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이반지하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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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 is an orphan. A survivor."
그애는 고아야. 생존자라는 말이지.

나는 저 대사가 참 좋았다. 어린 여자 체스 상대에 대해 당대 최고의 마스터가 긴장해야 하는데, 그 이유가 ‘생존자‘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이 훅 흔들렸다.

피해자에서 생존자가 되는 것은 무척 존엄하게 느껴지지만, 이 사회가 실제로 생존했다고 해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어떤 보상을 주지는 않는지라, 그 생존의 의미가 무엇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피해자를 생존자라는 단어로 대치하는 것이 도리어 ‘정말 생존했는가‘를 되묻게만 하는 것 같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 말을 <퀸스 갬빗>에서 저런 맥락으로 들으니, ‘생존자’라는 말이 가슴 중간에 팍 꽂혀, 가슴을 펴고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또 생존자라는 말이 상대방을 이토록 위협할 수 있는 요소라는 것에 아주 천진한 쾌감을 느꼈다. 근원조차 알 수 없는 특유의 끈질긴 생명력 그 자체로 살아남았다, 그 사람은 생존자야―라는 - P12

쓰임이 나에게 새삼 낯선 울림을 주었다.
세상아, 너는 두려워해야 할 거야. 나는 생존자거든―그런 태도.

그럼에도 〈퀸스 갬빗〉을 보는 내내 나는 주인공이 강간당할까봐 걱정했다. 미디어 시청자로 살아온 경험적 통계로 미루어보아 몇 번의 강간 모먼트가 있었기 때문에, 악― 이제 나온다 하며 그만 볼 준비를 하다가 말다 했다. 여러 명의 남성 체스 전문가 동료들이 주인공을 ‘돕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정말로 얘를 ‘실력자로 성장시켜주려는 의도‘였다는 게 놀라웠다. 재능 있는 여자를 진심으로 도우려고 하는, 재능 있는 우리 남성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판타지임을 알면서도, 화면에서 그것이 구현되는 장면을 본다는 건 딱 구태의연한만큼 큰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새삼 잊고 있었던 오랜 장롱 속 페미니즘의 먼지를 털며, 이렇게 강간당하지 않는 잘난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픽션/논픽션을 계속 보는 삶을, 도무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달으며.
주인공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계속 실험해나가는 걸 보는 것도 좋았다. 성욕을 느끼고 표현하고 거절하고 이용하고 등등. 강간당하지 않고 그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보통 이러면 - P13

사회로부터 성性적으로 크게 혼나곤 하는데, 이 시리즈에는 그런 것이 나오지 않아서 좋았다.

그러니까 잘난 여자를 감히 혼내지 말자. 제발 좀 그르지 말자.
버릇이 나쁘다 싶어도 제발 좀 내버려두자. 구린 구석 없이 정정당당하게 도와도 주자.
이토록 심플한 메시지를 전해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존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빨리 깨닫도록 하자.
생존자는 살아남은 자다.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She is an orphan. A survivor.
Losing is not an option for her."
그애는 생존자야. 애초에 질 생각이 없어.

아니, 러시아 체스마스터 보르고프도 무서워한다고, 이 양반들아. - P15

생존자 조심해라. - P17

검열을 당한다는 것은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생각이라는 것은 대단히 생산적이거나 발전적인 무엇이 아니라, 나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속의 장기와 세포 하나하나까지를 양말 까뒤집듯이 의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검열은 잔인하다. 검열하는 쪽은 간편하되 당하는 쪽에서는 정말로 내가 당당한 피해자인지를, 내 쪽에 정말로 한 점의 원인 제공도 없었는지를 지속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잔인함의 핵심이다. 검열은 저쪽에서 시작되었으나, 결국 그걸 지속하는 것은 이쪽, 나 자신이 된다는 것 말이다. - P47

잘라서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평생 살려고 하면 너무 힘들잖아요. 일 년만 살아보자, 한 달만 더 살아보자, 일주일만 더 살아보자. 하루만, 한 시간만, 십 분만, 일 분만…… 그렇게 가는 겁니다.
_<월간 이반지하> 4호 - P60

언제부터였을까. 미디어에 등장한 누군가를 보며 ‘저 사람, 저 정도 상황이면 죽고 싶겠다‘라고 생각하면, 별안간 그 사람이 정말로 죽은 채 떠올랐다. ‘죽을 만큼 괴롭겠다‘ 혹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면, 며칠 혹은 몇 달 후, 그는 정말로 죽음이 되어버리곤 했다. ‘어, 맞아‘라고 답하듯 곧 맥없이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죽을 만한 일에 실제로 죽어버리는 것‘을 이렇게 계속 목격해도 되는 걸까. 죽을 법한 일 다음에 죽음이 이어지는 것은, 왜 이토록 그럴 법하게 여겨지지 않는 걸까. 왜 이토록 그 인과가 부당하다 느껴지는 것일까. 죽을 법한 일들은 왜 계속 생기며, 왜 끝끝내 죽음까지 봐야 속이 시원한 듯 구는 것 - P70

퀴어 친구들은 일단 ‘살기‘부터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살았으면, 행복하게 살았으면, 이런 생각보다
일단 우리 생명 유지부터 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_<월간 이반지하> 1호 - P74

남들은 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못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1인분의 삶을 내가 온전하게 독립적으로 당당하게 살아낸다. 물론 중요한 이슈죠. 독립해야 한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잘살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정말 1인분을 다할 수 있었으면, 사회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순간순간 어떤 때는 0.8인분, 또다른 상황에서는 내 깜냥으로 1.5인분을 할 때도 있는 거예요. 간병하거나 누군가를 돌볼 때는 자기 몫의 1인분을 더 할 때도 있고. 그렇게 얽혀서 사는 것이지, 지금 당장 내가 1인분인가 아닌가 꼭 그렇게 따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순간순간 관계에 따라서 내 역할도 계속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요새 ‘당당‘ ‘독립‘ 이런 말들이 신자유주의랑 만나서 굉장히 자본의 기준에서만 해석되는 것 같거든요. 미디어의 영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나치게 그 틀에만 비춰서 나를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_<월간 이반지하 11호> - P123

아직도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내가 살아온 얘기가 궁금할 테니 그것을 쓰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읽혀야 할까. 살아온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마음이 들게 한다. 근데 또 그 ‘어쩌라고‘가 예술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승낙한다.
예전부터 제2차세계대전 이야기에 끌렸다. 책이 되었든 영화가 되었든 그때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내가 궁금한 것은 크고 작은 전투나 정치적 움직임이 아니라 그 시기를 살아낸, 여러 층위의 생존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것은 어떤 선정성에 대한 뒤틀린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나는 꼭 한 가지가 궁금했다. 도대체 왜 그들은 그 이야기를 하는지. 그러니까 경험한 것만으로 충분히 고통이었을 그 일을 왜 또 꺼내서 이야기하게 되는 것인지, 그것이 정말로 의미를 갖는지, 그들이 그 이야기를 마쳤을 때, 이야기를 들은 자들이 떠나버린 시간을 이야기한 자 - P128

들은 또 버텨내야 하는 것인지. 그런 것을 인간이 버틸 수나 있는 것인지. - P129

이 말했다. 왜 자꾸 그 기억을 그리는 줄 아나요? 왜냐고 묻자 그는, 다룰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예요, 라고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 말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맞는 얘기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종이 위에 기억을 잡아두려는 시도, 그 맹랑한 시도 자체가 마치 그 기억을 종이에 국한시키려는 행위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면 마치 그 기억이 그 종이만해지기라도 할 듯한, 그런 착각. 하지만 맹랑해서 그 나름대로 위대할 착각. 그런 착각 없이는 삶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어서.
확실히 그 말에 대해 생각하면서부터 내가 그날 밤을 그려대는 것에 대해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다. 그리고 이후에 곱씹는 여러 행위들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씹다보면 씹힐 것 같아서, 오독오독 씹다보면 절단이라도 될 것 같아서, 나눠 삼킬 수가 있을 것만 같아서, 그런 착각을 하려고, 그렇게 그것을 보내버리고 새 착각을 맞이하려고, 착각 없이 환상 없이 살기에는 던져진 삶이 너무 가혹하다.

갑자기 깨달았다. 내가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나의 트라우마를 설득하는 글을 쓰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끌러놓자마자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모든 것은 나의 망상이라고, 다 내가 지어낸 - P133

이야기라고 말할 사람들의 얼굴이 먼저 떠올라서 그랬던 것 같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골치 아프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것이 나의 경험과 감정에 대한 것이라면, 그런 것은 질리도록 겪어왔다. 말을 꺼내면, 그 말을 증명해야 할 것 같다. 증명하지 못하면 없었던 일이 되곤 했다. 나는 아마 그래서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나보다. 최근 들어 사람들이 왜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냐고 많이들 물어왔는데, 나는 별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결국 이래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 P134

집에서 과거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 과거에 갇힐까봐 두려워진다. 그것이 아주 조금, 혹은 반 정도만 갇히는 것이라도. 그래서 자꾸 엄두가 안 났고, 엄두를 내지도 않았다. 쓰다가 잠깐 새로운 공기를 쐬어야 할 때, 그 순간 아무도 만날 수 없다면 어떡하나. 누구도 나를 과거에서 끌어올려주지 않고 말 그대로 각자의 상황에 격리되어 있다면, 나는 글에서 - P146

못 나올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하지만, 나올 것이다. 나오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무엇을 어떻게 건드리면서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닐까.
위장에 껍질째 들어가 있는 성게를 꺼낸다고 생각해보자. 성게를 꺼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게는 꺼내지면서 끝끝내 위장부터 입안까지를 모조리 훑고 헐어내면서 나올 것이다. 그래, 꺼냈으니 이제 성게가 없다, 라고 하기에는 이미 내 속은 성게의 흔적이 완연하다못해 피를 펄펄 흘릴 것이다. 그 피는 왠지 철철보다는 펄펄이다. 끓어나오는 피일 것이고, 또 그 피는 피대로 내부 장기를 덮어 계속해서 안쪽 면을 태울 것이다.
애초에 성게가 껍질째 위장에 들어가는 일 같은 것이 없었다면 제일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나버린다. 원하고 원하지 않았고 따위는 처음에나 원망조로 따져보는 것이지, 나중이 되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들어가 있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 성게를 꺼냈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미 온몸은 성게에게 훑어진 후니까, 그 이전의 상황 같은 것은 다신 없는 것이다.
당신은 이 수술을 하시겠습니까? - P147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일이 정말 있었던 일이라는 걸 스스로 전혀 의심하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기억은 그런 것이다. 특히 끔찍한 기억일수록 나와 주변은 그것을 잊고자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마치 살 만한 삶들인 것처럼 착각할 - P159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결국 잊힌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살고 견디고자 하는 가냘픈 의지의 결과일 수도 있다. 나 역시도 내가 보라색 사람이었다는 것을 깜빡하거나, 정말로 그런 일이 나에게 있었나 생각할 때가 있다. 그것은 분명 자연스러운 망각이기도 하고, 그 기억을 꿈처럼 여기려는, 삶에서 그런 일은 정말 드문 것이라고 믿어보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 P160

