‘비 - P123
참‘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했다. 오랜 시간 절박한 이들과 함께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어디까지나 연대하는 사람이었을 뿐 당사자가 아니었다는 걸, 둘의 세상은 완전히다 르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손 벌리는 자‘의 마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손 잡아주는 자‘의 자부심으로 살아왔던 시간이 부끄러워서 펑펑 울었다. - P124
인구의 10퍼센트가 장애인이지만 그들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비장애인들은 일상적으로 자신들의 가해 사실을 인식할 수조차 없다. 한때 남성들이 자신이 여성혐오의 잠재적 가해자임을 선언하는 장면에 나를 대입하면 식은땀이 난다. 나는 장애인차별의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확실한 가해자이며, 이 시스템의 분명한 수혜자이다. 비장애인인 내가 이 지면에 장애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그 증거다. ‘장애인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내 목소리가 너무 크진 않은가 신경이 쓰였으나, 이 지면의 새로운 필자에 장애인 당사자와 그 가족이 있어 마음의 짐을 조금 내려놓았다. 세상의 변화는 ‘장애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 ‘장애인에게 닥쳐온 어떤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시작되며, 그것은 이 폭력적인 사회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살아가는 90퍼센트의 사람들이 비로소 ‘비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성찰할 때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글쓰기 교육에서 만났던 그 장애여성으로부터 배웠으므로, 당사자의 말하기, 그 어려운 일을 그녀가 이미 해냈다는 점만은 분명히 말해주고 싶다. (2018.1.8) - P125
박경석은 꿈이 외항선을 타고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마도로스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1983년, 스물넷의 나이에 행글라이딩을 하다 사고로 장애를 입습니다. 그후 그는 5년을 집에서 보냈습니다. ‘허리 아래 괴물같이 달라붙은‘ 하반신처럼 삶이 무감각했습니다. 그는 죽기로 결심합니다. 슬퍼할 어머니를 위해 집이 아닌 곳에서 죽기로 하죠. 고향인 대구가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대구까지 갈 방법이 없습니다. 택시를 불러야 했지만 그에겐 택시비도 없었죠. 마침 그의 형이 성경을 백번읽으면 용돈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죽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의 감각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죠. - P126
1994년 박경석은 노들장애인야학의 교사가 되었습니다.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던 청춘들과 어울리며 정을 나누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비장애인이던 대부분의 교사들은 때가 되면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났습니다. 마도로스가 되고 싶었던, 하늘을 날고 싶었던 그는 항구처럼, 공항처럼 그 자리에 남아 떠나는 동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자신의 닉네임을 ‘어깨꿈‘으로 정한 것이. 어차피 깨진 꿈이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그 뼈저린 포기가 그를 구원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2001년 2월 6일 지하철 서울역 플랫폼. 한 무리의 장애인들이 선로 아래로 내려갑니다. 오이도역에서 리프트가 추락해 장애인이 떨어져 죽은 일에 항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장애인이 한 달에 다섯 번도 외출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하철이 30분간 멈추자, 30년간 집 안에만 갇혀 있던 절망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병신 새끼들." 선량한 시민들이 잔인한 말을 쏟아냅니다. 그때 박경석이 이렇게 외칩니다. "좋습니다. 우린 병신입니다. 그러나 당당한 병신이고 싶습니다. 병신에게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걸 알려 - P127