보라색은 내 생각보다 훨씬 오래 피부 표면에 머물렀다. 그날의 그 시간은 나의 일상과 사람들과 완전히 분리된 것이어서, 완전히 잊혔다가도 샤워를 하거나 옷을 갈아입으려고 할 때면 나는 ‘아, 맞다‘ 했다. 엉덩이나 옆구리에서 새로운 보라 - P162

색을 갑자기 발견하기도 했다. 기억하는 것과 잊는 것, 그 어떤 것도 그 일과 완전히 걸맞지는 않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그 사이에서 선택이라도 할 수 있는 듯이. - P163

처음 살아보는 반지하방은 처음에는 처음이어서 딱히 대단한 불만이 생기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웬만한 것은 다 그러려니 했다. 여기에 있는 것이 어쨌든 정신적으로 학교나 집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에, 다른 문제들은 대단찮게 느껴졌다. 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곳이 작업실이 아닌 본격 생활공간이 되자, 괴로움이 갈수록 커져갔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 중 하나는 화장실 타일과 벽지였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 정말로 화장실 타일과 벽지였다. 왜 싫었나, 왜 견디지 못했는가 묻는다면, 사실 그것을 정확하게 어떤 이유다, 라고 설명하긴 힘들다. 당시엔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 정확히 어떤 무늬와 색감, 텍스처가 미칠 것 같았는지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화장실 타일과 벽지가 나를 매일 절망하게 했다는 것만을 기억하고 있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벽지와 타일에 둘러싸이게 된 이삶이, 집을 나온 것이, 정확히 나의 선택이었기에 나는 탓할 - P166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물론 나를 나오게 만든 상황에 대한 분노와 원망도 어마어마했지만, 결국 가장 원망스러운 것은 나와 가족의 조합이었다. 가족만, 혹은 나만 존재하면 됐을 텐데 왜 이렇게 묶여 나와서 나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 반드시 죽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을까. 그런 조합, 소위 말하는 팔자, 그런 것들이 가장 원망스러웠다.
화장실 타일과 벽지를 보면서 울곤 했다. 그리고 작게 딸려 있는 베란다에 비가 올 때마다 물이 차서 큰 캔버스 그림들이 젖을 때마다 몸에 차곡차곡 절망이 쌓이는 것을 느꼈다. 캔버스를 뽁뽁이로 싸두긴 했지만, 결국 이것이 그림에 곰팡이를 만들 거라는 생각에 비가 올 때마다 초조하고 화가 났다. 나는 그때 집을 관리한다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고, 미술 작가로서 작품을 이고 지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직 잘 몰랐다. 그 당시 알고 지내던 한 작가의 작업실에서 그림에 핀 곰팡이를 보고 나서 정말 그것만은 막고 싶다고 생각했을뿐이었다.

지금도 그림을 그리려고 하다가 멈칫하게 되는 때가 있다. 왜냐면 그 그림들은 내 공간에 쌓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유통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그려지지 않 - P167

은 이 그림이 유통되기 전까지 이고 지고 살 자신이 있는가, 그런 것을 스스로 되묻는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그려야 직성이 풀리는 그 대단한 욕구가 각종 이성적 셈들을 이겨먹었다. 그래서 나는 그림을 그렸고, 악기를 샀고, 이사할 때마다 추가비용을 내야 하는, 이삿짐 아저씨들과 집주인에게 핀잔 듣는 ‘여자‘가 되었다. 삶은 계속 그림을 버리는 게 이치에 맞다고 귀에 대고 끊임없이 얘기해주긴 했다.
그다음에 살 집을 보러 다닐 때는, 이사를 나가 가구가 없는 집을 보면 그냥 다 넓고 깔끔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집 보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커튼은 너무 비싸서 화방에서 전지를 사다가 창문에 더덕더덕 붙였다. 덕분에 매일 너무 춥거나 너무 더웠다. 무엇에다 돈을 써야 삶이 만들어지는지, 삶의 질이라는 게 올라가는지 전혀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도 살아 있는 것임을 몰랐다. 집도 사람처럼 계속 관리해주고 부족한 부분은 집주인에게 요구해서든 내가 직접 수리해서든 써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런 걸 전혀 몰라서 마냥 견디거나 비참해했다. 으레 외부먼지가 쉴새없이 들어오고 으레 냄새가 나고 으레 빗물이 들어오고 으레 몸이 무거워지는 그런 상태.
그래도 집에 문을 열고 들어올 때의 정적이 너무 행복해서 - P168

가끔 현관에 주저앉아 한참 그 정적을 놓칠세라 음미하곤 했다. 고함과 비명이 없는 집은 정말로 큰 의미가 있었다. 집에 뭐가 있느냐보다 뭐가 없는지가 훨씬 중요했던 때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으레 여자처럼 보이는 인간의 삶이 다 그렇듯, 밤마다 누군가가 집에 침입해서 나를 내려다보는 상상을 하고, 자주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런 두려움은 비싼 비용을 치르게 했다. 나의 건강이 되었든 집의 위치가 되었든, 문과 창문의 잠금장치가 되었든, 어쨌든 끊임없이 비용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별별 희한한 구조의 집이 많이 있었다. 변기 위에서 샤워를 하는 집은 처음 봤을 때도 충격이 컸지만, 살아보니 삶의 질을 말도 못하게 망가뜨리는 구조였다. 샤워를 하기도 변기를 쓰기도, 또 당연히 그 공간을 청소하기에도 불편한 삼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집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흔했다. 이런 집을 보여줄 때마다 부동산 아재들은 아 이거 그렇게 안 불편하다고, 괜찮다고들 주접을 떨곤 했다. 하긴 내가 갖고 있는 예산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안 불편해해야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고, 내가 이 돈을 갖고 와서는 매일 밤 샤워를 편히 하려고 했다니, 그래요, 미 - P169

안하게 됐습니다.

좋은 집은 콘센트가 필요한 곳에 딱딱 있는 집이었다. 컴퓨터 주변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많은 멀티탭이 필요하지 않은ㅊ집. 하지만 집을 쪼개고 쪼개서 월세방을 만든 집들은 대부분 뜬금없는 곳에 콘센트가 있어, 항상 멀티탭을 여기저기 대주어야 했다. 게다가 전자레인지는 멀티탭에 꽂으면 무조건 전기가 나가버리곤 해서, 온전한 콘센트 하나를 할당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멀티탭은 언제나 몇 번의 곁가지를 치며 구석구석 배치되었다. 놀랍게도 멀티탭들은 전기도 공급하지만 먼지도 틈틈히 저장하는 매체였다. 하얀 선들은 또 얼마나 쉽게 꾀죄죄해지는지, 정말 그런 식으로 더러워져야만 하는 건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꽂아야 할 것들은 점점 더 많아져만 갔고, 집안 곳곳에 뻗친 선들은 마치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결계처럼 집 전체를, 내 삶을 둘러싸 딱 여기까지다, 라고 외치는 듯했다. - P170

물론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갖고 있는 것이 그렇게 문제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필요라는 건 상황 따라 적당히 창조해내거나 무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으려면 그 비용을 정직하게 감당해야 할 뿐이다. 부동산이랄지 기억이랄지 뭐 그런 거 말이다. - P174

부모의 집을 나오며, 나는 다시는 내가 원목협탁에 걸맞은 - P175

삶을 살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불구덩이 같은 그 아수라장 속에서 그 많은 필요와 필수 중에 하필 협탁을 가져가기로 했을까. 집을 떠나면서 협탁을 들고 나오는 사람은 세상에 몇이나 될까. 반복되는 플라스틱과 MDF 사이에 원목협탁이라도 하나 있어주면 내가 떠나온 것들에 대해, 지금이 아닌 삶에 대해, 딱 원하는 만큼만 감정적 연결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뭔가를 잃지 않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것이 존재한 적 없었던 나의 격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또 기능이 아닌 취향이나 추억으로 갖고 있는 가구 하나쯤은 삶이 허락해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사치를 무리하게 누려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 P176

안분지족 같은 거 하지 마. 필요 없어.
존나 사치스러운 마음으로 살아.
_<월간 이반지하> 5호 - P177

이런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내가헤테로인지 레즈인지 바이인지모르겠다. 그래서 제발 알고만 싶어, 내가 뭔지. 내가 무성애자인지, 로맨틱 에이섹슈얼인지 알고만 싶어. 그러니까 초조한 거예요. 이걸 내가 결정해야만 할 것 같아서.
하지만 누구한테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건 아니잖아요. 이것에 대해 초조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다들 쪼금씩 이상한 데가 있고 남들과 다르잖아요. 기본적으로 사회가 말하는비정상성에 우리가 걸려 있어도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_<월간 이반지하> 6호 - P181

근데 이 코로나 상황이 참기 힘든 핵심적인 이유는 뭐냐면, 모든 사람들의 상황 해석과 그에 따른 행동지침이 다른 데에 있다. 이것은 수년 전 내가 잠시 절에서 생활했을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 절에서도 속세처럼 각종 단속을 받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듣는 말은 바로 "절에서는 그러면 안 돼" 이다. 이 말은 약간 만능 문장처럼 모든 사람들이 각자 다르게 활용한다는 점이 백미다. 그래서 서로는 서로를 단속하고 무한히 배려하다가 결국 사람들은 돌아버리는데, 지금 코로나 상황도 좀 그렇다. 각자의 ‘안 돼‘가 많은데 그게 또 각각의 맥락으로는 합당해서 어쩌란 말이냐 분통이 터진다! 존나 통제! 근데 통제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작금의 시대가 도래하고 말았 - P235

고, 나는 그저 산다. 살아야 한다.
그 말인즉슨, 억지 휴식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시대가 오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앞에 뭐든 쓰고 ‘~시대‘라고 붙이면 꽤 있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동시대에 살고 있는 주제에 시대를 꿰뚫는 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시대는 동시대의 누구도 뚫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네가 맞이해야만 하는 뼈아픈 진실임을 인식하도록 하자. 부디 시대를 꿰뚫지 말자.
그러므로 어허 조금씩들 물러나서 억지 휴식을 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오늘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과 일 사이에 일어나는 휴식이 그냥 휴식이라면, 억지 휴식이란 굳이 뭘 만들어내서 휴식을 취한다 이 말이다. 집이 아닌 장소를 예약해서 낯선 곳에 굳이 굳이 가서 쉰다거나, 일처럼 휴식 스케줄을 미리미리 만들어놓는 일을 (내가)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 짓 없이는, 이 통제와 조심조심적 일상을 영위하기가 너무나 힘들다. 한강에 가서 강을 보며 마스크를 벗고 앉아 있는 것 정도로는 더이상 쉬는 것 같지가 않아져버렸다. - P236

세월은 무섭지. 세월 그 새끼가 무섭지. 그런데 저는 나이 얘기는 이젠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옛날에는 이런 얘길 들으면, 어차피 나이 먹은 사람들이 자기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지,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근데 진짜 별 의미 없는 것 같아요. 특히 전염병의 시대를 살다보니깐 내가 젊든 늙든 당장 내일의 일을 알 수가 없잖아요.
내가 내일 죽을 거야? 그럼 나는 지금 존나 늙은 거지.
그런데 50년 후에 죽을 거야? 그럼 나는 존나 쌩쌩하지.
그런데 언제 죽을지 알 수 있다? 없다!
만약 젊고 늙은 게 그렇게 중요하다면, 일단 내 남은 삶에선 오늘이 제일 젊잖아요? 오늘 해라!
그러니깐 마음 가는 대로들 살어. 왜냐하면 내 맘이 뭔지 아는 것도 너무 힘들기 때문에.
_<월간 이반지하> 8호 - P244

나도 나 자신이 싫지, 그런데 나는 또 나잖아. 나를 견뎌야 되는 거지. 이 삶을 살아야 하잖아. 너는 니로 태어난 이상 너를 견뎌야 돼. 이런 너를 견디는 것이 너의 길이다!
잘못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어요. 관계의 다이내믹 속에서 누구나 당연히 잘못할 수 있죠. 다 다른 존재니까. 근데 나를 견뎌야 합니다. 항상 착한 일만 하지 않는 나 자신도 견뎌야 그것이 정말 ‘으른‘으로서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_<월간 이반지하> 9호 - P250

저는 삶의 가변성, 랜덤성에 완전히 지쳐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 사태 같은 것도 우리가 전혀 예상한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미래를 우리가 살고 있잖아요. 저는 노후뿐만 아니라 미래라는 것이 과연 대비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순간의 유희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영속적인 것은 없고, 저는 제가 통제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코로나 록다운으로 힘든 시기에 자기계발하는 사람들 있거든요. 지금이 기회다! 취업 대비 공부하고…… 적당히 해. 이미 황인종으로 태어났으면 끝이야. 이미 경쟁에서 한참 뒤처졌으니까 우린 그냥 재밌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_<월간 이반지하> 2호 - P261

우리 남성 친구들은 어떤 말을 해도 평생 누군가가 받아주고 들어줬거든요? 그래서 설득력이 약합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요. 그냥 아무 말이나 뱉어도 다 들어줬거든요. 그런데 우리 여성 친구들은 어떻습니까. 목숨걸고 말을 해왔죠. 두드리고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여성 친구들 언어 능력이 왜 발달하겠어요? 안 들어주니까. 그래서 여성 친구들 이야기가 조금 더 논리정연한 경향이 있죠.
_<월간 이반지하> 5호 - P265

하지만 결국 어떤 시대적 부름도 시대에 가려 결국 잘 안 들리기 마련이라, 어떻게 대충 잘 적당히 알아서 맘대로 나는 가려 하오. - P323

식물에게 마음을 주고 키우다보니, 이들은 식물원에서 데려올 때처럼 완벽하게, 허투루 자란 곳 하나 없이 그렇게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 P328

식물인지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기본 생장 이후부터의 생은, 어중간하고 뭐라 이름 붙이기 애매한, 그 못난 중닭의 연속인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잎과 줄기들을 보면서 무엇이 곁가지인지 고민하다 말다 했다. 전체 화분의 균형감을 생각하면서, 매일 가장 예쁜 단면을 찾아 입체인 화분을 빙글빙글 돌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깨닫고 만 것은 그냥 이 불완전함 자체가 너무나 완전한 아름다움 그 자체라서, 도저히 이대로 전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화분을 약 30도씩 돌려보면서 어떻게 놓아야 가장 시각적 쾌감이 있는가를 혼자 조율하다보면, 다시 말해 화분을 멀리서 봤다가 가까이 다가가서 조금 돌리고 또 나와서 보고를 무한히 반복하다보면, 결국은 그냥 항복이다! 지금 맞는 각도를 찾았다 싶더라도 내일이면 뭔가 또 미세하게 균형이 깨져 있다. 그래서 또다시 돌리고 돌리다보면, 아! 내가 지금 하는 일은 영원히 맞출 수 없는 것을 맞추려고 하는 무모함과 무용함. - P326

나는 분명 완연한 중닭이었다. 그리고 발레를 했던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 중닭스러움이 싫었기에 중닭의 아름다움시도 보지 못했다. 중닭은 너무 과하거나 모자라서, 가려지지 않지만 필시 가려야만 하는 무엇이었다.
하지만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불완전성의 다른 이름으 - P327

로서의 중닭이 아니라, 모든 측면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순간 같은 것은 없으며 영원히 여기저기 삐걱거릴 것이라서, 그래서 이 시간 축에서 다시 오지 않을, 그 모든 나사 빠진 순간을 끌어안음이 중닭이라면, 그런 고유함과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 중닭이라면.
그 중닭의 아름다움을 인지한 상태에서, 그때부터 절대로 도달하지 못할 균형을 향한 몸부림은 비로소 의미가 생겼다고 나는 생각했다. 우연히 어떤 성장과 노화의 아귀가 들어맞아 몸이 클래식하게 써지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불가능한 완전함을 위해 도전하고 완전히 실패하는 것, 그런데 그 실패가 실은 모두 각각의 클래식임을 받아들이는 부분 말이다.

나는 예술에서 중닭의 아름다움이 진하게 느껴질 때 완전히 매혹된다. 영원히 도달하거나 완성하지 못할 어떤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 앞에서 못난이를 숨기지 않은 채 대놓고 ‘나는 그곳에 이르지 못했소! 나는 중닭이오!‘ 하고 튀어나온 그 아름다움은,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이 된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다 바로 이런 중닭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식물 화분 돌리기를 지속하며 매번 가장 최고의 균형을 찾는 데 실패하고, 그 실 - P328

패에 대해 "아, 오늘도 역시"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의 대부분에서 우리는 중닭일 것이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매 순간의 중닭스러움에 대해 약간의 위로와 그 고유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남겨보는 것이다. - P330

아무튼 얘네는 큰다. 내가 어떤 마음이든 간에 그냥 자기들이 태어난 대로, 생겨먹은 대로 제 속도로 그렇게만 자란다. 가끔은 약간 나한테 엿먹어라 하는 느낌으로, 여봐란듯이 큰다는 노낌도 있다. 하지만 우리집 식물들은 자신들의 그런 생장에 어떤 미안함이나 송구함도 내비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게 매력포인트인 것 같다.
처음엔 기가 막히지만, 너무나 당당하고 아무렇지 않게 멋대로 다 깨부수면서 자라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삶에서 나는 그냥 ‘보는 자‘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나는 애초에 - P335

그 생에 관여할 자격이 없었으며 그저 보는 것 정도나 겨우 껴들듯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어떤 예고도 빚지지 않은 채, 어떤 껄끄러움도 없이 순정하게 지 할 일만 하고 사는 거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순간들을 필연적으로 놓치게 되어 있다. 겨우 따낸 보는 자의 위치에서도, 실상 모든 순간을 보고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대를 살아간다는 환경적 세팅 이외에는 어떤 공유도 약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눈을 둘 수 있는 그들이 그곳에다. 식물의 탈을 쓰고 짐승 같은 거친 성장을 하고 있는 그들의 에너지가 있다. - P336

작가로 사는 것은 평생을 희망고문에 시달리는 일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하고 적체되어만 가는 그림들을 목도하는 시간들은, 또 그것이 이사를 할 때마다 정확한 비용으로 환산되어 청구되는 일은, 창작으로 생산된 것들을 계속 이고 갈 것인지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까지가 내 몫임을 끊임없이 인지하게 되는 이 직업은. - P338

저는 기본적으로 ‘창작자라고 해서 미래 전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가 그런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은 좀 얇고 길게 하면 됩니다. 관계든 직업이든 뭐든 언제든 그만둘 수 있고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저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창작자로 살다보면, 그게 마치 직업이라기보다는 소명이라든가 신화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될 때가 있는데요. 저는 사실은그런 순간에는 좀더 직업적으로 생각해보면 좋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창작을 그만둔다는 게, 지금여기 사연에서도 너무 비장하게 그러잖아요. "친구가 진지하게 그만둘 생각을 한다. 물론 당연히 하던 걸 그만두면 일반 직장이든 뭐든 걱정도 되고 큰 변화이긴 한데, 제 생각은 그래요. ‘그.럴.수있.다‘라는 거죠.
그림을 그리다 붓을 꺾었다? 아니에요. 그냥 회사 다니다 때려치운 거예요.
기억해야 할 건, 근데 언제든지 또 그걸 다시 할 수 있다는 거. 힘들면 좀 쉴 수도 있고, 딴 일 좀 할 수도 있고, 그게 무슨 순수함을 - P342

더럽힌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럴 수 있다는 거죠.
사람들은 내가 나이가 너무 많아서, 너무 어려서, 또 여러 가지 상황이 안 좋아서 새로운 걸 시작하지 못하겠다. 혹은 하던 걸 못 그만두겠다, 이런 말들을 하죠. 근데 그런 완벽한 타이밍은 오지 않아요. 언제든 갈등도 있고 부딪치는 문제도 있고 그런 거죠. 창작이 힘들면 그냥 쉬면 되는 것 같아요..
일도 창작도 대단히 연속된 커리어를 쌓아야지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거든요. 한국 사회에서는 고정된 커리어나 소속을 갖고 있는 걸 당연히 여기다보니까, 초등학교 다니면 중학교 가고, 중학교 다니면 고등학교 가고, 이 선에 익숙해져서 그렇지, 사실 그런 계단은 환상에 가깝잖아요. 사실은 다 지그재그고, 커브고. 그래서 저는 그냥 그만둘 수도 있고 하고 싶을 때 또 하면 되고 그러면 좋겠어요. 내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편해지면서 상황이 객관화되는 게 있거든요.
죽을 때까지 해야 되는 일은 없어요. 죽을 것 같으면 안 해야 돼요.
한 사람의 창작 과정이나 삶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판단할 순 없어요. 그런데 저는 기본적으로 다 해도 된다는 얘기를 꼭 하고 싶어요. 그게 이 사회가 우리에게 안 주는 메시지인 거 같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네 인생은 다 더럽다. 그렇게 순수하지 않다.
한가지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가지고 거기에 깃발 꽂고 이런 게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이것저것 두드려보고. ‘아, 이거 아닌가?‘ 그럼 또 접었다가 딴 거 하고. 좀 - P343