줍시다." 순간,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가슴속에 작은 불씨가 탁, 하고 켜졌습니다. 그리고 13년이 지나 2014년 4월 20일이 되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검찰의 공소장 맨 첫 페이지에 있는 바로 그날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동할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우리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도착해 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 있었습니다. 그곳엔 우리가 함께 탈 수 있는 버스가 단 한대도 없었습니다. ‘차선을 넘었다‘는 말은 이상합니다. 길은 끊겨 있었으니까요. 박경석 대표가 버스를 타고 대구로 가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터미널까지 오는 데 17년이 걸렸는데, 대구까지 가려면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릴까요. ‘장애인과 함께 버스를 탑시다‘라는 말을 하는 데 그의 인생 전체가 필요했습니다. ‘고작, 버스‘라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그가 싸워온 건 평생 자신을 옥죄던 굴레였고, 그 싸움이 그를 살게 했으므로, 저는 이 문장이 어쩐지 숭고하게느껴집니다. 누군가의 평생이 있어야만 평범한 사람들의 - P128
작은 상식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고통스러운 위로입니다. 선처를 바랍니다. (2018.2.5) - P129
초등학교 시절 혜영은 오전에는 동생의 교실에 있다가 동생의 수업이 끝나면 자기 반으로 가 수업을 들었다. 혜영이 중학교에 가게 되었을 때 동생은 시설로 보내졌다. 언니의 삶을 위해서, 라고 했다. 시간이 흘러 언니는 깨달았다. 누군가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을 이유로 갑자기 사라져버릴 수 있다면 남아 있는 삶 역시 온전히 그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언니 혜영은 말한다. "혜정이와 같이 살기 위해서는 두 개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는 나의 시간이고 하나는 혜정이 언니의 시간이다. 혜정이를 시설로 보낸 대가로 얻어진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전제로 하는 진짜 나의 시간을 찾고 싶다." 그래서 그녀는 한동안 다시 ‘혜정이 언니의 시간‘을 살 - P143
기로 한다. (...) 혜영의 친구가 물었다. 안정된 삶에 대한 욕망 같은 거없어? 혜영이 대답하길, 나는 이게 안정된 상태야. 어느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아침에 5분만 더 자겠다는 동생을 보면서 방문 닫고 나올 때가 진짜 행복하다고.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자신이 겪어본 가장 평화로운 경험이라고. 그 말은 다시 영화 속 내레이션으로 이어진다. "혜정이를 돌봐야했던 어린 시절, 나는 자유로워지고 - P144
싶었다. 하지만 어느 날 혜정이가 시설로 사라졌을 때 내게 찾아온 것은 자유가 아니었다. 그저 혜정이의 빈자리가 마음속에 동그랗게 남아 있었다." 나에게 이 영화를 한마디로 줄이라면 ‘마음속 동그란 빈자리‘라고 말하겠다. - P145
친구가 글쓰기 강좌를 듣고 싶어 했다. 그녀는 뇌성마비 장애가 있고 전동휠체어를 탔다. 신촌의 한 빌딩 내에 있는 문화센터를 추천해주며 장애인 화장실이 있는지 확인해봐야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없어도 괜찮다고 했다. 그런 것은 기대조차 하지 않으며 충분히 참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누를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 버튼이나 낮게 설치되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아니 두 대쯤 얻어맞은 느낌이었는데, 한대는 그녀가 강좌 하나를 듣기 위해 저녁 내내 오줌을 참는 일을 익숙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었고, 또 한 대는 새로운 공간에 대한 고려 사항 목록에서 무려 화장실을 뺀 자리에 엘리베이터 버튼을 넣는다는 점이었다. 버튼의 높이 같은 것은 얼마나 사소한지, 나는 심장이 조금 아픈 느낌이었다. - P146