치사하게 살아도 괜찮다 이 말이죠.
저는 존버의 시간도 고통이 담보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길 하고 싶어요. 존버가 말 그대로 존나 버티는 건데 그 존나가 ‘존나‘ 아니고 그냥 ‘재밌게‘ 버틸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요소를 계속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우리, 오염된 상태로 같이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순수하지 않게. 다 섞이고.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_<월간 이반지하> 2호 - P344

정말 기묘한 외로움이었다.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하게 만들자 존재는 더욱 존재하기 위해 떠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봄과 더불어, 남겨진 자기 자신을 견디는 것까지가 만든 자의 몫이 된다. - P350

그냥 나로 사는 건데, 퀴어로 산다는 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운동적 측면을 갖게 되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마음대로 살 거예요. 그게 포인트예요.
그냥 끝까지 재밌게 살고 싶어요.
_<으랏파파> 인터뷰 - P351

다 해도 됩니다. 페미니스트 종류 되게 많습니다. 슈퍼마켓 같은 거예요. 자유롭게 맘대로 사십시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괜찮아, 별일 아냐.
_<월간 이반지하> 4호 -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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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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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질환을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현재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믿을 수 있다면, 누가 치료비를 지급해야 하느냐에 관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 P184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 보장은 아픈 사람들을 인정하는 일의 시작일 뿐 아픈 사람들이 갖는 가치를 표현하는 일은 아니다. 사회가 모든 사람에게 치료를 제공하면서도 여전히 아픈 사람들을 주변부로 밀어낼 수 있다. ‘생산적이지 못한‘ 사람들, 즉 아동, 장애인, 노인, 직업 훈련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그곳에 놓인다. 치료 자체는 치료를 받는 개인이 가치 있게 여겨진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아픈 사람이 미래에 보여줄 생산성에 투자하는 일이다. 아픈 사람은 수리가 필요한 고장 난 몸 안에 있는 건강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물어야 하는 어려운 질문은, 우리가 아픈 사람들을 나머지 사람들이 사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통찰을 주는 이들로서 가치 있게 볼 수 있느냐다.
건강한 사람들이 자기 삶을 평가하는 생산성이라는 기준을 의심해본다면, 이는 질병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의 시작이될 수 있다. 나는 다시 ‘생산성 있게‘ 되었지만 아팠던 때보다 더 잘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암은 없는 채로 그때처럼 - P187

살 수 있길 종종 바라기도 한다. 아플 때, 아마도 오직 아플 때만, 우리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암처럼 치명적인 병을 앓았기에 그저 가만히 앉아 오후의 빛을 바라볼 수 있었고, 16년 동안 봐온 야곱의 그림을 마주하고 마침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제대로 사는 법을 익힐 만큼 충분히 아프지는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자주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내가 가치 있다.
고 여기는 무언가를 생산하고 있는지 묻는 대신, 또 사회나 조직의 요구보다는 사람들의 필요에 맞추고 있는지 묻는 대신, 이력서에서 무엇이 중요하냐에 따라 선택을 가늠한다. 여전히 나는 다른 사람들의 질환과 고통에 두려움을 느낀다. 다시 그들처럼 될까 봐 두려울 뿐 아니라, 하던 일을 멈추고 아픈 사람을 돌봐야 할까 봐 두렵다. 고통도 무섭지만 속도를 늦추는 것도 무섭다.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느려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은 광기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속도가 늦어질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며, 이들은 조직이라는 생산 기계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겁낸다.
화학요법 치료 이후 몇 년이 지난 지금, 아팠을 때는 너무도 하고 싶었지만 체력이 부족해서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며 짜증을 내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 나는 제대로 감각을 느 - P188

낄 수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긴다. 문득 음악이 들려올 때 느꼈던 기쁨이 그립다. 산책을 할 때, 내 집에서 밤새 잘 때 느꼈던 기쁨이 그립다. 아팠을 때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했다. 요즘 나는 사람들이 내 일을 방해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그 밖의 모든 일을 전부 몰아내야 할 만큼 그렇게 엄청나게 중요한지 자문하길 잊곤 한다.
건강한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을 분리해두는 대신,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를 생각해봐야 한다.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하는 기본 권리 중에서도 특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경험할 권리를 짚고 싶다.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내달리면서 살아가느라 사람들에겐 자신이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지 반추할 시간이 없다. 우리는 더 많이 생산하는 법, 몸을 생산 도구로 사용하는 법을 배우고 익히면서 인생을 보낸다.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사람이든, 조립 라인에서 일하는 사람이든,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든, 우리는 몸을 생산 도구로 사용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지만, 우리 자신을 생산한다는 말의 의미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을 만들어가는 이런 종류의 생산은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여야 한다. - P189

아픈 사람의 권리라는 말의 뜻을 이해하려면 한 인간이 자신을 생산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질문해봐야 한다. 여기에는 먼저 다른 사람이 해주는 돌봄이 필요하고, 다음으론 시간, 공간, 기본적인 생필품 그리고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또 최종적으로는 삶의 여러 조건이 갖추어져서 우리가 받은 돌봄을 다른 이들에게 되돌려줄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넘어 삶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이 모두가 필요하다. 이 권리 중 어느 것도 특별한 권리여서는 안 된다.
질병의 궁극적인 가치는, 질병이 살아 있다는 것의 가치를 가르쳐준다는 점에 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아픈 사람들은 동정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하는 존재가 된다. (...) 죽음은 삶의 적敵이 아니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삶의 가치를 다시 확인한다. 또 질병을 계기로, 삶을 당연시하며 상실했던 균형 감각을 되찾는다. 무엇이 가치 있는지, 균형 잡힌 삶이 어떤 것인지 배우기 - P190

위해 우리는 질병을 존중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존중해야 한다. - P191

아픈 사람의 권리를 생각하다 보면 결국 아주 단순한 질문들에 도달한다. 우리를 인간으로서 하나로 묶는 경험의 핵심은 무엇일까? 이 질문의 답에 고통이 포함된다면, 우리 각자는 바로 자신도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만큼 강인한가? 만일 인정할 수 있다면 그 사실을 어떻게 존중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아주 현실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세금을 낼 이유로 의료 서비스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죽어가고 있는 사랑하는 이와 시간을 보내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무엇보다 가장 현실적인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인간으로서 생산할 수 있느냐다. 인간인 우리를 생산하는 일은 질병이 가져오는 고통을 목격하고 공유하는 데서 시작한다. 또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고통을 공유 - P192

함으로써 배우고, 이 배운 바에 따라 살아가는 데서 시작한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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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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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질병은 우리를 삶의 경계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삶이 어디에서 끝나버릴 수도 있는지 본다. 경계에서 삶을 조망하면서 우리는 삶의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혹은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보도록 허락 - P7

받는다. 여전히 살아 있긴 하지만 일상에서는 멀어져 있기에 마침내 멈춰 서서 생각해볼 수 있다. 왜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살아왔는가, 미래가 있을 수 있다면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질병은 삶 일부를 앗아가지만 기회 또한 준다. 우리는 그저 오랫동안 살아왔던 대로 계속 사는 대신 살고 싶은 삶을 선택할 수 있다.
(...)
회복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내 경우에 심장마비 이후의 회복이란 아팠던 경험 전체를 뒤에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건강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반면 암은 이런 식으로 회복할 수 없었다. 아직도 진찰을 받을 때마다, 보험 서류를 작 - P8

성할 때마다 암에는 차도가 있을 뿐이지 ‘완치‘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하지만 암이라는 질환의 생리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암 경험이 미친 영향이다. 암을 앓고 난 후에는 예전에 있던 곳으로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변화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도 비싼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고통을 보았고, 특히 젊은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은 갖기 어려울 수도 있는 어떤 관점에서 고통을 보았다. 삶이라는 게임을 이전과 같은 조건으로 계속할 수는 없었다. 예전의 나를 회복하기보다는 앞으로 될 수 있는 다른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그리고 글쓰기는 이 다른 나를 찾아가는 과정의 일부다.
회복이 질병의 이상적인 결말이라고 보는 견해에는 문제가 있다. 어떤 이들은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받던 암 치료가 끝나자마자 아내와 나는 장모님이 입원한 암 병동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고, 장모님의 경우 결말은 쉰아홉 살의 죽음이었다. 만일 회복이 이상적으로 여겨진다면 계속 만성으로 남는 질병이나 죽음으로 결말나는 질병을 앓는 사람들의 경험에서 어떻게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답은 회복보다는 ‘새롭게 되기‘에 초점을 맞추는 일인 듯싶다. 계속 아프다 해도, 심지어는 죽어간다 해도 질병 안에는 새롭게 될 기 - P9

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질병이 제공하는 기회를 붙잡으려면 질병을 적극적으로 살아내야 한다. 질병에 관해 생각해야 하고 이야기해야 하며 어떤 사람들, 곧 나 같은 사람들은 질병을 주제로 써야 한다. 생각하고 말하고 씀으로써 우리는 개인들이자 한 사회로서 질병을 받아들일 수 있다. 또 그때야 질병이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님을 배울 수 있다. 아프다는 것은 그저 다른 방식의 삶이고, 질병을 전부 살아냈을 즈음에 우리는 다르게 살게 된다. 질병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도 자명하지도 않은 이유는 질병이 우리를 다르게 살도록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 P10

손으로 편지를 만지듯이, 접고 또 접어서 답장을 보내듯이, 내가 쓰는 이 글에 다른 사람들의 손길이 닿길 바란다. 아픈 사람들이 이 글에 응답하길 바란다. 여기서 응답이란 다른 이가 쓴 이야기 안에서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는 것이다. - P11

나는 내 이야기를 할 뿐이지만, 독자들은 내 이야기에 자기 삶을 더할 수 있으며 각자의 상황에 맞게 내 글을 고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쳐 쓰기‘가 모여 우리 사이의 대화가 된다.
대화할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아픈 사람이 너무도 많다. 자기 질병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질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진단명을 말하거나 어떤 치료를 받고 있는지 설명하는 일 이상이다. 아픈 사람이 자기 질병에 관해 하는 말들은 대부분 자신에게서 나온다기보다는 의사라든지 그 밖의 의료진에게서 온다. 이런 경우 아픈 사람은 환자로서 말하고 있을 뿐으로, 그저 다른 곳에서 나온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의학의 이야기를 지루하게 반복한다. 전문적인 의학 용어를 써서 말하려고 애쓰면서 아픈 사람은 개인의 경험이라는 자신만의 드라마를 스스로 부정한다.
아픈 사람들은 할 말이 많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어떤 희망과 공포를 품고 있는지 듣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통증 속에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아픈 사람이 자신의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리고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 사람들은 당황하며, 그래서 연습할 기회를 놓친다. - P12

또 연습한 적이 없으므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결국 사람들은 질병이 이야기할 만한 주제가 아니라고 믿게 되며, 다른 이와 함께 질병을 경험하고 배울 기회를 놓친다. 하지만 새롭게 되어가는 과정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할 때 더 쉽다. - P13