신길역 계단 위에 섰다. 한경덕 씨를 낭떠러지로 밀어낸 버튼은 사고 후 원래 있던 위치에서 1미터쯤 계단 반대쪽으로 옮겨져 있다. 전쟁에서도, 교통사고에서도 살아남은 한 위대한 생명이 고작 이 작은 버튼에 닿으려다 무너졌다는 사실에 심장이 아프다. 아무도 죽이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면서도 버튼의 높이나 위치를 예민하게 감각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건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 호출버튼 누르기. 그것이 한경덕 씨가 지상에서 한 마지막 행동이지만 아직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2018.7.23) - P148
《나, 함께 산다》는 시설 밖으로 나온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태반의 구술자가 언어장애가 있거나 지적장애가 있다는 사실은 이 기록의 진정 기록할 만한 점이다. 누군가 나에게 이 작업을 제안했다면 대번에 거절했을 것이다. 여러모로 ‘각이 안 나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구술자들에게 가장 취약한 것이 언어능력, 그러니까 ‘이야기 하기‘이니까. 그것이 바로 그들의 장애니까 말이다. 기록자 서중원은 용감하게도(!) 이 제안을 기쁘게 수락한다. ‘살아 있음을 멋지게 항변하는 이들‘을 만날 기회라 여겼다. 그러나 동경심에 가득 차 그녀가 놓친 것이 있으니, 자신이 장애인을 거의 만나본 적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흔한 패키지여행 한 번 가보지 않았던 사람의 ‘오지 탐험기‘라고 할까. 그리하여 애초 1년을 염두에 두었던 여행이 2년을 넘겼던 까닭은 ‘여행 내내 자신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부서진 것 중 가장 낭패인 것은 ‘언어‘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교양 있는 사람들이 쓰는 현대 서울말‘, 그러니까 표준어의 - P149
체계 안에선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 P150
그동안은 엄숙하고 비장한 증언들만이 시설 밖으로 나왔다. 이제 시설 바깥으로 나오고 있는 말들은 이런 것들이다. 더듬는 말, 맥락을 알 수 없는 말, 뭉개지고 덩어리진 말, 까끌까끌한 말. ‘언어의 수용소‘가 있다면 필시 갇히고야 말았을 ‘추하고 열등하고 쓸모없는‘ 말들. 나는 어쩐지 어떤 견고했던 둑이 무너진 것 같은 해방감이 든다. 더 많은 짐작과 오해 속에 공동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함께 산다는 건 함께 이야기를 지어나가는 것이다. 돌아갈 길이 ‘부서져야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 지도 없이 떠난 어느 기록자의 여행이 또 하나의 지도가 되었다. 부러워서 가슴이 조금 아프다. (2018.8.20) - P151
어느 고등학교의 졸업식에 갔다. 주인공들을 보기 위해 하객들 사이를 기를 쓰며 비집고 들어갔다. 그러나 마 - P173
침내 강당의 중앙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한 사람의 졸업생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엔 250개의 빈자리만 있었다. 울고 싶었던 것도 같고 웃고 싶었던 것도 같다. 나는 그것을 보려고 아침부터 먼 길을 온 참이었다. 식이 끝난 후 교실로 갔을 때, 그날 처음 만난 한 여성이 오늘 당신의 아들이 졸업을 했으니 짜장면을 사겠다고 했다. 엉겁결에 그녀를 따라서 가게 된 북경반점에는 한바탕 눈물을 흘린 부모들이 해사해진 얼굴로 삼삼오오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슬프고 아름다운 의식이었다. - P174
세상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세상에 대해 읽고 쓴다는 일이 말할 수 없이 부당하게 느껴진다. 부끄러움을 견디면서 쓴다. (2019. 6. 10) - P192
언젠가 아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낳았을 때 좋았어요?"라고 내가 물었을 때 아버지는 대답했다. "아니, 무서웠다." 나는 무서웠다. 내가 얼마나 인간중심적인 사람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이 낯선 존재가 무섭도록 좋았다. 나에게 동물이란 갇혀 있거나 묶여 있거나 살점으로만 존재했다. - P203
하나의 생명을 온전히 책임져본 적 없었다. 나는 간절히 카라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남편에게 같이 살자고 말했던 순간처럼 뭉클한 기분이 되었다. 어떤 앎은 내 안으로 들어와 차곡차곡 쌓이지만 어떤 앎은 평생 쌓아온 세계를 한 방에 무너뜨리며 온다. 혁명 같은 그런 앎은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다. 작은 고양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는 걸, 나는 동물적으로 알았다. (...) 카라를 만났으므로, 머리로만 알던 것, 미루고 미루어오던 일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인간도 동물이란 감각을 일깨우는 것.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살고 싶어 한다는 걸 잊지 않을 것. 나는 동물들을 잔혹하게 착취하는 고기를 먹지 않으며 살아보기로 했다. (2019.9.2) - P204