어떻게 하면 모범적으로 아플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각자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혼자일 필요는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어디에서 문제를 맞닥뜨렸고 또 어디에서 가치 있는 순간을 발견했느냐다. 아픈 사람들은 아픈 동안 겪는 모든 일이 이야기할 만한 소재라는 증거로 이 글을 가족과 친구와 의료진에게 내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병을 고통과 상실 너머로 고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사람들 대부분이 가장 쉽게 의지할 수 있는 방법이다. - P14

심각한 질병은 삶의 모든 면을 건드린다. 아픈 사람을 수 - P15

용하기 위해 지어놓은 병원과 의료 시설들은 환상을 만들어왔다. 아픈 사람을 건강한 사람들에게서 떨어뜨려 가둬놓음으로써 질병 자체도 아픈 사람의 삶 안에 가둬놓을 수 있다는 환상이다. 이 환상은 위험하다. 아프게 되면 관계에도 직업에도 변화가 온다. 자신이 누구며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삶이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다르게 느낀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무섭다. 심하게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 번의 경험에서 나는 변화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압도되었다.
그리하여 이 글은 질병에 압도되기 전의 젊은 나에게, 몇 년 더 젊을 뿐이지만 경험의 심연 건너편에 있는 나에게 쓰는 것이기도 하다. (...) 이제 이어질 글에서 아프기 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두려울 수밖에 없겠지만 두려움에 차서 인생을 보낸다면 바보 같은 일일 거라고, 미래의 너는 고통받고 많 - P16

은 것을 잃게 되겠지만 고통과 상실은 삶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많은 것을 잃겠지만 그만큼 기회가 올 겁니다. 관계들은 더 가까워지고, 삶은 더 가슴 저미도록 깊어지고, 가치는 더 명료해질 거예요. 당신에게는 이제 자신의 일부가 아니게 된 것들을 애도할 자격이 있지만, 슬퍼만 하다가 당신이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느끼는 감각이 흐려져선 안 돼요. 당신은 위험한 기회에 올라탄 겁니다. 운명을 저주하지 말길, 다만 당신 앞에서 열리는 가능성을 보길 바랍니다. - P17

어느 날 몸이 고장 났다. 공포와 절망 속에서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우리가 아플 때 묻게되는 질문이다. 이때 문제는, 몸이 정신에게 질문을 던지자마자 의사들이 답한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질환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답한다. 이들의 답은 의술을 펼치는 데는 유용하지만 한계도 있다.
(...) 몸이 고장 나면 삶도 고장 난다. 의학 - P22

이 몸을 고칠 수 있다고 해도 언제나 삶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학은 고장 난 부분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지만, 때로 아픈 사람 안에서 피어오르는 공포와 절망은 너무나 커서 고장 난 부분을 고쳐도 가라앉지 않는다. 이런 때 질병 경험은 의학의 한계 밖에 있다. - P22

우리는 잘못된 결과를 뱉어내는 컴퓨터 문제를 상의하는 것처럼 내 심장 문제를 두고 이야기했다. ‘그것‘에 문제가 있네요. 우리의대화는 내가 자동차 정비공과 나누는 대화보다 대체로 더 고상했지만, 고상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의사와 내가 모호하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정비공처럼 구체적으로 말하질 않았으며, 나는 손상이 얼마나 심한지 자세하게 듣고 싶지가 않았다. 자동차보다는 심장에 관해 더 많이 알았지만 이 심장이라는 엔진은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듣기가 꺼려졌다. - P24

경험은 살아야 하는 것이지 처리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몸 또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관리자가 나라도 그렇다. 몸은 삶의 수단이며 매개체다. 나는 몸 안에서 살 뿐만 아니라 몸을 통해서 산다. 정신을 몸에서 떼어내라고, 그러고는 몸이 어디 바깥에 놓여 있는 사물인 양 이야기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몸이 고장 났다는 말을 들으면서 여전히 냉정하고 전문가답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의학의 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언제나 냉철하게 행동하라고 요구받는다. 몸이 고장 났지만 공포와 절망은 고장 난 일부가 아닌 것처럼 대해야 하고, 삶 전체가 바뀌었지만 바뀌지 않은 듯이 행동해야 한다. - P25

심장마비였다는 소식을 들으며 필요했던 것은 일종의 축하였다. 축하는 어떤 사건에 대단히 기뻐하기 위해서 하기도 하지만, 사건의 중요성을 표시하기 위해서도 한다. 장례식은 삶을 축하한다. 입맞춤과 악수가 그렇듯 눈물과 침묵은 특별한 때를 축하할 수 있다. 하지만 주치의와 나는 내게 일어나고 있던 일을 축하할 수 있는 말을 찾는 대신 그 경험을 인정하길 회피했다. 우리는 기계를 두고 말하듯 질환만을 논했다. 질병을 축하하는 법은 나 혼자서 배워야 했다. - P26

의학의 한계를 이해하려면 먼저 질환disease과 질병 illness의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의학의 이야기는 질환 용어를 사용한다. 질환 용어는 몸을 생리학으로 환원하며, 측정할 수 있는 것들로 이루어진다. 체온, 감염 여부, 혈액 및 체액의 순환과 구성, 피부 상태 등등을 측정하고 검사한 결과가 질환 용어에 포함된다. 질환 이야기에서 이런 결과들은 지금 일어나고 - P27

있거나 곧 발생할 어떤 고장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질환 용어는 측정된 값을 참조하기 때문에 ‘객관적‘이다. 내 몸은 살아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주체지만, 질환 이야기에서는 그 몸, 측정될 수 있으며 따라서 객관화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질환을 논할 때 ‘객관적‘인 이야기는 언제나 의학의 이야기다. 환자는 질환 용어를 사용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재빨리 배우지만, 의학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면서 아픈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는다. 내가 경험하는 내 몸은 다른 누군가가 측정하는 그 몸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환자가 되어 질환 이야기를 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자신의 몸을 외부에 존재하는 장소로, 질환이 발생하고 있는 ‘현장‘으로 언급한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환자는 의사와 자신을 같은 장소에 두지만, 의사에게는 환자의 몸 자체가 외부의 장소다. 아픈 사람은 의사와 자신을 동일시할 때 훨씬 더 안전하고 편안하다는 사실을 안다. 이 같은 정체성의 혼란은 이해할 만하지만 그래도 잘못됐다.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면서 아픈 사람은 대가를 치른다. 바로 자기 존재가 ‘그 몸‘의 일부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질병은 질환을 앓으면서 살아가는 경험이다. 질환 이야기가 몸을 측정한다면, 질병 이야기는 고장 나고 있는 몸 안에 - P28

서 느끼는 공포와 절망을 말한다. 질병은 의학이 멈추는 지점에서,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 단순히 측정값들의 집합이 아님을 인식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내 몸에 일어나는 일은 내 삶에도 일어난다. 내 삶에는 체온과 순환도 있지만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도 있으며, 이런 것들은 측정될 수 없다. 질병 이야기에 그 몸 같은 것은 없으며 오직 내가 경험하는 내 몸만이 있다. 질환 이야기는 어떤 측정값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기록한다. 질병 이야기는 완벽하게 편안했던 몸이 다른 몸이 되어가는 변화에 관해 말한다. 이 다른 몸은 질문을 던진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그것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 P29

그렇지만 내가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은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다. 내가 원하는 도움은 질문에 대답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름의 방식으로 질병을 살아내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의료진 또한 지켜봐주는 것이다. 답을 받기보다는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 이야기를 꺼내는 데 필요한 시간을 기다려주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없을 때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보호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즉시 말로 표현이 안될 때가 가장 절박하게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 때인 경우가 많다. 질문이 없다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심장마비가 있 - P30

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할 말이 별로 없고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수 있을까. 아픈 사람이 풀어야 하는 문제는 어떤 용어를 사용해 표현할지 고심할 때 도울 사람을 찾는 것이다.
(...)
질병이 삶에 가져온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서 나는 말해야 했다. 이야기함으로써 변화와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 P31

계속 찾아낼 수 있었다. 심각하게 아픈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인정해주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들은 자신을 위해서 이야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아직 아프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질병은 어떻게 더 또렷한 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지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질병은 삶을 위협하지만 살아갈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얼마나 고통스럽든 얼마나 아픈 것을 피하고 싶어 하든 상관없이 우리에겐 질병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 책의 과제는 바로 이 필요를 표현하는 것, 그리하여 질병을 축하할 수 있는 말들을 찾는 것이다. - P32

자신이 얼마나 취약한지 배웠어야 했지만, 취약함을 부인함으로써 나는 오히려 더욱 취약한 상태로 남았다.
우리는 취약한 생물이고, 인간들은 바로 이 취약함을 공유함
한다.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희망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취약함을 부정하기보다는 받아 안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취약함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을 때만 또렷하게 분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또렷하게 분별한다는 것은 저곳이 아니라 이곳에서 돌아다니길 선택하는 일 이상이고, 저것이 아니라 이것을 희망하는 일 이상이고, 저것이 아니라 이것을 사랑하길 선택하는 일 이상이다. 또렷하게 분별한다는 것은 어디서, 무엇을, 누구를 선택하는 문제를 넘어, 모든 활동의 한가운데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돌아다니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런저런 선택을 좇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일일 때 더는 건강에 - P39

의존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심장전문의의 진료실에서 나올 때의 나는 어떻게 혹은 왜 그러한지를 이해할 만큼 심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해가 미처 다 가기도 전에 나는 배우게 된다. 충만한 삶을 산다는 측면에서는 아픈 사람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보다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음을,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의지를 발휘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계속 확인하고 증명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건강이 필요하다. 반면 아픈 사람은 자신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자기 의지를 전혀 행사하지 않아도 세계가 이미 완벽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픈 사람은 자유롭다. 하지만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다른 회복을, 사고에서의 회복이 아니라 질병에서의 회복을 배워야 했다. - P40

정치인과 의사들은 ‘의사 쇼핑‘ 같은 말을 써가며 여러 의사를 전전하는 행동을 지탄하지만, 신경을 긁는 비난이며 표현 자체도 모욕적이다. 내가 세 번째 의사를 ‘쇼핑‘해서 다른 의견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죽었을 것이다. - P46

암이라는 말을 듣는 경험은 어땠을까? 미래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이들은 다시는 못 볼 얼굴들로 변했다. 비현실적이지만 완전히 현실인 악몽 속을 걷고 있는 듯했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리 없어. 하지만 일어나고 있었고, 계속 일어날 것이었다. 내 몸은 바닥이 없는 모래 수렁으로 변했고 나는 자신 안으로, 질병 안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 P49

내 병은 통증을 밤과 연결했다. 종양이 몸을 장악하면서 통증은 정신을 장악했다. 통증이 빚어낸 고립과 외로움은 어둠 속에서 더 커진다. 아픈 사람이 평화로이 몸을 눕힌 사람들에게서 분리되기 때문이다. 한밤중, 통증 속에 있는 사람의 세계는 더는 하나로 붙어 있지 못하고 조각나 떨어져 나온다.
통증 때문에 조각나는 듯한 경험을 쓰다 보면 모든 것이 부서지는 듯하던 느낌이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언어는 쉬이 빗나간다. 앞에서 나는 통증 속에서 보낸 밤들에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질병을 알게 됐다고 썼다. 하지만 이 비유는 경험을 왜곡한다. 내가 얼마나 질병에 얼굴을 주고 싶었든 간에, 다시 말해 얼마나 질병을 일관성 있게 표현하고 싶었든 간에 질병은 어떤 존재가 아니다. 질병에 얼굴을 주고 싶은 마음이 어둠 속에서는 더욱 커지기 때문에 나온 비유일 뿐, 질병에 얼굴이 있다는 말은 경험을 더 조각내고 뒤섞는다. 내가 한밤중에 마주한 것은 나 자신이었을 뿐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에 장악됐다고 느낄 때 인간이 흔 - P53

히 보이는 반응은, 위협이 되는 무언가를 설명하는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는 통증을 ‘그것‘으로, 신으로, 싸워야 하는 적으로 만든다. ‘그것‘이 사악해서든 아니면 우리 잘못으로 ‘그것‘이 진노를 일으켜서든 우리는 통증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저주하고 그것이 자비를 베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하지만 통증에는 얼굴이 없다. 통증은 밖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통증은 바로 내 몸,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신호를 보내는 내 몸이다. 통증은 몸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몸이지, 외부에 있는 어떤 신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아니다. 통증과 씨름하는 일은 몸 바깥에 있는 무언가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몸이 몸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통증을 전부 내 몸 안에 있는 내 것으로만 본다면 몸 안에 고립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리고 고립은 조각나 부서지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건강할 때 몸은 질서정연하고 주위 환경에 조응하며, 몸 부위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작동한다. 누웠을 때 몸은 편안함을 느끼면서 휴식하고, 깨어날 때는 활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휴식과 활동이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리듬은 통증 속에서 사라지고, 그러면서 계획과 전망도 사라지며, 과거와 미래가 서로 맞물려 있을 - P54

때는 이해할 수 있었던 삶 또한 사라진다. 조화는 붕괴하고 조각난다.
조화란, 한밤중 다른 사람들이 잘 때 함께 자고 함께 휴식하는 것이다. 함께 쉬지 못하고 불려 나오면서 아픈 사람은 조각나 떨어져 나오며, 무엇보다 삶의 자연스러운 주기라는 온전함을 상실한다. 하지만 여기서 또다시 나의 언어는 삐끗한다. 아무것도 나를 잠에서 불러내지 않았다. 몸의 통증 때문에 일어났고, 통증을 의식하며 혼자 깨어 있으면서 자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왔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아픈 사람이 겪는 추방당하는 듯한 경험은 통증과 함께 시작한다. 조화롭게 통일되어 있다는 감각 안에서만 통증은 아픈 사람이 느끼는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수 있다. 이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 아픈 사람은 자신이 떨어져 나온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통증 때문에 깨어 있던 밤들에 아내를 깨울 수도 있었다. 아내를 불러내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게 하고, 그래서 혼자 외로워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캐시를 깨웠다면 자연스러운 주기에 맞춰 흘러가기에 조화로운 그녀의 일상을 훼손했을 것이다. 캐시는 여전히 낮 동안 일하고 밤에는 잤다. 그녀의 삶에는 내 삶에서는 사라진 질서가 있었 - P55

다. 자연스러운 주기 바깥에 있던 나는 낮에는 너무 피곤해서 일할 수가 없었고, 밤에는 등을 망치로 치는 듯한 통증 때문에 잘 수가 없었다. 야행성도 주행성도 아니고 어느 쪽의 존재도 되지 못한 채로 일상의 바깥에 머물렀다.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역할을 다하지 못했고, 부재하고 있었지만 부재하는 이유를 전부 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제자리가 아닌 곳에서 삶을 살고 있었다. - P56

왜 캐시를 깨우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아직 절반만 답했다. 다른 절반의 이유는 캐시의 잠이 내게 유일하게 남은 질서였기 때문이다. 더는 다른 사람들이 휴식할 때 함께 쉴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가족의 휴식이 소중했다. 나는 잘 수 없었지만 여전히 아내의 잠은 아껴줄 수 있었다. 그녀의 수면을 방해했다면 정말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나중에 더 심하게 아프게 되었을 때는 밖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보며 움직일 수 있는 그들의 능력과 그들 몸 안의 자유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들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소중히 여기길 바랐다. - P57

중요한 것은 통증이 할 일을 했다는 것, 다시 말해 다른 의사를 만나보게 했다는 것이다. 주치의가 잡아놓은 비뇨기과 진료일이 됐을 때는 이미 수술도 받고 화학요법도 한 차례 받은 후였다. 통증은 원래 나를 돕기 위해 생겨났다. 무언가가 바뀌어야 한다고 집요하게 주장하는 내 몸, 그것이 바로 통증이다. - P58

표현할 수 없는 통증 속에서 아픈 사람은 고립되며, 입을 다물면서 추방되었다고 느낀다. 어떤 형태로 표현되는 일단 표현된 말은 다른 사람을 향한다. 곁에 아무도 없을 때라도 그렇다.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표현함으로써 아픈 사람은 다시 사람들 사이로 돌아온다. 사람들은 각자의 집에서 평화롭게 잠자고, - P59

나는 내 집에서 아름다운 무언가를 보았다. 여전히 혼자였지만 나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다.
조각나는 듯한 경험을 쓰기가 어려운 것처럼 다시 조화속에 있다고 느꼈던 경험도 표현하기 어렵다. 하지만 내 말이 조화로운지는 중요하지 않다. 소통하고자 하는 시도만으로도 아픈 사람은 조화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시의 단어 하나하나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표현하고자 했을 뿐이로, 표현이 조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 시를 ‘보기‘ 위해 창문이 필요했다. 그리고 본 것을 다른 사람들의 세계 안에 두기 위해,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세계 안에 내가 있을 자리를 되찾기 위해 나에게는 그 시가 필요했다.
소중히 하는 마음에 관해서는 좀 더 쉽게 쓸 수 있다. 가족들은 잠들어 있었고 그들의 잠은 내게 소중했다. 통증 때문에 깨어 있던 밤에도 여전히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이 있었다. 가족의 휴식은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런 마음 때문에 통증은 견딜 만해졌다. 질병과 통증은 삶을 조각내지만, 사는 이유를 모두 빼앗겼다고 혹은 사는 이유가 막 사라질 참이라고 느끼는 순간에 우리는 다시 조화를 발견하곤 하며, 그렇기에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창에 비친 아름다움을 본 그 밤에 통증은 덜 중요했다. 내 몸에서 나를 떼어냈기 때문이 아 - P60

니라 내 몸 밖으로 나를 연결했기 때문이다. 아내의 잠도, 그 창도 소중했다. 이렇게 아끼는 마음이 다시 모든 것을 조화롭게 했고, 그래서 나 자신도 계속 소중히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창문에서 본 것을 모두 이해할 만큼 심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언어는 오직 나중에야 경험을 따라잡는다. 하지만 그 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소중하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 P61

사람들이 애도와 관련해 겪는 문제는 대부분 상실이 겹쳐서 생기기보다는 상실한 사람이 그만 슬퍼하길 주변에서 바라기 때문에 생긴다. 의료진, 가족, 친구 등 모두가 질병에서 비롯된 상실이든 죽음에서 비롯된 상실이든 아픈 사람이나 돌보는 사람이 최대한 빨리 상실에 적응하길 바란다. 아픈 사람이 슬퍼하다 보면 치료가 늦어질 수도 있고, 한편으로 슬퍼하는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는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이 상실을 그리 대단치 않은 일로 정리하고 잊은 다음, 건강한 보통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라고 압력을 가한다.
전문가들은 적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나는 애도가 ‘긍정하는 일‘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질병이나 죽음 때문에 사라진 것을 애도하는 일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정한다. 상실이 그저 뒤돌아 나오면 되는 사건인 양 단순하게 다룰 때만 ‘신속한 적응‘을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상실 - P68

한 무언가를, 상실한 누군가를 존중하지 않는다. 아픈 사람이 그때껏 함께 살아온 자기 몸과 헤어질 때, 또 돌봄을 주던 사람이 돌봄을 받던 사람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울 때 시간을 두고 충분히 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충분히 애도한 후에야 한 사람은 상실을 통과하여 다른 편에 있는 삶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이 어떤 의미에서는 아프기 전의 젊은 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다고 앞에서 썼다. 나는 젊은 나에게 전하고 싶다.
상실을 충분히 슬퍼하고, 당신이 슬퍼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찾으세요. 당신이 잃어버린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피해요. 이런 사람들은 당신이 느끼는 상실을 사소하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상실과 비교하거나 곧 익숙해질 거라고 말하죠. 많은 것이 당신에게서 사라지고 있을 때 아무도 이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상실은 당신 경험의 일부이고, 당신에겐 슬퍼할 권리가 있어요. 질병은 삶의 모든 부분이, 상실조차, 경험할 가치가 있다는 점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슬퍼하는 일은 당신이 잃어버린 것을 소중히 하는 일과도 같아요. 상실감마저 소중히 여길 때 삶 자체를 소중히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당신은 다시 살기 시작할 거예요. - P69

스포츠의학 전문의와 초음파검사를 한 의사가 마침내 내가 얼마나 아픈지 확진을 내렸을 때, 두 의사의 태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한 사람은 내게 힘을 주고 돕고자고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진단은 거의 같았지만, 스포츠의학 의사는 내게 상황을 전해주면서 자신도 그 상황 안에 함께 있었던 반면 초음파검사 의사는 평결을 내리듯 진단을 선고했다. 차이들은 증식한다. 똑같은 메시지라고 해도 환자마다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어떻게 전달되느냐에 따라 똑같은 내용이 두 개의 다른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 P74

차이가 인식되어야 돌봄이 가능하다. ‘암 환자에게 해주기 적당한 말‘ 같은 것은 없다. ‘암 환자‘는 포괄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다른 시작 지점을 갖고 각자의 질환에서 비롯되는 사건들을 따라가면서 다른 경험을 할 뿐이다. 의학이 환자를 분류하는 데 사용하는 일반적인 진단 범주는 질환에 쓰이는 것이지 질병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이런 범주는 치료에는 유용하지만 돌봄에는 방해가 된다.
아픈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차이와 독특함을 인식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구별하는 데는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차이를 파악하려면 아픈 사람과 맺는 관계 속으로 더 깊게 들어가야 한다. 반면 일반론은 시간을 아껴준다. 사람들을 범주 안에 집어넣으면 효율적이며, 범주 개수가 적을수록 더 효율적이다. 모두에게 다 맞는 ‘원 사이즈‘의 옷처럼, 같은 범주에는 같은 치료법을 쓰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료는 돌봄과 똑같지 않다. 치료 제공자들은 효율성과 돌봄 사이에 균형을 찾으려 애쓰기보다는 환자에게 마음쓰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어 책임을 모면한다. 이 환상은 ‘단계 이론‘ 같은 것에 기반을 둘 때가 많다. 이런 이론에 나오는 핵심 용어들은 환자의 심리 상태를 기술하면서 환자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치료 제공자에게 알려준다. - P75