나는 ‘고통이 사라지는 사회‘를 꿈꾸지 않는다. 여기는 천국이 아니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나 전태일처럼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들은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몸을 사리며 적당히 비겁하게 내 곁에서 오래 살아주길 바란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고통에 대해 얼마간의 책임이 있고 어떤 의무를 져야 하는 것이다. 고통을 기록하는 마음은 광장에서 미경 씨의 머리를 밀어주며 "죄송해요"라고 말했던 여성의 마음과 비슷할 것 같다. 바라는 것은 그가 나에게 안심하고 자기의 슬픔을 맡겨주는 것이고, 나는 되도록 그의 떨림과 두려움을 ‘예쁘게‘ 기록해주고 싶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세상은 ‘싸우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 P213
명색이 고통을 기록하는 활동가인데, 두 고양이를 사랑하게 된 후에야 내가 듣고자 했던 고통엔 오직 인간의 자리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삽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뉴스에선 그물에 갇힌 채 가스를 주입당해 살해되는 돼지들이 매일같이 보도되었다. 살려달라고 뛰쳐나온 돼지들을 인간들이 삽으로 내리쳤다. 뉴스 앵커들 - P220
은 돼지가 아니라 인간의 피해만 걱정했고, 정치인들은 돼지 농가를 살려야 한다며 돼지 인형을 머리에 쓴 채 삼겹살을 구워 먹는 행사를 했다. 그들 사이엔 손석희나 심상정처럼 내가 믿고 좋아했던 사람들도 있었으므로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나는 ‘짐승 같은‘ 현실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러나 요즘의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 좋은 비장애인이나 좋은 이성애자가 되고 싶다는 말처럼 이상하게 들린다. 이제 나는 좋은 동물이 되고 싶어졌다. 40년을 살면서 한번도 배워보지 못한 그것이 앞으로 살아갈 생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2019.12.23) - P221
갇힌 존재들에 대해 생각할 때면 언제나 꽃님 씨가 떠오른다. 꽃님 씨는 서른여덟에 장애인시설에 들어갔다 3년 만에 그곳을 벗어났다. 그 후 10년간 악착같이 모은 돈 2천만 원을 탈시설 운동에 써달라며 기부했다. 2016년의 일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이 지면에도 쓴 적(「혹독하게 자유로운」)이 있는데, 이것은 그 뒷이야기쯤 된다. 그해 2월 꽃님 씨가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는 노들야학 학생이었고 나는 교사였다. 그날 그가 갑자기 발표했다. 2천만 원을 모았고 노들야학에 기부하겠다는 것이었다. 감동적이었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나는 먹던 밥이 얹힐 지경으로 당황했고 표정 관리를 하느라 애를 먹었다. 어떤 권력관계가 뒤집히는 순간이랄까. 말하자면 ‘소외된 이웃‘이 거액 후원자로 변신한 순간이었다. 나는 그동안 그에게 상처 준 말이나 행동을 떠올리느라 머릿속이 하얘졌다. 너무 많아서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어쨌든 큰 잘못을 저지른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고많은 교사 중에 굳이 나를 부른 건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일 거라고 말이다. 이것은 이미 5년 전에 예고된 일이었지만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로부터 5년 전 어느 날, 꽃님 씨에게 이런 이야길 들 - P241
었다. "학교에 다닌 적 없어. 취학통지서도 못 받았어. 주민들록이 안 되어 있었거든. 나는 이름도 없었어. 가족들은 내를 그냥 갓난아, 하고 불렀지. 스무 살에 처음 주민등록을 했는데 그때 내가 내 이름을 지은 거야."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름은 세상으로부터 받는 첫 선물인데 그는 그것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선물을 준 것이었다. 이상하게 전설 같고 어딘가 멋있는 이야기였다. 더 놀라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돈을 모으고 있어. 시설 나온 지 10년 되는 날까지 2천만 원을 모으는 게 목표야. 그걸 야학에 줄게. 시설에 있는 사람들 한 사람이라도 더 데리고 나와." 꽃님 씨는 야학 제일의 자린고비였다. 가게에 걸린 옷 하나를 마음에 두고 며칠을 끙끙 앓던 그에게 그렇게 궁상스럽게 살지 말라며 면박을 주었던 게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일부러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 "됐어, 언니 옷이나 사 입어요." 하지만 그가 정색하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곧바로 웃음을 거두었다. - P242