가장 유명한 단계 이론은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이론으로, 죽음을 앞둔 사람이 겪는 경험을 설명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죽어가는 사람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는 단계를 거쳐간다. 퀴블러 - 로스의 원래 의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이론은 사람들이 경험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데 도움을 주기보다는 경험을 분류하는 데 사용된다. 이 이론에 나오는 용어들은 개인의 질병 경험에서 어떤 점이 특별한지 보게 하는 대신, 사람들이 거리를 둔 채 "예상대로 환자분은 지금 분노를 겪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한다. 또 아픈 사람이 왜 분노하는지 묻는 대신 분노를 ‘그저 지나가는 단계‘로 여기게 한다. 그리고 이미 예상한 대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픈 사람의 분노를 ‘모두들 겪는 무엇‘으로 일축할 수 있다.
어떤 경험을 진짜로 만드는 것은 경험의 특수하고 세세한 부분들이다. 한 사람의 분노나 슬픔은 다른 사람의 분노나 슬픔과는 너무도 달라서, 이 감정들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면 각 사람에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오히려 덮인다. ‘분노‘든 ‘슬픔‘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말이든 이 단어들은 한 사람의 경험을 알려주기보다는 가린다. 이런 식의 이론이 인기를 끄는 현상은 놀랍지 않다. 실제 경험은 수없이 많은 모 - P76

습으로 나타나며 각기 다른 결을 갖지만, 이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산 경험에 자신이 연결되지 않고도 그 경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이해하고 있다는 이러한 환상 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끌어 오기까지한다.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단계 이론은 대단한 가치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귀중할 수 있다. 다른 사람도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일은 아픈 사람에게 의미 깊다. 나는 암 진단을 받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공포가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알자 위안이 됐다. 혼란스럽고 우울했을 때도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 역시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경험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내가 겪는 공포, 혼란, 우울함이 특별하다는 느낌, 또 나만의 것이라는 느낌이 덜해졌다. 하지만 돌봄공자의 입장은 다르다. 돌보는 사람은 아픈 사람이 느끼는 공포가 전부 그만의 것이며, 어떤 ‘단계‘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공포 단계를 지나고 있을 뿐‘이라는 식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아마 아픈 사람이 가장 원치 않는 일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겪는 일임을 - P77

알 때 개인이 느끼는 공포는 줄어들지만, 예상되는 단계라는 이유로 공포가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공포가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한 번 일어난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는다.
위중한 병이 있다는 진단을 받은 후 아픈 사람이 필요로 하는 도움은 지구 상의 인간들이 모두 다른 만큼이나 각기 다르다. 주위에 가족들이 모여 있길 원하는 사람도 있고,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즉각 의학의 도움을 받길 바라는 사람도 있고, 어떻게 치료받을지 시간을 두고 결정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환자의 경우는 치료를 서두르는 것이 의사로서 돕는 일이고, 또 다른 환자의 경우는 의사가 뒤로 물러나 있는 게 돕는 일일 때도 있다. 돌봄 제공자에게는 아픈 사람이 자기 필요를 표현할 방법을 찾도록 지원하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결국엔 아픈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과 돌봄 제공자가 줄 수 있는 것 사이에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픈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스스로 알아내도록 돌봄 제공자가 도와야 한다. 돌봄 제공자가 전문가든 가족이든 친구든 마찬가지다. 그래야만 돌보는 사람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과 아픈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절충할 수 있다. - P78

아픈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돌봄 제공자가 "무엇이 필요하세요?"라고 묻는다고 해서 답이 나오지는 않으며, 일관된 답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진단받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의 삶은 이미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정도 이상으로 여러 면에서 바뀌었고, 위중한 질병을 앓는 동안 변화는 계속된다. 그리고 변화가 계속된다는 점이 ‘위중함‘의 일부이기도 해서, 심하게 아픈 사람은 변해가는 자기 자신의 필요조차 따라잡기 힘들어한다. 아픈 사람은 분명 무언가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른다. 환자가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어쩌면 전부 다 실수였다는 말, 이것 하나일지도 모른다. 환자분 검사 결과에 이름이 잘못 붙어 있었네요. 오, 전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 P79

어쩌면 아픈 사람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예 말로 표현하려 애쓰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필요를 발견할 때까지 아픈 사람은 자신을 그저 놔두고 주위 사람들은 아픈 사람에게 시간과 공간을 주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닌가 한다.
나는 ‘돌봄 제공자caregiver‘라는 이름을, 아픈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며 아픈 사람 개개인의 경험에 응답하고자 하는 사람에 한정해서 쓰려고 한다. 돌봄은 분류하기 위한 범주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제대로 된 돌봄은 아픈 사람의 경험에서 다른 점이나 특별한 점을 인식하며, 그래서 돌봄을 받는 사람은 자기 삶이 귀중히 여겨진다고 느낀다. 우리에게 사람들 - P80

을 분류할 권리는 없지만 특권이 하나 있다. 바로 각자가 얼마나 고유한지 이해하는 특권이다. 돌봄 제공자가 이 고유함에 마음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아픈 사람에게 어떻게든 전할 때 아픈 사람의 삶은 의미 있어진다. 나아가 아픈 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돌보는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이루는 한 부분이 되면서 돌보는 사람의 삶도 의미 있어진다. 돌봄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일에서 분리할 수 없으며, 이해가 쌍방향으로 일어나야 하듯 돌봄도 대칭을 이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을 돌보며 우리는 자신 또한 돌본다. 그렇지 않다면 소진되거나좌절하고 말 것이다.
의료인 대부분에게는 돌보는 사람이 될 시간이 없다. 또 그럴 의향이 없는 사람도 많다. 의료진은 치료를 제공하며 치료 제공은 돌봄 제공만큼이나 중요하지만, 둘은 아주 다르다. 아픈 사람을 저버리지 않고 곁에 남는 가족조차 돌보는 사람이기보다는 서비스 공급자가 될 때가 너무도 많다.
돌보는 사람이 마주하는 질병 경험은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질병 경험이란 오히려 공포, 불확실함, 두려움, 부정, 혼란을 뒤섞은 다음, 여기에 ‘거래하기‘를 급히 첨가한 잡탕 같은 것이다. 캐시는 내가 어떤 진단 가능성이나 치료 가능 - P81

성을 다른 가능성과 저울질해보고 혼자 거래하면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며칠이고 들어야 했다. "그걸 하지 않아도 된다면 이걸 해도 괜찮겠어." 시간이 좀 지난 후에야 아픈 사람은 사실 거래할 거리도 없으며 거래할 상대도 없음을 깨닫는다. 또 외로움도 찾아오고, 그다음에 자신이 누구고 자기 인생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의심이 찾아오고, 우울과 뒤섞인 희망이, 다른 사람들과 닿아 있고 싶다는 욕망과 뒤섞인 분노가, 자기 일을 스스로 해내고 싶은 마음과 뒤섞인 의존 상태가 찾아온다.
앞에서 말한 내용은 어느 아픈 사람 한 명이 느꼈던 감정의 ‘잡탕‘을 보여줄 뿐이지만, 그래도 내 요점을 다시 확인해준다. 바로 경험을 몇몇 범주로 나누는 말들이 전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고통이나 상실 같은 용어는 이 말이 아픈 사람 자신의 경험으로 채워질 때까지는 실체가 없다. 아픈 사람의 경험에서 고유함을 목격하고 차이를 전부 인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돌봄이다. - P82

아픈 사람은 자기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자기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둘 모두에 잘 대처하려 애쓴다. 하지만 환자가 되어 의사들이 몸을 접수하면 의사들은 그 몸을 환자의 삶에서 분리해서 이해한다. 예를 들어 의학이 이해하는 통증은 아픈 사람의 경험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통증을 겪는 사람은 모든 것이 조각나고 뒤죽박죽되고 있다고 느낀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려워지고 일도 하기 힘들다. 자기가 있을 자리가 어디인지 감각이 희미해지기 때문에 다시 제자리를 찾기 위해 애써야 한다. 반면 의학은 통증이 삶에서 갖는 의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통증은 질환의 증상일 뿐이다. 의학은 아픈 사람의 통증 경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며 치료법이나 관리법에만 관심을 둔다. 의학은 분명 몸에서 통증을 줄여주지만, 그러면서 몸을 식민지로 삼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의학의 도움을 구하면서 맺는 거래 조건이다.
치료 경과가 좋을 때는 수동적인 환자로 있을 만한 가치가 있다. 병이 난다면 나는 환자가 되고 싶다. 의사를 피하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질병이라는 드라마에서 의사들이 무대 중앙을 독차지하게 내버려두는 것도 위험하다. 의사를 거부 - P87

하면 당장 몸이 위험해질 것이고, 의사들이 드라마를 차지하도록 둔다면 그들은 질환이 이야기의 전부가 되도록 각본을 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의사는 "이건 조사가 있어야겠네요"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무대 중앙을 차지하고 이후 이어질 드라마의 각본을 짰다. 내 몸 안에 존재하는 한 인간은 그저 수동적으로 관람만 하도록 객석으로 보내졌다. - P88

의사와 간호사들이 환자에게 감정을 보이고 친밀하게 대하길 바란다기보다는 그들이 인정하길 바란다. 질병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과거의 내가 힘든 경험을 통과하며 배운 소중한 사실이다. 이 과거의 나는 말해주었다. 암을 앓는다는 건 전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질병을 겪고 죽음을 무릅쓰는 것, 거의 죽어가다가 삶으로 다시 돌아와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아는 채로 삶을 다시 시작하는 - P89

것 모두,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처음엔 병 때문에 몸이 변하고, 다음엔 병을 낫게 하려고 받는 수술과 화학요법 때문에 몸이 변하는 것 또한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심각한 질병은 여행자를 인간 경험의 가장자리로 데려간다. 한 발짝만 더 내디뎌도 아픈 사람은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 나는 이 여행이 인정받길 원한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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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아빠가 됐다 - 가난의 경로를 탐색하는 청년 보호자 9년의 기록 ㅣ 이매진의 시선 6
조기현 지음 / 이매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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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해보려던 스무 살에 아버지가 쓰러졌다. 2011년 일이다. 그 뒤 1인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 P8