"이거 비밀이야.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너하고 나하고 끝이야. 너한테 말하는 이유는 내 마음이 흔들릴까봐서야. 이렇게 말해두면 흔들릴 때마다 도움이 되겠지." 어느덧 5년이 흘러 무수히 흔들렸을 그가 굳건한 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꽃님 씨가 말했다. "그 돈, 지금 이 방에 숨겨져 있어. 내가 매달 수급비 50만 원에서 20만 원씩을 빼서 현금으로 모았거든."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조선시대야? 왜 돈을 집에다 보관해요!" 꽃님 씨가 항변했다. "통장에 넣으면 재산으로 잡혀서 수급권 탈락해." 나는 또 말문이 막혔다. 그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났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운 중증 장애인이었고 누워서 생활했다. 활동지원사 없이 혼자 남겨진 밤이면 옆집에서 다투는 소리만 들려도 저러다 불이라도 지를까 걱정돼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꽃님 씨가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랬던 내가 현금 2천만원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렇게 외친 것이다. "불이 나면 어쩌려고요! 도둑이 들면 어쩌려고요!" 그제야 그가 살아낸 10년이 얼마나 위대하고 위태로운 - P243
것인지, 그가 모은 2천만 원이 얼마나 치열한 것이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나는 2천만 원을 받아 가장 가까운 은행으로 걸어갔다. 스쳐 가는 모든 사람이 강도처럼 느껴져 가슴 속 돈봉투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한번이라도 꽃님 씨를 이 돈뭉치처럼 귀하게 여긴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자 눈물 나게 부끄러워서, 이것은 꽃님 씨의 복수가 분명하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 복수가 너무 아름다워서 자꾸만 목이 메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거리에서 싸웠잖아. 그 싸움 덕분에 내가 살 수 있었는데 집에 누워 있는 게 항상 미안했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싸운 거다." 어떤 사람은 당연히 받는 선물을 어떤 사람은 평생 싸워서 얻는다. 자기 자신에게 권리를 선물한다는 일,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나는 꽃님 씨에게서 배웠다. (2020. 5.11) - P244
야학에 대한 설명을 마친 그는 며칠 뒤에 집회가 있으니 나오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했지만 짐짓 태연한 척 물었다. "구호가 뭔가요?" "버스를 타자 입니다." 나는 풉, 하고 웃었다. 뭔가에 대한 패러디라고 생각한것이다. 그가 전혀 웃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챘다. 자세를 고쳐 앉아 물었다. "버스를 왜 타죠?" "장애인은 탈 수 없으니까요." 나는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그럼... 지하철 타면 되잖아요." 그는 가르쳐야 할 게 아주 많은 사람이 들어왔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구호를 들은 날이었다. 허공에 붕뜬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누군가는 탈 수 없다는 그 버 - P245