나 혼자만 유별난 상황인 듯해서 점점 이 세상의 분류법에 들어가지 않는 내 고통을 외면하려 했다. 사회 문제로 호명되는 ‘청년‘을 보면서 한동안 내가 ‘일반 청년‘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청년은 학자금 대출로 힘들고,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버지의 부모처럼 살고 있어서 내게 청년이라는 말은 좀 어색했다.
그렇지만 나는 분명 청년이다. 어떤 직업적 성숙기에 들지도 않았고, 심지어 진로를 찾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가늠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을 벌기에는 아버지가 큰 짐처럼 느껴졌다. 내게 ‘청년‘은 나를 설명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과제였다. 가족 돌봄과 가장 구실까지 맞물려서 청년이라는 과제는 충돌하거나 가중됐다. 지난 9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간신히 샛길을 찾아 뭔가 해보려고 노력한 시간이었다. 9년의 기록을 써 내려갈수록 여전히 대답은 쉽지 않지만, 꼭 해야 하는 질문은 뚜렷해졌다. 아버지를 버리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아버지의 삶을 관리하는 수준에만 머물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희생이나 배제 없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 - P9

돌봄 문제를 ‘사회가 해결‘하려고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가 도입됐다. 그렇지만 이 제도는 50대 여성 요양보호사들의 나쁜 노동 여건과 낮은 임금에 기대어 유지되고 있다. 저임금 여성 노동자의 희생이 돌봄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큰 자원인 셈이다. "과거 가부장제가 공고하던 시절 노인에 대한 돌봄은 가족 간 권력 위계에서 가장 취약한 며느리의 몫이었다. 2019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저임금 여성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 P18

돌봄이 필요한 사람은 돌봄을 받지 못하고,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은 자기 삶이 위태로워지고, 돌봄 관련 공적 제도는 50대 여성 노동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유지된다. 악순환이 반복된다. 돌봄은 누군가를 보호하며 관계 맺는 방식이라고 보기 어렵다. 돌봄과 ‘위기‘는 동의어다. 이런 악순환을 ‘돌봄 위기 사회‘로 부를 수 있다. 돌봄이 필요한 자와 돌봄을 수행하는 자, 돌봄 노동자가 모두 누군가의 공백을 누군가의 희생으로 메운다. - P19

더 나은 삶을 위해 삶을 재정의해야 한다. 장수, 건강, 웰빙 같은 말에 가려 잘 안 보이던 아픔, 질병, 돌봄, 죽음을 문제로 받아들이고 응시해야 한다. - P26

사연을 말해달라는 말을 들으니 긴급 복지 지원과 기초 생활 수급자 신청 앞에서 간절하던 마음이 사라져버렸다. 몇몇 서류로 증명되지 않는 사실을 사연으로ㅍ풀어내는 방식이 어쩌면 합리적인데도 내키지 않았다. 나를 사연이라는 온정적인 틀 안에 끼워 맞춰야 하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존재가 돼야 하고, 불쌍한데 착해야 하고, 그래서 지원이 더 의미 있어야 한다. 내 삶 전체를 가난으로 설명하고, 그 삶을 심사받아야 한다. 탁자에 앉아서 내 사연을 심사하는 사람은 나 같은 상황을 겪어봤을까. 차라리 서류 뒤에 숨어서 가난을 증명하는 - P41

쪽이 더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가난하기 때문에, 이런 절차들속에서 길을 헤매는 모욕은 마땅히 감수해야 했다. - P42

공장에서 일하는 내 모습, 병원에서 간병하는 내 모습, 선거 운동을 하는 내 모습이 대조됐다. 아무것도 뜻대로 하지 못하는 노예였다가,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는 보호자였다가, 정치적 의사를 자유롭게 내비치는 시민이 되기도 했다. 선거는 1.4퍼센트 득표로 끝났지만 좀더 해보고 싶은 의지를 얻었다. 공장 문을 나서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활동을 하고 싶다. 내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일들을 바꾸는 시민으로 살고 싶다. 대조되는 세 모습 사이에서 가장 되고싶은 내 모습은 시민이다. - P83

공장은 나를 짓밟지 못해 안달이었고, 병원은 나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공장과 병원 사이에서 동아줄처럼 진보 정당을 잡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이 나를 더 하찮게 만들었다. 아주 미세하게 느끼고 있던 권리 감각이 내게 먼지 한 톨만큼의 존엄도 없는지 확인해주는 일들 앞에서 더 처참하게 뭉개졌다.
자유니 권리니 정치니 사회니 복지니, 세상이 너무 쉽게 씹어 먹어버릴 소리에 나는 심장이 뛰었다. 현실로 오면 나는 시민보다는 노예였다. 보호자는 환자 대신 제때 돈을 내야 하는 채무자였고, 치료 도중에 발생하는 법적 문제를 떠맡는 책임자였다.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뭔가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사는 듯했다. - P85

두 번이나 살려냈는데도 말을 듣지 않는다는 괘씸함과 두 번이나 살려줬는데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안 한다는 서운함이 내 마음 - P90

에 가득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데 협력할 수 없었고, 나는 혼자 모든 일을 해내야 했다. 하루에 열댓 번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평생 돈을 벌어 병원비로 다 바쳐야 하는 걸까. 도저히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두 번이나 거대한 폭탄을 얻어맞았다. 나도 할 만큼 했다. 앞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아빠 개인의 책임이다. 아빠의 삶을 책임지지 않는 선택이 내 유일한 출구다.
꼬리 자르기 같았다. 내 경제 능력이나 조건으로 아빠까지 책임지는 일은 생존에 맞먹는 부담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께름칙했다. ‘정말 아빠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마음 한구석에 고여 있었다. 아빠를 타박하면서도 아빠를 이렇게 만든 사회적 조건을 무시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도 못 다닌 사람, 어느 자리에 있는 조금만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면 기가 죽는 사람, 자기표현을 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 노동 현장에서 일을 빠르고 잘하는 게 유일한 인정이었던 사람, 그런데 이제 일을 못 하는 사람, 다시 말해 무엇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빠였다. - P91

큰마음 먹고 검사를 했지만, 결과는 근로 능력 ‘있음‘이었다. 건강하다는 결과에 암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빠가 정말 회복이 돼서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품게 됐다. 증명되지 않는 ‘고통‘과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 사이를 오가며 진단명을 붙잡고 싸움을 벌였다. - P118

면회실 옆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저 눈빛에 익숙해져야 하는 곳이었다. 저 사람들은 수급자가 됐을까? 1촌 직계 가족 두 명이 동의했을까? 어떤 박탈감을 느꼈을까? 술 마신다고 이곳에 오지는 않았겠지? 술 마시고, 돈 없고, 가족 사이 신뢰도 없는 사람들이겠지? 가족에게 짐짝이 될 때 들어오는 곳이겠지? 그 가족들은 의사를 만나 4개월짜리 신비로운 완치 과정을 듣겠지?
여기는 짐짝들을 모아두고서 완치라는 헛된 희망을 품는 곳이라고 서슴없이 생각하려다가 포기했다. 비관하기보다는 한번 믿어 - P121

보는 편이 나았다. 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사람들하고 어울리면서 좀더 잘살자는 의지를 품게 될 수도 있었다. 환자복을 입은 아빠가 면회실로 들어왔다. - P122

아빠가 아무 일이라도 하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면회 날만 되면 그 일하고 싶은 마음을 묻고 또 물었다. 작은 불씨가 꺼지지 않게 호호 불 듯이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쉬지 않고 물었다. 6개월 뒤 - P127

폐쇄 병동을 나가면 바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
아빠의 마음속에서 일하겠다는 불씨가 꺼지지 않게 호호 불면서, 그 불을 쓸모 있게 쓸 곳을 찾으려했다. 6개월은 금방 갔다. 아무런 대안을 찾지 못했다. 아빠는 사람들하고 기분 좋게 인사를 나누면서 폐쇄 병동을 나섰다. - P128

기억이 뒤죽박죽되는 사이에도 내 말을 듣기 싫다는 아빠의 의지는 뚜렷했다. 그럴 때 나는 ‘나라‘ 탓을 했다. 나라가 요청해서 해야 한다고 하면 곧잘 따랐다. ‘나라에서 시켜서‘, ‘나라에서 감시해 - P129

서‘, ‘나라에서 안 된다고 해서‘처럼 나라를 빌미로 삼아 아빠에게 작은 책무를 부과했다. ‘나라‘와 아빠가 서로 의지하게 하고, 그런 관계를 핑계로 조금씩 좀더 나은 삶의 방향을 잡아가려 했다. - P130

기어코 문제를 다 맞히려는 아빠를 어떻게 해볼 수 없었다. 의지를 갖고 뭔가 해보려는 태도야말로 내가 바라던 회복된 아빠의 모습이었다. 타들어가는 아들 속도 모르고 문제를 다 맞히는 아빠가 밉고, 다 맞히려는 아빠가 안쓰럽고, 다 맞히는 아빠가 기특했다. 한 문제라도 더 맞히려는 의지가 치매 검사지 위에서 리허설을 했다면, 이제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시연될 수도 있을 듯했다. 그런 아빠에게 문제를 틀리라고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 영 내키지 않았다. 한번쯤은 아빠라는 약자가 아니라 의사라는 강자에게 먼저 말하자 싶었다. 초조하게 의사가 할 진단을 기다렸다.
"제 말 잘 들으세요. 아버지는 지금 거짓말하는 게 아니에요. 중간중간 기억이 편집돼서 없어졌다고 보면 돼요. 거짓말처럼 들리는 말은 앞에 있는 아들이랑 얘기해야 하니까 중간중간 없어진 부분을 생각나는 기억으로 채우는 겁니다. 소통하려고요. 지금 아버지는 치매 진단 받고 요양 등급 받기에는 너무 일러요. 다음번에 약 타러 올 때는 아버지 혼자 오게 하세요. 전화로 잘 가고 있는지 체크하시고요. 생활 속에서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쓰면 좋습니다." - P133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발상이었다. 그동안 나를 괴롭힌 기짓말과 허상이 잘려 나간 기억과 기억 사이를 이으려는 노력이었다니. 아빠는 지금, 바로, 여기에 가장 충실하게 살아온 셈이었다. 현재에서 살아가는 나하고 소통하느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분주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내가 현재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아빠하고 통할 수 있는 길이 열릴지도 몰랐다.
"아야, 구두 공장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밖에서는 손님들 발 사이즈 재고, 바로 뒤에서 구두를 만들어."
"그래요? 그럼 결과는 언제 연락 준대요? 일은 할 만할 거 같아요? 구두 만드는 일이 재미있으면 좋겠네."
"재미는 무슨. 다 돈 벌라고 하는 거지."
언제 겪은 기억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제 아빠의 말 속에 흐르는 아빠라는 의지를 나도 느끼게 됐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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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룸 - 영원한 이방인, 내 아버지의 닫힌 문 앞에서 ㅣ Philos Feminism 6
수전 팔루디 지음, 손희정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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