스를 타고서였다. 집회엔 가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 이상한 학교에 계속 갈지 말지 결정해야 했다. 며칠 후 그날의 집회를 영상으로 보았다.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백 명도 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쇠사슬로 서로의 몸과 휠체어를 묶어 8-1번 버스를 에워싸고 있었다. "장애인도 인간이다. 이동권을 보장하라!" 그들이 바깥에서 외치는 동안 버스 안에서는 휠체어를 탄 한 남자가 자신의 손목과 버스의 운전대에 수갑을 채우고선 버스가 움직일 수 없도록 막고 있었다. 기어이 버스를 함께 타겠다는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을 수백 명의 비장애인 경찰들이 체포하기 시작했다. 충격적이었고 몹시 가슴이 뛰었다. 그 순간 내가 장애인에 대해 가졌던 어떤 관념들이 와장창 깨지는 것을 느꼈다. 며칠 후 야학에 갔다가 영상 속에서 수갑을 차고 시위하던 그 장애인을 만났다. "노들야학 교장 박경석입니다." 그의 두툼한 손이 내 손을 잡던 순간, 내 안에서 또 뭔가가 무너졌다. 휠체어를 탄 교장이라니, 불법 시위를 주도하는 교장이라니. 세계에 대한 이해가 급격히 바뀌는 나날이었다. 나는 바다를 한 번도 못 봤다는 사람. 언니의 결혼 - P246
식에 초대받지 못했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신입 교사 교육을 받았다. 그때 내 손엔 장애인의 이동권 실태를 알려주는 자료집이 들려 있었지만, 정말로 나를 가르친 건 8할이 우리가 동그랗게 둘러앉은 그 관계였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해 겨울 임용시험이 있던 날, 시험장이 아니라 야학으로 갔다. 나는 그렇게 아무도 이기지 않은 채로 교사가 되었다. 내가 충격을 받았던 건 장애인의 열악한 현실 그 자체가아니라 그것을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들 옆에 서자 세계가 온통 문제투성이로 보여서 나는 정말로 충격받았다. 내가 타고 온 버스도, 지하철도, 내가 다닌 학교도 모두 문제였다. 나는 마치 중력이 다른 행성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말하자면 그건 경쟁하는 세계에서 연대하는 세계로, 적응하는 세계에서 저항하는 세계로, 냉소나 냉담보다는 희망을 더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 공동체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에 가장 좋은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나자신일 것이다. 중력이 다른 세계에선 다른 근육과 다른 감각을 쓰면서 살게 되기 때문이다. 노들은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다르게‘ 관계 맺을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 - P247
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말했다. 차별이 사라져서 노들이 더 이상 필요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그 말에 힘껏 저항하고 싶었다. 노들과 같은 공동체가 사라지는 것이 좋은 사회라고 말할 때, 노들은 그저 차별받은 사람들의 집단이다. 그러나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 같은 구호는 수십년간 집 안에 갇혀 살아온 사람이 외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 버스란 그저 해가 뜨고 달이 지는 풍경의 일부일 뿐 자신이 탈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항하는 인간들이 ‘발명‘해낸 말이다. 그 저항이란 해와 달의 질서에 맞서는 일처럼 아득한 것이지만 그 어려운 일을 기어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의 마지막에 누군가 살아남아야 한다면 바로 그들이 아닌가. 싸우는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건 좋은 사회의 증거가 아니라 그 사회의 수명이 다했다는 징조인 것이다. (2020.6.8) - P248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재난을 나는 그가 전한 소식을 통해 배웠다. 대구의 활동가들은 발달장애인이 살고 있는 집으로 매일매일 출근해 하루를 함께 보냈다. 손을 씻도록, 마스크를 쓰도록, 외출을 자제하도록, 답답함을 풀 수 있도록, 삼시 세끼를 잘 챙겨 먹도록 도왔다. 코로나 시대 - P250
에 역행하는 이 엄청난 밀접접촉은 3개월이나 지속되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강력한 연결망을 구축함과 동시에 재난 시 사회적 돌봄 시스템을 마련하라고 이 사회를 향해 촉구했다. 뉴스에선 그들을 ‘의인‘이라 칭송했지만, 그들이 한 가장 의로운 일은 재난 현장에 뛰어든 것 그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재난을 탄생시킨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코로나가 아니라 코호트가, 바이러스가 아니라 대책 없는 거리두기가 누군가에겐 더 큰 재난임을 알린 것 말이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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